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돌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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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예루살렘의 순례길로, '고난의 길'이라는 뜻이다. 비잔틴 시대부터 순례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14개의 처(station)로 구성된 형태는 14세기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정립되었다. 고고학적 발견과 연구를 통해 경로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현재는 우마리야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성묘 교회로 이어진다. 매주 금요일 가톨릭 행렬이 진행되며, 다양한 재연 공연도 열린다.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비아 돌로로사를 중요한 신앙적 장소로 여기며, 관련 유적과 건물들이 순례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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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 예수의 매장
예수의 매장은 기독교의 핵심 사건으로, 십자가형 후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된 사건을 의미하며, 아리마대 요셉이 시신을 수의에 싸서 무덤에 넣었다는 성경 묘사와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논쟁, 예술적 표현 등이 존재한다.
비아 돌로로사 | |
---|---|
개요 | |
종류 |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거리 |
위치 | 예루살렘 |
길이 | 약 600m |
의미 | 슬픔의 길, 고난의 길 |
상세 정보 | |
시작점 | 안토니아 요새 |
종료점 | 성묘 교회 |
경유 지점 | 제1지점: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곳 제2지점: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곳 제3지점: 예수가 처음 넘어지신 곳 제4지점: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신 곳 제5지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아드린 곳 제7지점: 예수가 두 번째 넘어지신 곳 제8지점: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하신 곳 제9지점: 예수가 세 번째 넘어지신 곳 제10지점: 예수의 옷이 벗겨진 곳 제11지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제12지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곳 제13지점: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곳 제14지점: 예수가 묻히신 곳 |
언어별 명칭 | |
라틴어 | Via Dolorosa |
아랍어 | طريق الآلام (Tariq Al-Alam) |
히브리어 | ויה דולורוזה (Via Dolorosa) |
2. 역사
Via Dolorosala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간 길을 의미하며, 기독교에서 중요한 순례길 중 하나이다.
비아 돌로로사의 기원은 비잔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순례자들이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순례길이었으나, 8세기경에는 서쪽 언덕을 거치는 경로가 나타났다. 중세 시대에는 가톨릭 교회 내 두 파벌 간의 경쟁으로 인해 경로가 분리되기도 했다.
14세기에 프란치스코회가 성지 관리권을 얻으면서 현재와 유사한 형태의 비아 돌로로사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회는 비아 돌로로사를 통해 예수 수난의 신심을 전파하고, 순례자들에게 종교적 체험을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경건 관습이 발전하고, 예루살렘 현장의 상황이 변하면서 비아 돌로로사의 경유지와 14개 처(stations)가 점차 확립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덟 번째 처의 위치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들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서쪽 언덕의 초기 경로가 더 현실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현재의 비아 돌로로사는 예루살렘 무슬림 구역의 사자문(성 스테판 문)에서 약 200m 안쪽에 위치한 우마리야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기독교 구역에 있는 성묘 교회까지 이어진다.
오늘날 비아 돌로로사는 예루살렘 관광의 주요 목적 중 하나이며, 죄의 속죄를 구하는 순례자들에게는 여전히 신성한 종교 의식으로 여겨진다. 비록 70년 제2성전 붕괴와 로마의 식민 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건설로 인해 예수가 걸었던 길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많은 순례자들은 예수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믿음으로 종교적 체험을 얻고 있다.
2. 1. 초기 역사
비잔틴 시대에는 성목요일 행렬이 감람산 꼭대기에서 시작하여 겟세마네에서 멈추고 사자문에서 옛 시내로 들어가 현재의 경로를 따라 성묘 교회까지 이어졌다.[4] 그러나 고난의 길la 자체의 경로를 따라 실제 정류장은 없었다.[2] 8세기경에는 서쪽 언덕을 거쳐 겟세마네에서 시작하여 시온산의 가야바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 하르케 소피아(프라에토리움의 위치로 간주됨)를 거쳐 성묘 교회로 이어졌다.[2]중세 시대 예루살렘의 가톨릭 신자들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서쪽 언덕에 있는 교회를, 다른 하나는 동쪽 언덕에 있는 교회를 통제했다. 각 파벌은 자신들이 통제하는 교회를 지나는 경로를 지지했다.[2] 한 파벌은 로마 총독의 저택(프라에토리움la)이 시온산에 있다고 주장했고, 다른 파벌은 안토니아 요새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다.
14세기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황 칙서 Nuper Carissimaela를 통해 순례 경로에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게 되었고, 프란치스코회의 성지 관할권을 설립하고, 수도사들에게 "라틴 순례자의 인도, 교육 및 돌봄과 성지의 가톨릭 성지 보호, 유지, 방어 및 의례"를 맡겼다.[7] 1350년경부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성묘 교회에서 빌라도의 집 (성경에서 예수가 여행한 반대 방향)까지 고난의 길la의 공식적인 여행을 수행했다. 이 경로는 프란치스코회가 예수의 수난의 사건을 연대순으로 따라가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는데, 빌라도의 집에서 출발하여 갈보리 언덕에서의 십자가형으로 끝났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비아 돌로로사라는 개념이 없었고, 오늘날과 같은 留(정거장)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순례자들이 겟세마네 동산 (또는 총독 관저 터)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비잔틴 시대 말기에는 키드론 강에서 시온 언덕의 닭울음 교회(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짐)를 경유하여 세인트 소피아 교회 (이미 철거되어 소재지도 특정되지 않음)로 향하고, 거기에서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루트가 일반적이었다.
14세기, 프란치스코회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예루살렘 관리를 명령받았는데, 그들은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통치로 상징되는 힘에 의한 성지 탈환이 아닌, 평화적으로 성지 해방을 목표로 하는 이데올로기를 내걸었다. 그 운동의 일환으로 1342년부터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었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 예루살렘의 가톨릭 신자들은 서쪽 언덕과 동쪽 언덕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두 파벌로 나뉘어 각기 다른 경로를 지지했다.[2] 이들은 각자 자신들이 통제하는 교회가 있는 경로를 지지했는데, 한 파벌은 로마 총독의 관저(프라에토리움|Praetoriumla)가 시온산에 있다고 주장했고, 다른 파벌은 안토니아 요새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다.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이 여호사밧 거리(비아 요사파트|Via Josaphatla)라고 부른 곳은 현재 고난의 길|Via Dolorosala의 일부가 있는 곳이었다.[5]
2. 3. 프란치스코회 시대
14세기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프란치스코회에 성지 관리권을 부여하여 비아 돌로로사 순례를 관장하게 했다.[7] 프란치스코회는 1350년경부터 성묘 교회에서 빌라도의 집까지 공식적인 순례를 시작했으며,[4] 1517년경부터는 순서를 바꾸어 빌라도의 집에서 출발하여 갈보리 언덕에서 끝나는 순례를 진행했다.[4] 프란치스코회는 묵상 자료 등을 통해 비아 돌로로사 신심을 유럽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2. 4. 근현대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경건 관습이 발전하고, 예루살렘 현장의 상황이 변하면서 비아 돌로로사의 경유지와 14개 처(stations)가 점차 확립되었다. 14세기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황 칙서 Nuper Carissimaela를 통해 프란치스코회에게 성지 관할권을 부여하고 순례 경로에 일관성을 부여했다.[7] 1350년경부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성묘 교회에서 빌라도의 집까지 비아 돌로로사의 공식적인 순례를 수행했다.[7] 1517년경부터는 순례 경로가 반대 방향, 즉 빌라도의 집에서 시작하여 갈보리 언덕에서 끝나는 형태로 바뀌었다.[7]프란치스코회는 수난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경건한 묵상을 장려했으며, Meditaciones vite Christila (''MVC'')와 같은 안내서를 배포하여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러한 경건 문헌은 성경의 간결한 설명을 확장하여, 14세기 내내 비아 돌로로사의 역을 표시하는 여러 사건들이 예루살렘 현장에 나타났다.
19세기에 이르러 첫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덟 번째 처의 위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7] 20세기 고고학적 발견은 서쪽 언덕의 초기 경로가 더 현실적이었음을 시사한다.[8] 현재 비아 돌로로사는 우마리야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성묘 교회까지 이어지며, 14개 처는 14세기 프란치스코회의 순례길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09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시몬 깁슨은 야파 문 남쪽의 아르메니아 지구에서 로마 병영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복음서에 묘사된 경로와 일치하며,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 장소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장소에서 약 20m 떨어져 있다.[13][14]
비아 돌로로사에 참여하는 것은 오늘날 예루살렘 관광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되었다. 순례자들은 죄의 속죄를 구하며 여전히 신성한 종교 의식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70년의 제2성전 붕괴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건설로 인해 예수가 걸었던 길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참가자들은 예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믿으며, 그의 고통을 헤아림으로써 종교적인 체험을 얻고 있다.
17세기 말 무렵, 유럽의 교회에는 留(정거장)의 개념이 도입되어, 각 교회를 경유한 "고난의 길" 순례를 완수한 자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이 제도는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허가 하에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 시대에는 프란치스코회 소유의 모든 교회에서 14개 留를 답파한 순례자에게 면죄부 발행이 허가되었다.
3. 14개 처 (Stations of the Cross)
고난의 길la(Via Dolorosa)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골고타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을 따라 조성된 순례길로, 14개의 지점(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지점은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특정 사건을 기념한다.
14세기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황 칙서 Nuper Carissimaela를 통해 순례 경로에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게 하였고, 프란치스코회에 성지 관할권을 설립하고 수도사들에게 순례자 인도 및 성지 보호 등의 임무를 맡겼다.[7] 1350년경부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성묘 교회에서 빌라도의 집까지 고난의 길la의 공식적인 여행을 수행했다.[2] 이후 프란치스코회는 예수의 수난의 사건을 연대순으로 따라가기 시작하면서 순례 경로를 빌라도의 집에서 출발하여 갈보리 언덕에서의 십자가형으로 끝나는 것으로 역전시켰다.[2]
프란치스코회 행정의 시작부터 고난의 길la의 발전은 유럽의 경건한 관행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작은 형제회는 수난을 접근하고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경건한 묵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Meditaciones vite Christila (''MVC'')와 같은 안내서를 제작하여 유럽에 널리 배포했다.
14세기 내내 고난의 길la의 역을 표시하는 여러 사건이 경건한 문헌과 예루살렘의 물리적 현장에 나타났다. 순례 기록에 처음 나타난 역은 키레네 사람 시몬과의 만남과 예루살렘의 딸들이었으며, 이후 베로니카의 집 등 여러 다른 역이 뒤따랐다.[2]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덟 번째 역의 위치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20세기의 고고학적 발견은 서쪽 언덕의 고난의 길la의 초기 경로가 더 현실적인 길이었음을 나타낸다.[8]
현재의 고난의 길la을 성경적 경로와 동일시하는 것은 프라에토리움la이 안토니아 요새에 인접해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러나 1세기 후반의 작가인 요세푸스는 로마 총독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헤롯 궁전에 머물렀고,[9] 그 밖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채찍질했다고 증언한다.[10] 요세푸스는 헤롯 궁전이 서쪽 언덕에 있다고 지적하며,[11] 2001년에는 야파 게이트 시타델의 한 모퉁이 아래에서 재발견되었다.[12]
2009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시몬 깁슨은 야파 문 남쪽의 아르메니아 지구에서 발견된 유적을 통해 복음서에 묘사된 경로와 일치하는 새로운 경로를 추적했다. 깁슨이 추적한 경로는 아르메니아 지구의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구시가지의 오스만 벽을 지나 다윗의 탑 옆의 야파 문을 지나 성묘 교회를 향한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 장소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장소에서 약 20m 떨어져 있다.[13][14]
전통적인 경로는 예루살렘 무슬림 구역의 사자문 (성 스테판 문)에서 약 200m 안쪽에 위치한 우마리야 초등학교에서 시작하며, 이곳은 옛 안토니아 요새가 있던 곳 근처이다. 사자문 거리에서 시작하여 경로는 옛 시가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기독교 구역에 있는 성묘 교회로 이어진다. 현재의 14처는 14세기에 프란치스코회에서 조직한 순례길에 부분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다.
예루살렘의 많은 도로 이름이 표지판에 따라 영어, 히브리어, 아랍어로 번역되는 반면, 히브리어로 사용되는 이름은 라틴어 음역인 Via Dolorosala이다. 아랍어 이름은 '고통의 길'(طريق الآلامar )의 번역이다.
현재 14처는 다음과 같은 14개의 에피소드를 기념한다:[15]
#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은 곳
#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곳
# 예수가 처음 넘어지는 곳
# 예수가 어머니를 만나는 곳
# 키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도록 강요받는 곳
#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아주는 곳
# 예수가 두 번째로 넘어지는 곳
#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예수 앞에서 우는 곳
# 예수가 세 번째로 넘어지는 곳
# 예수의 옷이 벗겨지는 곳
#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곳
#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곳
#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곳
# 예수가 무덤에 안치되는 곳
예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만남을 기념하는 네 개의 지점이 시내 거리에 있다.
신약 성경의 사복음서에 따르면, 유월절 기간에 붙잡힌 예수는 산헤드린에서 조사를 받은 후, 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지만,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부활한다.
기독교의 교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위에 세워졌으며, 어떤 복음서도 예수를 메시아 (구세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제2성전 시대의 유대인은 유대 민족을 로마 제국의 멍에에서 해방할 왕, 또는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인자"와 같은 신비로운 모습을 갖춘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했다.
메시아의 고통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예수는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내몰렸다. 예수는 그 죽음으로 제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사흘째 되는 날의 부활로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 예수를 따르던 자는 메시아의 고통과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완성했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였던 예수의 깨끗한 죽음은 인류를 원죄로부터 깨끗하게 하기 위한 자기 희생이었으며, 그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신과 인류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해석했다. 예수가 자신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향해 걸어간 길이 비아 돌로로사이다.
3. 1. 제1처 ~ 제9처 (구시가지)
고난의 길la(Via Dolorosa)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골고타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을 따라 조성된 순례길이다. 현재의 비아 돌로로사는 구시가지 내에 위치하며, 제1처부터 제9처까지는 구시가지의 통로 옆에 있다.제1처는 예수가 재판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총독 관저 터로, 현재는 남자 학교인 우마리야 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16] 일부 학자들은[17] 헤롯 궁전, 즉 현재 성묘 교회 서쪽의 다윗의 탑 근처에서 판결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8] 이곳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선도로 행진이 시작되며,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에 참여한다.
제2처는 예수의 채찍질 교회와 유죄 판결 교회가 있는 곳으로,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장소로 여겨진다.[16]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빌라도는 이곳에서 예수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군중에게 넘겨주었다. 채찍질 교회는 안토니오 발루치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바라바의 석방, 채찍질 당하는 예수, 손을 씻는 빌라도가 묘사되어 있다. 유죄 판결 교회에는 유죄 판결을 받고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고난이 새겨져 있다.
제3처는 예수가 처음 넘어진 곳으로, 현재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교회가 세워져 있다.[21][22] 교회 정면과 예배당에는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는 예수의 기념비가 있다.
제4처는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으로, 슬픔의 성모 교회가 세워져 있다.[21][22]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마리아의 슬픔을 헤아리며 기도를 올린다.
제5처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곳으로, 시몬 키레네 경당이 세워져 있다.[23]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사람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였다.[24]
제6처는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으로, 성스러운 얼굴과 성녀 베로니카 교회가 세워져 있다. 음운 전위를 통해 vera iconla('진실된 이미지'를 의미)라는 라틴어 단어가 ''베로니카''로 바뀌면서,[31]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님을 만나 천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 수건에 이미지가 새겨졌다고 전해졌다.
제7처는 예수가 두 번째로 넘어진 곳으로, 현재 콥트 정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는 곳이다.[21][22] 이곳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시대에 도시의 주요 교차로였으며, 테트라필론의 잔해가 남아 있다.
제8처는 예수가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곳으로, 그리스 정교회의 성 카랄람포스 수도원 벽에 ''IC XC / Nika''라는 글자와 양각된 십자가로 표시되어 있다.[33]
제9처는 예수가 세 번째로 넘어진 곳으로, 콥트 정교회의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 외벽을 지지하는 기둥이 그 상징이다.[21][22]
3. 2. 제10처 ~ 제14처 (성묘 교회)
제10처는 성묘 교회에 인접해 있지만, 유일하게 건물 외부에 독립된 성당이 놓여 있다. 계단을 올라간 성당에서는 교회의 2층에 있는 제11처를 볼 수 있다. 이 곳은 예수가 옷을 벗기고 제비뽑기로 나누었다는 로마 병사의 일화에서 유래한다.[4]
십자군 시대에는 이 성당에서 계단을 통해 곧바로 골고다 언덕(제11처)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1187년 이슬람교도에 의해 통로는 끊어져 창문으로 개조되었다. 성당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에게 기도가 바쳐지고 있다.
제11처는 예수 성묘 교회 내 골고다 언덕의 (안쪽에서 볼 때) 오른쪽에 위치해 있으며, 프란치스코회의 관할 하에 있다. 벽으로 구분되기 전에는 제10처에서 제11처로 이동하려면 몇 계단을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지만, 현재는 일단 지상으로 내려가 교회에 입장한 후 다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순은으로 만들어진 제단은 1588년 메디치 가문의 페르디난도 1세가 기증한 것이다. 예배당의 현재 장식은 1937년 안토니오 발루치에 의해 개수되었다. 천장 중앙에는 십자군 시대에 제작된 모자이크화가 간신히 남아 있는데, 그곳에는 예수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 외의 모자이크는 천장을 P. 다치알디, 벽면을 L. 트리포글리오가 담당했으며, 두 사람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십자가 아래에서 묵묵히 서 있는 부인들, 이삭의 번제를 모티프로 선택했다. 이삭의 번제는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예수의 십자가형을 예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것처럼, 신도 또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외아들 예수를 바쳤다는 신학에 기반한다.
제12처는 골고다 언덕의 왼쪽 측면에 위치해 있으며, 예수가 숨을 거둔 곳이다. 현재는 그리스 정교회의 관리하에 있으며, 제단 발치에는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움푹 파인 부분을 정확히 표시하기 위해 은색 원형 플레이트가 놓여 있다. 또한, 예수와 함께 두 명의 범죄자가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전해지는 장소(제단의 양 옆)에는 검은색 플레이트가 놓여 있다. 순례자들은 오랫동안 이곳에 발을 멈추는데, 이는 골고다 언덕의 암반이 노출된 움푹 파인 부분을 직접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암반에는 예수가 죽을 때 발생한 지진으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균열이 있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피는 이 지진으로 발생한 균열을 통해 지하로 흘러 골고다 언덕에 매장된 아담의 뼈에 떨어졌다고 한다. 즉, 예수의 피로 인해 아담과 하와로 인해 초래된 원죄로부터 인류가 정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성전의 지성소와 외부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향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는 또한 예수라는 지상의 제물을 바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제사장 계급에 의한 신성한 의식, 특히 번제 등으로 대표되는 제물에 의존한 신앙이 끝났음을 상징한다. 복음서에서는 이야기의 초반, 요르단강에서의 세례에서 하늘로부터의 소리에 의해 예수의 신성이 선언되는데, 이야기의 후반, 십자가가 땅에 세워지는 장면에서는 이교도인 로마 병사의 입에서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 보인다. 이 사건은 후에 예수에 대한 신앙이 유대인이 아닌 로마 병사로 대표되는 이방인에게 맡겨지는 선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제13처에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라고 불리는 프란치스코회 소유의 제단이 있으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헌정되어 있다. 제단 옆에는 1778년 리스본에서 기증된 마리아상이 놓여 있다. 여기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두 손으로 받아 든 마리아의 슬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13처가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다른 처에 비해 늦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에는 예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후 "향유의 돌(Anointing Stone)"이라고 불리는 돌 위에 눕혀져 매장 절차가 시행되었다는 사건이 제13처의 주제였다. "향유의 돌"은 성묘 교회 입구 정면에 있는 골고타 언덕 기슭에 놓여 있다.
제14처는 예수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유해는 아리마태아 요셉이라는 인물이 소유한 묘지에 매장되었다.
예수의 무덤은 현재 로툰다(원형 건물)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석관 자체는 깬 돌을 조합하여 만든 소박한 것이지만, 비잔틴 시대에 무덤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대리석제 기념물이 주변을 둘러싸게 되었다. 로툰다는 1808년에 일어난 화재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1810년에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1세의 자금 지원을 받아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수리되었는데, 그 때 러시아 황제의 왕관을 본뜬 천개가 설치되었다.
제14처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예배 시설이 있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석관이 놓여 있는 방이다. 예배 시설의 양 옆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과월절에 불을 밝히기 위한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또한 방 안에는 묘혈의 덮개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 돌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석관이 있는 방에서는 총 43개의 촛불이 밤낮으로 켜져 있다. 43개의 내역은 가톨릭 교회가 13개, 그리스 정교회가 13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13개, 콥트 정교회가 4개이다. 석관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이 덮개에는 세 개의 돌기가 있는데, 이는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건에 기인한다.
그러나 기독교인 모두가 실제로 예수가 이 장소에 묻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측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시대에 묘지가 있었던 곳은 현재의 다마스쿠스 문 북쪽이기 때문에, 예수의 무덤도 그 묘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기독교인 일부는 제14처에서 예수의 부활이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같은 이 장소를 제15처로 정하고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종착점으로 위치시키고 있다.
4. 한국 기독교와 비아 돌로로사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성지순례를 통해 비아 돌로로사를 방문하여 신앙심을 고취하고 예수의 고난을 되새긴다. 한국 교회는 비아 돌로로사를 통해 예수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강조한다.
4. 1. 한국 개신교
신약성서의 사복음서에 따르면, 유월절 기간에 붙잡힌 예수는 산헤드린에서 조사를 받은 후, 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지만,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부활한다.기독교의 교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위에 세워졌으며, 어떤 복음서도 예수를 메시아(구세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제2성전 시대의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유대 민족을 로마 제국의 멍에에서 해방할 다가올 왕, 또는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인자"와 같은 신비로운 모습을 갖춘 인물 등, 권위와 영광으로 가득 찬 강력한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했다.
메시아의 고통은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예수는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내몰렸다. 예수는 그 죽음으로 제자들과 신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사흘째 되는 날의 부활로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 예수를 따르던 자는 메시아의 고통, 나아가 죽음까지 인정함으로써,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완성했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였던 예수의 깨끗한 죽음은, 인류를 원죄로부터 깨끗하게 하기 위한 자기 희생이었으며, 그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신과 인류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해석했다. 예수가 자신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향해 걸어간 길이 비아 돌로로사이다.
4. 2. 한국 가톨릭교회
한국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인 14개 처를 따르는 순례를 통해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고, 그의 희생을 기린다. 매주 금요일 비아 돌로로사에서 열리는 가톨릭 행렬은 한국인 순례자들에게도 중요한 신앙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5. 비아 돌로로사와 관련된 논쟁
역사적 예수의 실제 경로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고고학적 발견은 기존의 통념과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부 학자들은 빌라도의 재판 장소가 안토니아 요새가 아닌 헤롯 궁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9][10][11] 요세푸스는 헤롯 궁전이 서쪽 언덕에 있다고 지적하였고,[11] 2001년에 야파 게이트 시타델의 한 모퉁이 아래에서 재발견되었다.[12] 더욱이 고고학적 재건은 하드리아누스의 2세기 변경 이전(아일리아 카피톨리나 참조)에 안토니아 요새에 인접한 지역이 넓은 야외 물웅덩이였음을 보여주었다.[8]
2009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시몬 깁슨은 야파 문 남쪽의 아르메니아 지구에서 두 개의 방어벽 사이에서 큰 포장된 안뜰의 잔해를 발견했다. 그 안뜰에는 외부 문과 병영으로 이어지는 내부 문이 있는 약 2m2의 융기된 플랫폼이 있었다. 로마 병영이라고 오랫동안 생각되었던 프라에토리움la의 유적에 대한 조사는 감시탑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냈다. 이러한 발견은 복음서에 묘사된 경로와 "완벽하게 일치"하며 다른 고대 저작물에서 발견된 세부 사항과 일치한다.
깁슨이 추적한 경로는 아르메니아 지구의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구시가지의 오스만 벽을 지나 다윗의 탑 옆의 야파 문을 지나 성묘 교회를 향한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 장소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장소에서 약 20m 떨어져 있다.[13][14]
14개 처의 선정과 관련된 역사적 근거와 신학적 해석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6. 현대의 순례
매주 금요일, 가톨릭 행렬이 비아 돌로로사 경로를 따라 진행되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이 행렬을 이끈다.[13][14] 이 행렬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조직하며, 이들이 행렬을 이끈다. 또한 이 경로에서는 아마추어 연극부터, 플라스틱 헬멧과 선명한 빨간색 폴리에스터 랩을 착용한 군인들이 등장하는 연극, 역사적으로 정확한 의상과 소품을 갖춘 더 전문적인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연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비아 돌로로사에 참여하는 것은 오늘날 예루살렘 관광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되었다. 죄의 속죄를 구하는 순례자에게 비아 돌로로사는 여전히 신성한 종교 의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기원 70년 제2성전 붕괴에 따른 시가지 파괴와 그 폐허 위에 새로 건설된 로마의 식민 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가 정비된 경위도 있어서, 예수가 걸었던 길을 역사적 사실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참가자 대다수는 예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믿고, 예수의 고통을 헤아림으로써 종교적인 체험을 얻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비아 돌로로사라는 개념이 없었고, 오늘날과 같은 留 (정거장)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순례자에 의해 겟세마네 동산 (또는 총독 관저 터)에서 골고다 언덕까지의 진행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4세기, 프란치스코회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예루살렘 관리를 명령받았는데, 그들은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통치로 상징되는 힘에 의한 성지 탈환이 아닌, 평화적으로 성지 해방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내걸었다. 그 운동의 일환으로 1342년부터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었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7. 비아 돌로로사와 관련된 기타 유적
- 성 안나 교회: 성모 마리아가 태어난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이다. 부지 내 웅덩이는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베데스다 연못"으로 여겨진다.[1]
- 에케 호모 아치: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고 말한 장소로 전해지는 곳이다.[2] 제2구역과 시온 여자 수도원 사이에 있는 고가식 건축물로, 사자문 거리 북쪽에 있는 에케 호모 교회의 문을 구성하는 세 개의 아치 중 하나이다. 통설에 따르면, 원래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의 동쪽에 세워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칭송하기 위한 개선문의 일부였다고 한다.
- 시온 여자 수도원: 예수 수난과 관련된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모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시대(2세기 이후)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3]
- 닭 울음 교회 (성 베드로 교회):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사건을 기념하는 장소이다.[4] 1924년부터 1931년에 걸쳐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에 세워졌다. 지하에는 예수가 투옥되었다는 감옥이 남아 있다. 교회 옆 돌계단은 예수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בית חסדא|베데스다he 연못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고 말한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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