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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르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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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조르즈성은 리스본 중심부에 위치한 언덕에 자리 잡은 역사적인 요새이다. 기원전 1세기에 처음 건설되었으며, 켈트족, 페니키아인, 고대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수에비족, 서고트족, 무어인을 거쳐 1147년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아폰수 엔히케스에 의해 탈환되었다. 13세기에는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리스본으로 정해지면서 왕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축과 증축을 거쳤다. 현재는 박물관과 전망대,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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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르즈성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유형
위치리스본
국가포르투갈
소유주포르투갈 정부
운영자리스본 시 의회
공개 여부공개
건축 자재돌, 화강암, 철근 콘크리트
웹사이트상조르즈 성 공식 웹사이트
리스본 역사 지구를 조망하는 상조르즈 성의 모습.
리스본 역사 지구를 조망하는 상조르즈 성의 모습.
건설 및 사용 정보
건설포르투갈 왕족, 특히 페르난두 1세, 데니스 왕, 세바스티앙 1세
주앙 페르난데스와 바스쿠 브라스
역사
지정 번호
위치 정보
좌표38° 42′ 50″ N, 9° 08′ 01″ W

2. 역사

상조르즈성은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그 모습이 변화해왔다.

기원전 1세기경 처음 요새가 건설된 이후, 켈트족, 페니키아인, 고대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이 언덕을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했다. 이후 고대 로마, 수에비, 서고트, 무어인에게 차례로 점령되었다. 10세기에는 베르베르 군대가 성벽을 건설하여 요새를 강화했다.

레콩키스타 시기인 1147년, 아폰수 엔히케스가 이끄는 기독교 군대가 리스본 공방전에서 승리하며 상조르즈성을 탈환했다. 이때, 마르팀 모니스라는 기사가 자신의 몸을 던져 성문을 지켜낸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1255년 리스본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상조르즈성은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1300년경 드니시 1세는 대대적인 개조를 통해 성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14세기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으며, 주앙 1세는 성 게오르기우스에게 성을 헌정했다.

1378년부터 왕국의 주요 기록들이 토레 두 톰보에 보관되었고, 15세기 초에는 왕립 동물원이 설치되기도 했다. 또한, 바스코 다 가마가 마누엘 1세를 알현하고, 질 비센테가 희곡을 공연하는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6세기 초 리베이라 궁전이 건설되면서 왕궁으로서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1531년 리스본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 세바스티앙 1세가 재건축을 시도했지만,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왕이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이베리아 연합 시기에는 군사 시설과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포르투갈 복원 전쟁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성을 다시 요새화했다.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1788년에는 포르투갈 최초의 측지학 천문대가 설치되기도 했다.

1930년대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정부는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통해 성의 모습을 복원했다. 1947년에는 아폰수 엔히크스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1942년부터 리스본 시 정부가 성을 관리하고 있으며, 1998년에는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2006년에는 특별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2. 1. 초기 역사

16세기 두아르테 갈바웅의 ''D. 아폰수 엔히크스 연대기''에 묘사된 리스본의 삽화, 성과 성벽, 왕궁(''Alcáçova'') 포함 (1505)


타구스 강에 있는 캐러벨과 캐랙, 멀리 중앙에 성이 있는 모습, 작가 미상 (1572)


이 언덕에 최초로 요새가 건설된 것은 기원전 1세기였지만, 고고학 발굴을 통해 기원전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타구스 계곡에서의 인간 존재가 확인되었다. 최초의 요새는 리스본이 로마 자치체로 분류된 기원전 48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4][5][6][7]

이 언덕은 켈트족, 페니키아인, 고대 그리스인, 카르타고인에 의해 방어 기지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고대 로마, 수에비, 서고트, 무어인에게 차례로 빼앗겼다. 10세기에는 베르베르 군대에 의해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성벽 또는 ''Cerca Moura''("무어인의 포위")가 포함되었다.[7]

기독교도의 ''레콩키스타'' 맥락에서, 상조르즈성과 리스본시는 1147년 아폰수 엔히케스와 북유럽 기사단에 의해 리스본 공방전에서 무어인 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승리는 실패한 십자군의 유일한 주목할 만한 성공이었다.[7] 자주 반복되는 전설에 따르면, 기사 마르팀 모니스는 성문 중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몸을 그 틈새에 던져 무어인들이 문을 닫지 못하게 하여 기독교 군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성을 점령한 후 기독교군은 12세기 말까지 리스본의 방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8]

2. 2. 중세

이 언덕에 요새가 처음 건설된 것은 기원전 1세기였지만, 고고학 발굴을 통해 기원전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타구스 계곡에서의 인간 존재가 확인되었다. 최초의 요새는 리스본이 로마 자치체로 분류된 기원전 48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4][5][6][7]

이 언덕은 처음에는 켈트족, 다음은 페니키아인, 그 다음은 고대 그리스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르타고인에 의해 방어 기지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고대 로마, 수에비, 서고트, 무어인에게 차례로 빼앗겼다. 10세기 동안에는 베르베르 군대에 의해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성벽 또는 ''Cerca Moura''("무어인의 포위")가 포함되었다.[7]

기독교도 ''레콩키스타''의 맥락에서, 상조르즈성과 리스본시는 1147년 아폰수 엔히케스와 북유럽 기사단에 의해 리스본 공방전에서 무어인 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승리는 실패한 십자군의 유일한 주목할 만한 성공이었다.[7] 자주 반복되는 전설에 따르면, 기사 마르팀 모니스는 성문 중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몸을 그 틈새에 던져 무어인들이 문을 닫지 못하게 하여 기독교 군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성을 점령한 후 기독교군은 12세기 말까지 리스본의 방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8]

리스본의 무어인 점령 기간에 건설된 성벽과 탑


1255년 리스본이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상조르즈성은 지배자로서의 아폰수 3세의 요새화된 거처인 ''알카소바'' 역할을 했다.[7] 약 1300년 경 드니시 1세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무어인 알카소바는 알카소바의 왕궁으로 변모했다.[7] 1373년에서 1375년 사이에 페르난두 1세는 성의 북쪽 측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둘러싸는 성벽인 ''세르카 노바'' 또는 ''세르카 페르난디나''를 건설하도록 지시했다.[9]

이 성벽은 리스본 건축가 주앙 페르난데스(João Fernandes)와 바스코 브라스(Vasco Brás)가 건설을 담당했다.[7] 이 벽은 이전 무어인 벽을 부분적으로 대체하여 이전에 보호받지 못했던 도시 부분을 둘러싸도록 설계되었다. 2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77개의 탑, 34개 또는 38개의 문,[10][11] 그리고 5400m의 둘레를 가지고 있었다.

14세기 동안 성과 도시는 여러 차례 카스티야 왕국의 군대에 저항했다(특히 1373년과 1383-1384년). 이 시기(14세기 후반)에 주앙 1세가 랭커스터의 필리파 영국 공주와 결혼하면서 성을 성 게오르기우스에게 헌정했다.[7] 전사 성자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으로 용을 죽이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두 나라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1378년 이후 왕국의 많은 기록들은 ''토레 두 톰보''(문자 그대로 "기록 보관소의 탑")에 보관되었으며, 이는 "''토레 알바란''"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755년 지진까지(오늘날 "오디세우스"의 탑으로 알려진 탑).[7] 페르나오 로페스, 고메스 이아네스 데 주라라, 다미앙 데 고이스가 한때 일했던 포르투갈 왕립 기록 보관소는 리스본 성의 탑 중 하나에 원래 위치했기 때문에 여전히 ''토레 두 톰보''로 불린다.

1448년 12월 9일, 길 피레스(Gil Pires)는 아폰수 에스테베스(Afonso Esteves)를 대신하여 성 건축가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작업에 대해 400레알을 지불받았다.[7] 1448년에서 1451년 사이에, 건축가는 궁궐 공사에 대한 작업에 대해 여러 수당을 지불받았다. 마찬가지로 석공 주앙 데 알베르카(João de Alverca)는 석조 작업에 대해 상당한 금액을 지불받았다. 이러한 공공 사업은 1449년부터 1452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요새화된 성에서 왕궁으로 건물을 개조하기 위한 인력 및 자재에 대한 추가 지불이 이루어졌다.[7]

15세기 초에 리스본 왕궁에 왕립 동물원이 설립되었으며, 이곳은 상조르즈 성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1415년 세우타 정복 이후 주앙 1세는 리스본으로 두 마리의 바바리 사자를 데려왔고, 그들은 리스본 성채 내 그의 궁전의 큰 방에 설치되었다. 이 궁전 지역은 ''카사 두스 레옹스''( "사자의 집")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오늘날 이 지역은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한 레스토랑이 차지하고 있다.[12] 그 후 1494년 독일 인문주의자 히에로니무스 뮌처는 리스본에서 5일 동안 머물면서 사자에 대해 배웠고, 그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야생 동물이라고 주장했다.[13]

왕궁으로서 이 성은 마누엘 1세가 1498년 인도 항로를 발견하고 돌아온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를 접견한 장소였다. 또한 1502년에는 선구적인 극작가 질 비센테가 마누엘 1세의 아들인 미래의 주앙 3세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목동의 독백''을 무대에 올리면서 극장 역할을 했다.[7]

2. 3. 근세

1255년 리스본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상조르즈성은 아폰수 3세의 요새화된 거처인 ''알카소바'' 역할을 했다.[7] 약 1300년 경 드니시 1세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무어인 알카소바는 알카소바의 왕궁으로 변모했다.[7]

14세기 동안 성과 도시는 여러 차례 카스티야 왕국의 군대에 저항했다(특히 1373년과 1383-1384년). 이 시기(14세기 후반)에 주앙 1세가 랭커스터의 필리파 영국 공주와 결혼하면서 성을 성 게오르기우스에게 헌정했다.[7] 전사 성자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으로 용을 죽이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두 나라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1378년 이후 왕국의 많은 기록들은 ''토레 두 톰보''(문자 그대로 "기록 보관소의 탑")에 보관되었으며, 이는 "''토레 알바란''"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1755년 리스본 지진까지 이 탑은 오늘날 "오디세우스"의 탑으로 알려진 곳이었다.[7] 페르나오 로페스, 고메스 이아네스 데 주라라, 다미앙 데 고이스 등 포르투갈의 저명한 연대기 작가들이 한때 일했던 포르투갈 왕립 기록 보관소는 리스본 성의 탑 중 하나에 원래 위치했기 때문에 여전히 ''토레 두 톰보''로 불린다.

1448년 12월 9일, 길 피레스(Gil Pires)는 아폰수 에스테베스(Afonso Esteves)를 대신하여 성 건축가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작업에 대해 400레알을 지불받았다.[7] 1448년에서 1451년 사이에, 건축가는 궁궐 공사에 대한 작업에 대해 여러 수당을 지불받았다. 마찬가지로 석공 주앙 데 알베르카(João de Alverca)는 석조 작업에 대해 상당한 금액을 지불받았다. 이러한 공공 사업은 1449년부터 1452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요새화된 성에서 왕궁으로 건물을 개조하기 위한 인력 및 자재에 대한 추가 지불이 이루어졌다.[7]

15세기 초, 리스본 왕궁에 왕립 동물원이 설립되었으며, 이곳은 상조르즈 성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1415년 세우타 정복 이후 주앙 1세는 리스본으로 두 마리의 바바리 사자를 데려왔고, 그들은 리스본 성채 내 그의 궁전의 큰 방에 설치되었다. 이 궁전 지역은 ''카사 두스 레옹스''( "사자의 집")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오늘날 이 지역은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한 레스토랑이 차지하고 있다.[12] 1494년 독일 인문주의자 히에로니무스 뮌처는 리스본에서 5일 동안 머물면서 사자에 대해 배웠고, 그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야생 동물이라고 주장했다.[13]

왕궁으로서 이 성은 마누엘 1세가 1498년 인도 항로를 발견하고 돌아온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를 접견한 장소였다. 1502년에는 선구적인 극작가 질 비센테가 마누엘 1세의 아들인 미래의 주앙 3세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목동의 독백''을 무대에 올리면서 극장 역할을 했다.[7]

16세기 초, 타구스 강 옆에 리베이라 궁전이 건설된 후, 알카소바 궁전은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다.[7] 1531년 리스본 지진은 오래된 성에 더 많은 피해를 입혀 쇠퇴와 방치를 더욱 심화시켰다.[7] 1569년, 세바스티앙 1세는 왕의 공식 거처로 사용할 의도로 성의 왕실 아파트를 재건축하도록 명령했다. 재건축의 일환으로 1577년 필리포 테르치(Filippo Terzi)는 로레토 교회의 주요 파사드 근처에 있는 탑 중 하나를 철거했다.[7] 그러나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젊은 왕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후 많은 공사가 완료되지 않았다. 그 다음 포르투갈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이베리아 연합이 성립되었고, 성은 군사 막사와 감옥으로 변모했다.[7]

1642년 12월 30일, 테오도시오 데 프리아스 2세(Teodósio de Frias the Younger)는 아버지인 루이스 데 프리아스(Luís de Frias)와 할아버지인 테오도시오 데 프리아스(Teodósio de Frias)가 시작한 공사를 계속하기 위해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스페인 군대가 요새를 재가동하기 위한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

포르투갈 복원 전쟁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이 작업을 인수했다. 1648년 11월 6일, 니콜라우 데 랑그레스(Nicolau de Langres)는 상조르즈 성과 리스본의 성벽을 둘러싸는 새로운 요새의 설계, 실행 및 건설을 인수하도록 요청받았다. 1650년에는 군사 건축가 마테우스 두 코투(Mateus do Couto)가 이 프로젝트의 건축가로 임명되었고 재건축은 새로운 형식을 갖게 되었다. 군사 기술자 주앙 질롯(João Gillot)은 1652년에 새로운 벽을 건설했지만, 1657년에서 1733년 사이에 코투의 계획에 따라 건설이 다시 진행되었다. 1673년에는 ''상 주앙 드 데우스''(성 요한)에게 헌정된 군인 병원이 루아 두 레콜리멘토 옆 부지에 설치되었다. 17세기 말에는 법원 동남쪽 모서리를 따라 ''레콜리멘토 두 카스텔로''( "성 보호소")가 건설되었으며, 1733년에는 건축가 쿠스토디오 비에이라(Custódio Vieira)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755년 리스본 지진은 성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지속적인 쇠퇴에 기여했다. 오래된 성의 벽 외에도, 군인 병원과 ''레콜리멘토''는 폐허로 남았다. 수도 내에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부대의 주둔지와 요새로서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1780년부터 1807년까지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자선 단체 카사 피아가 성채에 설립되었으며, 군인들은 현장에 계속 주둔했다. 지진과 뒤이은 쓰나미의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포르투갈 최초의 측지학 천문대가 1788년 성의 탑 중 하나 꼭대기에 건설되었으며, 이후 ''토레 두 오부제르바토리오''(관측소 탑)로 불렸다.

2. 4. 현대

1930년대에 이르러 상조르즈성은 리스본의 스카이라인에서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랜드마크가 되었으며, 나중에 추가된 부속 건물과 증축 건물 뒤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14]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정부는 국가 건국과 독립 회복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부지에서 광범위한 개조 공사를 시작했다. 이는 신트라와 실베스와 같은 다른 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DGEMN의 감독하에, 이전 세기에 성 단지에 추가된 대부분의 부조화스러운 구조물들이 철거되었고, ''Recolhimento''가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또한, 1947년 10월 25일, 포르투 시에서 기증한 아폰수 엔히크스 기념비가 부지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1887년 소아레스 도스 헤이스가 제작한 복제품이었다.

1942년 5월 31일, 성의 운영은 리스본 시 정부가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79년 6월 8일에 재확인되었다.

1998년에는 반 직사각형 공간, 기둥 및 저수조가 ''올리시포니아''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2006년 8월 22일, 리스본 문화 지역 관리국(DRCLisboa)은 상조르즈성과 리스본 성벽의 나머지 부분, ''바이샤 폼발리나'', 이미 문화 유산으로 분류된 다양한 재산을 포함하는 특별 보호 구역을 정의했다. IGESPAR의 지원을 받아 Conselho Nacional de Cultura (국립 문화 위원회)는 2011년 10월 10일에 이 정의를 보류할 것을 제안했다.

3. 건축

상 조르즈 성의 전체 파노라마


성에서 관심 지역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지도


현재 마른 해자 위 다리


성 내부에서 바라본 모습


누문(楼門)


상 조르즈 성은 언덕 위에 있는 리스본의 중심부에 있으며, 성벽의 많은 부분이 동쪽과 남쪽의 민간 교구로 요새 주변으로 뻗어 있다. 성의 구조와 방어 시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각 '주요 구조물' 및 '방어 시설'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3. 1. 주요 구조물

성의 평면은 대략 사각형이며, 원래는 요새를 형성하기 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15] 성 단지는 성 자체(castelejo), 몇몇 부속 건물(왕궁의 폐허 포함), 정원, 그리고 리스본의 인상적인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넓은 테라스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15] 요새의 주요 입구는 19세기의 문으로, 포르투갈의 문장, 마리아 2세 여왕의 이름과 1846년의 날짜가 새겨져 있다.[15] 이 문을 통해 오래된 대포와 무어인으로부터 성을 빼앗은 포르투갈 군주 아폰수 엔히케스의 청동 조각상이 있는 주요 광장(Praça d'Armas)으로 들어갈 수 있다.[15] 이 조각상은 낭만주의 조각가 안토니우 소아르스 두스 레이스가 만든 19세기 원본의 복제품으로, 포르투갈 북부의 기마랑이스 성 근처에 위치해 있다.[15]

왕궁의 잔해는 주요 광장 근처에 위치해 있지만,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벽과 ''카사 오기발''과 같은 몇 개의 재건된 방이 전부이다.[15]

중세 성은 요새의 북서쪽 모퉁이,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다.[15] 가상적으로 공성전 동안 공격자가 요새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면, 성은 마지막 보루, 피난처로 삼을 마지막 장소였다.[15] 성은 직사각형이며, 10개의 탑이 있다.[15] 탑과 연결 문이 있는 벽이 성 안뜰을 반으로 나눈다.[15] 일련의 계단을 통해 방문객들은 성벽 꼭대기와 탑으로 가는 통로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리스본의 웅장한 전망을 즐길 수 있다.[15]

주요 성벽 외에도 성은 남쪽과 동쪽에 바비칸(barbacã)으로 보호받고 있는데, 이는 공성 무기가 주요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낮은 벽이다.[9] 반면에 성의 북쪽과 서쪽은 성의 기초에서 아래로 경사진 가파른 언덕 측면에 의해 자연적으로 보호되었다.[9] 성은 또한 부분적으로 현재는 마른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9] 주요 입구는 해자를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앞에 있다.[9]

3. 2. 방어 시설

상조르즈 성은 대략 사각형 모양이며, 원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성 단지는 성 자체(castelejo), 몇몇 부속 건물(왕궁의 폐허 포함), 정원, 그리고 리스본의 인상적인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넓은 테라스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9]

요새의 주요 입구는 19세기의 문으로, 포르투갈의 문장, 마리아 2세 여왕의 이름과 1846년의 날짜가 새겨져 있다. 이 문을 통해 오래된 대포와 무어인으로부터 성을 빼앗은 아폰수 엔히케스의 청동 조각상이 있는 주요 광장(Praça d'Armas)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조각상은 낭만주의 조각가 안토니우 소아르스 두스 레이스가 만든 19세기 원본의 복제품으로, 포르투갈 북부의 기마랑이스 성 근처에 위치해 있다.[9]

중세 성은 요새의 북서쪽 모퉁이,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다. 공성전 동안 공격자가 요새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면, 성은 마지막 보루이자 피난처였다. 성은 직사각형이며, 10개의 탑이 있다. 탑과 연결 문이 있는 벽이 성 안뜰을 반으로 나눈다. 일련의 계단을 통해 방문객들은 성벽 꼭대기와 탑으로 가는 통로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리스본의 웅장한 전망을 즐길 수 있다. 토레 두 톰보 보관소가 있던 율리시스 탑에는 1998년에 카메라 옵스큐라가 설치되어 관람객들이 도시와 테주 강을 360도 볼 수 있다.[15]

주요 성벽 외에도 성은 남쪽과 동쪽에 바비칸(barbacã)으로 보호받고 있는데, 이는 공성 무기가 주요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낮은 벽이다. 반면에 성의 북쪽과 서쪽은 성의 기초에서 아래로 경사진 가파른 언덕 측면에 의해 자연적으로 보호되었다. 성은 또한 부분적으로 현재는 마른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주요 입구는 해자를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앞에 있다. 서쪽에는 언덕 아래로 뻗어 있는 긴 커튼 벽이 있으며, 탑(Torre de São Lourenço)에서 끝난다. 이 탑은 ''세르카 페르난디나''의 문을 지켰다.[9]

참조

[1] 간행물 A ocupação da Idade do Ferro na colina do Castelo de São Jorge (Lisboa, Portugal) http://repositorio.u[...] 2016-04
[2] 간행물 Sobre a ocupação pré-romana de Olisipo
[3] 웹사이트 Monumentos https://www.visitpor[...] 2019-04-30
[4] 서적 Ecohistoria del paisaje agrario: La agricultura fenicio-púnica en el Mediterráneo https://books.google[...] Universitat de València
[5] 서적 Los fenicios en Portugal: fenicios y mundo indígena en el centro y sur de Portugal (siglos VIII-VI a.C.) https://books.google[...] Carrera Edició
[6] 서적 Lisbon https://books.google[...] Clio Press
[7] citation Castelo de São Jorge e restos das cercas de Lisboa (PT031106120023) http://www.monumento[...] SIPA–Sistema de Informação para o Património Arquitectónico 201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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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A Cerca Fernandina de Lisboa (Vol. I) Municipio de Lisboa 1987
[10] 서적 The Great Cities in History https://books.google[...] Thames & Hudson 2016-08-02
[11] 서적 Comissão Nacional para as Comemorações dos Descobrimentos Portugueses, Lisbon (Portugal). Museu da Cidade, Lisbon (Portugal). Câmara Municipal, Lisbon (Portugal). Departamento de Património Cultural https://books.google[...]
[12] 웹사이트 Castle http://castelodesaoj[...]
[13] 서적 Animals and Courts: Europe, c. 1200–1800 https://books.google[...] Berlin: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14] 블로그 "Fotografia do Castelo de São Jorge - Lisboa - 1877. ''Conversa, muita conversa''" https://conversamuit[...] 2005
[15] 웹사이트 Camera Obscuras http://www.camera-ob[...]
[16]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5-06
[17] 문서 城の門の一つ、モニス門がその場所と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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