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충서원 및 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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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충서원 및 묘정비는 조선 영조 1년(1725)에 건립된 사액서원으로, 신임사화로 희생된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의 신위를 모셨다. 경종 사후 영조가 즉위하며 이들의 복권과 함께 과천에 서원이 세워졌으나, 정미환국으로 철폐되었다가 영조 32년(1756)에 복설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존속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이전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묘정비는 1786년에 건립되었으며, 서원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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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 훈장은 1399년 기원을 둔 영국의 기사 작위 훈장으로, '입욕 기사'에서 유래, 1725년 재창설 후 3등급 체계로 개편되어 군인과 문민, 여성에게 수여되며 고위 공무원 및 장교, 외국 원수에게 수여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문장이 전시된다.
사충서원 및 묘정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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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충서원 정보 | |
이름 | 사충서원 및 묘정비 |
유형 | 향토유적 |
지정 번호 | 3 |
지정일 | 2001년 4월 9일 |
시대 | 조선시대 |
주소 |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100-2 |
웹사이트 | 하남 사충서원 |
2. 역사
사충서원은 경종 대 신임사화(1721년~1722년) 때 희생된 노론의 네 신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1] 영조가 즉위한 후 1725년(영조 1년),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과천 노량진동의 사육신묘 인근에 서원 건립을 명하였다.[1] 이듬해인 1726년 영조는 '사충(四忠)'이라는 현판을 내리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 사액서원이 되었다.[1]
그러나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4대신은 다시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사충서원도 철폐되었다.[1] 이후 1740년(영조 16년) 경신처분으로 이들은 다시 충신으로 인정받았고, 1756년(영조 32년)에 이르러 서원이 복설되어 사충서원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1]
사충서원은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1] 하지만 1927년 서원 자리가 철도 용지로 편입되면서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하였고,[1] 한국 전쟁 중 건물이 파괴되었다.[1] 전쟁 후 피난민 가옥이 들어서 원 자리 복원이 어려워지자, 1968년 사림(士林)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위치에 이전하여 중건되었다.[1]
2. 1. 건립 배경
사충서원은 1721년부터 1722년까지 이어진 신임사화 때 희생된 노론의 네 신하, 즉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1]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후사가 없자, 그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 세력은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추대하려던 노론의 핵심 인물인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을 역모 혐의로 몰아 사사하였다.[1]
그러나 경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영조는 즉위 이듬해인 1725년(영조 1년), 신임사화로 억울하게 희생된 네 명의 대신을 포함하여 관련자들의 관직과 명예를 모두 회복시켜 주었다.[1]
영조는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명했다. 서원의 위치는 처음 경기도 과천(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으로 정해졌는데, 이는 네 신하가 생전에 과천 지역을 자주 오갔다는 점과 지역 유생들이 이곳에 사당 건립을 청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조는 이곳이 사육신묘와 가깝다는 점도 고려하여 건립을 허가하였다.[1] 이에 1725년 과천 노량진의 사육신묘 입구 동쪽 동산(옛 노량진동사무소 자리)에 사충서원이 처음 세워졌다.
이듬해인 1726년(영조 2년), 영조는 '사충(四忠)'이라는 현판을 직접 내려주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면서 사충서원은 사액서원이 되었다.[1]
2. 2. 영조 대의 복권과 사액
경종 재위 시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신임사화(1721년~1722년)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영조(당시 연잉군) 추대를 지지했던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가 소론의 공격을 받아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었다.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1724년)하자, 신임사화로 희생된 이들 4대신을 포함한 관련자들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복권 조치가 이루어졌다. 1725년(영조 1년), 영조는 이들 4대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명했다. 서원은 4대신이 생전에 자주 왕래했던 과천 노량진(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의 사육신묘 입구 동쪽 동산에 세워졌는데, 이는 선비들의 건의와 함께 영조가 사육신묘와의 근접성을 고려하여 허가한 것이었다.[1]
1726년(영조 2년), 영조는 '사충(四忠)'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사액서원으로 지정하며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1] 그러나 이듬해인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4대신은 다시 죄인의 신분으로 격하되었고 사충서원 역시 철폐되는 시련을 겪었다.[1]
이후 1740년(영조 16년) 경신처분을 통해 4대신은 다시 충신으로 인정받았으나, 서원이 바로 복구되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756년(영조 32년)에 이르러서야 서원이 다시 세워져 사충서원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1]
2. 3. 정미환국과 서원 철폐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는 다시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이들을 기리던 사충서원 역시 철폐되었다.[1] 그 후 1740년(영조 16년) 경신처분으로 이들은 다시 충신으로 인정받았으나, 서원이 곧바로 복구되지는 못했다. 1756년(영조 32년)에 이르러서야 서원이 다시 세워지면서 사충서원이라 불리게 되었다.[1]2. 4. 복설과 이후 역사
1726년(영조 2년) 사액을 받았으나, 이듬해인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정권이 들어서자 김창집 등 제향 인물들은 다시 죄인이 되었고 서원도 철폐되었다.[1] 이후 1740년(영조 16년) 경신처분으로 이들은 다시 충신으로 판정되었으나, 서원은 곧바로 복설되지 못했다.[1] 시간이 흘러 1756년(영조 32년)에 이르러서야 서원이 복설되면서 다시 사충서원이라 불리게 되었다.[1]사충서원은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철폐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1] 그러나 1927년 봄, 서원이 있던 자리가 철도 용지로 편입되면서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재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하였다.[1] 한국 전쟁 중에는 서원 건물이 파괴되었고, 전쟁 이후 피난민들의 가옥이 들어서면서 원래 자리에 다시 세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1] 이에 따라 1968년 사림(士林)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위치(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이전하여 중건되었다.[1]
3. 사충서원묘정비
옛 서원 터에서 함께 옮겨왔다. 비문은 오재순이 짓고 홍낙성이 썼으며, 김욱이 전액(篆額, 비석 머리글씨)을 썼다. 묘정비는 1786년(정조 10년)에 건립된 것으로, 사충(四忠)이라 불리는 네 신하의 행적과 임금(정조)이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한 일, 그리고 사충서원의 철폐·복설(다시 세움)·이건(옮겨 지음)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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