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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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서는 삼국 시대 인물로, 격검의 명수였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유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한 인물이다. 유비 휘하에서 조조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후 조조에게 귀순했지만, 조조에게는 충고하지 않았다. 팽성상, 우중랑장 등을 역임했으며, 제갈량은 그의 재능을 아까워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책사로 활약하며 조조에게 귀순하는 과정이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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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년 사망 - 제갈량
제갈량은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비의 삼고초려로 촉한에 합류하여 승상이 되었고, 섭정으로서 남정을 통해 촉한의 기반을 다졌으며,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으며, 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경제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 234년 사망 - 구수왕
구수왕은 백제의 제6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 말갈, 신라와의 전쟁에서 주로 패배하고 가뭄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사반왕을 아들로 두었으나 비류왕과의 관계는 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고, 그의 치세는 백제 초기 왕권 경쟁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시기로 평가된다. - 조조와 주변 인물 - 관우
관우는 후한 말기 ~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자 정치인으로,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의형제로서 유비를 보좌하며 뛰어난 무예와 충절로 이름을 알렸으나, 손권의 계략으로 최후를 맞이한 후 동아시아에서 신으로 숭배받고 대중문화에서 영웅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강직함과 자만심이 정치적 판단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다. - 조조와 주변 인물 - 문소황후
문소황후는 후한 말기 조위의 인물로 조비의 황후이자 조예의 생모이며, 원희와 혼인했으나 조비의 아내가 되어 총애를 받았지만 소외되어 자결했고, 사후 조예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으며, 뛰어난 미모와 덕행, 조식과의 로맨스 설화로도 유명하다. - 유비 휘하의 정치인 - 제갈량
제갈량은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비의 삼고초려로 촉한에 합류하여 승상이 되었고, 섭정으로서 남정을 통해 촉한의 기반을 다졌으며,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으며, 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경제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 유비 휘하의 정치인 - 마량
마량은 촉한의 관료이자 유비의 측근으로, 형주에서 등용되어 종사, 시중을 지냈으며 이릉 전투에서 전사했고, 뛰어난 재능을 칭송하는 '백미'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서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서서 |
본명 | 서복 |
자 | 원직 |
출생 | 170년대 |
사망 | 230년대 초 |
출생지 | 허난성 |
직업 | 정치가 |
관직 정보 | |
소속 국가 | 조위 |
주요 관직 | 우중랑장 어사중승 |
섬긴 군주 | 유비 조조 조비 조예 |
2. 생애
서서는 젊은 시절 검객이었으나, 친구의 원수를 갚은 후 학자의 길을 걸었다. 중평 연간에 전란을 피해 형주로 이주하여 사마휘 문하에서 제갈량, 석도, 맹건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익혔다.[5][6]
유비가 신야에 주둔할 당시 그를 만나 참모가 되었으며, 제갈량을 천거하였다. 유비가 제갈량을 데려오도록 하자, "만날 수는 있지만 데려올 수는 없다"라며 직접 찾아갈 것을 권했다.[19]
장판 전투에서 어머니가 조조 군의 포로가 되자,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 갔다.[8][9] 조위 건국 후, 팽성상, 우중랑장, 어사중승 등을 역임했다.[11]
청룡 2년(234년), 팽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21] 훗날 제갈량은 북벌 중에 서서와 석도의 관직을 듣고, "위에 인재가 그렇게 많은데, 어찌하여 두 사람이 쓰이지 않는 것인가!"라며 한탄했다고 한다.[12]
2. 1. 초기 생애와 학문
서서는 예주 영천군 출신으로, 현재의 허난성 중부에 해당한다.[3] 본래 이름은 복(福)이었으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검객으로, 영제의 중평 연간(184~189년) 말기에 다른 사람의 복수를 돕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신원을 숨기기 위해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이름을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관헌은 그를 수레에 묶어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훗날 친구들의 도움으로 구출된 그는 검객의 삶을 포기하고 학자가 되었다.[4]처음 학교에 다녔을 때, 출신 배경 때문에 친구들이 그를 멀리했지만, 겸손하고 근면하게 학업에 정진했다. 일찍 일어나 혼자 학교를 청소하기도 했다. 석도(석광원(石廣元)이라고도 함)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0년대 초, 중국 중부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서서와 석도는 남쪽 형주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포함)로 이동하여 제갈량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5] 190년대 후반부터 200년대 초까지(약 10년) 형주에서 제갈량, 석도, 맹공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여행하고 공부했다.[6]
집안은 단가(單家)였다.[19] 격검(擊劍)의 명수였으며, 의협심이 강하여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다가 관원에게 붙잡혔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후 칼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때 동향인 석도와 교제하였다.
중평 연간(184년 - 189년)에 중원이 혼란해지자, 석도와 함께 형주로 이주하여, 사마휘의 문하생이 되었다. 제갈량, 맹건과 특히 친하게 되었고, 한숭, 향랑과도 친교를 맺었다.
서서·맹건·석도는 학문을 정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제갈량은 요점 파악에 힘썼다. 제갈량은 "서서·맹건·석도는 벼슬을 하면 주자사나 군태수 정도는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승상이 된 후 관료에게 준 교서에서 서서를 언급하며 "관서에 참예하는 자는, 뭇 생각을 널리 모아 충성스럽고 이롭게 하는 자이다. 인심이란 것은 다 하기가 서툴고, 다만 서원직만이 미혹됨 없이 이에 힘썼다. 만약 원직의 행실의 10분의 1이라도 사모할 수 있다면, 나 또한 과실이 적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또한 "옛날, 최주평과 교제하던 초기에, 자주 득실을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서원직과 사귀면서, 여러 번 결점을 지적받았다. 그들과는 시종 좋은 사이였다. 직언을 꺼리지 않는 이로움의 증거로서 충분할 것이다"라며 서서와의 우정을 기렸다.
2. 2. 유비와의 만남과 이별
서서는 검술의 명수로 의협심이 강하여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다가 관원에게 붙잡혔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후 칼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했으며, 동향인 석도와 교제하였다. 중평 연간에 전란을 피해 석도와 함께 형주로 갔고, 사마휘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이때 제갈량, 맹건과 교제하였다.유비가 신야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서서는 유비를 만났고 유비는 그를 유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서서는 제갈량을 천거하였고, 유비가 제갈량을 데려오도록 하자 '''"저는 그를 만날 수는 있지만, 데려오지는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고사하였다. 이로써 유비는 직접 제갈량을 찾아가 데려왔다.[19]
이후 조조는 유비에게 패하였고, 이때 서서의 모친이 조조군의 포로가 되었다. 서서는 유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조조에게 갔다.[9] 위 건국 후에는 팽성상(彭城相), 우중랑장(右中郞將) ·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승진하였으며[20], 석도는 태수와 전농교위(典農校尉)를 역임하였다. 맹건은 정동장군(征東將軍) ·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임명되었다.
2. 3. 조조와 위나라에서의 활동
서서는 조조에게 간 후, 위나라 건국 후 팽성상(彭城相)을 지냈으며, 우중랑장(右中郞將) 및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승진하였다.[20] 석도는 태수와 전농교위(典農校尉)를, 맹건은 정동장군(征東將軍) 및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임명되었다.훗날 제갈량은 북벌을 할 때 서서와 석도의 관직을 듣고는 "위에 인재가 그렇게 많은가? 어찌하여 두 사람이 쓰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12]
청룡 2년(234년)에 서서는 팽성(彭城)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21] 조위에서 계속 복무했는데, 이는 후한 왕조의 멸망과 삼국 시대의 시작 이후,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건국했다. 220년 12월부터 226년 6월까지 조비의 치세 동안, 서서는 우중랑장과 어사중승을 역임했다.[11]
조예 (조비의 후계자)의 치세인 ''태화'' 연간(227-233) 동안, 221년에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승상인 제갈량은 일련의 북벌을 이끌어 조위를 공격했다. 제갈량은 위나라에서 서서와 석도의 관직에 대해 듣고 "위나라에 인재가 이렇게 많다니! 어째서 이 두 사람의 재능은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몇 년 후 서서는 위나라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팽성(현재의 쉬저우시, 장쑤성)에서 발견되었다.[12]
그 후 위에 벼슬하여, 황초 연간에 팽성의 상으로서 조거에 속했고, 우중랑장으로 승진했다. 224년의 조칙으로 조거가 정도현왕으로 강등되자, 인사 이동으로 어사중승으로 승진했다.[17] 232년에 조예가 황실의 권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자, 그 성격상 벼슬자리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다시 팽국의 상으로 돌아가, 제갈량과 같은 시기에 생애를 마쳤다.[14]
석도와 맹건은 유비를 섬기지 않고, 일찍부터 북방으로 돌아가 조조를 섬겼으며, 석도는 군태수·전농교위를 역임했고, 맹건은 양주 자사·정동장군에 이르렀다.
제갈량이 승상이 된 후에 관료에게 준 교서에 그 이름이 나타나며 "관서에 참예하는 자는, 뭇 생각을 널리 모아 충성스럽고 이롭게 하는 자이다. 인심이란 것은 다 하기가 서툴고, 다만 서원직만이 미혹됨 없이 이에 힘썼다. 만약 원직의 행실의 10분의 1이라도 사모할 수 있다면, 나 또한 과실이 적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 최주평과 교제하던 초기에, 자주 득실을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서원직과 사귀면서, 여러 번 결점을 지적받았다. 그들과는 시종 좋은 사이였다. 직언을 꺼리지 않는 이로움의 증거로서 충분할 것이다"라고 서서의 인격을 칭찬하고, 그 교우를 기리고 있다.
훗날 제갈량은 북벌을 행했을 때, 서서와 석도의 관직을 듣고 각자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여겨, "위는 특별히 인물이 많은 것인가. 어째서 저 두 사람은 쓰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탄식했다(『위략』).[18] 그렇다고는 해도, 두 사람 모두 앞선 제갈량의 예상 정도로는 출세했고, 맹건은 제갈량의 예상 이상으로 출세했다.
또한 서서의 몰년은 불분명하지만, 명제기에 죽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위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과 같은 무렵에 팽성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서는 어사중승 때까지 "'''복'''"을 자칭했고, 만년에 "'''서'''"로 개명했다.
2. 4. 사망과 평가
서서는 조위에서 계속 복무했는데, 이는 후한 왕조의 멸망과 삼국 시대의 시작 이후,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건국한 것이다. 220년 12월부터 226년 6월까지 조비의 치세 동안, 서서는 우중랑장(右中郎將)과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역임했다.[11] 황초 연간에 팽성의 상으로서 조거에 속했고, 우중랑장으로 승진했다. 224년의 조칙으로 조거가 정도현왕으로 강등되자, 인사 이동으로 어사중승으로 승진했다.[17]조예 (조비의 후계자)의 치세인 ''태화'' 연간(227년-233년) 동안, 221년에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승상인 제갈량은 일련의 북벌을 이끌어 조위를 공격했다. 제갈량은 위나라에서 서서와 석도의 관직에 대해 듣고 "위나라에 인재가 이렇게 많다니! 어째서 이 두 사람의 재능은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12]
청룡 2년(234년), 서서는 팽성(彭城)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21]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팽성(현재의 쉬저우시, 장쑤성)에서 발견되었다.[12] 232년에 조예가 황실의 권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자, 그 성격상 벼슬자리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다시 팽국의 상으로 돌아가, 제갈량과 같은 시기에 생애를 마쳤다.[14]
훗날 제갈량은 북벌을 행했을 때, 서서와 석도의 관직을 듣고 각자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여겨, "위는 특별히 인물이 많은 것인가. 어째서 저 두 사람은 쓰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탄식했다(『위략』).[18] 그렇다고는 해도, 두 사람 모두 앞선 제갈량의 예상 정도로는 출세했고, 맹건은 제갈량의 예상 이상으로 출세했다.
제갈량이 승상이 된 후에 관료에게 준 교서에 서서의 이름이 나타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고, 그와의 우정을 기리고 있다.
2. 5. 개명 시기
서서는 어사중승 재임 시에도 '''서복'''이라 하였기 때문에, 말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17]3. 삼국지연의에서의 서서
서서는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꽤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삼국 시대 이전과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미화한 작품이다. 서서는 주로 35~36장에서 등장하며, 제갈량이 나타나기 전 유비의 책사로 활약했다. 소설에서 그의 원래 이름은 '''단복'''(單福)인데, 이는 ''위략''에 나오는 "본단가자"(本單家子)라는 구절을 잘못 읽은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단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의미였다.
서서는 신야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유비에게 발탁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사마휘가 말한 "와룡"인지 "봉추"인지 물었으나, 서서는 자신은 둘 다 아니라고 답했다. 서서는 유비의 책사가 되어 조조의 장수 조인이 이끄는 침략군에 맞서 유비를 도왔다. 조인은 신야 외곽에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陣)을 펼쳤지만, 서서는 진형의 약점을 지적하고 유비의 장수 조운에게 파해법을 가르쳤다. 조운은 군대를 이끌고 진형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조인을 격파했다. 서서는 조인이 패배 후 그날 밤 기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고, 유비는 야간 전투에서 다시 조인을 격파하고 퇴각시켰다.
조조는 서서의 소식을 듣고 감탄하며 참모로 영입하려 했다. 조조는 서서의 어머니를 초대하여 만나고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했으나, 서서의 어머니는 거절하고 조조를 간신이라고 비난하며 먹물을 던졌다. 격분한 조조는 서서의 어머니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순욱이 어머니를 죽이면 서서가 유비를 도와 조조에게 대항하려는 의지가 더 강해질 것이라고 설득하여 마음을 바꿨다. 조조는 서서의 어머니를 구금하고 순욱에게 서서의 의형제인 척하며 서서 어머니의 신뢰를 얻도록 했다. 얼마 후 순욱은 서서의 어머니와 가까워져 그녀의 필체를 모방하게 되었고, 서서 어머니의 필체로 서서에게 편지를 써서 어머니가 위기에 처했으니 황도 허(許; 현재 허창시, 허난성)로 빨리 오라고 했다. 서서는 효성이 지극했기에 편지를 읽자마자 허로 향했다.
서서는 말을 달려 급히 떠났다. 가는 길에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즉시 유비를 다시 만나 제갈량을 추천한 후 허로 가는 길을 재개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서서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서서의 어머니는 아들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 것에 분노했고, 아들이 유비 대신 조조를 섬기게 된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껴 자결했다. 서서는 조조 곁에 남았지만, 조조에게는 다시는 조언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13]
"몸은 (조)조의 진영에 있지만 마음은 한(漢)나라에 있다"는 속담은 서서와 관우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속담은 겉으로는 "나쁜" 조직을 위해 일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좋은"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서서는 "단가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단복"이라는 가명을 쓴다.
신야 시대에 유비와 만나 군사로 발탁되어 조인과의 신야성 공방전에서 선발대인 여광, 여상이 이끄는 위나라 군 5,000명을 2,000명으로 맞이하여 격퇴하고 두 사람을 죽였다. 보복을 명목으로 조인, 이전이 25,000명의 병력으로 남하하지만, 서서는 조인의 팔문금쇄진을 간파하여 완벽하게 격파하고 조인의 본거지인 번성을 빼앗는다.
정욱의 계략으로 서서 어머니의 필적을 흉내 낸 편지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귀순하게 되지만, 떠나기 전에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하고 유비 곁을 떠난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자결하고, 서서는 이 일로 조조를 위해 계책을 내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적벽대전에도 종군하지만, 방통이 준비한 연환지계의 진의를 알아차렸음에도 이를 묵인하고, 방통의 조언에 따라 "양주 침공에 대한 대비"라는 명목으로 진영을 떠나 피해를 면했다. 덧붙여 『연의』 제36회에 서서의 동생 서강이 정욱의 발언 중에 등장한다.
4. 대중문화 속 서서
코에이의 진·삼국무쌍 비디오 게임 시리즈 진·삼국무쌍 7: 엠파이어스에서 처음으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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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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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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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ü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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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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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ü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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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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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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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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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ü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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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ü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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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ü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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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 Ya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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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略
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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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姓統譜 (四庫全書本)/卷007
明・凌迪知『万姓統譜』巻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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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35#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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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略
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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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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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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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주
수경주(水經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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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
위략(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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