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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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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준은 사마의의 일곱 번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통하여 조위 시대에 평양정후에 봉해졌고, 조방을 보좌하는 등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서진 건국 후 여음왕에 봉해졌으며, 옹주와 양주를 다스리며 이민족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20만 명의 선비족을 귀순시켜 부풍왕에 봉해졌고, 287년에 사망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칭송받았으며, 그의 자손은 영가의 난 때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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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준
인물 정보
이름사마준
한자 표기司馬駿
자장
한자 자子臧
묘호없음
시호무왕
출생태화 6년 (232년)
사망태강 7년 9월 29일 (286년11월 2일)
출신지사례 하내군 온현 효경리
관직 및 직위
주요 직위부풍무왕
정서대장군
의동삼사
표기장군
섬긴 군주조방
조모
조환
사마염

2. 생애

사마의의 일곱번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통하여 5, 6세에 이미 글을 쓰고 경전을 낭독할 수 있었다.[1][2] 순의와 인효(人孝)를 논하며 명성을 얻었다.[1]

위 경초(景初) 연간(237년~239년)에 평양정후(平陽亭侯)로 봉해졌다.[3] 조예의 명으로 조방(曹芳)이 즉위하자, 8세의 어린 나이에도 산기상시(散騎常侍)로서 황제에게 글을 가르쳤다.[3] 이후 보병교위(步兵校尉), 둔기교위(屯騎校尉)를 역임했지만, 산기상시의 관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3]

평양향후로 진봉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가절, 도독·도독회북제군사, 평남장군이 되었으며, 평수후로 개봉되어 안남장군으로 이동했다. 264년 동모후(東牟侯)로 옮겨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으로 승진하여 허창을 지켰다.

265년 서진 건국 후 여음왕(汝陰王)에 봉해졌으며, 식읍은 1만 호였으며 도독예주제군사가 되었다.[4][5] 268년에는 대사마 석포가 모함을 받을 때, 손삭에게 조언하여 석포가 군사권을 내놓고 사죄하도록 이끌었다. 이후 사지절·도독양주제군사로 옮겨 수춘을 지키다 도독 예주제군사로 돌아와 허창으로 귀환했다.

270년 사지절·진서대장군·도독옹량등주제군사로 승진하여, 독발수기능의 반란 진압에 실패하여 직에서 해임된 형 사마량을 대신하여 관중을 진수했다.[6] 사마준은 민중을 마음으로 복종시키는 데 능숙하여, 위엄과 은혜가 있었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사졸과 고역을 함께 하며, 자신과 동료 및 장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사유지를 10묘로 제한했다.

264년 동모후(東牟侯)로서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이 되어 허창을 지켰다. 작피(芍陂)를 공격한 정봉을 막아냈으며, 이후 합비를 공격한 정봉과 제갈정의 오군을 막아내었다. 정봉이 이간책으로 석포와 조정을 분열시켰을 때 손삭을 보내어 석포가 군사권을 내놓고 사죄하도록 이끌었다.

사마준은 270년 독발수기능이 난을 일으켰을때, 진압에 나선 장수들이 줄줄이 실패하자 사마염에 의해 진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옹주, 양주의 군사를 총괄하여 맞섰다.[6] 그러나 견홍이 패하여 죽고 사마준은 그 책임을 지고 경질된다.[6] 후임 사령관으로 추대된 가충은 정벌에 뜻이 없어 곧 물러나고 일년만에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둔전을 설치하고 병사를 양성하여 274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6]

274년 8월, 량주의 만족이 금성군을 침공했을때, 이를 토벌하여 그 수령의 걸문니 등을 참수했다. 함녕 원년 (275년) 5월, 특발수기능 등이 거병했고, 3천여 개의 수급을 올렸다. 6월, 서역무기교위 마순을 보내, 배반한 선비 호를 토벌하고, 난을 진압하여, 기거수령을 참수했다[7]276년 5월, 북호를 격퇴하고, 그 수령 토돈을 참수했다. 7월, 선비 아라다가 국경을 침범했을때, 서역무기교위 마순과 함께 각지에서 선비들을 격파해나갔다. 4천 명을 죽이고, 9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으며, 아라다의 항복을 받았다[8]

277년 특발수기능은 부하 20부를 보내고, 후탄발은 뒤로 묶여 투항했으며, 두 사람은 자식을 인질로 바쳤다. 안정군·북지군·금성군의 여러 호의 길가라·후금다와 북로의 열경 등은 20만 명의 민중을 이끌고 귀순했다. 그 결과로 선비족 20만명이 사마준에게 투항하였고, 이 공으로 부풍왕에 봉해지고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였다.

282년 사마유순욱과 풍담의 모략으로 산동으로 쫓겨날 때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9] 286년에는 흉노족 10만 명이 사마준에게 귀부하였다.[10] 287년 음력 9월 29일, 사마준은 병으로 사망했다.[11]

사마준 사후, 서방 지역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우는 자가 길에 넘쳤고,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웠다. 장로는 비석을 보면 절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마준은 죽은 후에도 백성들에게 인덕을 남겼다. 사마준은 학문을 좋아하고 봉국에서 선정을 베풀었기에, 사후에 그를 애도하여 각지에 비석이 세워졌다. 그의 자손은 영가의 난 때 살해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학문

사마준은 사마의의 일곱번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통하여 5, 6세에 이미 글을 쓰고 경전을 낭독할 수 있었다.[1][2] 순의와 인효(人孝)를 논하며 명성을 얻었다.[1]

2. 2. 조위(曹魏) 시기 관직 생활

사마준은 하내(河內)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사마의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했으며, 5, 6세에 글을 쓰고 경전을 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1][2] 당대의 명사 순의와 인효를 논하며 명성을 얻었고, 성장해서도 청렴한 뜻으로 도를 지켜 서진 종실 최고의 준걸로 기대를 받았다.

위 경초(景初) 연간(237년~239년)에 평양정후(平陽亭侯)로 봉해졌다.[3] 조예의 명으로 조방(曹芳)이 즉위하자, 8세의 어린 나이에도 산기상시(散騎常侍)로서 황제에게 글을 가르쳤다.[3] 이후 보병교위(步兵校尉), 둔기교위(屯騎校尉)를 역임했지만, 산기상시의 관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3]

평양향후로 진봉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가절, 도독·도독회북제군사, 평남장군이 되었으며, 평수후로 개봉되어 안남장군으로 이동했다. 264년 동모후(東牟侯)로 옮겨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으로 승진하여 허창을 지켰다.

2. 3. 서진(西晉) 건국 이후의 활약

사마준은 하내(河內)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사마의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어났다.[1][2]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했으며, 경서를 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1][2] 조예의 명으로 조방(曹芳)이 황제가 되었을 때 산기상시로서 황제에게 글을 강론했다.[3] 이후 보병교위(步兵校尉), 둔기교위(屯騎校尉)를 거쳐 상시(常侍)를 역임했다. 향후(鄉侯)로서 평남장군(平南將軍), 가절(假節), 도독회북제군사(都督淮北諸軍事)를 역임하였으며, 평수후(平壽侯)로서 안동장군(安東將軍)이 되어 오(吳)나라 전선을 총괄했다. 264년, 동모후(東牟侯)로서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이 되어 허창을 지켰다.[4][5]

265년 서진 건국 후 여음왕(汝陰王)에 봉해졌으며, 식읍은 1만 호였으며 도독예주제군사가 되었다.[4][5] 268년에는 대사마 석포가 모함을 받을 때, 손삭에게 조언하여 석포가 군사권을 내놓고 사죄하도록 이끌었다. 이후 사지절·도독양주제군사로 옮겨 수춘을 지키다 도독 예주제군사로 돌아와 허창으로 귀환했다.

270년 사지절·진서대장군·도독옹량등주제군사로 승진하여, 독발수기능의 반란 진압에 실패하여 직에서 해임된 형 사마량을 대신하여 관중을 진수했다.[6] 사마준은 민중을 마음으로 복종시키는 데 능숙하여, 위엄과 은혜가 있었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사졸과 고역을 함께 하며, 자신과 동료 및 장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사유지를 10묘로 제한했다. 274년 8월, 량주의 만족이 금성군을 침공하자 이를 토벌하고 수령을 참수했다.[7] 275년 5월부터 278년까지 독발수기능과 맞서 수차례 이기고 연맹을 해체시켜 그의 세력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그 결과 선비족 20만 명이 사마준에게 투항하였고, 이 공으로 부풍왕에 봉해지고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였다.

282년 사마유순욱과 풍담의 모략으로 산동으로 쫓겨날 때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이 났다.[9]

286년 흉노족 10만 명이 사마준에게 귀부하였다.[10] 287년 음력 9월 29일 병사하였다.[11] 사마준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복태비가 형 사마량의 부임에 따라갔을 때, 늘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사모했고, 병환 소식을 들으면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2. 4. 오(吳)나라와의 전쟁

264년 동모후(東牟侯)로서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이 되어 허창을 지켰다. 작피(芍陂)를 공격한 정봉을 막아냈으며, 이후 합비를 공격한 정봉과 제갈정의 오군을 막아내었다. 정봉이 이간책으로 석포와 조정을 분열시켰을 때 손삭을 보내어 석포가 군사권을 내놓고 사죄하도록 이끌었다.

2. 5. 서북방 이민족 진압

사마준은 270년 독발수기능이 난을 일으켰을때, 진압에 나선 장수들이 줄줄이 실패하자 사마염에 의해 진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옹주, 양주의 군사를 총괄하여 맞섰다.[6] 그러나 견홍이 패하여 죽고 사마준은 그 책임을 지고 경질된다.[6] 후임 사령관으로 추대된 가충은 정벌에 뜻이 없어 곧 물러나고 일년만에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둔전을 설치하고 병사를 양성하여 274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6]

사마준은 민중을 마음으로 복종시키는 데 능숙하여, 위엄과 은혜가 있었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사졸과 고역을 함께 하며, 자신과 동료 및 장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사유지를 10묘로 제한하고, 상세한 내용을 상소했다. 그리고 조서가 모든 주현에 보내져 각자 농사를 짓게 되었다. 한편, 아직 반란에 동조하지 않은 선비의 수령 약라발능과 화친을 맺어 특발수기능을 견제했다.

274년 8월, 량주의 만족이 금성군을 침공했을때, 이를 토벌하여 그 수령의 걸문니 등을 참수했다. 함녕 원년 (275년) 5월, 특발수기능 등이 거병했고, 3천여 개의 수급을 올렸다. 6월, 서역무기교위 마순을 보내, 배반한 선비 호를 토벌하고, 난을 진압하여, 기거수령을 참수했다[7]276년 5월, 북호를 격퇴하고, 그 수령 토돈을 참수했다. 7월, 선비 아라다가 국경을 침범했을때, 서역무기교위 마순과 함께 각지에서 선비들을 격파해나갔다. 4천 명을 죽이고, 9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으며, 아라다의 항복을 받았다[8]

277년 특발수기능은 부하 20부를 보내고, 후탄발은 뒤로 묶여 투항했으며, 두 사람은 자식을 인질로 바쳤다. 안정군·북지군·금성군의 여러 호의 길가라·후금다와 북로의 열경 등은 20만 명의 민중을 이끌고 귀순했다. 그 결과로 선비족 20만명이 사마준에게 투항하였고, 이 공으로 부풍왕에 봉해지고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였다.

2. 6. 만년

사마준은 282년 사마유순욱과 풍담의 모략으로 산동으로 쫓겨날 때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9] 286년에는 흉노족 10만 명이 사마준에게 귀부하였다.[10] 287년 음력 9월 29일, 사마준은 병으로 사망했다.[11]

사마준 사후, 서방 지역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우는 자가 길에 넘쳤고,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웠다. 장로는 비석을 보면 절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마준은 죽은 후에도 백성들에게 인덕을 남겼다. 사마준은 학문을 좋아하고 봉국에서 선정을 베풀었기에, 사후에 그를 애도하여 각지에 비석이 세워졌다. 그의 자손은 영가의 난 때 살해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3. 평가

사마준은 문장과 교양을 겸비하고 효를 실천하여 종실 내에서 가장 칭찬받는 인물이었다. 관중(關中)을 다스리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았다.[17][18]

사마준은 그의 가문에서도 기이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위 명제(魏明帝) 조예의 주목을 받아 8세에 관직에 진출, 조방(曹芳)의 교육을 담당했다. 조위(曹魏)의 명사 순의(荀顗)와의 토론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는 등,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이후 무관직에 임명되어 군공을 세워 활약했다.

석포(石苞)의 교체로 수춘성(壽春城) 지휘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봉(丁奉)이 작비(芍陂)를 공격했으나, 사마준이 정봉과 제갈정(諸葛靚)을 요격하여 오군(吳軍)을 격파했다. 이 공적으로 서진(西晉)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첩발수기능(禿髮樹機能)의 반란 진압에 투입되는 토대가 되었다.

사마준이 오(吳)의 군대를 격퇴한 지 1년 후, 북지호(北地胡)의 수령 첩발수기능이 반란을 일으켰다. 양주 자사(涼州刺史) 소유(蘇愉)가 전사하고, 강호(羌胡)가 진주(秦州)를 압박하며 연락을 끊으려 했다. 호렬이 토벌에 나섰으나 패사했고, 도독 사마량(司馬亮)은 교체되었다. 석감이 파견되었고, 사마준은 도독 옹량 이주 제군사(雍凉二州諸軍事)에 임명되어 첩발수기능 토벌에 나섰다. 견홍이 양주 자사가 되어 함께 파견되었다.

석감은 두예와 불화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첩발수기능에게 참패 후 허위 보고를 하여 면직되었다. 견홍은 선비족의 침공을 막았으나, 첩발수기능 등의 포위로 패사했다. 사마준은 사령관직에서 교체되었다.

호렬, 견홍 등 숙장(宿將)들이 패배하고, 사마량, 석감 등 반란 진압에 실패하여 교체되는 가운데, 사마준은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도독 후임 가충(賈充)이 사령관직을 회피하자, 다시 사마준에게 기회가 왔다.

사마준은 전선을 고착 상태로 만들고 첩발수기능의 기세를 꺾었다. 이후 '''이민족 20만 명의 귀순'''을 얻는 데 성공했다.

사마준이 중앙으로 입조(入朝)하고 관중에 사령관이 부재한 사이, 양흔이 약라발능(若羅拔能)에게 패배하여 죽는 일도 있었다. 서쪽의 이민족은 보다 더 위협적인 세력이었으며, 첩발수기능은 서진 조정을 당혹시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마준만이 침착하게 대응하여 뛰어난 활약으로 이를 막아냈고, 훗날 마륭이 첩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마준은 문앙(文鴦)을 서진에 투항한 이후 적절한 시기에 과감하게 기용했다. 비천한 출신으로 멸시받던 손삭(孫鑠)을 구출하고, 죄를 범한 유보(劉寶)를 대신 속죄하고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삼았다. 오만한 손초(孫楚)와도 친했다. 사마유(司馬攸)의 좌천을 유일하게 반대했던 종실 인물로, 정치적 판단과 소신을 갖추고 있었다.

사마준은 업적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다. 10년 가까이 관중을 지키며 변방 이민족을 진압하는 것이 주 무대였고, 대오정벌에는 이미 사마준 없이 작전이 구성되었다. 무묘육십사장에는 대오정벌을 주도한 양호(羊祜), 두예, 왕준이 포함된 반면, 사마준은 포함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사마준은 아버지 사마의(司馬懿)보다 뛰어난 인품과 동등한 군사적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일화손삭(孫鑠)은 미천한 혈통으로 명족 출신 동료들에게 무시당했으나, 호분과 유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12] 사마준은 손삭을 알고 있었고, 석포의 모반을 의심한 상황에서 손삭에게 귓속말로 석포 토벌이 목적임을 알렸다. 손삭은 석포에게 저항하지 않고 죄상을 선고받을 것을 진언했고, 석포는 모반 혐의를 풀었다.[12]

유보(劉寶)가 죄를 범하자, 사마준은 그를 500필의 비단으로 대신하게 한 후,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임명했다.[14]

손초는 오만한 성격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사마준에게 초빙되어 참군이 되었다.[15]

석포의 아들 석통이 사마준에게 거역하자, 석숭이 형의 죄를 대신 사죄했다.[16]

3. 1. 일화

손삭(孫鑠)은 젊어서 현의 관리가 되었고, 태수 호분의 주부(회계 담당)가 되었으나, 혈통이 미천하여 명족 출신 동료들에게 무시당했다. 호분은 크게 화를 내며 손삭을 추천하여 사예(司隸) 도관의 종사로 삼았고, 사예교위 유눌은 손삭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12]

당시 호분은 대사마 석포에게도 손삭을 추천했고, 석포는 손삭을 연으로 삼았다. 손삭이 석포에게 가려고 허창에 도착했을 때, 허창에서는 석포의 모반을 의심하여 몰래 경군을 이끌고 석포를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여음왕 사마준이 허창에 출진해 있었는데, 손삭을 알고 있었고, 같은 고향이라는 인연으로 손삭에게 귓속말로 "화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석포의 화에 휘말릴 필요가 없음을 알리고, 석포 토벌이 목적임을 전했다. 그러나 손삭은 곧 허창을 떠나 수춘까지 달려가 석포에게 저항하지 않고 도정(郡役所의 건물)에서 죄상을 선고받을 것을 진언했다. 결과적으로 석포는 면직되어 낙양으로 소환되었지만, 모반의 혐의는 풀렸다.[12]

유보(劉寶)는 일찍이 죄를 범했는데, 사마준은 그를 500필의 비단으로 대신하게 한 후,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임명했는데, 당시 아름다운 일이라고 여겨졌다.[14]

손초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오만한 성격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던 손초는 석포, 곽혁 등을 업신여겨 분쟁을 일으켰고, 사마염(무제)도 그 중재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 후, 정서장군이 되어 있던 옛 지인 부풍왕 사마준에게 초빙되어 그 참군이 되었다.[15]

석포의 아들 석통이 부풍왕 사마준에게 감히 거역하는 일이 발생하자, 석통의 동생 석숭이 형의 죄를 대신 사죄했다.[16]

4.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晋書』
[2] 서적 『太平御覧』
[3] 서적 『太平御覧』
[4] 서적 『晋書』
[5] 서적 『晋書』
[6] 서적 三国志全人名事典 徳間書店 1994-11
[7] 서적 『晋書』
[8] 서적 『晋書』
[9] 서적 『東西晉演義』
[10] 서적 『晋書』
[11] 서적 『晋書』
[12] 서적 『晋書』
[13] 서적 『晋書』
[14] 서적 『世説新語/德行』
[15] 서적 『晋書』
[16] 서적 『晋書』
[17] 서적 『晋書』
[18] 서적 『世説新語/德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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