북양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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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양정부는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초기(1912-1928) 베이징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정부를 지칭한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약법에 따라 대통령 중심의 정치 체제를 갖추었으나, 군벌 시대의 혼란 속에서 잦은 정권 교체와 부패, 무능함으로 인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제정 시도, 외몽골 상실, 5.4 운동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안휘파, 직예파, 봉천파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1926년 장제스의 북벌로 인해 1928년 장쭤린이 암살당하고 장쉐량이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붕괴되었다. 이후 일본은 만주국 등 괴뢰 정부 수립에 북양정부의 상징을 사용하기도 했다.
신해혁명 이후 쑨원의 임시정부와 위안스카이의 북양함대 간의 협상을 통해 베이징에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직을 맡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독재 체제를 강화하며 혁명가들을 탄압하고 열강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어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려 했으나, 호국전쟁 발발 등으로 인해 제정을 취소하고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신해혁명으로 쑨원 주도의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난징에 수립되었고, 청나라는 북양함대를 이끄는 위안스카이가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위안스카이는 협상을 통해 중화민국 정부를 베이징에 두고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직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에 두었으며, 독재 체제를 굳히려 했다.
2. 정치 체제
이후 리위안훙이 대총통직을 이어받았으나, 헌법 제정 문제와 군벌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장훈복벽 사건과 호법 전쟁 등 남북 내전이 이어졌고, 북방에서는 돤치루이, 펑궈장, 차오쿤, 오패부, 장쭤린, 옌시산 등 군벌들이 할거하며 중앙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했다.
1912년 2월 임시 상원이 제정한 임시약법에 따라, 국민회의(의회)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고 내각총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군벌들의 권력 투쟁과 부패로 인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1920년 직완전쟁에서 승리한 직예파와 봉천파의 연합정부는 안휘파의 신국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직예파는 법통 회복을 명분으로 리위안훙을 대총통으로 복직시키고 민육회의를 회복시켰으나, 이는 정통성 확보와 권력 장악을 위한 수단이었다.
1923년 조곤 매수 선거를 통해 차오쿤이 대총통이 되고 헌법이 공포되었으나, 부패와 재정 문제로 인해 국정 혼란이 심화되고 여론의 지지를 잃었다. 1924년 북경정변으로 직예파 정권은 붕괴되었다.
북양정부 시기 역대 대총통은 다음과 같다.[12]# 성명 재임 기간 초상 설명 초대 위안스카이 1913.10.10-1916.1.1 -- 중화민국 대총통, 수도를 베이징으로 지정 홍헌제제 위안스카이 1916.1.1-1916.3.22 위안스카이 황제를 칭함, 퇴위 후 1916년 6월 6일 사망 제2대 리위안훙 1916.6.6-1917.7.14 -- (대리) 펑궈장 1917.7.6-1918.10.10 제3대 쉬스창 1918.10.10-1922.6.2 -- 제4대 리위안훙 1922.6.12-1923.6.14 -- 제5대 차오쿤 1923.10.10-1924.10.30 -- 림시집정 돤치루이 1924.11.24-1926.4.20 안휘군벌 수령; 국무총리에 세 차례 취임 북양 안국 장쭤린 1927.6.18-1928.6.3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 1927년 6월 16일 베이징에서 북양 안국군정부를 세움. 1928년 6월 4일 장쭤린 암살 사건으로 암살됨.
이 목록에는 임시직 및 이에 해당하는 직책도 포함되며, 북양정부 기간 중 14명의 국회의원이 대총통 직무를 수행했다.[14] 이외 9명의 국무총리가 대총통을 겸임했다.[13]
외교부는 구홍모와 같은 저명한 외교관들을 보유하여 상당한 자율성을 가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점령했던 산둥의 독일 조계를 1922년에 반환받은 것은 외교부의 큰 업적이었다. 외교부는 북양정부가 붕괴될 때까지 남쪽 정부의 국제적 인정을 거부했으며, 중국은 국제연맹의 창립 회원국이었다.
2. 1. 임시약법과 의회
1912년 2월, 임시 상원은 임시약법을 제정하여 대통령과 의회의 권한을 규정했다.[3] 임시약법에 따라 의회는 5년 임기의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고, 내각을 구성하고 이끌 총리를 임명했다.[3] 행정부의 칙령은 집행력을 갖기 위해 관련 장관들의 대서명이 필요했다.[4]
의회는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구성되었다. 상원의원은 6년 임기로 두 개의 등급으로 나뉘었고, 하원의원은 3년 임기였다. 상원의원은 각 성 의회에서 선출하고, 하원의원은 제한된 공개 선거권에 의해 선출된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었다. 의회의 임무는 영구 헌법을 작성하고, 법률을 초안하고, 예산과 조약을 승인하고, 내각을 승인하고, 부패한 공직자를 탄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제도들은 강력한 개인적, 파벌적 유대관계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정부는 매우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폭력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2. 2. 군벌의 영향력
군벌 시대 동안 정부는 매우 불안정했으며, 12년 만에 국가 원수 7명, 임시 정부 5개, 정부 수반 34명, 내각 25개, 의회 5개, 헌장 4개가 있었다. 관료주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겨우 100만달러로 여러 번 파산 직전에 놓였다. 정부의 수입은 주로 관세 수입, 외국 차관, 정부 채권에서 나왔는데, 주변 지역이 동맹 군벌의 통제하에 있더라도 수도 외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 직례-안휘 전쟁 이후 직례성을 제외하고는 베이징에 세금이 납부되지 않았다.
1923년 6월, 조곤 매수 선거를 통해 조곤(曹錕)이 대총통으로 선출되었고, 대총통 권한을 강화한 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조곤 매수 선거에 나타난 돈과 권력의 부패와 재정 문제로 인해 국정 혼란을 초래하고 여론의 지지를 잃었다. 더욱이 1924년, 봉천파 장작림(張作霖)의 공격을 받은 제2차 봉직전쟁 중, 같은 해 10월 23일 봉옥상(馮玉祥)의 쿠데타인 북경정변으로 직예파 정권은 붕괴되었다.
3. 역사
위안스카이는 혁명가들을 탄압하고 열강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어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나,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1915년 12월 25일 윈난 군벌의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일으킨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1916년 3월 23일 제정을 취소했다. 이후 요독증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6일 사망했고, 리위안훙이 대리총통직을 계승하여 임시약법과 구국회의 회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헌법 제정 문제로 국회 내부의 정쟁이 이어졌고, 장훈복벽 등을 거치면서 호법전쟁 등 남북 내전이 이어졌다. 북양정부의 권력을 쥐기 위해 안휘파의 돤치루이, 직예파의 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 봉천파의 장쭤린, 산서파의 옌시산 등이 각지에서 할거하며 대립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에서 서로 싸우는 상황이 1928년까지 이어졌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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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외몽골 출병으로 외몽골을 다시 복속시켰으나, 1921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다시 빼앗기는 등 국가적 손실이 컸다.
이후 장쭤린이 대원수 자리에 올랐으나, 1926년 장제스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많은 군벌들이 몰락했다. 1927년 장제스를 중심으로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었고, 1928년 2차 북벌이 시작되었다.[9] 결국 장쭤린은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고,[11] 장쉐량이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1928년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3. 1. 북양정부의 성립 (1912-1916)
신해혁명 이후 쑨원의 난징 임시정부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통합되어 북양정부가 수립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북양군벌의 힘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적인 통치를 지향했다. 중앙에서는 의회정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쑹자오런을 암살했고, 지방에서는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켜 지방 세력을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를 통해 중국 분할을 꾀하려는 열강의 움직임(중국 분할론)을 견제했다.
1913년 7월, 장시의 리리에쥔 등을 중심으로 제2차 혁명이 일어났으나, 위안스카이 측이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 반위안 세력이 결집하지 못해 진압되었다. 같은 해 10월, 위안스카이는 정식 대총통에 취임했다. 1914년 1월 10일 국회를 해산하고, 5월에는 대총통에게 강대한 권한을 집중시키는 약법(「민국 3년 약법」·「위안기 약법」)을 공포하는 등 독재를 강화했다.
이러한 집권은 위안스카이가 열강의 지지를 얻었기에 가능했다. 열강은 청나라 이래의 권익 보장과 차관 창구로서 안정된 정권을 필요로 했고, 위안스카이는 이에 응하며 열강의 힘을 이용했다. 이는 중국의 반식민지화를 심화시켰지만, 개발 독재적인 측면도 있었다. 법제 정비, 산업 진흥, 군대 근대화, 교육 보급 등 각 분야에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독재 체제 확립 후 제정을 모색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쇠퇴했다. 1915년 일본의 대화 21개조 요구를 수용하고 제정 부활을 선언했으나, 국내외 비판과 운남의 채억, 탕지야오, 리리에쥔 등에 의한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등 열강은 제정 반대로 돌아섰고, 북양군벌 내부 반발로 1916년 3월 22일 제정을 취소했다. 위안스카이는 권위를 상실한 채 6월 6일 병사했다.
3. 1. 1. 난징 임시정부와 북양군의 통합
신해혁명으로 난징에는 쑨원 주도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청나라는 북양함대를 이끄는 위안스카이가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위안스카이는 협상을 통해 중화민국 정부를 베이징에 두고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직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에 두었으며, 독재 체제를 굳히려 했다.
1911년부터 1912년까지 일어난 신해혁명 이후, 반란군은 난징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쑨원(孫文)을 대통령으로, 리위안훙(黎元洪)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3] 중국 남부만 통제하고 있었던 그들은 청나라 종식을 위해 위안스카이와 협상해야 했다.[3]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인 베이징에서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3] 그는 추가적인 암살 시도를 우려하여 난징으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기존의 청나라 관료들을 베이징에 유지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기 때문에 임시 상원도 북쪽으로 이동했다.[3] 따라서 정부는 1912년 10월 10일부터 베이징에서 행정을 시작했다.[3]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1911년 신해혁명에 의해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수립되었다.[4] 그러나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던 대청제국은 베이징에 존속하고 있었다.[4] 양측은 선통제의 퇴위, 임시대총통직의 쑨원에서 위안스카이로의 이양, 「임시약법」 준수 등으로 합의하였고,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룽유황태후가 퇴위 조서를 내림으로써 통일되었다.[4] 이후,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수도를 난징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인 베이징으로 옮기고, 1913년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였다.[4] 이것이 '''베이징 정부'''의 시작이다.[4]
3. 1. 2.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제정 시도
신해혁명으로 쑨원 주도의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난징에 수립되었고, 청나라는 북양함대를 이끄는 위안스카이가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위안스카이는 협상을 통해 중화민국 정부를 베이징에 두고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직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에 두었으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그는 혁명가들을 탄압하고 열강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어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1912-1913년 국민회의 선거에서 쑨원의 국민당(KMT)은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양원을 장악했다. 쑹자오런(宋教仁)은 차기 총리로 예상되었으나, 의회가 소집되기 2주 전에 암살당했다. 조사 결과 총리 자오빙쥔(趙秉鈞)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는데, 이는 위안스카이가 연루되었음을 시사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과 자오빙쥔 모두 쑹자오런을 암살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국민당은 납득하지 않았다. 그 후 위안스카이는 의회의 동의 없이 거액의 외국 차관을 받았다. 쑨원은 1913년 여름 제2차 혁명에서 위안스카이에 맞서 국민당의 일파를 이끌었지만, 두 달 만에 완패했다.
위안스카이는 고문들과 장남 위안커딩의 권유로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측근들과 가족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열강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1915년 12월 25일 운남군벌의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합세하여 토원 봉기가 일어나고 봉기가 전국으로 퍼져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1916년 3월 23일 제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측근들의 배신과 하야 압력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6일 사망했다.
3. 2. 군벌 시대 (1916-1928)
위안스카이 사후, 중국은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했다. 신해혁명 이후 쑨원을 중심으로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청나라의 실권은 북양함대를 이끌던 위안스카이에게 있었다. 임시정부와 위안스카이는 협상을 통해 중화민국 정부를 베이징에 두고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1916년 제정을 취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리위안훙이 대총통직을 계승했지만, 헌법 제정 문제와 국회 내부의 정쟁, 그리고 장훈복벽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중화민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북양정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안휘파의 돤치루이, 직예파의 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 봉천파의 장쭤린, 산서파의 옌시산 등이 각지에서 할거하며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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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장제스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많은 군벌들이 몰락했다. 장제스는 1928년 펑위샹, 옌시산 등과 힘을 합쳐 2차 북벌에 나섰고,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통해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1928년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3. 2. 1. 안휘파, 직예파, 봉천파의 각축
돤치루이의 안휘파, 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의 직예파, 장쭤린의 봉천파 등이 권력을 다투었다.[5] 이들 군벌은 중앙에서 대립하였고, 각 지방에서도 군벌들이 난립하여 중국 전역에서 서로 싸우는 상황이 1928년까지 이어졌다.[5] 이 시기에는 장훈복벽, 호법전쟁, 직안전쟁, 직봉전쟁 등 군벌 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차오루린은 일본에게 산둥에 있는 독일의 모든 양보를 약속했고, 이는 5·4 운동을 촉발하여 안휘파의 정부 장악력을 약화시켰다.[5]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지만, 돤치루이가 참호로 보낼 목적으로 창설한 군대는 해산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부하 쉬수정에게 주어져 외몽골을 침략하게 되었다. 이는 만주(滿洲)의 봉천파(奉系) 장쭤린(張作霖)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920년 7월, 직안전쟁에서 안휘파는 패배했고 돤치루이는 군에서 은퇴했다. 장쭤린의 봉천파는 직예파를 돕는 데 미미한 역할을 했지만, 베이징에서 권력을 공유할 수 있었다.[5]
1924년 9월, 직예파 장군이자 강소성 총독인 기협원(齊燮元)은 절강성의 뤄용샹에게 그의 성에 속한 상하이의 통제권을 요구했다. 두 성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기협원은 빠르게 우위를 점했다. 쑨원과 장쭤린은 절강성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며 제2차 직봉전쟁을 촉발했다.[5]
1924년 10월 23일 새벽, 풍옥상(馮玉祥) 장군은 1924년 베이징 쿠데타를 일으켜 직예파를 배신했다. 그는 차오쿤 대통령을 가택 연금했다.[5]
3. 2. 2. 외몽골 상실과 5.4 운동
1919년 외몽골 출병을 통해 외몽골을 다시 복속시켰으나, 1921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공격으로 다시 빼앗기는 등 국가적 손실이 매우 심각하였다.
3. 2. 3. 장쭤린의 국민평정군과 북벌
1926년 7월, 중국 국민당은 중국 통일과 군벌 타도를 위해 북벌을 시작했다. 국민당은 우페이푸와 쑨촨팡의 군대를 빠르게 격파했다. 이에 장쭤린은 1926년 11월 국민당에 대항하는 군벌 연합인 국민평정군(안궈쥔/안쿠오춘(安國軍)으로도 알려짐)을 결성했다.[5] 장제스는 1927년 4월 공산당을 국민혁명군에서 제거하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북벌을 잠시 중단했다.
1927년 6월, 국민평정군 군벌 지도자 회의에서 모든 문민 및 군사 권력을 장쭤린에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5] 장쭤린은 "총통"으로 선포되었고, 새로운 군정을 수립했다. 이는 북양 정부 역사상 명시적으로 군정이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판푸는 총리 겸 교통부 장관이 되었고, 장징후이는 산업부 장관이 되는 등 내각이 구성되었다. 장쭤린은 볼셰비키(붉은 군대)와 혼란으로부터 중국을 해방시키고, 협상을 통해 불평등 조약을 폐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6]
1927년 초, 국민평정군 정치위원회는 장쭤린이 "민주 정신의 발전", "국가 주권 회복과 '불평등 조약'의 폐지" 등의 새로운 정책을 취할 것이라고 선포했다.[7]
우페이푸 패배 직후, 봉천 세력과 국민당은 만주 정세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1926년 8월, 장줘빈이 광저우에서 무던으로 파견되어 동맹 가능성을 논의했다. 1927년 초 봉천-국민당 협상에서 국민당은 북벌을 종식하고 봉천 세력이 남쪽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장쭤린은 국민당에게 외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라고 요청했다.[9]
군정은 군벌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개혁과 재건, 그리고 정치의 새로운 근대성 채택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9] 다음은 국민평정군이 서주에서 국민당을 물리친 후 1927년 8월 ''따꽁바오''의 발췌문이다.
그러나 장쭤린에게는 개혁을 위한 정치적 권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군정은 실질적인 정당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게다가 국민평정군의 군사적 실패는 국민평정군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해를 끼쳤다.[9]
3. 3. 북양정부의 붕괴 (1928)
1926년 장제스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많은 군벌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국민당은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곧 영한합작을 통해 1927년 장제스를 중심으로 하여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었고, 장제스는 1928년 펑위샹, 옌시산 등과 힘을 합쳐 2차 북벌에 나섰다.[9] 결국 장쭤린은 수도를 봉천으로 옮긴다고 선포한 후 내각을 거느리고 본거지인 만주로 퇴각하다가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도이하라 겐지 등이 일으킨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다.[11] 그 뒤를 이은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힘의 차이를 깨달은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항복하였고,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양정부는 1928년에 완전히 소멸했다.
국민정부군은 다른 군벌들과 어느 정도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폭력적인 혁명적 통일을 제시하는 중국 국민당과는 대조적으로 평화적인 통합 세력으로 인식되도록 하려고 시도했다.[9] 국민정부군 내 군부는 유혈 사태 없이 국가를 통일할 수 있다고 믿으며 중국 국민당 온건파와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 지도부는 북경 정부의 파괴를 추진할 결의를 했고, 펑위샹의 국민군과 옌시산의 산서 군대가 장제스의 난징 국민당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며 북양 정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9]
장쭤린은 1928년 6월 3일 북경을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 그의 권력 기반인 만주로 돌아가는 길에, 일본 관동군 장교들에 의해 그의 기차가 폭파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황고둔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옌시산의 군대는 곧 북경을 점령하여 북양 정부를 효과적으로 해체했고, 6월 16일 국민당에 의해 통일이 선포되었다.[11] 북경은 1949년 중국 국공 내전이 끝날 때까지 북평으로 개명되었다.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은 국민정부군을 인계받았고 총리 판푸가 이끄는 망명 정부를 유지했다. 그러나 전 장관과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공무원들은 이미 국민정부로 전향했다. 미국은 10월 1일 난징 국민정부를 인정한 첫 번째 주요 강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중국 국민당의 반일 태도를 혐오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정부를 변경한 주요 강대국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협상하여 이러한 허울을 종식시켰고, 그 결과 북양 정부와 국민정부군이 해체되었으며, 1928년 12월 29일 국민당 깃발 아래 중국 통일이 이루어졌다.
북벌로 인해 우페이푸 세력이 소멸된 후 1926년 말, 베이징 정부를 장악한 봉천파 장쭤린은 안국군 총사령이 되어 1927년 6월에는 안국군정부를 조직하고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에 취임했다.
그러나 상하이 쿠데타로 일시 정체되었던 북벌이 1928년 4월에 재개되자 열세는 명확해졌고, 이 정권은 같은 해 6월 3일 장쭤린의 퇴거로 붕괴되었으며, 같은 달 15일 북벌군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되면서 베이징 정부는 소멸했다.
4. 일본의 괴뢰정부와 북양정부의 상징 사용
일본 제국은 난징의 새로운 국민당 일당 국가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일본이 1932년에 분리주의 국가 만주국을 세우자, 새 국가는 북양정부 시대의 상징을 사용했다.[1] 이후 몽강, 중화민국 임시정부(1937년-1940년), 중화민국 개조정부 등도 모두 북양 군벌 시대의 상징을 사용했다.[1] 고위 국민당 인사였던 왕징웨이가 일본에 망명하자, 그는 1940년에 중화민국 재편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1] 왕징웨이는 충칭의 국민당 정부에 맞설 평행적인 경쟁 정부를 만들기 위해 북양 정부를 부활시키는 대신 국민당의 상징을 채택하는 데 주력했다.[1] 왕징웨이 정권과 충칭의 국민당 정부는 거의 동일한 상징을 사용했고, 원세개 정권이 아닌 손문의 정권으로부터의 연속성을 주장했다.[1]
5. 한국과의 관계
북양정부 시기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6. 평가 및 역사적 의의
북양정부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부였지만,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대총통으로 재임 중 중화제국 황제를 칭하며 공화정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12] 그의 사후, 군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서로 다투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들은 각자의 세력을 키우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안휘파(皖系軍閥)의 수령 두안치루이(段祺瑞)는 국무총리에 세 차례 취임하고 임시집정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13] 장쩌린(張作霖)은 1927년 베이징에서 북양 안국군정부를 세우고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에 취임했으나, 1928년 장쩌린 암살 사건으로 암살되었다.[13]
이처럼 북양정부 시기에는 9명의 국무총리가 대총통을 겸임하고,[13] 14명의 국회의원이 대총통 직무를 수행하는 등[14] 권력 구조가 불안정했다. 이러한 혼란은 외세의 개입을 불러왔고, 결국 북양정부는 1928년 국민당의 북벌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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