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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스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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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룩스 로빈슨은 1955년부터 1977년까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3루수로 활약한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다. 그는 1964년 아메리칸 리그 MVP, 1970년 월드 시리즈 MVP, 1966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으며, 15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뛰어난 수비 실력으로 "인간 진공 청소기"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3루수로서 통산 2,697개의 잡은 수와 6,205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1977년 은퇴 후에는 오리올스 텔레비전 해설자로 활동했으며, 1983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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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스 로빈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9년의 로빈슨
로빈슨 (1959년)
이름브룩스 로빈슨
원어 이름Brooks Calbert Robinson, Jr.
출생일1937년 5월 18일
출생지미국 아칸소주 리틀록
사망일2023년 9월 26일
사망지미국 메릴랜드주 오윙스 밀스
포지션3루수
타석
투구
선수 경력
데뷔 리그MLB
데뷔일1955년 9월 17일
데뷔 팀볼티모어 오리올스
최종 리그MLB
최종일1977년 8월 13일
최종 팀볼티모어 오리올스
소속 팀볼티모어 오리올스 (1955–1977)
기록
타율.267
안타2,848
홈런268
타점1,357
수상 및 업적
올스타 선정18회 (1960–1974)
월드 시리즈 우승2회 (1966년, 1970년)
AL MVP1964년
월드 시리즈 MVP1970년
골드 글러브 수상16회 (1960–1975)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1972년
AL 타점왕1964년
영구 결번볼티모어 오리올스 No. 5
명예의 전당
명예의 전당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유형국립
헌액 연도1983년
득표율92.0% (첫 번째 투표)

2. 어린 시절

브룩스 캘버트 로빈슨(Brooks Calbert Robinson)은 1937년 5월 18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브룩스 캘버트 시니어(Brooks Calbert Sr.)와 에셀 메이 로빈슨(Ethel Mae Robinson, 결혼 전 성은 덴커(Denker))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리틀록의 콜로니얼 베이커리(Colonial Bakery)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리틀록 소방서(Little Rock Fire Department)의 대장이 되었다.[3] 어머니는 시어스 로벅 앤드 컴퍼니에서 일하다가 주 회계 감사관실(state controller's office)로 직장을 옮겼다.[4] 어린 로빈슨은 자전거로 ''아칸소 가제트(Arkansas Gazette)'' 신문을 배달하고, 라마 포터 필드에서 전광판을 운영하거나 청량음료를 팔며 용돈을 벌었다.[5]

로빈슨의 아버지는 준프로 야구팀에서 2루수로 뛰었던 경험이 있었다.[6] 그는 아들 로빈슨이 어릴 때 함께 야구를 하곤 했다.[7] 로빈슨은 자라면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 Louis Cardinals)를 응원했고, 특히 스탠 뮤지얼(Stan Musial)을 가장 좋아했다.[8] 고등학교 시절에는 지역의 강팀 중 하나인 M. M. 에버츠 포스트 1 더우보이스(M. M. Eberts Post No. 1 Doughboys) 소속으로 아메리칸 레기온 야구(American Legion Baseball)를 했다.[9] 이 팀은 로빈슨이 15살이던 1952년에 지역 결승에 올랐고, 1953년에는 지역 토너먼트까지 진출했다.[10]

로빈슨은 1955년 5월 27일 리틀록 중앙 고등학교(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를 졸업했다.[11][12] 그의 뛰어난 농구 실력을 눈여겨본 아칸소 대학교(University of Arkansas)는 전액 장학금을 제안하기도 했다.[11][12] 하지만 로빈슨의 꿈은 프로 야구 선수였다.[13] 로빈슨과 같은 감리교 교회에 다녔던 린제이 디얼(Lindsay Deal)은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의 감독 폴 리처즈와 마이너 리그 시절 팀 동료였는데, 디얼은 리처즈에게 로빈슨의 재능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14] 디얼은 편지에서 "그는 발이 아주 빠른 선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습니다. 브룩스는 강한 힘과 야구 센스를 갖췄고, 중요한 순간에도 늘 침착합니다."라고 썼다.[15]

1955년, 뉴욕 자이언츠, 신시내티 레드레그스(Cincinnati Redlegs), 그리고 오리올스 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이 로빈슨과 계약하기 위해 리틀록으로 스카우트를 보냈다.[16][17][18] 세 팀 모두 계약금으로 4000USD를 제시했지만, 메이저 리그 계약을 제안한 곳은 신시내티와 볼티모어뿐이었다.[16][17][18] 로빈슨은 젊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출전 기회를 줄 것으로 보였고, 영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하기로 결정했다.[16][17][18] 당시 그를 영입한 스카우트는 아트 엘러스(Art Ehlers)였다.[15]

3. 볼티모어 오리올스 (1955-1977)

로빈슨은 1955년 자유 계약 선수로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하여 1977년 은퇴할 때까지 23시즌 동안 오직 오리올스에서만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19][20]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3루수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인간 진공청소기(The Human Vacuum Clean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1964년 타율 .317, 28홈런, 리그 1위인 118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다.[79][80] 1966년에는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로빈슨 콤비'를 이루어 팀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vs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을 이끌었고,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으며 리그 MVP 투표에서는 프랭크 로빈슨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70년 월드 시리즈(vs 신시내티 레즈)에서는 공수 양면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고, 월드 시리즈 MVP와 베이브 루스상, 히콕 벨트(Hickok Belt)를 수상했다. 당시 상대 팀 감독이었던 스파키 앤더슨은 "로빈슨 한 명에게 진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1963년 로빈슨


로빈슨은 15년 연속(1960-1974)을 포함하여 총 18번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3루수 부문 골드 글러브상을 16년 연속(1960-1975) 수상했다.[63][64] 이 16회 연속 수상 기록은 역대 야수 최다 연속 수상 기록이다. 그는 뛰어난 수비력으로 은퇴 당시 통산 수비율(.971), 3루수 출전 경기(2,870), 척살(2,697), 보살(6,205), 병살(618) 등 3루수 부문에서 여러 기록을 남겼다.

통산 성적은 2,89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7, 2,848안타, 268홈런, 1,357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오랫동안 '미스터 오리올'로 불렸으나, 훗날 칼 립켄 주니어가 그의 여러 구단 기록을 경신했을 때 "미스터 오리올스는 한때 나였지만, 이제는 칼의 것이다"라고 말하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1977년 시즌 중반 은퇴했으며, 그의 등번호 '''5'''번은 오리올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1983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3년 9월 26일, 향년 86세로 사망했다.[231]

로빈슨의 등번호 "'''5'''".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영구결번으로 1977년 지정.

3. 1. 초기 (1955-1959)

1955년 로빈슨


로빈슨은 1955년 자유 계약 선수로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했다.[19][20] 그는 1955년 6월 3일, 요크 화이트 로즈(York White Roses) 소속으로 밥 호프만 스타디움(Bob Hoffman Stadium)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19][20] 펜실베이니아주 요크에서 3개월을 보낸 후, 1955년 9월 17일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열린 워싱턴 세네이터스와의 경기에 오리올스 소속으로 처음 출전하여 6번 타자로 나섰다. 그는 이 경기에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는데, 4이닝에 척 스톱스를 상대로 안타를 쳐 첫 메이저 리그 안타를 기록했고, 8이닝에는 타점을 올리는 적시타를 쳐 팀의 3-1 승리에 기여했다.[22][21] 그러나 이후 18타수 무안타에 그쳤고 시즌 마지막 두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22] 그는 훗날 "아메리칸 리그 투수들은 나를 18살짜리 어리고 경험 없는 선수로 보이게 만들었고, 워싱턴과의 첫 경기에서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회상했다.[23] 시즌 후 오리올스는 유망주들을 보내던 콜롬비아 윈터리그 팀 윌러드 블루스(Willard Blues)에 그를 배정했다.[24] 한 경기에서는 얼 윌슨이 던진 공에 머리를 맞았으나, 팀이 시험 중이던 새로운 섬유유리 타격 헬멧 덕분에 심각한 부상은 피했다.[25][26]

1956년, 로빈슨은 3월 21일까지 오리올스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지만, 구단은 그가 아직 메이저 리그에 뛸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바비 애덤스를 영입해 3루수로 기용했다.[27] 그는 그 해 대부분을 더블A 팀인 샌 안토니오 미션스에서 보냈다. 8월에는 도루를 시도하다 오른쪽 무릎 연골 파열 부상을 입었으나, 휴식과 온열 치료로 회복하여 몇 경기만 결장했다.[28] 마이너 리그 시즌 종료 후 볼티모어로 승격되어 15경기에 출전했고, 나이에 비해 뛰어난 수비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타율은 0.227에 머물렀다.[29]

1957년, 로빈슨은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조지 켈과 주전 3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며, 켈은 로빈슨을 기꺼이 지도했다.[30][31] 시즌 초반 두 선수 모두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지만(로빈슨 3루수, 켈 1루수), 개막 2주 만에 로빈슨은 1루에서 태그를 피하려다 무릎 연골이 완전히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32] 그는 5월 한 달간 결장했고, 6월 대부분을 샌 안토니오에서 재활하며 보낸 뒤 복귀하여 다시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33] 8월 2일에는 네드 가버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아 가벼운 뇌진탕과 왼쪽 눈 위 열상(10바늘 봉합)을 입었지만, 5일 만에 경기에 복귀했다.[33][34] 8월 14일에는 페드로 라모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홈런을 기록했다.[35] 이 해 5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39를 기록했다.[36] 결장 기간 때문에 오리올스는 그를 다시 윈터리그(이번에는 쿠바 아바나)로 보냈고, 그는 9개의 홈런으로 리그 홈런왕이 되었다.[37]

1958년 4월 말,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로빈슨은 3루 수비 중 길 맥더걸드의 땅볼을 다이빙 캐치로 잡아낸 후 빠르게 일어나 홈으로 쇄도하던 요기 베라를 막아냈다. 베라는 이 수비를 보고 로빈슨에게 "훌륭한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38] 공격 면에서는 4월까지 타율 0.406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시즌 중반 스윙에 문제가 생겨 뜬공을 많이 치기 시작했고, 8월에는 딕 윌리엄스에게 출전 시간을 일부 내주었다. 하지만 9월 28일 경기 8회에 윌리엄스를 대신해 3루수로 출전하여 세 차례의 환상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호이트 윌헬름의 노히터 달성을 도왔다.[39][40] 로빈슨은 "1958년 시즌에 밝은 점이 많지는 않았지만, 윌헬름의 노히터 경기에 참여한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고 회상했다.[41] 그는 145경기에 출전하여 463타수 타율 0.238, 3홈런을 기록했다. 타격은 부족했지만 수비는 인상적이었고, 오리올스 감독 폴 리처즈는 "브룩스는 수비형 3루수로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평가했다.[42]

1958 시즌 후, 로빈슨은 2년간의 현역 복무를 피하기 위해 4년 임기의 아칸소 주방위군에 입대했다. 그는 6개월간 현역으로 복무한 후 3년 반 동안 예비역으로 복무했다.[12][43][44] 병기대에서 수리 부품 전문가 자격을 얻었고, A중대 제739병기대대에 배치되었다.[45] 군사 훈련은 그의 건강 유지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야구에는 최적의 상태가 아니었고, 1959 시즌 시작 직후 클래스 AAA 퍼시픽 코스트 리그밴쿠버 마운티스로 강등되었다.[46] 5월 17일에는 캐필라노 스타디움 더그아웃으로 공을 잡으려다 넘어지면서 오른쪽 이두박근이 갈고리에 걸려 힘줄이 파열되고 심한 출혈이 발생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신경 손상을 간신히 피해 선수 생명이 끝날 뻔했지만, 25경기 결장에 그쳤다.[47][48] 리처즈 감독은 로빈슨을 강등시킬 때 했던 약속대로 시즌 첫 올스타전 전에 그를 다시 메이저 리그로 불러올렸다.[49][50] 마이너 리그 경험은 그의 타격에 도움이 되었고, 전기 작가 더그 윌슨은 "그는 더 이상 메이저 리그 투수들에게 압도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51] 로빈슨은 88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84를 기록했고, 리처즈 감독은 그가 "시즌 마지막 5주 동안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선수였다"고 칭찬했다.[52][53]

3. 2. 전성기 (1960-1971)

1960년이 되자 로빈슨은 오리올스의 확실한 3루수가 되었다.[54] 시즌 초반 타순 6번으로 시작했으나, 6월 타율 .333, 7월 타율 .351을 기록하며 3번 타자로 자리 잡았다.[55] 7월에는 18년 연속 올스타전 출전의 시작을 알리는 첫 올스타 선정을 경험했으며, 1960년부터 1962년까지는 한 해에 두 번 열린 올스타전에 모두 출전했다.[52][56] 7월 15일에는 5타수 5안타를 기록하며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5-2 승리를 이끌었고, 오리올스 선수 최초로 사이클 히트를 달성했다.[57][58] 오리올스는 양키스, 화이트삭스와 함께 아메리칸 리그 우승 경쟁을 벌였고, 로빈슨은 수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59] 시즌 막판 팀은 2위로 마감했다.[62] 이 해 로빈슨은 152경기에 출전해 타율 .294, 14홈런을 기록했고,[52]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MVP)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16년 연속 골드 글러브상 수상의 시작을 알렸다.[63][64]

1961년에는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하며[65] 뛰어난 수비력을 더욱 공고히 하여 '과거 위대한 3루수들과 비교될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66] 리그에서 전 경기에 출전한 두 선수 중 한 명으로, 타율 .287, 192안타(리그 2위), 7홈런을 기록했다.[52][65] 1962년 팀 성적은 부진했지만[67] 로빈슨은 개인적으로 뛰어난 시즌을 보냈다. 5월에는 이틀 연속 그랜드슬램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웠고,[69][68]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로부터 '리그 최고의 3루수'라는 찬사를 받았다.[69] 처음으로 타율 3할(.303)과 20홈런(23개)을 넘기며 86타점을 기록했다.[69][70] 1963년에는 시즌 초반 좋은 타격감을 보였으나[71] 후반기에 타율 .219로 부진하며 462경기 연속 출장 기록이 중단되기도 했다.[72] 최종 성적은 타율 .251, 11홈런, 67타점이었다.[52]

로빈슨은 1964년 타격 코치 진 우들링과 함께 타격 향상에 힘썼고,[73] 약간 더 무거운 배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74] 수비에서도 양키스의 바비 리처드슨을 상대로 다이빙 캐치 후 앉은 상태에서 송구하여 아웃시키는 명장면을 연출했다.[75] 시즌 막판 타율 .464, 28타점을 몰아치며 분전했으나 팀은 다시 양키스에 이어 2위에 머물렀다.[76] 시즌 후반 오리올스는 '브룩스 로빈슨의 밤' 행사를 열기도 했다.[77] 이 해 로빈슨은 거의 전 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17, 28홈런, 그리고 리그 1위인 118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다.[52][79][80] 이는 그의 경력 최고의 시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78]

1965년에는 시즌 대부분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다 .297로 마감했으며, 팀 내 타율 및 타점(80) 1위를 기록했다.[81][82] 1966년에는 신시내티 레즈에서 이적해 온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강력한 '로빈슨 콤비'를 이루었다. 브룩스는 23홈런, 100타점을 기록했고, 팀은 창단 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4연승으로 꺾고 첫 우승을 달성했다. 로빈슨은 이 해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고, 리그 MVP 투표에서는 팀 동료 프랭크 로빈슨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루 게릭상도 수상했다.

1970년 포스트시즌에서 로빈슨은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서는 타율 .583을 기록했고, 신시내티 레즈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429, 2홈런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3루에서 신기에 가까운 수비로 여러 차례 레즈의 안타성 타구를 막아냈다. 그의 맹활약으로 오리올스는 4승 1패로 팀의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로빈슨은 월드 시리즈 MVP와 베이브 루스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최고의 프로 선수에게 주어지는 히콕 벨트(Hickok Belt)도 받았다. 상대팀 레즈의 감독 스파키 앤더슨은 "로빈슨 한 명에게 시리즈를 내줬다. 잠자리에 들 때도 로빈슨이 보일 지경이다."라고 극찬했다.

이 시기 로빈슨은 리그를 대표하는 3루수로 자리매김했다. 1960년부터 1975년까지 16년 연속 골드 글러브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부터 1974년까지 15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의 뛰어난 수비력은 '인간 진공청소기(The Human Vacuum Cleaner)'라는 별명으로 상징된다. 1971년 시즌에는 타율 .272, 20홈런, 92타점을 기록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52]

3. 3. 선수 생활 말기 (1972-1977)

메이저 리그 선수 협회 선수 대표를 오랜 기간 역임했으며,[139] 1972년에는 동료 마크 벨랜저와 함께 1972년 메이저 리그 야구 파업에 찬성표를 던진 47명 중 한 명이었다. 로빈슨은 "경기를 하고 싶다. 모든 선수들이 그렇다. 결국 구단주들이 어떤 양보를 할 의향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선수들도 양보할 의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고 입장을 밝혔다.[140] 이 파업으로 1972 시즌 초반 10일간 경기가 취소되었고, 로빈슨은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즌 첫 타석에서 팬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141]

1972년 시즌, 153경기에 출전해 타율 .250, 8홈런, 64타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1961년 이후 가장 낮은 홈런과 타점 기록이었다.[52] 시즌 중 얼 위버 감독이 오리올스의 베테랑 선수들이 너무 나이가 들어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로빈슨은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는 "그 발언은 당황스럽다. 내가 쇠퇴했다는 말을 듣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42] 하지만 그는 위버 감독을 위대한 감독으로 인정했고, 훗날 "그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한 적은 거의 없다"고 회고했다.[143] 이 해 로빈슨은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야구를 가장 잘 대표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했다.[144]

마지막 시즌의 로빈슨


1973년 개막전에서 홈런 두 개를 치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6월 중순까지 타율은 .200을 밑돌았다.[145] 그럼에도 올스타전에 선발되었으나, 스포츠 기자들은 그의 성적보다는 인기에 힘입은 선정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145] 5월 4일에는 통산 2,417번째 안타를 기록하며 파이 트레이너가 보유하고 있던 3루수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145][146] 수비에서는 7월 7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과 9월 2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에서 두 차례 5-4-3 병살 플레이를 성공시켰다.[147][148] 8월 20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는 9회말 동점 적시타를 쳐 팀의 4-3 역전승에 기여했다. 시즌 마지막 두 달 동안 타율을 .300 가까이 끌어올리며,[145] 최종적으로 155경기에서 타율 .257, 9홈런, 72타점을 기록했고, 오리올스는 2년 만에 ALCS에 진출했다.[52][145] 하지만 오클랜드와의 ALCS에서 타율 .250, 1득점, 2타점에 그쳤고, 팀은 5경기 만에 패배했다.[52]

1974년에는 평소보다 많은 실책을 기록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타율 .311을 기록하며 타격감을 유지했다.[149]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앤디 에체바렌의 대타 2루타 때 1루에서 홈까지 달려 결승 득점을 올렸고, 이는 오리올스의 AL 동부 지구 우승을 확정짓는 중요한 득점이 되었다.[150] 이 해 로빈슨은 타율 .288, 7홈런, 59타점을 기록했다. 타율은 1965년 이후 가장 높았지만, 타점은 1959년 이후 가장 낮았다.[52] 오리올스 역사가 테드 패터슨은 1974년을 "그의 마지막 탄탄한 시즌"이라고 평가했다.[151] 오리올스는 ALCS에서 다시 애슬레틱스와 맞붙었다. 1차전에서 로빈슨은 딕 그린의 타구를 잡아 1루로 던져 아웃시키는 호수비와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6-1 승리에 기여했지만,[152] 시리즈 전체에서는 타율 .083으로 부진했고, 오클랜드가 4경기 만에 승리했다.[52][152]

1975년 시즌에는 엄지손가락 통증과 전반적인 기량 저하로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 이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선발되지 못했고, 타율은 한때 .159까지 떨어졌으며, 7월 7일에는 1958년 이후 처음으로 경기 중 대타로 교체되는 경험을 했다.[153] 144경기에 출전해 타율 .201, 6홈런, 53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52] 하지만 수비에서는 여전한 기량을 선보이며 개인 통산 11번째로 아메리칸 리그 3루수 부문에서 수비율 1위를 기록했다.[154]

오리올스에는 더그 디신세스라는 젊은 3루수 유망주가 있었고, 1976년 5월 17일 위버 감독은 로빈슨에게 디신세스가 주전 3루수를 맡게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당시 로빈슨의 타율은 .165에 불과했다.[155] 로빈슨은 더 많은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시카고 화이트삭스로의 이적이 거의 성사될 뻔했으나, 시카고가 1978년까지의 계약 연장을 원하지 않아 무산되었다.[156] 이 해 로빈슨은 7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11, 3홈런, 11타점을 기록했다.[52]

1977년은 그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고, 출전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52][157] 테드 패터슨에 따르면 "브룩스의 마지막 위대한 순간"은 4월 19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였다. 10회말 팀이 5-3으로 뒤진 상황에서 대타로 나선 로빈슨은 주자 2명을 두고 풀카운트 승부 끝에 여러 개의 파울볼을 걷어낸 후, 데이브 라로슈를 상대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터뜨려 팀에 6-5 역전승을 안겼다.[158] 그의 마지막 타석은 8월 5일 엔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로, 8회초 벨랑제르의 대타로 나서 뜬공으로 아웃되었다.[159][160] 8일 후인 8월 13일,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열린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 잠시 출전한 것이 마지막 메이저 리그 경기가 되었다. 좌완 투수 밥 레이시를 상대로 알 범브리의 대타로 나섰으나, 오클랜드 감독 바비 윙클스가 투수를 우완 더그 베어로 교체하자 위버 감독 역시 로빈슨을 타석에 들어서기도 전에 좌타자 토니 뮤저로 다시 교체했다.[160][161] 릭 뎀프시가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하면서 선수 명단에 자리가 필요해지자, 로빈슨은 시즌 종료를 한 달 이상 남겨둔 8월 21일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162] 그는 같은 날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 전에 팬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163] 한 달 뒤인 9월 18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 전에 1시간 동안 은퇴 기념식이 열렸고, 이 자리에는 51,798명의 관중이 모여 오리올스 홈 정규 시즌 경기 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164] 같은 해, 그의 등번호 '''5'''번은 프랭크 로빈슨의 20번에 이어 오리올스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4. 은퇴 이후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브룩스 로빈슨은 볼티모어 오리올스텔레비전 해설자로 활동하며 성공적인 제2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원정 경기 약 50경기에 참여하고 홈 경기 10경기를 중계했다.[185] 1993년까지 방송 활동을 이어가다가 사업에 더 집중하기 위해 마이크를 내려놓았다.[188]

1982년 3월, 로빈슨이 해설자로 있던 볼티모어의 지역 방송국 WMAR-TV에서 미국텔레비전방송연예인협회(AFTRA) 소속 방송인들이 파업에 돌입했다.[186] 협상이 몇 주간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야구 시즌 개막이 다가왔고, 로빈슨은 파업 중인 동료들을 지지하며 피켓 라인을 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이러한 결정은 경영진에게 압박으로 작용하여 협상 타결을 이끌었고, 파업은 다음 날 종료되었다.[187]

오리올스가 팀 명예의 전당을 만들었을 때, 로빈슨은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가장 먼저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다. 1977년 현역에서 은퇴하던 해, 그의 등번호 '''5'''번은 프랭크 로빈슨의 ''''20''''번에 이어 오리올스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은퇴 후에는 자신의 야구 인생을 담은 자서전 "Third Base is My Home."을 출간했다.

로빈슨은 선수 시절부터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다. 1961년에는 메모리얼 스타디움 근처에 위치한 레스토랑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고,[178] 1963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브룩스 로빈슨 스포팅 굿즈'를 설립하여 볼티모어 지역에서 스포츠 용품 사업을 펼쳤다.[179][180] 사업은 한때 펜실베이니아주 요크까지 확장하려 했으나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181] 이로 인해 1976년에는 집을 매각해야 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개인 저축 약 18만달러를 들여 집을 지켜냈다.[182] 한편, 1968년부터는 크라운 센트럴 석유의 대변인으로 30년 이상 활동했으며,[183] 스포츠 용품 사업 실패 후에는 론 샤피로와 함께 운동선수들의 자산 관리를 돕는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184]

로빈슨은 야구계 발전과 사회 공헌 활동에도 힘썼다. 1982년에는 은퇴 선수들의 복지를 증진하고 청소년 야구를 장려하며 자선 활동을 지원하는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 동문회(MLBPAA)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89] 그는 1989년부터 짐 카트의 뒤를 이어 MLBPAA 회장을 맡아 2023년 2월까지 봉사했으며, 그의 후임으로는 짐 토미가 선출되었다.[190][191][192] MLBPAA는 그의 공로를 기려 지역 사회 봉사에 기여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의 명칭을 '브룩스 로빈슨 커뮤니티 서비스 상'으로 명명했다.

2005년에는 여러 마이너 리그 팀을 소유한 오프닝 데이 파트너스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195] 특히 펜실베이니아주 요크에 애틀랜틱 리그 소속 팀인 요크 레볼루션을 창단하는 데 기여했는데, 이는 로빈슨 자신이 1955년 마이너 리그 시절 뛰었던 요크 화이트 로즈 이후 처음으로 요크에 생긴 프로 야구팀이었다.[193] 요크 레볼루션의 홈구장인 웰스팬 파크는 '브룩스 로빈슨 웨이 5번지'에 위치하며, 구장 입구 광장 역시 그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194] 또한, 그는 1980년대와 2006년에 자신의 고향인 리틀록에 있는 라마 포터 필드(어린 시절 야구를 했던 곳) 복원을 위한 기금 모금 활동을 돕기도 했다.[195] 2015년에는 자신의 1970년 골드 글러브와 1966년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등 개인 소장품을 경매에 내놓아 '콘스탄스 & 브룩스 로빈슨 자선 재단'을 위해 144만달러의 기금을 마련했다.[196]

1983년, 로빈슨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통산 타율 .267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야수 중에서는 오지 스미스(.262)에 이어 낮은 편에 속하지만, 이는 그의 압도적인 수비 능력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준다. 로빈슨 자신도 테드 윌리엄스의 타격 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워 수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훗날 칼 립켄 주니어가 오리올스의 각종 기록을 경신하며 '미스터 오리올'로 불리게 되자, 로빈슨은 "미스터 오리올스는 한때 나였지만, 이제는 칼의 것이다"라며 후배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3년 9월 26일, 브룩스 로빈슨은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231]

5. 명예

1977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브룩스와 프랭크 로빈슨을 볼티모어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의 첫 번째 헌액자로 선정했다.[197] 그의 등번호 5번은 1978년 4월 14일 오리올스에 의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197][198] 브룩스는 이듬해 아칸소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197]

1983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로빈슨은 첫 투표에서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1936년 첫 헌액자들 이후 단 16명만이 달성한 기록이다.[171]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조지 켈(George Kell)도 함께 헌액되었다. 켈은 "불과 90마일 떨어진 곳에서 자란 두 아이가, 같은 교회 신앙과 같은 이상을 가지고, 같은 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다니 믿을 수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199]

로빈슨은 야구 외적으로도 여러 공로를 인정받았다. 1984년에는 미국 업적 아카데미로부터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고,[207] 오랜 기간 보이스카우트 볼티모어 지역 의회 행정부에서 활동하며 1990년에는 실버 비버 상을 수상했다.[208] 2006년 12월 5일에는 보비 브래건 청소년 협회로부터 일생 공로상을 받으며 선수 시절뿐 아니라 은퇴 후의 공헌도 인정받았다. 2007년 5월 16일, 그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메릴랜드주 파이크스빌의 라디오 타워 드라이브는 브룩스 로빈슨 드라이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209] 2020년에는 베트남 전쟁 참전 경력으로 밥 펠러 용기상을 수상했다.[206]

2010년의 로빈슨


볼티모어의 전설적인 선수로 여겨지는 로빈슨은 볼티모어 콜츠의 미식축구 스타 조니 유니타스와 함께 메모리얼 스타디움 로비에 기념 명판을 가지고 있었다. 1991년 10월 6일, 오리올스가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을 때, 로빈슨과 유니타스는 기념 시구자로 초청받았다. 로빈슨은 야구공을, 유니타스는 미식축구공을 던졌다. 경기 후에는 유니폼을 입은 119명의 전 오리올스 선수들이 과거 자신들의 수비 위치에 섰는데, 로빈슨이 가장 먼저 필드로 걸어 나왔다.[200]

1999년, 로빈슨은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야구 선수 100인' 명단에서 80위에 올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에도 선정되었다.[201][202] 2008년에는 팬 투표를 통해 역대 롤링스 골드 글러브 팀의 일원으로 선정되었으며, 헌액된 선수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203] 2015년에는 짐 파머, 프랭크 로빈슨,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오리올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4명을 기리는 '오리올스 프랜차이즈 4'에 선정되었다.[204] 2020년, 스포츠 전문 매체 '''더 애슬레틱'''은 스포츠 기자 조 포즈난스키가 선정한 '야구 100인' 명단에서 그를 73위로 평가했다.[205]

로빈슨을 기리는 동상은 총 세 개가 세워졌다.[210] 첫 번째는 2008년, 그가 마이너 리그 선수로 뛰었던 펜실베이니아주 요크의 웰스팬 파크 외부 브룩스 로빈슨 광장에 건립되었다.[210] 두 번째 동상은 2011년 10월 22일 볼티모어 시내 워싱턴 대로에 공개되었는데, 1루로 공을 던지는 그의 역동적인 모습을 형상화했다.[211][212] 세 번째 동상은 오리올 파크 앳 캠던 야즈 개장 2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9월 29일 야구장 내에 세워졌다. 이 동상은 실물보다 큰 크기의 청동 조각상이다.[213][214]

다음은 브룩스 로빈슨의 주요 수상 내역이다.

상 이름수상 횟수수상 연도/부문
아메리칸 리그 MVP1회1964년
골드 글러브상 (3루수 부문)16회1960년 ~ 1975년 (16년 연속)
월드 시리즈 MVP1회1970년 월드 시리즈
MLB 올스타전 MVP1회1966년 MLB 올스타전
루 게릭상1회1966년
베이브 루스상1회1970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1회1972년
프랜차이즈 포-2015년 (오리올스 대표 4인 중 1명)


6. 개인 생활

브룩스 로빈슨은 1937년 5월 18일 리틀록에서 브룩스 캘버트 시니어와 에셀 메이 로빈슨 사이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리틀록의 콜로니얼 베이커리에서 일했으며, 나중에는 리틀록 소방서에서 대장으로 근무했다.[3] 어머니는 시어스 로벅 앤드 컴퍼니에서 일하다가 주 감사관실에서 근무했다.[4] 어린 로빈슨은 자전거로 ''아칸소 가제트'' 신문을 배달하고, 라마 포터 운동장에서 전광판을 운영하며 청량음료를 판매해 용돈을 벌었다.[5]

로빈슨 시니어는 준프로 야구팀에서 2루수로 활동했으며,[6] 어린 로빈슨과 함께 야구를 즐겼다.[7] 로빈슨은 성장하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응원했고, 스탠 뮤지얼을 가장 좋아했다.[8] 고등학교 시절에는 지역의 유명 아메리칸 레기온 야구 팀인 M. M. 에버츠 포스트 1 더우보이스에서 활동했다.[9] 이 팀은 로빈슨이 15세이던 1952년에 지역 결승에 진출했고, 1953년에는 지역 토너먼트에 참가했다.[10]

1955년 5월 27일 리틀록 중앙 고등학교를 졸업한 로빈슨은 농구 실력을 인정받아 아칸소 대학교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제안받았으나,[11][12] 프로 야구 선수가 되기를 원했다.[13] 같은 감리교 교회에 다녔던 린제이 디얼은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 폴 리처즈마이너 리그 팀 동료였는데, 그는 리처즈에게 로빈슨의 재능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14] 디얼은 편지에서 "그는 매우 빠르지는 않지만 느리지도 않다. 브룩스는 힘과 야구 센스를 갖췄으며,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다"고 썼다.[15] 1955년, 뉴욕 자이언츠, 신시내티 레드레그스, 오리올스 세 팀이 로빈슨과 계약하기 위해 스카우트를 파견했다. 각 팀은 4000USD를 제안했지만,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한 것은 신시내티와 볼티모어뿐이었다. 로빈슨은 오리올스가 가장 큰 관심을 보였고, 젊은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가 많다고 판단하여 볼티모어와 계약했다.[16][17][18] 아트 엘러스가 그를 영입한 스카우트였다.[15]

2011년 로빈슨과 그의 아내


로빈슨은 1959년 7월, 오리올스 팀 비행기(캔자스시티발 보스턴행)에서 미래의 아내 콘스탄스 루이스 "코니" 부처를 만났다.[2] 당시 그녀는 유나이티드 항공의 객실 승무원이었다. 로빈슨은 그녀에게 반해 계속 아이스티를 주문했고, 동료들의 격려에 힘입어[3] 세 번째 잔을 마신 후 그녀에게 다가가 "볼티모어 오리올스 선수 중 누군가 데이트 신청을 하면, 결혼한 남자와는 데이트하지 않는다고 말하세요. 제가 팀에서 유일한 독신이니까요."라고 말했다. 실제로는 팀의 절반 가량이 독신이었지만, 이 말 덕분에 두 사람은 비행기가 보스턴에 착륙하기 전에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215][216] 두 사람은 1960년 10월 8일 그녀의 고향인 캐나다 윈저에서 결혼했다.[217] 그들은 오윙스 밀스(볼티모어 교외)에 거주하며[218] 브룩스 데이비드(1961년생), 크리스(1963년생), 마이클(1964년생), 다이애나(1968년생) 네 자녀를 두었다.[219]

감리교 신자로 자랐으나, 1970년 아들 브룩스 데이비드가 매주 일요일 아침 왜 다른 교회에 가는지 묻는 것을 계기로 아내의 종교인 가톨릭으로 개종했다.[220] 개종 과정에서 가족 친구인 마틴 슈왈렌버그 신부의 도움을 받아 가톨릭 신앙을 배웠다. 로빈슨은 1974년 자서전에서 "나에게 여전히 절대적인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 모두는 그의 영적 완성에 도달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는 예배 형식과 관계없이 중요한 목표이다."라고 썼다.[221] 그는 선수 시절 초기부터 크리스천 운동 선수 연맹 회원이었다.[222]

로빈슨의 주요 취미는 독서였으며, 오리올스 시절 여러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특히 미국 남북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책에 매력을 느낀다"고 밝혔다.[223] 또한 컨트리 음악을 즐겨 들었다.[223]

2009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으나, 조기 발견 덕분에 성공적인 수술을 받고 치료되었다.[224] 2010년에는 복부 문제로 응급 수술을 받았고, 회복 중이던 2011년 3월 31일 감염이 발생하여 약 한 달간 입원해야 했다.[225] 퇴원 후에도 합병증으로 인해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224]

2012년 1월, 플로리다 남부의 세미놀 하드 록 호텔 & 카지노 할리우드에서 열린 자선 만찬에 참석했다가 무대 위 플랫폼에서 의자가 뒤로 넘어져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한 달간 입원 및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226] 2014년 4월, 로빈슨과 그의 변호사들은 이 사고와 관련하여 플로리다 세미놀 부족을 상대로 990만달러의 합의를 추진했다.[227]

로빈슨은 2023년 9월 26일, 86세의 나이로 메릴랜드주 오윙스 밀스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228][229][230]

7. 유산

1977년 마지막 시즌을 마치고 그의 등번호 5번은 오리올스 구단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 1983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첫 투표에서 명예를 얻은 16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역대 최고의 오리올스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로빈슨은 볼티모어 콜츠의 위대한 미식축구 선수 조니 유니타스와 함께 볼티모어 메모리얼 스타디움 로비에 명판이 설치되었다. 1991년 10월 6일, 오리올스가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를 때 로빈슨과 유니타스는 기념 시구를 위해 초청되었다. 경기 종료 후, 119명의 전 오리올스 선수들이 과거 유니폼을 입고 각자의 포지션에 섰는데, 로빈슨이 가장 먼저 필드로 나왔다.

1999년에는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명단에서 80위에 올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에도 선정되었다.

오랫동안 스카우트 활동을 후원해 온 로빈슨은 미국 보이스카우트 볼티모어 지역 의회 행정부에서 여러 해 동안 활동했으며, 실버 비버 상을 받았다. 2006년 12월 5일에는 보비 브래건 청소년 협회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받으며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공헌을 인정받았다. 2007년 5월 16일, 그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메릴랜드주 파이크스빌의 '레이디오 타워 드라이브'가 '브룩스 로빈슨 드라이브'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8년 7월 2일, 로빈슨이 선수 생활을 시작했던 펜실베이니아주 요크의 마이너 리그 팀은 그가 팬 투표로 '올타임 롤링스 골드 글러브 팀'의 일원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상은 롤링스 골드 글러브 상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롤링스 사가 제정하고 팬 투표로 선정되었다.

2011년 10월 2일, 로빈슨이 1루로 송구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볼티모어 시내 워싱턴 대로에서 제막되었다. 무게 약 680.39kg 이상인 이 동상은 글러브 부분만 금색이고 나머지는 어두운 회색이며, 오리올 파크 앳 캠던 야즈에 있는 베이브 루스 동상에서 약 약 182.88m 거리에 있다. 2012년 9월 29일, 오리올스 구단은 20세기 오리올스 전설들을 기리는 행사의 일환으로 오리올 파크 앳 캠던 야즈에 로빈슨의 실물 크기보다 큰 동상을 세웠다. 이 제막식은 원래 2012년 5월 12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로빈슨이 1월 27일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회복 중이었기 때문에 연기되었다.

2015년에는 짐 파머, 프랭크 로빈슨,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오리올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4명의 선수인 '프랜차이즈 4'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로빈슨은 23년의 선수 생활 동안 통산 타율 0.267, 2,848안타, 268홈런, 1,357타점을 기록했다.[52] 포스트시즌에서는 39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03, 5홈런, 22타점을 기록했다.[52] 수비에서는 11시즌 동안 아메리칸 리그(AL) 3루수 수비율 1위를 기록했다. 그의 통산 수비율 0.971은 은퇴 당시 역대 3루수 중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165] 또한 3루수로서 최다 경기 출전(2,870경기), 최다 잡아낸 아웃카운트(2,697개), 최다 보살(6,205개), 최다 총 찬스(9,165개), 최다 병살(618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66][165]

로빈슨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한 팀에서 23시즌 이상을 뛴 선수였으며, 이후 칼 야스트렘스키만이 이 기록을 달성했다.[165] 18년 연속 올스타(1960~1974)로 선정되었고, 4번의 월드 시리즈에 참가했다.[52][166] 그가 3루수로서 기록한 AL 통산 최다 홈런(266개) 기록은 1980년 그레이그 네틀스에 의해 경신되었다.

항목GBAABRH2B3BHRRBISBCSBBSOOBPSLGOPSPOADPEFLD%참고문헌
통산2,896.26710,6541,2322,848482682681,3572822860990.322.401.7232,7126,205621264.971[52]


8. 평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영구결번으로 1977년 지정되었다.]]

1977년 시즌 종료 후 그의 등번호 5번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 로빈슨은 1983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첫 투표로 헌액되었는데, 이는 첫 투표만으로 명예를 얻은 16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역대 최고의 오리올스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볼티모어 콜츠의 미식축구 스타 조니 유니타스와 함께 볼티모어 메모리얼 스타디움 로비에 명판이 설치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스포팅 뉴스 선정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명단에서 80위에 올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에도 선정되었다. 스카우트 활동의 오랜 후원자로서 보이스카우트 볼티모어 지역 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실버 비버 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보비 브래건 청소년 협회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며 경기장 안팎에서의 공헌을 인정받았다. 2015년에는 짐 파머, 프랭크 로빈슨,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오리올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4명의 선수('Franchise Four') 중 한 명으로 뽑혔다.

로빈슨은 특히 3루수로서 뛰어난 수비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인간 진공청소기'''(The Human Vacuum Cleaner)" 또는 "'''미스터 후버'''(Mr. Hoov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70][171] 그는 골드 글러브상을 16년 연속 수상했는데, 이는 투수 그렉 매덕스 (18회)에 이어 투수 짐 카트와 함께 역대 공동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야수 중에서는 최다 수상 기록이다.[173] 수비 시 항상 움직였으며, 당시 3루수들에게는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을 잡아서 던지기까지의 동작이 매우 빠르고 부드러웠으며,[170] 번트나 느린 땅볼 처리에도 능숙했다.[170] 팀 동료 척 에스트라다는 로빈슨이 운동선수로서 이상적인 체격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손재주와 빠른 릴리스를 가지고 있었고, 주자는 항상 아웃되었다"고 평가했다.[172]

케이시 스텡겔과 홈런 베이커는 모두 로빈슨이 자신들이 본 최고의 3루수라고 동의했으며,[174]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명예의 전당 3루수 파이 트레이너는 "그는 최고"라고 말했다.[174] 심판 에드 헐리는 "그는 더 높은 리그에서 내려왔다"고 극찬했다.[175]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짐 머리는 "미래에 브룩스 로빈슨은 모든 3루수가 측정될 기준이 될 것"이라고 썼고, 이는 시간이 지나도 유효한 평가로 남았다.[166]

타격 면에서는 타석에 들어설 때 헬멧 꼭대기를 잡고 배트를 앞뒤로 흔드는 독특한 자세를 취했으며,[167]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쇠톱날을 이용해 챙 앞부분을 짧게 잘라낸 맞춤형 헬멧을 사용했다.[169] 통산 타율 .267은 명예의 전당 헌액자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이는 그의 압도적인 수비력이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준다. 로빈슨 자신도 테드 윌리엄스의 타격 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워 수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참고로, 통산 병살타 4회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최다 기록이다.

뛰어난 실력 외에도 겸손하고 친절한 성품으로 오리올스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174] 팬들을 인내심 있게 대했으며,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나눴다고 알려져 있다.[174][78] 작가 패터슨은 "다른 스타들은 팬을 가졌지만, 로비(로빈슨의 애칭)는 친구를 만들었다"고 썼으며,[174] "선수가 프랜차이즈와 도시에 대해 브룩스가 오리올스와 볼티모어시에 대해 의미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진 적은 없다"고 평가했다.[174]

칼 립켄 주니어가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경신했을 때의 기념식에서 로빈슨은 "미스터 오리올(Mr. Oriole)은 한때 나였지만, 이제는 칼의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2007년 메릴랜드주 파이크스빌의 한 도로는 그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브룩스 로빈슨 드라이브'로 명명되었으며, 2011년과 2012년에는 오리올 파크 앳 캠던 야즈 근처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그의 업적은 계속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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