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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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북 사건은 1980년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 광부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어용 노조에 반발하여 일으킨 시위이다. 당시 광부들은 임금 인상과 어용 노조 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격화되어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후 노사정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계엄사령부의 개입으로 관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했다. 사북 사건은 이후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노력을 통해 관련자들의 무죄가 선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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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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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사건명 | 사북 탄광 노동쟁의 |
별칭 | 사북 사건 |
발생일 | 1980년 4월 21일 ~ 4월 24일 |
발생 위치 |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
원인 | 탄광 회사의 비리 및 부정부패 열악한 노동 환경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 |
주요 참여자 | 탄광 노동자 및 가족 |
주요 결과 | 정부의 개입 및 강경 진압 관련자 구속 및 처벌 노동 운동에 대한 탄압 강화 사회적 파장 및 노동 운동의 기폭제 역할 |
배경 | |
당시 사회 상황 | 1970년대 후반, 경제 성장과 함께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됨 유신 체제 하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노동 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 |
탄광촌의 현실 | 열악한 노동 환경과 낮은 임금 탄광 회사의 부정부패와 비리 만연 어용노조의 존재와 노동자들의 불만 |
전개 과정 | |
발단 | 1980년 4월 21일, 사북 지역 광부들의 임금 인상 요구 시위에서 시작 |
주요 사건 | 4월 21일: 광부들의 시위 및 어용노조 간부 감금 4월 22일: 경찰의 진압 시도 및 시위 확산 4월 23일: 사북읍 전체가 시위대의 통제 하에 놓임 4월 24일: 정부의 계엄군 투입 및 강경 진압 |
시위대의 요구 사항 |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 어용노조 해체 및 민주노조 설립 탄광 회사 비리 척결 |
결과 및 영향 | |
인명 피해 |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다수의 부상자와 연행자가 발생 |
정부의 대응 | 계엄군 투입 및 강경 진압 관련자 구속 및 처벌 노동 운동에 대한 탄압 강화 |
사회적 영향 | 노동 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 증대 이후 노동 운동의 기폭제 역할 정부의 노동 정책에 대한 비판 |
평가 및 의의 | |
역사적 평가 | 한국 노동 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음 |
의의 |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 고취 민주노조 운동의 발판 마련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 |
관련 정보 | |
관련 인물 | 사북 지역 광부들, 어용노조 간부, 당시 정부 관계자 |
관련 단체 | 사북 광업소, 어용노조, 민주노조 추진위원회 |
관련 문서 | 당시 신문 기사, 정부 조사 보고서, 관련 연구 논문 |
2. 배경
1980년 동원탄좌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으로, 전국 채탄량의 9%(하청 탄광 포함 시 11%)를 차지했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더불어, 1970년대 오일쇼크 여파 극복을 위한 정부의 석탄산업 육성정책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쟁의하게 된 발단은 어용노조였다. 당시 동원탄좌의 어용노조는 전과자와 불량배 출신으로 구성되어 사측의 입맛에 맞게 행동했으며, 노조 지부장으로 이재기를 선출했다.[2]
2. 1. 열악한 노동 환경
당시 광부들은 잦은 갱도 매몰사고와 진폐증에 시달렸다. 높은 노동 강도 때문에 도시 노동자에 비해서는 임금을 더 받았으나, 그조차도 당시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월평균 155000KRW이었다.[1]2. 2. 어용노조 문제
1980년 동원탄좌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으로, 전국 채탄량의 9%를 차지했고 하청 탄광까지 포함하면 11%에 달했다. 그러나 당시 탄광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갱도 매몰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진폐증에 시달리는 광부도 많았다. 높은 노동 강도 덕분에 도시 노동자에 비해 임금이 높았지만, 그조차도 당시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월평균 155000KRW이었다.[1]정부는 1970년대 오일쇼크의 여파를 극복하고자 석탄산업 육성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빠른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하다 보니 노동자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쟁의하게 된 발단은 어용노조였다. 당시 동원탄좌의 어용노조는 전과자와 불량배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측의 입맛에 맞게 행동했으며, 노조 지부장으로 이재기를 선출했다.[2]
3. 전개
1980년 4월 16일 노사분규가 발생하여 4월 24일 노·사·정 합의까지,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사측의 비협조와 경찰의 편파적인 대응 속에, 4월 21일 노동자와 가족 6,000여 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서가 점령되고 이재기 지부장의 아내에게 폭력이 행사되기도 했다. 24일 노·사·정 대표가 합의에 도달하고 여야 정치인들이 현장을 방문하면서 사태가 평화적으로 수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자 당시 계엄사령부는 합의를 깨고 사건 관련자와 그들의 가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계엄사령부는 이들에게 모진 고문, 구타, 성고문 등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유산과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얻고 2~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이후 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짜맞추기 수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3]
3. 1. 노사분규 발생
1980년 4월 16일 노사분규가 일어났고, 4월 18일부터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어용 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이들의 요구를 듣지 않고 경찰을 개입시켰다. 경찰은 어용 노조와 회사 측을 두둔하며 편파적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용 노조 지부장 이재기가 도망치자 사태는 급물살을 탔다.[3]3. 2. 시위 확산
1980년 4월 21일, 노동자들과 그 가족 6,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가 경찰차에 치이는 등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탄광 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 동안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공권력이 무력화되고 경찰과의 유혈 사태가 일어났으며, 경찰서가 점령되기도 했다. 도망친 이재기 지부장을 추적하려 그의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도 어느 정도 수반되었다.[3]3. 3. 유혈 충돌과 시가 점거
1980년 4월 21일, 노동자들과 그 가족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차에 노동자가 치이는 등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3] 이에 분노한 탄광 노동자들은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간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공권력이 무력화되었고, 경찰서가 점령되기도 했다. 도망친 어용노조 지부장 이재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질서 유지를 위한 노력도 어느 정도 수반되었다.[3]3. 4. 노·사·정 합의
1980년 4월 24일, 노·사·정 대표가 합의에 도달했다. 여야 정치인들이 현장을 방문하여 사태가 평화적으로 수습되는 듯 보였다.[3]4. 계엄군의 개입과 탄압
1980년 4월 24일 노·사·정 대표가 합의하고 여야 정치인들이 현장을 방문하면서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자 당시 계엄사령부는 합의를 파기하고 사건 관련자와 그 가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여 모진 고문, 구타, 성고문 등 가혹행위를 하며 자백을 강요했다.[3]
4. 1. 계엄사령부의 합의 파기
사태가 진정되자 당시 계엄사령부는 합의를 깨고 사건 관련자와 그들의 가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3] 계엄사령부는 이들에게 모진 고문과 구타, 성고문 등을 가하며 자백을 요구했다.[3]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유산과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얻고 2~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3] 이후 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짜맞추기 수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3]4. 2. 가혹행위와 인권 유린
사태가 진정되자 당시 계엄사령부는 합의를 깨고 사건 관련자와 그들의 가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3] 계엄사령부는 이들에게 모진 고문과 구타, 성고문 등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3]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유산과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얻고 2~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3] 이후 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짜맞추기 수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3]4. 3. 짜맞추기 수사
사태가 진정되자 당시 계엄사령부는 합의를 깨고 사건 관련자와 그들의 가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계엄사령부는 이들에게 모진 고문과 구타, 성고문 등을 가하며 자백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유산과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얻고 2~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3] 이후 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짜맞추기 수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3]5. 사건 이후
1980년대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항쟁은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월 노동자 대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김영삼 정부에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북 사태 진상규명 요구가 본격화되었다.[6]
5. 1. 전두환의 사북광업소 방문
1980년 10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북광업소에 방문해서 열악한 광부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4]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다.5. 2.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와 사북광업소 폐광
1980년대 석유 공급 과잉 여파로 국제 유가가 폭락하고 국민 소득이 향상되면서 연탄 소비량이 감소하였다. 이에 1987년 10월 13일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 대책을 발표했다.[5] 그 결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영세 탄광들이 폐광되었고 사북광업소는 2004년 10월 23일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5]5. 3. 진상규명 노력과 명예회복
1980년대 석유 공급과잉 여파로 국제 유가가 폭락하고 국민 소득이 향상되면서 연탄 소비량이 감소했다. 이에 1987년 10월 13일 정부는 석탄산업합리화 대책을 발표했고,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영세 탄광들이 폐광되었다. 사북광업소는 2004년 10월 23일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5]1993년 2월 김영삼 정부에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북 사태 진상규명 요구가 본격화되었다.[6] 2005년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사북사건 당시 항쟁 지도부였던 이원갑 씨와 신경 씨 등 2명의 명예회복 신청을 받아들여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7] 2008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당시 연행·구금된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행해진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해 국가의 사과를 권고하였다.
2015년 2월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상환)는 사북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던 이원갑 씨와 신경 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6. 사회적 영향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10월 사북광업소를 방문하여 열악한 광부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4] 그러나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항쟁은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월 노동자 대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석유 공급과잉 여파로 국제 유가가 폭락하고 국민 소득이 향상되면서 연탄 소비량이 감소하자, 1987년 10월 13일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 대책을 발표했다. 그 결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영세 탄광들이 폐광되었고 사북광업소는 2004년 10월 23일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5]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에 이어 김대중 정부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사북 사태의 진상 규명 요구가 나왔다.[6] 2005년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사북사건 당시 항쟁 지도부였던 이원갑 씨와 신경 씨 등 2명의 명예 회복 신청을 받아들여 민주화 운동 관련 인정자로 확정ㆍ발표하였다.[7] 2008년 4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당시 연행ㆍ구금된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행해진 인권 침해와 가혹 행위에 대해 국가의 사과를 권고하였다.
2015년 2월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상환)는 사북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던 이원갑 씨와 신경 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참조
[1]
뉴스
'사북항쟁' 역사적 재평가 서둘러야
https://n.news.naver[...]
2002-06-05
[2]
웹인용
민주화운동 오픈 아카이브
https://archives.kde[...]
2021-04-22
[3]
뉴스
[그때 오늘] 사북 탄광 노사분규 유혈사태로 번지다
https://www.joongang[...]
2010-04-23
[4]
뉴스
대통령 강원도 시찰
https://www.ehistory[...]
1980-10-08
[5]
뉴스
<80년 사북사태 현장 사북광업소 역사속으로>
https://n.news.naver[...]
2004-10-22
[6]
뉴스
사북사태 피해자 "명예회복하겠다"
https://n.news.naver[...]
2001-09-11
[7]
뉴스
“폭도의 오명 벗어 마음 후련”… 사북노동항쟁 주역 이원갑씨
https://n.news.naver[...]
200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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