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순의 (조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순의는 영천 순씨 가문 출신으로, 조조의 참모 순욱의 아들이며, 효성과 박식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조위에서 중랑, 시중 등을 역임하고, 관구검·문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만세정후에 봉해졌다. 사마소 사후, 상서복야를 거쳐 사공에 올랐으며, 서진 건국 후 임회공으로 봉해지고 사도, 태위 등을 역임했다. 그는 예법에 정통했지만, 가충 및 순욱과의 아첨적인 행동으로 비판받았으며, 가남풍을 태자의 배필로 추천하여 비난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진의 태위 - 사마옹
    사마옹은 서진의 황족이자 군벌로,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혼란을 야기했으며, 진서장군으로서 관중 지역을 수비하다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암살당했다.
  • 서진의 태위 - 가충
    가충은 삼국시대 위나라부터 서진 시대까지 사마씨 일가를 섬긴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조모 시해에 가담했으며, 서진 건국 공신으로서 《진율령》 편찬에 기여했지만, 딸 가남풍으로 인해 서진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서진의 사공 - 가충
    가충은 삼국시대 위나라부터 서진 시대까지 사마씨 일가를 섬긴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조모 시해에 가담했으며, 서진 건국 공신으로서 《진율령》 편찬에 기여했지만, 딸 가남풍으로 인해 서진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서진의 사공 - 배수 (서진)
    배수는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관료이자 지리학자로, 사마소의 신임을 얻어 서진 건국에 기여했으며, 지도 제작의 기본 원칙인 제도육체를 정립하고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여 중국 지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 서진의 사도 - 사마망
    사마망은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촉한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서진 건국 후 요직을 역임하며 서진 발전에 기여했고 사후 의양성왕으로 불렸다.
  • 서진의 사도 - 산도 (서진)
    산도는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위나라 말부터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부상서, 태자소부, 사도를 역임했으며 노장사상에 심취했고 사마씨 정권에 협력했다.
순의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순의
본관예주영천군 영음현
경천 (景倩)
시호강공 (康公)
작위임회공 (臨淮公)
사망일274년 6월 19일
아버지순욱
관직 경력 (조위)
관직시중
사공
관직 경력 (서진)
관직태위
행태자태부 (行太子太傅)
사도

2. 가계

순의는 영천군(현재의 쉬창시)의 유력 가문 순씨 가문 출신으로, 조조의 핵심 참모였던 순욱의 여섯째 아들이다.[4] 어렸을 때부터 매형 진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청소년기 이전부터 효성과 박식함, 통찰력으로 명성을 얻었다.[4]

영천 순씨의 가계도


순의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 증손자인 순서가 회남공 작위를 이었다.[14] 순서 사후, 진 효무제는 순서의 아들 순항을 회남공으로 임명했고, 작위는 순항의 아들 순룡부에게 이어졌으나, 유유가 유송을 건국한 420년에 폐지되었다.[14]

3. 생애

유년 시절부터 매형인 진군에게 재능을 인정받았고, 사마의로부터도 "순령군(순욱)의 아들다움이 있다"고 인정받았다. 성격은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박학다식하고 견문이 넓었으며, 사고는 치밀했다. 또한, 사마준과의 토론에서 명성을 얻었다.[15]

관력은 아버지의 훈공으로 임명된 중랑에서 시작되었다. 산기시랑, 시중, 기도위로 역임했고, 소제 조방의 교육 담당관을 맡았다. 가평 6년 (254년) 9월의 조방 폐위 상소에 일원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조방이 폐위되고 새 황제 조모가 즉위하자 사마사에게 지방에 사자를 파견하여 덕을 널리 알리고 동시에 정세를 조사할 것을 진언했다. 이 진언은 정원 2년 (255년) 정월의 관구검·문흠의 난의 발생, 그리고 진압으로 이어졌다. 난의 진압 후 공적으로 만세정후에 봉해졌고, 식읍 400호를 받았다.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뒤를 잇자, 순의는 상서로 옮겨졌다. 감로 2년 (257년) 6월, 사마소가 제갈탄의 반란 진압을 위해 떠나자, 그 유수를 맡았다.

이 무렵, 왕침, 완적과 함께 『위서』를 편찬했지만, 시세에 배려한 내용으로, 후세의 진수의 『삼국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받았다.[16]

감로 5년 (260년) 5월, 조모가 사마소의 습격을 계획했지만, 도리어 가충의 군대에 의해 살해된다(감로의 변). 사마소는 조정 회의를 열었지만, 태상진태 (진군의 아들)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의에게 불러오게 했다. 순의는 진태를 찾아가 사마씨에 협력하는 것에 대해 "세간의 논자는 저와 숙부님(순의)을 비교하지만, 지금 숙부님은 저에게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비난받았다.[17]

얼마 지나지 않아 진태가 죽자 순의가 그 뒤를 이어, 상서복야·령이부상서가 되었다. 정무에 임해서는 청렴하고, 명실상부를 밝히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함희 원년 (264년) 3월, 사공·향후로 승진했다. 같은 해에는 여러 제도가 개혁되어, 순의가 예의를 정하고, 가충이 법률을 바로잡고, 배수가 관제를 개정했다.[18]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한 번 관직을 떠났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로 쇠약해져, 그 효성을 칭찬받았다.

태시 원년 (265년) 12월, 위에서 진(서진)으로의 선양이 이루어지고, 사마염이 황제로 즉위했다.[19] 순의는 임회공으로 진봉되었고, 식읍 1800호를 받았다. 더 나아가 사도를 거쳐 태위로 옮겨, 시중·도독성외아문제군사·행태자태부 등을 겸임했다.

태시 10년 4월 기미 (274년) 6월 19일에 사망했다. '''강공'''으로 시호되었다. 아들이 없어, 종손인 순휘가 뒤를 이었다.

진서』순의전은 그의 인물에 대해, "'삼례'에 밝고 예법에 통달했지만, 근본을 따지는 덕행을 갖추지 못했다. 순욱과 가충의 시대에서 아첨했을 뿐"이라고 혹평했다. 황태자 사마충(후의 혜제)의 비로 가남풍 (가충의 딸)을 "정숙하고 품성이 뛰어난 부인"이라고 추천한 것도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3. 1. 조위에서의 활동

순의는 아버지 순욱의 공적으로 조위에 등용되어 중랑(中郎)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5] 사마의는 순의를 높이 평가하며 "순욱 공의 아들은 요경의 아들 원간과 견줄 만하다."라고 칭찬했다.[5] 순의는 산기시랑(散騎侍郎), 시중(侍中) 등을 역임하며 조방의 스승 역할을 맡기도 했다.[6][7] 또한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고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받았다.[7]

순의는 정역과 함께 주역을 연구하고, 종회와 함께 유교의 덕목인 인과 효에 대해 사마준과 토론을 벌였다.[7] 254년 섭정 사마사가 조방을 폐위하고 조모를 옹립한 후, 순의는 사마사에게 새 황제를 알리고 정세를 살필 것을 제안했다.[8] 같은 해 관구검문흠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만세정후(萬歲亭侯)로 봉해지고 식읍 400호를 받았다.[8]

255년 사마사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사마소가 섭정이 되자[8] 순의는 상서(尚書)로 승진했다. 257년부터 258년 사이, 사마소가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을 때, 순의는 낙양 수비를 맡았다.[9] 260년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된 후, 진태의 뒤를 이어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어 인사 제도를 정비했다.[9]

함희 연간(264~265년)에 사공에 올랐고, 정후(亭侯)에서 현후(縣侯)로 승진했다.[9] 265년 조위의 촉한 정복 후, 5계층 귀족 제도를 복원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0] 순의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사후 3년 상을 치르는 등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10]

3. 2. 서진 건국과 이후 활동

순의는 266년 조위(曹魏)가 멸망하고 서진이 건국된 후에도 계속 관직을 역임했다.[11] 사마염(진 무제) 즉위 후, 현후(縣侯)에서 임회공(臨淮公)으로 작위가 승진되었고 식읍 1,800호를 받았다.[11] 또한, 사도로 임명되었다.[11] 이후 시중(侍中)을 겸임하고, 태위(太尉)로 승진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황제 측근 경호원 100명을 지휘했다.[11]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태부(太子太傅)를 겸임하게 되었다.[11]

274년 사망 당시, 순의는 정덕(正德)과 대예(大豫)라는 두 춤곡 음악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12] 사후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고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으며, 사마충이 조문했다.[12] 순의의 가족에게는 그가 생전에 고정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집을 짓기 위해 2백만 냥의 돈이 주어졌다.[12] 무제의 함녕(咸寧) 연간(275~280) 초기에 황제는 공로가 있는 신하들을 기리는 조칙을 발표했는데, 순의는 그 조칙에 언급된 신하들 중 한 명으로 황실 종묘에 봉안되었다.[12]

순의는 '의례경', '예기', '주례'와 같은 책의 내용을 읽고 암기하여 예법과 예절에 매우 정통했다.[13] 그의 도덕적 인품은 일반적으로 훌륭하다고 여겨졌지만, 가충순욱과의 아첨적인 행동과 관계 때문에 훼손되었다.[13] 사마충 태자가 결혼할 때가 되자, 순의는 가충의 딸인 가남풍을 태자의 배필로 추천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13]

4. 평가

순의는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소가 후계자를 정할 때 장유서열에 따라 사마염을 추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5. 논란

참조

[1] 서적 Book of Jin
[3] 서적 Jin Shu 274-06-19
[4] 서적 Jin Shu
[5] 서적 Jin Yang Qiu
[6] 서적 Jin Shu
[7] 서적 Jin Shu
[8] 서적 Jin Shu
[9] 서적 Jin Shu
[10] 서적 Jin Shu
[11] 서적 Jin Shu
[12] 서적 Jin Shu
[13] 서적 Jin Shu
[14] 서적 Jin Shu
[15] 서적 三国志
[16] 서적 晋書
[17] 서적 三国志
[18] 서적 晋書
[19] 서적 晋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