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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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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창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김상헌의 증손이자 김수항의 아들이다. 숙종 때 관직에 나아가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갑술환국 이후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경종 때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소론의 공격을 받아 신임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국조자경편》, 《몽와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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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
기본 정보
김창집 초상
김창집 초상
긍지(兢止)
몽암(夢庵)
본관안동 김씨
생애
출생1648년 9월 11일 (음력 8월 5일)
사망1722년 5월 2일 (음력 3월 28일)
묘소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14-3
가족 관계
아버지김수흥(金壽興)
어머니정경부인 문화 유씨
배우자정경부인 파평 윤씨
자녀4남 2녀
형제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관력
주요 관직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대제학
사후
시호문충(文忠)
기타
관련 인물경종, 숙종, 영조, 최석정, 이이명, 조태억, 유봉휘, 김수항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가계

김상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광찬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이며, 어머니는 현감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김창협, 김창흡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리며,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의 맏형으로 명문대가(名文大家)의 장자(長子)로 1648년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2. 2. 초기 활동

현종 14년(1673년) 계축 26살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숙종 1년(1675년) 을묘 7월 17일 아버지 김수항이 예송 논쟁으로 화를 입어 영암에 유배되었으므로 과거(科擧)를 미루고 있었다. 숙종 6년(1680년) 경신 4월 3일 김수항이 유배(流配)에서 풀려나자 숙종 7년(1681년) 신유 내시교관(內侍敎官)을 특별히 제수 받아 관직에 나갔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숙종 10년(1684년) 갑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재직 중 37살 늦은 나이에 정시문과(廷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숙종 11년(1685년) 을축 5월 25일 정언(正言), 같은 해 8월 25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같은 해 8월 22일 홍문록(弘文錄) 16명에 뽑히고, 같은 해 11월 16일 도당(都堂)에서 뽑은 홍문록(弘文錄) 15인에 뽑혔다.

숙종 12년(1686년) 병인 3월 13일 부수찬(副修撰), 같은 해 7월 9일 수찬(修撰), 7월 25일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다음날 교리(校理)로 바뀌었다. 그 뒤 11월 24일 헌납(獻納), 12월 10일 이조좌랑(吏曹佐郞), 숙종 13년(1687년) 정묘 12월 26일 수찬(修撰), 숙종 14년(1688년) 무진 2월 6일 검상 (檢詳), 3월 18일 수찬(修撰)이 되었다.

5월 15일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8월 2일 응교(應敎)가 되었으나 숙종 15년(1689년) 기사 윤 3월 21일 기사환국(己巳煥局)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아버지 김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고 4월 9일 남인의 집중 공세로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과 함께 포천 영평(永平 = 경기도 포천시) 백운산(白雲山)으로 들어가 산중에 숨어 지냈다.

아버지 김수항

2. 3. 정치 활동

2. 3. 1. 갑술환국과 복귀

숙종 20년(1694년) 4월 2일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아버지 김수항이 사면복관(赦免復官)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5월 5일 김창집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사례한 후 사직하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陽州)로 돌아갔다. 같은 해 윤 5월 15일 승지(承旨), 8월 19일 대사간(大司諫), 숙종 23년(1697년) 6월 9일 승지(承旨) 등 여러 관직(官職)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제수되었을 때는 사직할 명분을 찾지 못해 취임하였다. 당시 도적들이 출몰하고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관군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폭도를 제압하였다.

숙종 24년 (1698년) 11월 4일 강화유수(江華留守), 숙종 26년(1700년) 4월 11일 대사헌(大司憲), 숙종 27년(1701년) 3월 20일 개성유수(開城留守), 9월 10일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선친(先親)의 유계(遺戒)를 이유로 여러 번 사직상소(辭職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던 중, 숙종 29년 (1703년) 6월 22일 모친 안정 나씨(安定羅氏)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사퇴하고 3년상을 치렀다.

2. 3. 2. 주요 관직 역임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아버지 김수항이 사면복관되자, 5월 5일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사례한 후 사직하고 아버지 묘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로 되돌아갔다. 같은 해 윤 5월 15일 승지, 8월 19일 대사간, 1697년 6월 9일 승지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에 제수되었을 때는 사직할 명분을 찾지 못해 마지못해 취임하였으나, 그때 도적들이 출몰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관군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폭도를 제압하였다.

1698년 11월 4일 강화유수, 1700년 4월 11일 대사헌, 1701년 3월 20일 개성유수, 9월 10일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을 때 선친의 유계를 들어 수없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관철되지 않아 고심하였다. 1703년 6월 22일 어머니 안정 나씨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사퇴하고 3년상을 마쳤다.

2. 3. 3. 우의정, 좌의정 재직

숙종 31년(1705년) 을유 9월 14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복귀하였다. 숙종 32년(1706년) 병술 1월 8일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2일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으나, 십수 차(十數次) 사직 상소(辭職上疏)를 올리고 등청(登廳)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이 여러 차례 사관과 승지를 보내어 독려하고 특별히 유시(諭示)를 내려 판부사(判府事)로 임명하였다.

숙종 33년(1707년) 1월 12일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5월 23일 사직(辭職) 상소를 올려 체직(遞職)을 허락받아 판부사(判府事)가 되었다. 숙종 36년(1710년) 3월 26일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같은 해 1월 8일 사직서(辭職書)를 내고 경기도 양주(楊州)로 돌아갔다.

같은 해 성문(城門) 밖에서 사직 의사를 44번에 이르도록 전달했는데, 그때마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설득하여 마지못해 등청(登廳)하기로 하였다. 숙종 37년(1711년) 4월 19일 좌의정(左議政)이 되었으나 사직상소(辭職上疏)를 18번 올렸고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계속 내렸다.

숙종 38년(1712년) 1월 15일 19번째 사직 의사를 전달하여, 임금이 잠시 사직(辭職)을 허락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 상직(相職)을 사임하여 체직되었으므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겸 사은사(兼謝恩使)로 선발되어 부사(副使) 윤지인(尹趾仁) 등과 함께 심양으로 출발하여 숙종 39년(1713년) 3월 30일 심양에서 돌아왔다.

숙종 39년(1713년) 8월 29일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었고, 숙종 40년(1714년) 10월 18일 첫 번째 사직상소(辭職上疏)를 올린 후 열 번이 넘게 사직을 원했으나 상이 사관(史官)과 승지(承旨)를 보내 위로하였다.

숙종 42년(1716년) 7월 6일 행 판중추부사(行 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9월 11일 면직을 청하였다.

2. 3. 4.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시도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를 두고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김창집은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서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 이후 소론과 남인으로부터 계속 공세와 비판을 받았다.

경종 1년(1721년) 8월 20일,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上疏)하여 처음에는 경종이 대소 정사(政事)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같은 해 10월 11일, 김창집영의정을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17일과 12월 9일에 조태구의 간언(諫言)에 따라 세제 대리청정(世弟 代理聽政)의 명(命)을 거두었고, 소론의 격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2. 4. 신임사화와 죽음

1721년(경종 1년) 스승격인 권상하가 죽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10일 지평 윤성시가 김창집, 조성복 등의 죄를 논하고 이들을 벌할 것을 청하였고, 12월 25일 양사(兩司)에서 김창집 등을 안율해 처단할 것과 조성복(趙聖復)을 배소로 돌려보내라는 명(命)을 거둘 것을 청하였고,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주장하여 12월에 신임환국(辛壬換局)이 발생했다.

이때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 때 그는 그의 손자 김성행이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면서 그는 경상남도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이듬해 1월에 경상북도 성주(星州)로 이배(移配)되었다.

경종 2년(1722년) 임인 4월 18일 영의정 조태구(趙泰耈),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원로 대신이므로 정형(正刑)에 처하지 말고 국문(鞠問)을 하자고 청하였으나 경종은 이를 허락 하지 않았고, 같은 해 4월 29일 성주(星州) 요도(蓼島)에서 도사(都事) 정암(靜菴) 조광조의 후손 조문보(趙文普)에 의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었다.

사사되기 전 후손들에게 남기는 편지를 작성하고 사약에 임한다.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 조문보는 그에게 사약을 어서 마시라고 독촉이 심했다. 김창집은 그를 보며, "어찌 네 선조를 생각지 않느냐!"며 호통을 친뒤, 시 한수를 읊고 도성을 향해 배를 올린뒤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75세였다.

2. 4. 1. 유배와 최후

1721년(경종 1년) 스승격인 권상하가 죽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10일 지평 윤성시가 김창집, 조성복 등의 죄를 논하고 이들을 벌할 것을 청하였고, 12월 25일 양사(兩司)에서 김창집 등을 안율해 처단할 것과 조성복(趙聖復)을 배소로 돌려보내라는 명(命)을 거둘 것을 청하였고,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주장하여 12월에 신임환국(辛壬換局)이 발생했다.

이때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 때 그는 그의 손자 김성행이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면서 그는 경상남도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이듬해 1월에 경상북도 성주(星州)로 이배(移配)되었다.

경종 2년(1722년) 임인 4월 18일 영의정 조태구(趙泰耈),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원로 대신이므로 정형(正刑)에 처하지 말고 국문(鞠問)을 하자고 청하였으나 경종은 이를 허락 하지 않았고, 같은 해 4월 29일 성주(星州) 요도(蓼島)에서 도사(都事)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후손 조문보(趙文普)에 의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었다.

사사되기 전 후손들에게 남기는 편지를 작성하고 사약에 임한다.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 조문보는 그에게 사약을 어서 마시라고 독촉이 심했다. 김창집은 그를 보며, "어찌 네 선조를 생각지 않느냐!"며 호통을 친뒤, 시 한수를 읊고 도성을 향해 배를 올린뒤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75세였다.

아비를 사랑하듯 임금 사랑했으니 / 愛君如愛父

하늘 해가 내 붉은 맘 비춰주리라. / 天日照丹衷

선현께서 남기신 이 두 구절이 / 先賢此句語

슬프기가 고금에 한가지로다. / 悲絶古今同

3. 사후

조선 말의 학자 김원행은 그의 손자였고,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연 김조순은 그의 4대손이다.

영조 즉위(1725년) 후 즉시 관작이 복구되었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725년 (영조 1년) 을사 8월 16일 과천에 사충서원을 세워 사액하고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헌이다. 저서로는 ≪국조자경편≫, ≪몽와집≫ 등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초현2리에 있다.

4. 저서


  • 국조자경편
  • 몽와집
  • 연행훈지록

5. 사상과 신념

5. 1. 소현세자빈 복위 주장

서인 출신 학자 학주 김홍욱소현세자민회빈 강씨와 강씨의 친정 일족의 복권을 주청했다가 장살당한 뒤, 민회빈과 강씨의 억울함을 쉽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는 민회빈 강씨의 일족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고하고 이들의 사면, 복권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5. 2. 후손들에게 남긴 유지

김창집은 사사되기 전, 아들 김제겸과 외손자 민백순, 그리고 여러 손자들에게 유지를 남겼다.[2]

아들 김제겸에게 보낸 유지에서는 천리 밖에 끌려와 온갖 욕을 당했지만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니 웃으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전했다.[2] 다만, 김제겸과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며, 김제겸이 잘 심문에 대답하여 살아남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2]

외손자 민백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민백순이 시대를 상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자신이 죽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고 어머니를 잘 보호하여 보전케 하면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당부했다.[2] 또한, 민백순이 학문을 즐기는 것을 알고 격려하며, 그의 자(字)를 순지(順之)로 정해주는 내용도 담겨 있다.[2]

여러 손자들에게 보낸 유서에서는 자신의 죽음이 불가피함을 언급하며, 아들과 형들의 생사를 걱정했다.[2] 그러면서도 손자들이 화변(禍變)에 자포자기하지 않고 더욱 학업에 정진하여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당부를 남겼다.[2]

6. 평가

6. 1. 긍정적 평가

6. 2. 부정적 평가

7. 가족 관계


  •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증 의정부영의정 김광찬(金光燦)이다.
  • 아버지는 의정부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이다.
  • 어머니는 안정 나씨로,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 외조부는 나성두(羅星斗)이다.
  • 형제로는 동생들인 성균관대사성 예조판서 농암 김창협(金昌協), 사헌부집의 증이조판서 삼연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즙(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이 있다.
  • 부인은 박씨이다.
  • 장인은 박세남(朴世楠)이다.
  • 장남은 승정원우부승지 증 의정부좌찬성 김제겸(金濟謙)이며, 슬하에 증영의정 김성행(金省行), 증 좌찬성 김달행(金達行), 공조참의 김원행(金元行)(동생 김창협에게 입적), 남원부사 김탄행(金坦行)을 두었다.
  • 장녀는 안동김씨이며, 사위는 민진원의 아들 민창수(閔昌洙)이다.

8. 기타

순조비 순원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조순은 김창집의 4대손이었다. 김조순 등은 노론 중에서도 시파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정조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를 세자빈으로 간택한다.

소론조문명, 조현명 일가와는 개인적으로 친분관계였다. 조문명은 그의 동생 김창업의 사위로 그의 조카사위였고, 그의 다른 동생인 김창협의 문하생이었다. 또한 효장세자빈 현빈 조씨의 외종조부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이 20세에 김창집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9. 관련 작품


  • 이성용이 2002년 KBS2 드라마 《장희빈》에서 김창집 역을 연기하였다.
  • 이재용은 2016년 SBS 드라마 《대박》에서 김창집 역을 맡았다.
  • 2019년 SBS 드라마 《해치》에서는 이원재가 김창집을 연기했다.

참조

[1] 문서 조문명은 김창집의 동생 김창업의 사위이고, 영조의 서장자 효장세자의 장인이며 조선 정조의 양 외할아버지이다. 따라서 김창집은 효장세자의 처외종조부가 되고, 법적으로는 조선 정조의 외외종증조부가 된다.
[2] 문서 당시 거제도와 성주 등 유배지를 전전하던 김창집은 아들 김제겸과는 생사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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