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부아는 현재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지역의 일부로, 역사적으로 사보이아 가문의 영지였으며, 1860년 프랑스에 합병되기 전까지 사보이아 공국이었다. 사부아는 알프스 산맥에 위치해 있으며, 샹베리가 전통적인 수도이다. 1860년 프랑스 합병 당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투표 조작 혐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후 사부아에서는 지역주의 운동과 분리주의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사부아 - 사보이아 공국
사보이 공국은 사보이 가문이 지배한 이탈리아 북서부의 복합 군주국으로, 1416년 아메데오 8세가 공작 작위를 받으면서 성립되었으며, 여러 영토 확장과 변화를 거쳐 1720년 사르데냐 왕국으로 개편되어 이탈리아 통일의 일부가 되었다. - 사부아 - 사보이아르디
사보이아르디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스펀지 케이크로, 14세기 사보이 백국 궁정에서 유래되어 디저트 재료로 널리 사용된다. - 프랑스의 역사적 지역 - 카마르그
카마르그는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서유럽 최대의 강 삼각주 중 하나로, 다양한 조류의 서식지이며 카마르그 흰말과 카마르그 소의 방목으로 유명하고, 국제적인 조류 지역이자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 프랑스의 역사적 지역 - 북카탈루냐
북카탈루냐는 프랑스 피레네-오리엔탈 데파르트망에 위치하며 역사적으로 카탈루냐 공국의 일부였던 지역으로, 피레네 산맥, 코르비에르 산괴, 지중해로 둘러싸인 삼각형 형태를 이루고 페르피냥을 중심으로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지니며 프랑스 내에서 카탈루냐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 이탈리아의 역사적 지역 - 마그나 그라이키아
마그나 그라이키아는 기원전 8세기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건설한 식민 도시들을 일컫는 명칭으로, 인구 증가, 경제적 필요, 정치적 불안 등의 요인으로 건설되었으며,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으나 로마의 팽창으로 로마 문화와 융합되었고, 현재는 칼라브리아와 풀리아 지역에 그리코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 공동체 형태로 남아있는 역사적 지역이다. - 이탈리아의 역사적 지역 - 로마냐
로마냐는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역사적인 지역으로, "로마인들이 거주하는 땅"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고대에는 다양한 민족이 거주했고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를 거쳐 교황령의 지배를 받다가 이탈리아 통일에 합류했으며, 체세나, 파엔차, 포를리, 이몰라, 라벤나, 리미니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사부아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일반 정보 | |
![]() | |
현지 이름 | |
국가 | 알로브로게스의 노래 |
공용어 | 프랑코-프로방스어 (사부아 방언) 프랑스어 |
별칭 | 사부아인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 사부아지앵 (합병 이전 사용) 사부아인 (역사적, 현재는 사용되지 않음) |
수도 | 샹베리 |
가장 큰 도시 | 안시 |
역사 | |
국가의 시작 | 사부아 백국 설립 (1003년)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에 의해 공국으로 승격 (1416년 2월 19일) 프랑스 제2제국에 합병 (1860년 6월 14일) |
정치 | |
입법부 | 사부아 주권 원로원 (1860년 해산) |
지리 | |
면적 | 10416km2 |
인구 | |
인구 (2020년) | 1,274,956명 |
기타 정보 | |
시간대 | CET |
UTC 오프셋 | +1 |
DST | CEST |
DST UTC 오프셋 | +2 |
차량 통행 방향 | 우측 통행 |
국가 전화 코드 | 33 |
2. 지리
현대 프랑스에서 사부아는 오베르뉴-론-알프 지역의 일부이다. 1860년 프랑스에 병합된 후, 사부아의 영토는 행정적으로 두 개의 분리된 데파르트망인 사부아와 오트사부아로 나뉘었다.
전통적인 수도는 샹베리(이탈리아어: Ciamberì, 라틴어: Camberia)로, 레세 강과 알반 강에 위치하며, 사보이아 가문의 성과 사보이아 상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주는 6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사부아 프로프, 때로는 공작령 사부아로 알려짐 (수도 샹베리)
- 샤블레 (수도 토농레뱅)
- 포시니 (수도 본빌)
- 타랑테즈 (수도 무티에)
- 모리엔 (수도 생장드모리엔)
- 제네부아 (수도 안시)
사부아 백국과 공국은 사부아와 접경한 이탈리아 북서부 지역인 피에몬테의 토리노와 기타 영토를 포함했는데, 이 지역들 또한 사보이아 가문의 소유였다. 공국의 수도는 1563년 토리노로 옮겨질 때까지 전통적인 사보이아 수도인 샹베리에 남아 있었다.
사부아는 북쪽으로 레만 호, 동쪽에서 남쪽으로 알프스산맥, 남동부로 샤르트뢰즈 산지, 동쪽으로 론 강과 기에르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2. 1. 지형
사부아는 북쪽으로 레만 호, 동쪽에서 남쪽으로 알프스산맥, 남동부로 샤르트뢰즈 산지, 동쪽으로 론 강과 기에르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2. 2. 수계
사부아는 북쪽으로 레만 호, 동쪽에서 남쪽으로 알프스산맥, 남동부로 샤르트뢰즈 산지, 동쪽으로 론 강과 기에르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2. 3. 기후
사부아는 북쪽으로 레만 호, 동쪽에서 남쪽으로 알프스산맥, 남동부로 샤르트뢰즈 산지, 동쪽으로 론 강과 기에르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3. 역사
11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콘라트 2세가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 지역은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인 움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사보이아 백국으로 발전하여, 1416년에는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으나, 1563년에 궁정이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겨진다.
1720년에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섬과 왕위를 얻어 사르데냐 왕국이 성립되자, 사부아는 실질적으로 왕가와 관련된 한 지역이 되었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사보이는 프랑스 혁명 군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793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메리벨 전쟁). 1860년에 사르데냐 왕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아래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었지만, 프랑스에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받기 위해, 롱비에르 조약에 따라, 니스 지방(이탈리아어: 니차)과 함께 사보이를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했다. (사보이아 공의 칭호는 이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도 이탈리아 왕의 명목상의 칭호 중 하나로 유지되었다.)
3. 1. 고대
이 지역은 기원전 121년에 로마 공화국에 정복된 알로브로게스족, 갈리아 민족[4]이 점령했다. '사보이'라는 이름은 후기 라틴어 ''사파우디아''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전나무 또는 고지대 숲을 의미한다.[6] 이 단어는 궁극적으로 갈리아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 sapin 자체는 갈리아어 ''sappos'' (전나무)와 라틴어 ''pinus'' (소나무)의 혼합어이다. 이 단어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354)에 처음 기록되었으며, ''세콰니''의 남부를 묘사하고 있다. 452년의 ''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부르군트족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게 패배한 후 443년에 사파우디아 지역에 정착했다.[7]
3. 2. 중세
8세기까지 사보이로 알려지게 될 영토는 프랑크 왕국의 일부였으며, 843년 베르덩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단명한 중 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2년 만인 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중 프랑크 왕국은 알프스 북쪽의 로타링기아,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 그리고 프로방스의 샤를이 상속받은 서알프스의 부르고뉴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이 후자의 영토는 사보이와 프로방스로 알려지게 된다. 잠시 동안 이 지역은 아랍에게 넘어갔다.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결국 사보이가 될 지역의 일부는 부르고뉴-아를 왕국에 속해 있었다. 11세기부터 사보이 가문의 점진적인 권력 상승은 1003년과 1416년 사이에 그들의 사보이 백국 영토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보이 백국은 136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에 의해 아를 왕국으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되었다. 1388년 니스 백국을 획득했으며, 1401년에는 제네바 백국을 추가했다. 제네바 지역은 도시 자체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주교가 통치했으며, 명목상 공작의 지배를 받았다. 제네바 주교는 묵시적인 합의에 따라 1533년까지 사보이 가문 출신이었다.[8]
11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콘라트 2세가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 지역은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인 움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사보이아 백국으로 발전하여, 1416년에는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으나, 1563년에 궁정이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겨진다.
3. 2. 1. 사보이아 백국 (1003년-1416년)
8세기까지 사보이로 알려지게 될 영토는 프랑크 왕국의 일부였으며, 843년 베르덩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단명한 중 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2년 만인 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중 프랑크 왕국은 알프스 북쪽의 로타링기아,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 그리고 프로방스의 샤를이 상속받은 서알프스의 부르고뉴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이 후자의 영토는 사보이와 프로방스로 알려지게 된다. 잠시 동안 이 지역은 아랍에게 넘어갔다.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결국 사보이가 될 지역의 일부는 부르고뉴-아를 왕국에 속해 있었다. 11세기부터 사보이 가문의 점진적인 권력 상승은 1003년과 1416년 사이에 그들의 사보이 백국 영토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보이 백국은 136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에 의해 아를 왕국으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되었다. 1388년 니스 백국을 획득했으며, 1401년에는 제네바 백국을 추가했다. 제네바 지역은 도시 자체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주교가 통치했으며, 명목상 공작의 지배를 받았다. 제네바 주교는 묵시적인 합의에 따라 1533년까지 사보이 가문 출신이었다.[8]
11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콘라트 2세가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 지역은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인 움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사보이아 백국으로 발전하여, 1416년에는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다.
3. 2. 2. 사보이아 공국 (1416년-1714년)

1416년 2월 19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아메데오 8세를 초대 공작으로 하여 사부아 백국을 독립적인 사부아 공국으로 만들었다. 알프스 산맥에 걸쳐 있는 사부아는 프랑스 세력과 북부 이탈리아 세력이라는 두 경쟁 세력권 내에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부아는 미미한 발전을 보였다.[9] 도시도 적고 작았다.[9] 사부아는 농업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했다.[9] 사부아의 지리적 위치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9] 프랑스와 스페인이 북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놓고 벌인 이탈리아 전쟁 동안 사부아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을 제공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중요했다.[9] 사부아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탈리아에서 점령한 영토 사이의 완충 역할을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게 중요했다.[9] 1563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프랑스의 간섭에 덜 취약한 토리노로 수도를 샹베리에서 옮겼다.[10]
보(Vaud)는 1536년 베른에 의해 병합되었고, 사보이는 1564년 10월 30일 로잔 조약에서 보를 공식적으로 베른에 할양했다.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사보이는 기술적으로 시칠리아 왕국에 편입되었고, 그 후 (오스트리아에 사르데냐와 교환된 후) 1720년부터 사르데냐 왕국에 편입되었다. 사보이아 가문의 수장은 사르데냐의 왕으로 알려졌지만, 토리노는 그들의 수도로 남았다.
3. 3. 근세
11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콘라트 2세가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 지역은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인 움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의 영지가 되었다.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사보이아 백국으로 발전하여, 1416년에는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으나, 1563년에 궁정이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겨진다.
1720년에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섬과 왕위를 얻어 사르데냐 왕국이 성립되자, 사부아는 실질적으로 왕가와 관련된 한 지역이 되었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사보이는 프랑스 혁명 군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793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메리벨 전쟁). 1860년에 사르데냐 왕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아래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었지만, 프랑스에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받기 위해, 롱비에르 조약에 따라, 니스 지방(이탈리아어: 니차)과 함께 사보이를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했다. (사보이아 공의 칭호는 이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도 이탈리아 왕의 명목상의 칭호 중 하나로 유지되었다.)
3. 3. 1. 사르데냐 왕국 (1720년-1861년)
11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콘라트 2세가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 지역은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인 움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의 영지가 되었다.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사보이아 백국으로 발전하여, 1416년에는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으나, 1563년에 궁정이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겨진다.
1720년에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섬과 왕위를 얻어 사르데냐 왕국이 성립되자, 사부아는 실질적으로 왕가와 관련된 한 지역이 되었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사보이는 프랑스 혁명 군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793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메리벨 전쟁). 1860년에 사르데냐 왕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아래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었지만, 프랑스에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받기 위해, 롱비에르 조약에 따라, 니스 지방(이탈리아어: 니차)과 함께 사보이를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했다. (사보이아 공의 칭호는 이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도 이탈리아 왕의 명목상의 칭호 중 하나로 유지되었다.)
3. 3. 2.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사보이는 1792년에서 1815년 사이에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지역 전체는 처음에는 몽블랑 데파르트망을 형성했다. 1798년에는 몽블랑과 레만 (제네바 호수의 프랑스어 명칭) 데파르트망으로 나뉘었다.[11] 1801년, 사보이는 공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했다.[12] 1793년 9월 13일, 사보이, 피에몬테, 아오스타 계곡의 연합군은 메리벨 전투 (살랑슈)에서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나폴레옹의 퇴위 이후 1814년의 제1차 복고 시기에 사보이의 2/3가 사르데냐 왕국으로 반환되었고, 샹베리와 안시의 두 주요 도시를 포함한 사보이의 약 1/3은 프랑스에 남았다.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동안의 짧은 권력 복귀와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사보이의 나머지 1/3은 프랑스 남동부 국경에서 완충 국가로서 사르데냐를 강화하기 위해 빈 회의에서 사르데냐 왕국으로 반환되었다.
1793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메리벨 전쟁).
3. 4. 현대
11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 지역은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인 움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사보이아 백국으로 발전하여, 1416년에는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으나, 1563년에 궁정이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겨진다.1720년에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섬과 왕위를 얻어 사르데냐 왕국이 성립되자, 사보이는 실질적으로 왕가와 관련된 한 지역이 되었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사보이는 프랑스 혁명 군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793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메리벨 전쟁). 1860년에 사르데냐 왕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아래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었지만, 프랑스에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받기 위해, 롱비에르 조약에 따라, 니스 지방과 함께 사보이를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했다. (사보이아 공의 칭호는 이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도 이탈리아 왕의 명목상의 칭호 중 하나로 유지되었다.)
=== 프랑스 합병 (1860년) ===
프랑스 제2공화국은 1848년에 사부아를 처음 합병하려 시도했다. 1,500명의 군대가 리옹에서 파견되어 4월 3일 사부아를 침공하여 샹베리(수도)를 점령하고 프랑스에 합병을 선포했다. 침략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샹베리로 달려갔다. 군대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프랑스인 5명이 사망하고 800명이 체포되었다.[13]
1858년 7월 21일 보주주 플롬비에르레뱅에서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카밀로 벤소, 카부르 백작은 이탈리아 통일과 관련된 갈등 중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스 군사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와 은밀히 만났다. 논의 과정에서 카부르는 사르데냐가 니스 군과 사부아 공국을 프랑스 제2제국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비밀 협약이었지만, 빠르게 널리 알려졌다.[14]
니스와 사부아를 프랑스에 합병하는 조약은 1860년 3월 24일 토리노에서 체결되었다(토리노 조약).[15] 샤블레와 포시니의 북부 지방에서는 북부 지방이 오랫동안 경제적 관계를 맺어온 인접한 스위스에 합병하려는 지지가 있었다. 스위스의 매력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북부 사부아 공동체의 제네바에 대한 오랜 관세 면제 관계를 유지하는 자유 무역 지대를 양보했다. 조약이 이미 체결된 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보편적 남성 참정권을 사용하여, 양도된 지방의 유권자들은 조약을 승인하고 프랑스에 합류하기 위해 "예"로 투표하거나, 조약을 거부하기 위해 "아니요"로 투표하는 옵션을 받았다. 유권자들은 스위스에 합류하거나, 이탈리아에 남거나, 독립을 되찾는 옵션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이는 일부 반대의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 합류에 99.8%의 찬성표가 나오면서, 특히 전통적인 프랑스의 적의 대륙 확장을 반대하는 영국 정부에 의해 투표 조작 혐의가 제기되었다. 4월 22일 본빌, 오트사부아에 있던 사부아의 ''더 타임스'' 특파원은 투표를 "국가 역사상 가장 비열하고 부도덕한 코미디"라고 불렀다.[16]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마쳤다.
: 이 여행에서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여행은 사부아의 이 지역에서 투표가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줄 것입니다. 투표는 민중 투표에 대한 가장 쓰라린 아이러니였습니다. 선언을 발표한 바로 그 당국의 손에 들린 투표함, 통제 불가능, 심지어 여행자들마저 의심하고 그들이 이 문제를 엿볼까 봐 따라다녔으며, 모든 반대는 위협으로 진압되었고, 모든 행동의 자유는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반대파가 게임을 포기한 것을 정말 비난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너무 큰 힘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투표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니스와 마찬가지로 훌륭할 것입니다. 유일한 위험은 사부아 당국이 열의에 차서 1852년 투표에서 프랑스인들 중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놀랍게도 명부에 기재된 유권자보다 더 많은 표를 얻는 것입니다.
당시 외무부 장관, 존 러셀 제1대 러셀 백작은 빈 주재 대사 로드 어거스터스 로프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부아와 니스에서의 투표는 웃음거리... 우리는 즐거움도 감화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17]
합병은 1860년 6월 14일에 공포되었다. 1860년 8월 23일과 1861년 3월 7일, 프랑스 제2제국과 사르데냐 왕국은 합병과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협정을 체결했다.[18][19]
이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카밀로 카부르 백작 (당시 사르데냐 총리) 간에 중개된 비밀 협정(플롬비에르 협정)의 일부였으며, 이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의 최종 단계를 허용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왕조인 사보이 가문은 피에몬테와 리구리아의 이탈리아 영토를 유지했으며, 이탈리아의 지배 왕조가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작은 사보이 분리주의 운동으로 인해 1860년 합병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예를 들어, 사부아 연맹(Ligue Savoisienne)은 토리노 조약과 그 이후의 국민 투표를 무효로 간주하며, 국민 투표가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860년 국민 투표에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합병 문서가 국민 투표가 아닌 토리노 조약이었다는 것을 확언하며, 국민 투표의 주요 목적은 조약 서명 후 사부아에서 합병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24] 사부아 대학교(University of Savoy)의 역사학자인 실뱅 밀바흐(Sylvain Milbach)는 르 도피네 리베레(Le Dauphiné Libéré)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투표를 나폴레옹적이라고 평하며, 완전히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가 결과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보이 주민 대다수가 프랑스인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25] 이것은 오늘날 프랑스 데파르트망(Departements of France)의 사부아(Savoie) 일반 의회(General Council)의 공식 입장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
1919년, 프랑스는 빈 회의에서 합의되었던 사부아 지역의 중립 군사 조치를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자유 무역 지대도 폐지했는데, 이는 합병 조약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두 조항은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비공식적으로 파기된 상태였다. 프랑스는 1932년 사부아와 니스 지역과 관련된 토리노 조약의 조치를 준수하지 않아 국제 법정에서 비난을 받았다.[20]
1960년, 프랑스에서 '합병'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면서(특히 독일의 1871년 알자스-로렌 합병 이후), 합병은 "사부아의 프랑스 병합"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프랑스 당국은 합병 1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21] 프랑스 아카데미의 다니엘 로프스는 “사부아는 1960년에 프랑스 병합(rattachement) 1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병합(rattachement)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사부아 사람들은 이 단어에 큰 가치를 두고 있으며, 100주년 공식 용어에서 사용하기로 결심한 유일한 단어입니다. [...] 135,449명 중 130,889명의 유권자가 승인한 결정에 대해 우리가 합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사부아는 [...] 합병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민들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병합되었습니다.”라며 새로운 명칭을 정당화했다.
전 프랑스 하원 의원 P. 타포니에는 “1860년 3월 말, 사부아의 프랑스 약혼식이 튈르리 궁전에서 열렸습니다 [...], 사랑과 충실의 조약이었던 이 행사는 [...] 사부아가 [...] 엄숙한 국민 투표를 통해 자유로운 동의로 프랑스에 헌신했습니다. [...] 사부아 사람들은 이탈리아인이라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1858~1859년 나폴레옹 3세와 카보우르가 사부아의 운명을 결정한 롬비에르 비밀 협정의 소문이 돌 때 사부아 사람들이 스스로 병합(rattachement)을 요구한 이유입니다. [...] 합병이 아닌 병합 [...] 병합은 지리와 역사의 논리적인 순서에서 자유 의지의 행위였습니다.”라고 말했다.
=== 지역주의 운동 ===
20세기 중반 이후, 사부아에서도 프랑스의 다른 역사적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1971년 12월에 설립된 사부아 지역 운동(Mouvement Région Savoie)은 지역 자치를 옹호하는 '운동'(전통적인 정당이 아닌)이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를 포함한 다른 역사적 지방들과 달리, 사부아는 현재 프랑스 내에 자체적인 레지옹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의 일부이다. 1996년 지방 선거에서 사부아 지역 운동은 19,434표를 얻었고, 1998년 레지옹 선거에서는 4,849표를 얻었다. 새로운 비정당 조직인 ''라 레지옹 사부아, 지 크루아 !''(''나는 사부아 레지옹을 믿는다!'')가 1998년에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사부아와 오트사부아 데파르트망을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에서 분리된, 더 많은 권한 위임을 가진 지역 정부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지난 20년 동안 사부아에서는 매우 미미한 분리주의 운동 또한 나타났으며, 1994년에 설립된 사부아 리그(Ligue Savoisienne)가 가장 두드러지게 대표한다. 1998년 3월 레지옹 선거에서 사부아 리그의 지도자인 파트리스 아베유가 1석(총 23석 중)을 차지했으며, 두 데파르트망에서 총 17,865표를 얻었다. 2004년에는 젊은이들에게 평화로운 분리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사부아의 자유를 기다리며''가 설립되었다.
2000년에 실시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41%에서 55%가 별도의 사부아 레지옹 제안에 찬성했다. 2005년 말, 에르베 게이마르는 자신의 제안인 "사부아의 국가 평의회" 하에서 사부아에게 프랑스 레지옹과 유사한 특별 지위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3. 4. 1. 프랑스 합병 (1860년)
프랑스 제2공화국은 1848년에 사부아를 처음 합병하려 시도했다. 1,500명의 군대가 리옹에서 파견되어 4월 3일 사부아를 침공하여 샹베리(수도)를 점령하고 프랑스에 합병을 선포했다. 침략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샹베리로 달려갔다. 군대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프랑스인 5명이 사망하고 800명이 체포되었다.[13]1858년 7월 21일 보주주 플롬비에르레뱅에서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카밀로 벤소, 카부르 백작은 이탈리아 통일과 관련된 갈등 중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스 군사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와 은밀히 만났다. 논의 과정에서 카부르는 사르데냐가 니스 군과 사부아 공국을 프랑스 제2제국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비밀 협약이었지만, 빠르게 널리 알려졌다.[14]
니스와 사부아를 프랑스에 합병하는 조약은 1860년 3월 24일 토리노에서 체결되었다(토리노 조약).[15] 샤블레와 포시니의 북부 지방에서는 북부 지방이 오랫동안 경제적 관계를 맺어온 인접한 스위스에 합병하려는 지지가 있었다. 스위스의 매력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북부 사부아 공동체의 제네바에 대한 오랜 관세 면제 관계를 유지하는 자유 무역 지대를 양보했다. 조약이 이미 체결된 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보편적 남성 참정권을 사용하여, 양도된 지방의 유권자들은 조약을 승인하고 프랑스에 합류하기 위해 "예"로 투표하거나, 조약을 거부하기 위해 "아니요"로 투표하는 옵션을 받았다. 유권자들은 스위스에 합류하거나, 이탈리아에 남거나, 독립을 되찾는 옵션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이는 일부 반대의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 합류에 99.8%의 찬성표가 나오면서, 특히 전통적인 프랑스의 적의 대륙 확장을 반대하는 영국 정부에 의해 투표 조작 혐의가 제기되었다. 4월 22일 본빌, 오트사부아에 있던 사부아의 ''더 타임스'' 특파원은 투표를 "국가 역사상 가장 비열하고 부도덕한 코미디"라고 불렀다.[16]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마쳤다.
: 이 여행에서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여행은 사부아의 이 지역에서 투표가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줄 것입니다. 투표는 민중 투표에 대한 가장 쓰라린 아이러니였습니다. 선언을 발표한 바로 그 당국의 손에 들린 투표함, 통제 불가능, 심지어 여행자들마저 의심하고 그들이 이 문제를 엿볼까 봐 따라다녔으며, 모든 반대는 위협으로 진압되었고, 모든 행동의 자유는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반대파가 게임을 포기한 것을 정말 비난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너무 큰 힘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투표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니스와 마찬가지로 훌륭할 것입니다. 유일한 위험은 사부아 당국이 열의에 차서 1852년 투표에서 프랑스인들 중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놀랍게도 명부에 기재된 유권자보다 더 많은 표를 얻는 것입니다.
당시 외무부 장관, 존 러셀 제1대 러셀 백작은 빈 주재 대사 로드 어거스터스 로프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부아와 니스에서의 투표는 웃음거리... 우리는 즐거움도 감화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17]
합병은 1860년 6월 14일에 공포되었다. 1860년 8월 23일과 1861년 3월 7일, 프랑스 제2제국과 사르데냐 왕국은 합병과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협정을 체결했다.[18][19]
이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카밀로 카부르 백작 (당시 사르데냐 총리) 간에 중개된 비밀 협정(플롬비에르 협정)의 일부였으며, 이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의 최종 단계를 허용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왕조인 사보이 가문은 피에몬테와 리구리아의 이탈리아 영토를 유지했으며, 이탈리아의 지배 왕조가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작은 사보이 분리주의 운동으로 인해 1860년 합병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예를 들어, 사부아 연맹(Ligue Savoisienne)은 토리노 조약과 그 이후의 국민 투표를 무효로 간주하며, 국민 투표가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860년 국민 투표에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합병 문서가 국민 투표가 아닌 토리노 조약이었다는 것을 확언하며, 국민 투표의 주요 목적은 조약 서명 후 사부아에서 합병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24] 사부아 대학교(University of Savoy)의 역사학자인 실뱅 밀바흐(Sylvain Milbach)는 르 도피네 리베레(Le Dauphiné Libéré)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투표를 나폴레옹적이라고 평하며, 완전히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가 결과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보이 주민 대다수가 프랑스인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25] 이것은 오늘날 프랑스 데파르트망(Departements of France)의 사부아(Savoie) 일반 의회(General Council)의 공식 입장이다.
3. 4.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19년, 프랑스는 빈 회의에서 합의되었던 사부아 지역의 중립 군사 조치를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자유 무역 지대도 폐지했는데, 이는 합병 조약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두 조항은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비공식적으로 파기된 상태였다. 프랑스는 1932년 사부아와 니스 지역과 관련된 토리노 조약의 조치를 준수하지 않아 국제 법정에서 비난을 받았다.[20]1960년, 프랑스에서 '합병'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면서(특히 독일의 1871년 알자스-로렌 합병 이후), 합병은 "사부아의 프랑스 병합"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프랑스 당국은 합병 1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21] 프랑스 아카데미의 다니엘 로프스는 “사부아는 1960년에 프랑스 병합(rattachement) 1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병합(rattachement)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사부아 사람들은 이 단어에 큰 가치를 두고 있으며, 100주년 공식 용어에서 사용하기로 결심한 유일한 단어입니다. [...] 135,449명 중 130,889명의 유권자가 승인한 결정에 대해 우리가 합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사부아는 [...] 합병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민들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병합되었습니다.”라며 새로운 명칭을 정당화했다.
전 프랑스 하원 의원 P. 타포니에는 “1860년 3월 말, 사부아의 프랑스 약혼식이 튈르리 궁전에서 열렸습니다 [...], 사랑과 충실의 조약이었던 이 행사는 [...] 사부아가 [...] 엄숙한 국민 투표를 통해 자유로운 동의로 프랑스에 헌신했습니다. [...] 사부아 사람들은 이탈리아인이라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1858~1859년 나폴레옹 3세와 카보우르가 사부아의 운명을 결정한 롬비에르 비밀 협정의 소문이 돌 때 사부아 사람들이 스스로 병합(rattachement)을 요구한 이유입니다. [...] 합병이 아닌 병합 [...] 병합은 지리와 역사의 논리적인 순서에서 자유 의지의 행위였습니다.”라고 말했다.
11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 지역은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인 움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사보이아 백국으로 발전하여, 1416년에는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으나, 1563년에 궁정이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겨진다.
1720년에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섬과 왕위를 얻어 사르데냐 왕국이 성립되자, 사보이는 실질적으로 왕가와 관련된 한 지역이 되었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사보이는 프랑스 혁명 군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793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메리벨 전쟁). 1860년에 사르데냐 왕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아래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었지만, 프랑스에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받기 위해, 롱비에르 조약에 따라, 니스 지방과 함께 사보이를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했다. (사보이아 공의 칭호는 이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도 이탈리아 왕의 명목상의 칭호 중 하나로 유지되었다.)
3. 4. 3. 지역주의 운동
20세기 중반 이후, 사부아에서도 프랑스의 다른 역사적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1971년 12월에 설립된 사부아 지역 운동(Mouvement Région Savoie)은 지역 자치를 옹호하는 '운동'(전통적인 정당이 아닌)이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를 포함한 다른 역사적 지방들과 달리, 사부아는 현재 프랑스 내에 자체적인 레지옹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의 일부이다. 1996년 지방 선거에서 사부아 지역 운동은 19,434표를 얻었고, 1998년 레지옹 선거에서는 4,849표를 얻었다. 새로운 비정당 조직인 ''라 레지옹 사부아, 지 크루아 !''(''나는 사부아 레지옹을 믿는다!'')가 1998년에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사부아와 오트사부아 데파르트망을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에서 분리된, 더 많은 권한 위임을 가진 지역 정부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지난 20년 동안 사부아에서는 매우 미미한 분리주의 운동 또한 나타났으며, 1994년에 설립된 사부아 리그(Ligue Savoisienne)가 가장 두드러지게 대표한다. 1998년 3월 레지옹 선거에서 사부아 리그의 지도자인 파트리스 아베유가 1석(총 23석 중)을 차지했으며, 두 데파르트망에서 총 17,865표를 얻었다. 2004년에는 젊은이들에게 평화로운 분리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사부아의 자유를 기다리며''가 설립되었다.
2000년에 실시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41%에서 55%가 별도의 사부아 레지옹 제안에 찬성했다. 2005년 말, 에르베 게이마르는 자신의 제안인 "사부아의 국가 평의회" 하에서 사부아에게 프랑스 레지옹과 유사한 특별 지위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4. 정치
4. 1. 행정 구역
4. 2. 지역주의 운동
20세기 중반 이후, 사부아에서도 프랑스의 다른 역사적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1971년 12월에 설립된 사부아 지역 운동(Mouvement Région Savoie)은 지역 자치를 옹호하는 '운동'(전통적인 정당이 아닌)이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를 포함한 다른 역사적 지방들과 달리, 사부아는 현재 프랑스 내에 자체적인 레지옹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의 일부이다. 1996년 지방 선거에서 사부아 지역 운동은 19,434표를 얻었고, 1998년 레지옹 선거에서는 4,849표를 얻었다. 1998년에 설립된 ''라 레지옹 사부아, 지 크루아 !''(''나는 사부아 레지옹을 믿는다!'')는 사부아와 오트사부아 데파르트망을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에서 분리된, 더 많은 권한 위임을 가진 지역 정부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지난 20년 동안 사부아에서는 매우 미미한 분리주의 운동 또한 나타났으며, 1994년에 설립된 사부아 리그(Ligue Savoisienne)가 가장 두드러지게 대표한다. 2004년에는 젊은이들에게 평화로운 분리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사부아의 자유를 기다리며''가 설립되었다.
2000년에 실시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41%에서 55%가 별도의 사부아 레지옹 제안에 찬성했다. 2005년 말, 에르베 게이마르는 자신의 제안인 "사부아의 국가 평의회" 하에서 사부아에게 프랑스 레지옹과 유사한 특별 지위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5. 문화
5. 1. 언어
5. 2. 요리
5. 3. 축제
6. 한국과의 관계
6. 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참조
[1]
논문
The Independence of Savoy and the Autonomy of the Valle d'Aosta
The French Review
1998-02
[2]
웹사이트
Savoy on www.oxforddictionaries.com.
https://web.archive.[...]
2014-02-16
[3]
서적
The Romance of the House of Savoy
https://archive.org/[...]
Putnam, New York
1898
[4]
간행물
Savoy
CathEncy
[5]
논문
Recherches sur l'Histoire de Lyon du Ve au IXe Siècle (450–800)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1930-07
[6]
문서
Modern French sapin; sapinière signifies "fir forest".
[7]
문서
Chronica Minora
[8]
문서
See the career of the last prince-bishop Pierre de La Baume.
[9]
서적
The Renaissance and the Reformation
Harper & Bros. Publishers: New York
1960
[10]
서적
The Fall of the House of Savoy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71
[11]
뉴스
Le nom des départements
https://www.lemonde.[...]
1999-12-11
[12]
문서
Heiliges Römisches Reich
[13]
서적
1848: Year of Revolution
Basic Books
2010
[14]
웹사이트
address to the House of Common, July 5, 1861
https://api.parliame[...]
1861-07-05
[15]
웹사이트
Traité de Turin, Signé à Turin le 24 mars 1860 entre la France et la Sardaigne.
http://mjp.univ-perp[...]
mjp.univ-perp.fr
2010-01-01
[16]
웹사이트
The Times
http://archive.times[...]
1860-04-28
[17]
문서
Austria. Vol 1. Legation (from Nov. 1860) embassy in Vienna. Private correspondence (drafts). Lord John (earl from 1861) Russell, foreign secretary to Hon. Julian Fane, legation later embassy secretary; Lord Augustus Loftus, envoy; Lord Bloomfield, ambassador. Document conserved at
http://www.nationala[...]
The National Archives
[18]
서적
Convention entre la France et la Sardaigne destinée à régler diverses questions auxquelles a donné lieu la réunion de la Savoie et de l'arrondissement de Nice à la France; signée a Paris le 23 août 1860. G.Fr.de Martens, Nouveau Recueil Général de Traités et autre actes relatifs aux rapports de droit international, t. XVII, p.460 (pdf)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2010-01-01
[19]
서적
Convention de délimitation entre la France et la Sardaigne, conclue a Turin le 7 mars 1861. G.Fr.de Martens, Nouveau Recueil Général de Traités et autre actes relatifs aux rapports de droit international, t. XVII, p.406 (pdf)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2010-01-01
[20]
서적
La vérité sur la zone franche de la Haute-Savoie, F.Murullaz. Bulletin de l'académie chablaisienne 1915–1916 Séance du 8 Novembre 191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2010-01-01
[21]
웹사이트
La Savoie au miroir du Centenaire de son Rattachement à la France
http://doc-iep.univ-[...]
[22]
웹사이트
Waiting for Freedom in Savoy
http://www.wffis.org[...]
2007-01-04
[23]
웹사이트
Région Savoie
http://www.regionsav[...]
[24]
웹사이트
1860, La Savoie de l'Annexion
http://www.savoie.fr[...]
Archives Départementales de la Savoie
[25]
웹사이트
Savoie Française: Sylvain Milbach: "Le 'oui' était acquis"
http://www.ledauphi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