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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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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륜은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의의 아들이자 낭야왕이었다. 그는 조카인 진 혜제 사마충이 즉위한 후 권력을 잡고, 300년 가남풍이 사마휼을 살해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섭정이 되었다. 이후 301년 혜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나, 제왕 사마경 등의 반란으로 인해 3개월 만에 체포되어 자결했다. 그의 통치는 서진의 혼란을 가중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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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자 표기first: t
p: Sīmǎ Lún
s: 司马伦
t: 司馬倫
w: Ssu-ma Lun
자이 (子彛)
통치 정보
작위안락정후 (安樂亭侯)
동안자 (東安子)
칭호조왕 (趙王)
재위 기간 (조왕)277년 10월 5일 – 301년 2월 3일
칭호 2낭야군왕 (琅邪郡王)
재위 기간 (낭야군왕)266년 2월 9일 – 277년 10월 5일
왕조
황제 정보
칭호황제
왕조
재위 기간301년 2월 3일 – 301년 5월 31일
연호건시 (建始) (301년 2월 3일 – 301년 5월 31일)
이전 통치자혜제
다음 통치자혜제
가문 정보
아버지사마의
어머니백부인
자녀사마 훌 (司馬荂)
사마 복 (司馬馥)
사마 건 (司馬虔)
사마 휼 (司馬詡)
생몰 정보
출생 추정 시기232년 ~ 250년 사이
사망일301년 6월 5일 (51세 ~ 69세)

2. 생애

사마륜은 사마의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막내 아들로, 어머니 백부인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7] 사마씨가 의 실권을 장악하자 안락정후(安樂亭侯)로 책봉되었다.[8][9]

조카 사마염이 위 원제(元帝) 조환에게서 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265년 12월 진(晉)을 건국하자 낭야(琅邪)왕이 되었다.[11] 277년 8월에는 조왕(趙王)이 되었다.[12] 진 무제 사후, 손자뻘인 진 혜제 사마충이 즉위하자, 무제의 외척 양준과 사마륜의 이복형 여남왕(汝南王) 사마량이 살해되고, 혜제의 외척 가(賈)씨와 곽(郭)씨가 정권을 잡았다. 이때 사마륜은 혜제의 황후 가남풍에게 아부하여 신임을 얻었다.

291년 8월, 정동장군(征東將軍)이 되어 서주예주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그해 9월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이 되어 양주, 옹주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296년 5월, 족과 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륜은 측근 손수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변방 장군 해계(解系)가 불만을 품자 손수는 해계의 직위를 박탈했다. 조정에서 사마륜에게 거기장군, 태자태부(太子太傅), 녹상서사(錄尙書事) 등의 벼슬을 내리려 했지만, 장화와 배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상서령(尙書令) 벼슬 역시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가남풍은 아들을 낳지 못해 299년 태자 사마휼(司馬遹)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사마륜은 분노하여 가남풍을 공격하려 했으나, 손수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300년 3월, 사마휼이 가남풍에게 살해되자,[4] 사마륜은 4월에 측근 손수를 시켜 양왕(梁王) 사마융(司馬肜)을 부추기고,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혜제의 사촌 동생인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함께 가남풍을 체포하고 황후 자리를 빼앗았다.[5] 가밀(賈謐) 등 가씨 일족을 몰살하고,[6] 이전부터 원한을 품고 있던 장화와 배위 등 많은 관리들을 살해하고 일부는 삼족을 멸했다.[9] 허위 조서를 통해 전국의 군사를 장악하고,[12] 가남풍을 독살했다.[11]

그해 5월, 사마륜은 죽은 태자 사마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아들 사마장(司馬臧)을 황손(皇孫)으로 봉하여 혜제를 보좌하게 했다. 그러나 점차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손수의 부추김으로 중앙 권력을 독점하고 혜제의 동생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과 제왕 사마경 등을 중앙에서 몰아내려 했다. 사마윤은 분개하여 거병했으나 사마륜 군대에 토벌되었다. 사마륜은 제왕 사마경에게 허창 군사를 맡기고 지방으로 보내 감시하게 했다.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며 혜제로부터 구석을 받았고, 11월에는 손수의 친척 양헌용(羊獻容)을 아내로 삼았다.

301년 정월, 사마륜은 황제 자리를 빼앗아 즉위했다. 황손 사마장을 복양왕(濮陽王)으로 강등시키고 얼마 후 살해했다. 장자 사마과를 태자로 삼고 연호를 건시로 했다. 신임하는 인물만 벼슬을 주어 친인척, 노비, 시종들까지 고위직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구미속초(狗尾續貂)). 손수는 장림(張林)과 대립하여 그를 살해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관습을 살해한 제왕 사마경이 거병하고, 혜제의 동생 장사왕(長沙王) 사마애, 청두왕(成都王) 사마영 등 많은 황족이 호응했다. 조카 하간왕(河間王) 사마옹의 배반으로 열세에 몰린 사마륜과 가족은 죽임을 당했다. 사마륜 일당 손수, 손회 부자를 비롯하여 사마위, 맹관, 손기 등이 살해되었지만, 사마무, 육기, 고영 등은 살아남았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사마의의 아홉 번째이자 막내 아들로, 어머니 백부인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7] 조위(曹魏) 섭정 기간 동안 여러 작은 직함을 가졌으며, 250년 2월 또는 3월경에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해졌다.[8][9] 264년에 주나라의 오등작을 제정했을 때 동안자(東安子)로 작위가 바뀌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10]

266년 2월 8일에 조카 사마염이 진(晉)나라를 건국한 후, 다음날 낭야왕(琅琊王)에 봉해졌다.[11] 재위 기간 동안 때때로 장군과 지방 장관을 역임했지만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여러 차례 기병사령관 유기를 보내 황실 모피를 강탈하려는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불하게 하는 등 범죄 혐의를 받았지만, 무제는 매번 그를 사면했다. 277년 10월 5일,[12] 봉지가 조(趙)로 옮겨졌다.

혜제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진주(秦州, 현대의 동부 간쑤성)와 옹주(雍州, 현대의 중부 및 북부 산시성)의 군사 지휘를 맡았으나, 통치 부실은 저와 강이 저족 족장 기만년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최고 책사 손수는 체포되어 처형될 뻔했지만, 이복 형제 사마융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사마륜과 손수는 수도 낙양으로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혜제의 황후 가남풍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얻었다. 이후 고위직을 요청했지만, 장화와 배위에게 거절당했다.

2. 2. 섭정과 찬탈

300년, 가남풍이 태자 사마휼을 폐위하고 살해하자, 사마륜은 이를 기회로 쿠데타를 일으켜 가씨 일족을 몰살시키고 섭정이 되었다. 섭정 기간 동안 실권은 측근 손수에게 있었으며, 사마륜은 혜제보다 특별히 더 지능적이지 않다고 묘사되었다.[1] 301년, 손수의 설득으로 혜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며, 혜제는 태상황으로 가택 연금되었다.[2]

가남풍은 사마휼을 미워하여 죄를 씌워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만들었으며, 영강 원년(300년) 1월에는 허창궁에 유폐시켰다.[3] 사마휼이 살해되자, 사마륜은 손수와 함께 가씨 일파 토벌을 결행했다.[4] 4월 3일, 사마륜은 손수 등과 함께 정변을 결행하여,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근위군을 장악하고 궁중에 침입했다.[5] 가밀은 이변을 알아차리고 도망가려 했으나,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6] 가남풍은 체포되어 서민으로 강등되고, 건시전(建始殿)에 유폐되었다.[7]

사마륜은 상서에게 가씨 일파를 모두 체포하도록 명했으나, 상서들은 사마륜이 가진 조서를 의심했고, 상서랑 사경은 혜제의 친필 조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사마륜 등은 본보기로 사경을 죽이고, 군신에게 따르도록 강요했다.[8] 가밀 등 가 일족을 몰살하는 동시에, 손수와 모의하여 조정 내에서 명망이 있는 자나, 이전부터 원한이 있는 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장화, 배위, 해계, 해결 등 많은 정치 중추의 관리들을 체포하여 삼족까지 몰살했다.[9]

4일, 사마륜은 단문(궁궐 정남문)을 제압하고, 상서 화욱에게 명하여 가남풍을 금용성에 감금했다.[10] 9일, 사마륜은 거짓 조서를 발하고, 상서 유홍에게 금설주(금가루가 든 독주)를 금용성에 보내어, 가남풍에게 이 술을 마시게 하여 자결하게 했다.[11]

사마륜은 조서를 칭하며 대사를 내리고, 스스로 부절을 지니고 도독중외제군사·상국·시중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12] 인망을 얻기 위해 전국의 명사들을 등용했다.

5월, 죽은 황태자 사마휼의 명예가 회복되자, 그의 아들인 임해왕 사마장이 황태손으로 세워졌다. 사마륜은 태손태부를 겸임하여 황태손을 보좌했다. 우선은 인심 장악과 혜제 보좌에 힘썼지만, 점차 권력 독점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마륜 자신은 재능이 부족하고 지략이 없었기에, 실제로는 정치를 담당했던 것은 중서령이 된 손수였다.

2. 3. 황제 즉위와 몰락

司馬倫|사마륜중국어은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즉위했지만, 이는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찬탈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사마륜은 많은 사람들에게 훈작을 내렸고, 특히 손수(孫秀)는 자신의 변덕에 따라 조서를 내렸다.

혜제의 사촌이자 혜제의 숙부인 제의 현왕 사마유(司馬攸)의 아들인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혜제의 이복동생인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혜제의 증조부인 사마부(司馬孚) 안평현왕의 손자인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등 세 명의 유력한 황족들은 강력한 독립적인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손수는 신뢰하는 부하들을 그들의 보좌관으로 보냈으나, 사마경은 이를 거절하고 혜제를 복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선포했다. 사마영, 사마애(司馬乂) (상산왕, 혜제의 이복동생), 사마흔(司馬肫) (신야공, 혜제의 백부의 아들)은 모두 사마경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사마옹은 처음에는 장군 장방(張方)을 사마륜을 지원하도록 보냈지만, 사마경과 사마영이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란군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사마륜의 군대는 사마경과 사마영의 군대에 쉽게 패배했고, 황제를 칭한 지 3개월 만에 반란을 선포한 낙양의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혜제에게 왕위를 돌려주는 조서를 발표하도록 강요받았다. 사마륜은 이후 자결을 강요받았고, 손수와 사마륜의 다른 측근들,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도 처형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사마의(司馬懿|사마의중국어)진 고조(高祖) 선제(宣帝).
어머니백부인(柏夫人)柏氏|백씨중국어 부인.
형제자매
사마사(司馬師)진 세종(世宗) 경제(景帝). 장춘화(張春華) 소생.
사마소(司馬昭)진 태조(太祖) 문제(文帝). 장춘화 소생.
사마량(司馬亮)여남 문성왕(汝南文成王). 복귀비(伏貴妃) 소생.
사마주(司馬伷)낭야 무왕(瑯邪武王). 복귀비 소생.
사마경(司馬京)청혜 정후(清恵亭候). 복귀비 소생.
사마준(司馬駿)부풍 무왕(扶風武王). 복귀비 소생.
사마간(司馬幹)평원왕(平原王). 복귀비 소생.
사마융(司馬肜)양 효왕(梁孝王). 백부인 소생.
누이남양공주(南陽公主)장춘화 소생.
누이남육공주(南陸公主)장춘화 소생, 두예(杜預)의 부인.
자녀
장남사마과(司馬荂)태자.[7]
차남사마복(司馬馥)제양왕(濟陽王).[7]
3남사마건(司馬虔)여음왕(汝陰王).[7]
4남사마후(司馬詡)박성후(霸城侯).[7]


4. 평가

사마륜은 학문을 배우지 못했고, 책을 읽을 수 없었다. 황위에 올라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에게 정치를 운영할 능력은 없었고, 실제로는 손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의 통치는 서진의 혼란을 가중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아들들도 모두 흉폭하거나 우둔하여 협력하지 않고 서로 미워했으며, 측근들은 눈앞의 이익만 좇는 자들뿐이었다고 한다.

5. 기타

사마륜의 정권 당시에는 그 정권의 혼란과 단명함을 암시하는 듯한 기묘한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1] 사마륜은 관작을 남발하여 조정에는 수달과 매미의 관(황제의 측근들이 쓰는 관)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수달이 부족하니, 개의 꼬리가 뒤를 잇는다(개는 쓸모없는 자를 의미)"고 수군거렸다.[1] 사마륜은 눈에 혹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요괴의 상징이라고 소문했다.[1]

5. 1. 일화

사마륜의 정권 당시에는 그 정권의 혼란과 단명함을 암시하는 듯한 기묘한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1]

  • 사마경 등이 거병했을 때, 사마륜은 스스로 태묘를 받들어 필승을 기원했지만, 그 돌아가는 길에 큰 바람이 불어 깃발과 수레 덮개가 부러졌다고 한다.[1]
  • 어느 날, 꿩이 날아들어 태극전 동쪽 계단에서 어전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쫓아냈다. 꿩은 전의 서쪽에 있는 큰 종 아래로 날아가, 잠시 후 날아가 버렸다.[1]
  • 어느 날, 사마륜이 어전에 오르자 한 마리의 기이한 새를 잡았는데, 부하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어떤 새인지 알지 못했다. 며칠이 지난 날 해 질 녘, 흰 옷을 입은 소년이 궁궐 서쪽에 나타나, 이 옷이 새를 죽인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마륜은 이 소년을 붙잡아 감옥 안에 있는 새와 함께 가두었다. 다음 날 아침, 상황을 확인하려 하자 문은 닫힌 채였지만, 새와 아이는 사라져 있었다.[1]


사마륜은 관작을 남발하여, 조정에는 수달과 매미의 관(황제의 측근들이 쓰는 관)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수달이 부족하니, 개의 꼬리가 뒤를 잇는다(개는 쓸모없는 자를 의미)"고 수군거렸다.[1] 사마륜은 눈에 혹이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요괴의 상징이라고 소문했다.[1]

5. 2. 구미속초(狗尾續貂)

사마륜은 자신이 신임하는 인물에게만 벼슬을 내려, 그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연륜이 있는 노비와 시종들까지도 고위직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구미속초(狗尾續貂)'라는 고사성어를 낳았는데, 이는 담비의 꼬리(훌륭한 것) 뒤에 개의 꼬리(보잘것없는 것)가 잇따른다는 뜻으로, 벼슬을 함부로 주어 훌륭한 인재와 그렇지 못한 자가 뒤섞인 상황을 비판하는 말이다.

참조

[1] 서적 Jin Shu, vol.31 & 38
[2] 서적 Zizhi Tongjian, vol. 84 :zh:s:資治通鑑/卷084
[3] 서적 Zizhi Tongjian, vol. 84 301-06-05
[4] 서적 Zizhi Tongjian, vol. 84 301-02-03
[5] 서적 Zizhi Tongjian, vol. 84 301-06-01
[6] 문서 232
[7] 서적 Jin Shu, vol.59
[8] 서적 Jin Shu, vol.59
[9] 서적 Jin Shu, vol. 01 250-02-19
[10] 서적 Jin Shu, vol.59
[11] 서적 Jin Shu, vol. 03 266-02-08
[12] 서적 Jin Shu, vol. 03 277-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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