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쿠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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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르 쿠쟁은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프랑스 정신주의의 절충주의 학파를 확립했다. 그는 에콜 노르말과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철학사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쿠쟁은 데카르트, 독일 관념론,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철학을 종합하여 자신의 철학 체계를 구축했으며, 정치적으로는 7월 왕정 시기에 공직을 맡아 교육 개혁에 기여했다. 그의 철학은 심리학적 관찰을 통해 감성, 활동/자유, 이성을 도출하고,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쿠쟁의 철학은 19세기 프랑스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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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쿠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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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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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92년 11월 28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
사망일 | 1867년 1월 14일 (향년 74세) |
사망지 | 칸, 프랑스 |
모교 |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École Normale Supérieure) |
사조 | 대륙 철학 절충주의 영성주의 |
주요 관심사 | 존재론 인식론 |
주요 사상 | 인간은 이성의 두 원리, 즉 원인과 실체를 통해 심리학(지식의 과학)에서 존재론(존재의 과학)으로 나아갈 수 있음 |
2. 생애
파리의 생탕투안 지구에서 시계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리세 샤를마뉴와 에콜 노르말에서 교육받았다. 에콜 노르말에서 철학 강사로 활동하며 피에르 라로미기에르, 피에르 폴 로이에 콜라르, 맹 드 비랑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3] 독일 철학에도 관심을 가져 헤겔 등과 교류했다.
1815년 왕정 복고 시기에는 독트린 학파에 속했으나, 1824년 샤를 10세 즉위 후 정치적 이유로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복권되어 7월 왕정 하에서 국무원 고문관, 공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교육 개혁에 기여했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3]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시계 제작자의 아들로 파리 생탕투안(Saint-Antoine) 구역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지역의 샤를마뉴 고등학교(Lycée Charlemagne)에 입학하여 18세까지 공부했다. 리세(lycée) 재학 중, 최고 학생을 선발하는 '콩쿠르 제네랄'(Concours général)에서 라틴어 연설로 1등 상을 받기도 했다. 리세의 고전 교육은 그를 문학(당시 '웅변술')에 심취하게 했고 고대 그리스어 실력도 뛰어났다.이후 프랑스의 명문 고등 교육기관인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진학하여 피에르 라로미기에르(Pierre Laromiguière)에게 철학을 배웠다. 쿠쟁은 훗날 라로미기에르의 강의를 처음 들은 날을 회고하며 "그날이 내 인생 전체를 결정했다"고 말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라로미기에르는 존 로크와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야크의 철학을 명료하게 가르쳤다.
쿠쟁은 철학 교수를 지망하여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사(maître de conférences) 자리를 얻었다. 그에게 두 번째로 큰 철학적 영향을 준 인물은 피에르 폴 로와예 콜라르(Pierre Paul Royer-Collard)였다. 1815년부터 1816년까지 문학부에서 로와예 콜라르의 조수(suppléant)로 일하며 토마스 리드 등이 주장한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철학을 접했다. 이 학파는 외부 세계와 인간 정신의 객관적 실재, 그리고 내성을 통해 파악되는 자유 의지의 존재를 강조했다. 또한 맹 드 비랑(Maine de Biran)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쿠쟁은 그를 당대 프랑스 최고의 심리학적 관찰자로 평가했다. 맹 드 비랑은 특히 의지(意志)의 문제를 탐구하며 의식 활동 속에서 개성을 드러내는 자발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
이러한 스승들의 영향 아래 쿠쟁의 초기 철학 사상이 형성되었으며, 1815년부터 고등사범학교와 문학부에서 철학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독일어를 익혀 칸트, 야코비, 셸링 등의 독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셸링의 자연철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1817년에는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헤겔을 만났고, 이듬해에는 뮌헨에서 셸링과 야코비를 만나 교류하며 독일 철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2. 2. 초기 철학적 영향
에콜 노르말에서 피에르 라로미기에르(Pierre Laromiguière)에게 철학을 배우며 존 로크와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야크에 관한 강의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철학 강사(maître de conférences)가 되어 모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쿠쟁의 철학적 사고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피에르 폴 로이에 콜라르이다. 쿠쟁은 1815년부터 1816년까지 문학부 현대 철학사 강좌에서 로이에 콜라르의 조교(suppléant)로 일하며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로이에 콜라르는 엄격한 논리와 진지한 언변으로 쿠쟁을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철학으로 이끌었다. 이 학파는 토마스 리드 등이 대표하는 사상으로, 외부 세계와 인간 정신(특히 의식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자유 의지)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로이에 콜라르는 감각조차도 분석이나 정신의 타고난 능력보다 우위에 있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부 법칙과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같은 시기 쿠쟁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주요 인물은 맹 드 비랑이다. 쿠쟁은 그를 당대 프랑스 최고의 심리학적 관찰자로 평가했다. 멩 드 비랑은 특히 의지의 현상을 깊이 연구했으며, 모든 인식 활동, 심지어 가장 단순한 의식 속에서도 인간의 개성이 드러나는 자발적 활동이 중요함을 강조했다.[3]
쿠쟁은 라로미기에르에게서 사고를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모든 것을 감각으로 환원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로이에 콜라르와 멩 드 비랑의 가르침을 통해 그는 각각 정신의 내재적 원리와 의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러한 "삼중 훈련"을 통해 쿠쟁의 초기 철학 사상이 형성되었으며, 1815년부터 에콜 노르말과 문학부에서 철학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쿠쟁은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철학 연구에 몰두했다. 임마누엘 칸트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의 사상을 공부했으며, 특히 셸링의 '자연 철학'에 깊이 매료되어 초기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야코비의 신념(belief) 원리에는 공감했지만, 그것이 이성에 기반하지 않으면 자의적이라고 보았다.
1817년, 쿠쟁은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헤겔을 만났다. 마침 그 해에 헤겔의 주요 저서인 ''철학 백과사전''이 출판되었고, 쿠쟁은 초기 판본 중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큰 호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학문적 교류를 통해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인 1818년에는 뮌헨으로 가서 셸링과 야코비를 직접 만나 한 달간 함께 지내며 자연 철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켰다.
2. 3. 정치적 박해와 경력 단절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은 한동안 빅토르 쿠쟁의 경력에 영향을 미쳤다. 1814년부터 1815년까지의 왕정 복고 시기에 그는 왕당파를 지지했으며, 로이에-콜라르가 철학적 지도자였던 독트린 학파(Doctrinaire)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는 점차 극좌파에 가까워졌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후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적인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1821년부터 1822년 사이에 쿠쟁은 문학부와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고등사범학교는 폐지되었고, 역사학 교수였던 기조 역시 같은 처지에 놓였다.[3]이렇게 강제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그에게 철학 연구에 더 깊이 몰두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는 독일로 떠나 철학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1824년부터 1825년 사이 베를린에서 프랑스 경찰의 사주로 인해 모호한 정치적 혐의를 받거나, 혹은 부주의한 발언을 문제 삼아 투옥되었다. 그는 6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이후 3년 동안 프랑스 정부의 의심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 시련의 기간 동안 쿠쟁은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적 교리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의 절충주의, 존재론, 그리고 역사 철학의 주요 원칙과 세부 내용은 1826년 파리에서 출판된 Fragments philosophiquesfra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이후 출판된 두 번째 판(1833)과 세 번째 판(1838)의 서문에서는 동시대 비판가들의 지적에 맞서 자신의 철학적 원칙을 방어하고자 했다. 심지어 그의 후기 주요 저서들인 ''스코틀랜드 철학'', ''진실, 아름다움, 선'', ''로크의 철학'' 등도 대부분 1815년부터 1820년까지 진행했던 강의 내용을 수정하고 발전시킨 결과물이었다. 예를 들어, 로크에 대한 강의는 1819년에 처음 구상되었고 1829년에 완성되었다.
그가 강의를 할 수 없었던 7년 동안, 쿠쟁은 ''철학적 단편'' 외에도 프로클로스의 저작(6권, 1820-1827)과 르네 데카르트의 저작(11권, 1826)을 편집하는 데 힘썼다. 또한, 1825년부터 시작하여 1840년까지 여가 시간을 활용해 플라톤의 저작을 번역하는 방대한 작업(13권)에 착수했다. ''철학적 단편''에서는 그가 다양한 철학적 영향을 받아 자신의 견해를 최종적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쿠쟁은 철학적 원리와 체계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과 마음의 습관에서도 절충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명성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26년 ''철학적 단편''의 출판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1827년에는 Cours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fra가 출간되었다.
2. 4. 대학교 복귀와 전성기
1828년, 앙투안 르페브르 드 바티메닐은 마르티냐크 내각에서 공교육부 장관(1828-1829)으로 재직하며 쿠쟁과 기조를 대학교수로 복귀시켰다. 이후 3년은 쿠쟁이 강사로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시기였다. 그의 복귀는 입헌주의 사상의 승리를 상징하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소르본 대학교 강당은 피에르 아벨라르 이후 파리의 어떤 철학자보다 많은 청중으로 붐볐다. 강사의 웅변은 사변적 설명과 어우러졌으며, 그는 독특한 수사적 절정의 힘을 지녔다. 그의 철학은 프랑스 지성의 일반화 경향과 중심 원리들을 중심으로 세부 사항을 그룹화하려는 논리적 필요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었다.쿠쟁의 정신 철학에는 청중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도덕적 고양감이 있었으며, 프랑스의 전통 철학보다 국가 문학, 예술, 심지어 정치에서도 더 높은 발전을 위한 기반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의 강의는 다른 동시대 철학 교수보다 더 열렬한 제자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교육적 영향력을 판단하면, 쿠쟁은 야코비, 셸링, 두갈드 스튜어트와 같이 사변적, 설명적, 상상적 능력을 결합한 철학 교수들 중 선두를 차지한다. 철학, 특히 철학사에 대한 취향은 17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유례없이 부활했다.
쿠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에드거 앨런 포, 테오도르 시몽 주프로이, 장 필리베르 다미롱, 아돌프 가르니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쥘 바르텔레미 생틸레르, 펠릭스 라베송 몰리엥, 샤를 드 레뮈자, 오레스테스 브라운슨, 랄프 왈도 에머슨, 쥘 시몽, 폴 자네, 아돌프 프랑크, 그리고 그의 저서 『인간 진보 이론』(1850)을 그에게 헌정한 패트릭 에드워드 도브가 있었다. 주프로이와 다미롱은 처음에는 동료 추종자이자 제자였다. 주프로이는 항상 쿠쟁의 가르침의 초기, 즉 프랑스적이고 스코틀랜드적인 자극을 굳게 지켰다. 쿠쟁은 그가 교수로 복귀한 후 2년 반 동안 계속 강의했다. 그는 7월 혁명에 공감하여 새 정부로부터 국가 자유의 친구로 즉시 인정받았다.
2. 5. 공직 활동과 교육 개혁
1830년 7월 혁명 이후 새 정부는 쿠쟁을 중요하게 기용했다[3]。 당시 내각 수장이었던 친구 프랑수아 기조는 쿠쟁을 공공 교육 위원회 위원이자 국무원 고문으로 임명했으며, 1832년에는 프랑스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대중 강연은 중단했지만, 철학 교수직은 유지했다. 1840년에는 아돌프 티에르 내각에서 공공 교육부 장관직을 맡았다. 또한 고등사범학교 교장, 사실상 대학 총장 역할, 그리고 1840년부터는 프랑스 학술원의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공직 경험을 통해 그는 대학과 국가 교육 시스템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이 시기 쿠쟁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프랑스 초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1830년에서 1848년 사이 프랑스 초등 교육이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프로이센과 작센은 국가 주도의 교육 시스템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쿠쟁은 프랑스가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 프로이센과의 전쟁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이센의 체계적인 국가 교육 시스템을 최고의 모델로 평가했으며, 프로이센 교육 시스템 도입이 과거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군사적 승리보다 더 값진, 피 흘리지 않는 승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831년 여름, 정부의 위임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와 작센을 방문하고 베를린에 머물며 교육 시스템을 연구했다. 그 결과는 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 ''Rapport sur l'Etat de l'instruction publique dans quelques pays de l'Allemagne et particulièrement en Prusse'' (독일 일부 국가, 특히 프로이센의 공교육 현황 보고서)로 출판되었다(네덜란드 교육에 관한 보고서 ''De l'instruction publique en Hollande'', 1837년도 참조). 프랑스로 돌아온 쿠쟁의 제안은 정부에 의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의 영향력 아래 곧 초등 교육법이 통과되었다(그의 ''Exposé des motifs et projet de loi sur l'instruction primaire, présentés à la chambre des députés'', ''séance du 2 janvier 1837'' 참조).
에든버러 리뷰는 1833년 7월호에서 이 보고서들이 "국가 교육의 진보에 한 획을 그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중요한 결과를 직접적으로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했다. 이 보고서는 1834년 사라 오스틴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에서 여러 차례 재인쇄되었다. 뉴저지주와 매사추세츠주 의회는 주 정부 예산으로 학교에 이 보고서를 배포하기도 했다. 쿠쟁 자신도 "미국 교육 연구소의 외국인 회원이라는 칭호보다 나에게 더 감동을 준 문학적 명성은 없다"고 술회했다. 루이 필리프 통치 하에서 기조와 티에르 같은 인물들의 개혁적 시각과 쿠쟁의 열정 및 실행력이 결합되어, 프랑스는 선진적인 초등 교육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제국 시대와 왕정복고 시대를 거치며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던 국가적 과제였다(Exposé, p. 17 참조). 실제로 루이 필리프 통치 초기 2년 동안 이루어진 교육 개혁은 프랑스 역사상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 더 큰 진전을 보였다.
1844년에는 귀족원에서 대학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한편으로는 성직자들의 간섭에,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주의자나 속물주의자들의 요구에 맞서 학문의 자유와 발전을 굳건하게 옹호했다. 이 사건에 대한 그의 연설은 ''Défense de l'université et de la philosophie'' (대학과 철학의 옹호, 1844년 및 1845년)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출판되었다.
2. 6. 저술 활동 및 말년
1830년부터 1848년까지 공직 생활 기간 동안 쿠쟁은 철학 연구에 매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전의 강의와 저술을 수정하고 출판하거나 재발행하는 데 집중했으며, 철학사의 특정 시기 연구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프로클로스의 작품(6권, 1820-1827)과 르네 데카르트의 작품(11권, 1826)을 편집했으며,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플라톤 번역(13권, 1825-1840) 작업을 진행했다.이 기간의 주요 저술 및 편집 활동은 다음과 같다.
- 1835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첫 번째 책과 열두 번째 책 번역 시도'' 출판.
- 1836년: ''1818년 문학부에서 강의한 철학 강좌''와 아벨라르의 미출판 작품 출판. (''철학 강좌''는 훗날 1854년 ''진, 미, 선에 관하여''로 다시 출판됨).
- 1825년부터 1840년까지: ''철학사 강좌'' 출판.
- 1829년: 독일어에서 번역한 ''테네만의 철학사 개요'' 출판.
- 1840년-1841년: ''18세기 도덕 철학사 강좌'' (5권) 출판.
- 1841년: 메인 드 비랑의 철학 작품 편집 및 출판.
- 1842년: ''칸트 철학 강좌''와 ''파스칼의 사상'' 출판.
- 1847년: ''새로운 단편들'' 재출판.
- 1859년: ''페트리 아벨라르디 오페라'' 출판.
또한 이 시기 쿠쟁은 젊은 시절 라로미기에르와 로이에르-콜라르의 영향으로 잠시 멀어졌던 문학 연구에 다시 관심을 보였다. 특히 17세기 프랑스의 주목할 만한 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그 결과물로 ''파스칼의 사상''(1842) 외에도 ''17세기 여성과 사회에 관한 연구''(1853) 등이 있다. 그는 다음 인물들에 대한 글을 썼다.
- 자클린 파스칼 (1844)
- 롱게빌 부인 (1853)
- 사블 후작 부인 (1854)
- 슈브뢰즈 공작 부인 (1856)
- 오트포르 부인 (1856)
1855년에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
루이 필리프 정권 말기, 기조 내각의 선거 개혁 반대와 스페인 결혼 문제에 대해 쿠쟁은 정부와 다른 입장을 보였다. 정권 붕괴 후에는 카베냐크와 임시 정부에 공감을 표했으며, 반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소책자 ''정의와 자선''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그는 공직에서 거의 물러나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 이후에는 공공 교육 최고 위원회 상임 위원직을 박탈당했으며, 나폴레옹 3세와 제정에는 거리를 두었다. 1852년 법령에 따라 기조, 빌르맹과 함께 명예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특정 헌법적 안전 장치가 있는 군주제를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는 소르본의 검소한 방에서 생활했으며, 평생에 걸쳐 수집한 방대한 장서를 소중히 여겼다. 1867년 1월 14일, 캉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소중한 서재를 자신이 가르치고 활동했던 소르본에 기증했다.
3. 철학
쿠쟁은 데카르트 이후 프랑스 철학의 전통과 독일 관념론, 스코틀랜드 상식학파를 종합하여 19세기 프랑스에서 스피리추얼리즘적 에클렉티시즘 학파(Eclecticism)를 확립했다. 그의 철학은 에콜 노르말과 소르본에서 주류 학풍이 되어 한 세대의 철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전통은 쥘 라슐리에, 에밀 부트루, 모리스 블롱델, 앙리 베르그송을 비롯해 20세기의 사르트르, 자크 데리다와 같은 후대 철학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또한, 쿠쟁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1822년부터 발표했는데, 이 번역은 곧 고전으로 인정받았다[5]. 이 번역은 소설가 플로베르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에릭 사티의 극 부수 음악 《소크라테스》(1918년)의 텍스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에콜 노르말에서 그에게 배운 제자로는 귀스타브 제프로이가 있다[6].
3. 1. 방법론: 절충주의
쿠쟁의 철학은 절충주의(Eclecticism)로 특징지어지지만, 그는 이를 단순한 사상 혼합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절충주의는 진리의 기준이 되는 명확한 철학 체계 위에서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혼합주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 체계가 역사의 사실들과 의식 분석 결과가 일치함을 보여줌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철학에서 방법, 결과, 역사 철학은 각각 인식론, 존재론, 그리고 절충주의적 역사관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쿠쟁은 철학 연구에서 올바른 방법을 정립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채택한 핵심 방법론은 관찰, 분석, 귀납이다. 그는 이 관찰적 방법이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고, 로크와 콩디야크를 거쳐 토마스 리드와 칸트에 의해 발전된 중요한 방법론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쿠쟁은 모든 경험적 사실이 드러나는 의식에 대한 관찰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적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 방법을 적용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특정 이론에 대한 선입견 없이 의식에 나타나는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쿠쟁은 이전 철학들이 의식의 일부 측면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의식에 대한 관찰 방법을 체계적으로 적용하면 심리학이 성립되며, 이는 존재론(존재에 관한 학문)과 역사 철학의 기초가 된다. 쿠쟁은 의식 관찰을 보완하기 위해 귀납을 사용했는데, 이는 의식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재(reality)에 대해 필연적으로 추론하는 과정이며, 이때 이성은 의식 속 보편적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쿠쟁의 철학은 동시대의 다른 사상들과 구분된다. 첫째, 셸링이나 헤겔의 독일 관념론처럼 개념의 연역적 구성에 의존하는 대신 경험적 관찰을 중시했다. 둘째, 칸트나 스코틀랜드 학파의 철학이 심리학에 국한되어 현상적 지식에 머무르고 존재론적 실재에 대해 회의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 반면, 자신의 방법은 존재론적 탐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쿠쟁은 개별 의식의 탐구를 통해 발견되는 진리가 인류의 보편적 경험, 즉 상식(common sense)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보았다. 철학의 기능 중 하나는 이러한 보편적 신념을 체계화하고 설명하는 것이지만, 상식 자체가 철학은 아니며 단지 철학적 방법이 적용될 원재료라고 생각했다. 철학의 최종 결과는 이 보편적 상식과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3. 2. 심리학적 관찰의 세 가지 결과
심리학적 관찰의 세 가지 주요 결과는 감성, 활동 또는 자유, 그리고 이성이다. 이 세 가지 사실은 성격이 다르지만 의식에서 분리되어 발견되지 않는다.- 감성(fra): 감각의 사실은 필수적이다.
- 활동/자유(fra): 의지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발적인 활동이다. 자발적인 사실만이 책임과 인격의 특징을 가지며, 의지만이 인격 또는 자아이다. 자아는 의식이 직접 닿을 수 없는 지적 영역의 중심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두 가지 현상 영역, 즉 우리 자신과 구별하는 조건 하에서만 파악하는 외부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빛을 통해 파악한다.
- 이성(fra): 감성과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며, 감성만큼이나 필수적인 요소이다. 모든 빛은 이성에서 나오며, 이성은 그 자체와 그것을 감싸는 감성, 그리고 그것이 강요하지는 않지만 영향을 주는 의지를 모두 파악한다. 따라서 이성은 지식과 의식 자체의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의식은 이 세 가지 통합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성이 지식과 의식 자체의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고 본다.
3. 3. 이성론
빅토르 쿠쟁 철학의 특징적인 원리는 그의 이성에 관한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심리학적 관찰, 즉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이성은 본질적으로 비인격적이다. 인간이 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이성의 특성은 개별성과는 정반대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쿠쟁은 지식에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원리를 인식하는 것이 심리학의 핵심이며, 이러한 원리들이 존재하고 완전히 비인격적이거나 절대적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원리들의 수나 분류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그 본성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이러한 점을 칸트가 분석에서 놓친 부분이며, 의식 관찰 방법을 통해 철학의 완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진리라고 생각했다.
쿠쟁은 칸트가 이성 법칙의 기준으로 필연성을 앞세운 것이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칸트의 방식은 이성 법칙을 반성의 영역 안에 두게 하여, 그것들이 인간 지능과 관련되고 현상계에 국한되며 실질적인 현실을 드러낼 수 없는, 즉 필연적이지만 주관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쟁에게 필연성 검증은 부차적이며, 이성 법칙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들은 반성적 의식 이전의 자발적인 지각 또는 이해 행위로서 의식에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모든 주관성은 모든 반성과 함께 지각의 자발성 속에서 소멸한다. 이성은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자아와의 관계에서 주관적이 되지만, 그 자체로서는 비인격적이다. 그것은 특정 개인이나 인류 전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인류가 이성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의 법칙 없이는 둘 다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쿠쟁에 따르면, 사상의 기본적인 법칙은 단 두 가지, 즉 인과율과 실체율이다. 다른 모든 법칙들은 이 두 가지 기본 법칙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다. 자연의 순서에서는 실체율이 첫 번째이고 인과율이 두 번째이지만, 우리가 지식을 얻는 순서에서는 인과율이 실체율보다 앞서거나, 혹은 둘 다 동시에 의식 속에서 주어진다.
이러한 이성의 원리, 즉 원인과 실체는 심리학적으로 주어지며,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한계를 넘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현실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즉,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 법칙들은 의식 속에서 의지와 감각의 데이터, 자유로운 활동과 수동적인 인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를 개인적인 존재(자아 또는 자유로운 원인)와 비인격적인 현실(우리 외부의 비자아, 자연, 힘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우리가 주의와 의지의 행위를 자신에게 귀속시키듯, 감각은 우리 자신이 아닌 외부 원인에 귀속시킬 수밖에 없으며, 이 외부 세계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존재만큼이나 확실하다. 왜냐하면 외부 세계를 시사하는 현상이 우리 자신의 현실을 시사하는 현상만큼 확실하고, 둘 다 함께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감각의 다양성에 해당하는 객관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의 세계, 즉 우주의 질서에 도달하게 된다.
3. 4. 존재론
이성의 기본 원리인 인과 관계의 법칙과 실체의 법칙은 심리학적 관찰을 통해 주어진다. 쿠쟁에 따르면, 이 원리들은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 한계를 넘어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현실, 즉 존재론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열쇠이다. 이는 지식에 관한 학문인 인식론에서 존재 자체에 관한 학문인 존재론으로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이성의 법칙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의지나 감각과 같은 경험적 요소들과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기본적인 존재 현실을 파악하게 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존재, 즉 자유로운 원인으로서의 자아(Self)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인격적인 현실, 즉 비자아(Non-self) 또는 자연의 세계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의지를 발휘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자아)를 인식하는 것처럼, 우리는 감각을 통해 우리 외부의 어떤 원인(비자아)이 존재함을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쿠쟁은 이 외부 세계의 존재가 우리 자신의 존재만큼이나 확실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아와 비자아는 모두 유한하며 서로를 제한하는 관계에 있다. 이성은 이러한 유한한 존재들의 상호 제한성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근원적인 존재를 찾게 된다. 즉, 자아와 비자아라는 두 유한한 원인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제1 원인, 절대적이고 무한한 최고 원인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쿠쟁은 이 최고 원인을 신(God)이라고 불렀다.
쿠쟁에게 신은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나 엘레아 학파가 말하는 부동의 절대적 통일체가 아니다. 그는 신을 모든 존재의 근원인 절대적 원인이자 절대적 실체로 이해했다. 특히 신의 본질은 창조하는 능력에 있으며,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창조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는 신이 세계 및 인류와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3. 5. 역사 철학
쿠쟁은 프랑스에서 철학사 연구 분야를 처음으로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근세 철학사 강좌 Cours d'histoire de la philosophie morale au XVIIIe sièclefra』(1841년)는 이러한 연구의 결과물이다[3].1828년에는 역사 철학에 관한 연속 강연을 진행했다. 이 강연에서 쿠쟁은 인류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대는 특정한 지도 이념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각 시대의 지도 이념은 "무한의 관념", "유한의 관념", 그리고 "유한과 무한의 관계에 대한 관념"이었다[4].
3. 6. 비판 및 평가
1857년 이폴리트 테느는 그의 저서 Les philosophes français du XIXe siècle|19세기의 프랑스 철학fra에서 쿠쟁의 철학을 가혹하게 비판했다[7]. 또한 프랑스 문학에 쿠쟁을 포함한 교리파 전체가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던 평론가 생트뵈브는[8] 메모에서 쿠쟁을 "절륜한 광대"라고 묘사하기도 했다[9].반면, 작가이자 관념론 학파였던 스탕달은 쿠쟁의 독일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왕정복고 시대에 제수이트나 극우 왕당파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되었을 때 쿠쟁이 보여준 용감한 태도에 대해서는 칭찬했다[10].
4. 영향
쿠쟁은 데카르트 이래의 프랑스 철학 전통과 독일 관념론, 스코틀랜드 상식학파를 종합하여 19세기 프랑스에서 스피리추얼리즘적 절충주의 학파(Eclecticism)를 확립했다. 그의 철학은 에콜 노르말과 소르본을 중심으로 프랑스 철학계의 주류가 되어, 한 세대에 걸쳐 철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초기 제자이자 동료였던 테오도르 시몽 주프로이와 장 필리베르 다미롱을 비롯하여, 아돌프 가르니에, 쥘 바르텔레미 생틸레르, 펠릭스 라베송 몰리엥, 샤를 드 레뮈자, 쥘 시몽, 폴 자네, 아돌프 프랑크 등이 있다. 특히 에콜 노르말의 학풍은 쥘 라슐리에, 에밀 부트루, 모리스 블롱델, 앙리 베르그송으로 이어졌고, 20세기에는 사르트르와 자크 데리다 같은 후대 철학자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프랑스 외에도 미국의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과 오레스테스 브라운슨,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사회주의 사상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영국의 패트릭 에드워드 도브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그의 사상에 주목했다.
쿠쟁은 프랑스에서 철학사 연구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근세 철학사 강좌 Cours d'histoire de la philosophie morale au XVIIIe sièclefra』(1841년)[3]와 1828년에 행한 역사 철학 강연[4]은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가 번역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1822년부터 출간되어 프랑스어 번역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5], 소설가 플로베르와 작곡가 에릭 사티 등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쿠쟁의 철학은 감각주의 학파와 신학 학파 양쪽 모두와 대립하며 대의 정치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1830년 7월 혁명 이후 새 정부로부터 국가 자유의 친구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쿠쟁의 철학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다. 1857년 이폴리트 테느는 저서 『19세기의 프랑스 철학 Les philosophes français du XIXe sièclefra』에서 쿠쟁의 철학을 강하게 비판했으며[7], 문학 평론가 생트뵈브는 쿠쟁을 "절륜한 광대"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9]. 반면, 작가 스탕달은 쿠쟁의 철학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왕정복고 시기 제수이트와 극우 왕당파에 맞서 공직에서 추방되었을 때 보여준 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10].
참조
[1]
서적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Brahman to Derrida"
Taylor & Francis
1998
[2]
웹사이트
Book of Members, 1780–2010: Chapter C
http://www.amacad.or[...]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2016-09-15
[3]
서적
平凡社大百科事典4
平凡社
1985
[4]
서적
進歩の観念
創元文庫
1953
[5]
서적
ロッシーニ
みすず書房
1992
[6]
서적
프랑스文学史 中巻
岩波文庫
1960
[7]
서적
프랑스文学史 上巻
岩波文庫
1960
[8]
서적
프랑스文学史 中巻
岩波文庫
1960
[9]
서적
我が毒
創元文庫
1952
[10]
서적
ローマ散歩I
新評論
1996
[11]
서적
소크라테스에서 푸코까지De Socrate à Foucault (pages célèbres de la philosophie occidentale)
Perrin, Pari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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