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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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륵은 갈족 출신으로, 노예에서 시작하여 오호십육국 시대 후조를 건국한 인물이다. 그는 기근으로 노예가 되었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풀려난 후 도적과 용병을 거쳐 한(漢)에 귀순하여 장군으로 활약했다. 유연 사후 하북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고, 319년 조왕에 즉위하여 후조를 건국했다. 그는 법률 정비, 농업 장려 등 통치 정책을 펼쳤으며, 330년 황제에 즉위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석륵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모두 받으며, 사후 석호의 전횡으로 후조가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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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륵 | |
|---|---|
| 기본 정보 | |
| 씨 | 석(石) |
| 성 | 륵(勒) |
| 자 | 세룡(世龍) |
| 추존 시호 | 명황제(明皇帝) |
| 묘호 | 고조(高祖) |
| 존호 | 대장군, 대선우, 영기주목, 조왕 (대將軍 大單于 領冀州牧 趙王, 319–330) |
| 존호 | 대조천왕 (大趙天王, 330) |
| 존호 | 황제 (330년 3월) |
| 연호 | 태화(太和): 328–330 건평(建平): 330–333 |
| 출생 | 274년 |
| 사망 | 333년 (59세) |
| 매장지 | 고평릉(高平陵) |
| 아버지 | 주흘주 |
| 어머니 | 왕씨 |
| 배우자 | 유황후 성씨 |
| 자녀 | 석흥 석홍 석회 |
| 통치 | |
| 즉위 | 330년 3월 |
| 후계자 | 석홍 |
| 왕조 | 후조 |
| 기타 | |
| 중국어 | 石勒 |
2. 건국 이전
석륵은 산시성 유사 지역에 해당하는 상당군 출신이다. 갈족 소부락의 수령이었던 주갈주(周曷硃)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래는 '배(㔨)'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다.[4] 태안 연간(302년~303년)에 기근이 발생하여 부족이 흩어지면서, 석륵은 서진(西晉)의 동영공 사마등에게 사로잡혀 산동 지역의 한 농가에 노예로 팔려갔다.[5] 그러나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본 주인은 석륵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이후 석륵은 근처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석륵은 목장 주인 급상(汲桑)과 함께 도적이 되었으며, 이 난에 용병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급상은 석륵에게 '석(石)'이라는 성과 '륵(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용병 활동 중 패배하여 군사력과 근거지를 모두 잃게 되자, 석륵은 307년에 한나라의 유연에게 항복하였다.
유연의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석륵은 점차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는 군단의 수장으로 성장하였다. 유연이 사망한 후에는 유총의 지휘 아래 하북 및 하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310년에는 장강 유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311년 영가의 난 당시 낙양을 공략하는 데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낙양 함락 이후에도 황하 이남 지역에서 약탈을 지속하던 석륵은, 자신을 죽이고 군대를 빼앗으려던 왕미를 역으로 제거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하였다.
석륵은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뛰어난 식견과 인재를 모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309년에는 하북 공격 과정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부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등용된 장빈은 석륵의 가장 중요한 참모로 활약하였다. 312년, 석륵은 장빈의 건의에 따라 약탈을 중단하고 기주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기로 결정, 양국(襄國, 현재의 허베이성 형태시)을 수도로 삼아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316년에는 유곤을 격파하고 병주 북부 지역을 차지하였다.
318년, 한나라 황제 유총이 사망한 후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석륵은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한 유요와 대립하게 되었다. 유요와의 화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석륵은 유요와 결별하고 완전히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생애
석륵은 갈족의 소수령인 주갈주(周曷硃)의 아들로 병주상당군 무향현(현재의 산서성진중시유사현 북서쪽)에서 274년에 태어났다. 본래 성(姓)이 없이 '㔨'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걸은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7] 다른 가능한 이름으로는 '匐勒'이 있었다. 아버지 주갈주는 흉폭했지만, 㔨은 씩씩하고 담략이 있으며 기마와 활쏘기를 좋아하여 부락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다.[8][9]300년 전후 태안 연간(302년 ~ 303년)에 병주에 기근과 전란이 닥쳐 부락이 흩어졌다.[5] 석륵도 유랑하다가 옛 지인인 한족 곽경에게 의지하여 굶주린 호인(胡人)을 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도중에 다른 호인들과 함께 서진의 동영공 사마등에게 군자금을 위해 붙잡혀 산동에서 팔렸다. 석륵은 지평의 사환이라는 자의 노예가 되었지만, 사환은 석륵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유롭게 풀어주었다.[10] 이후 사환 옆 마목장(馬牧場)의 급상과 친해졌으며, 함께 군도(群盜)가 되었다.[9]
2. 2. 팔왕의 난과 석륵의 등장
석륵은 산시성 유사 지역인 상당군 출신으로, 갈족 소부락 수령 주갈주(周曷硃)의 아들이었다. 본래 성이 없이 '배(㔨)'라는 이름으로만 불렸다. 태안 연간(302년~303년) 기근으로 부족이 흩어지자, 석륵은 서진의 동영공 사마등에게 사로잡혀 산동 지역의 사환에게 노예로 팔렸다. 그러나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근처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다.[4][7][8][9][10]300년 전후 태안 연간, 병주의 기근과 전란으로 부락이 흩어졌다. 㔨는 유랑 중 한족 곽경에게 의지했으나, 서진 동영공 사마등에게 붙잡혀 산동성에서 팔렸다. 지평의 사환이라는 사람의 노예가 되었지만, 사환은 㔨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유롭게 해주었다.[10] 이때 사환 옆 마목장의 급상과 친해졌고, 군도가 되어 석륵십팔기 중 처음 여덟 기를 따르게 되었다.[9]
305년,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석륵과 급상은 수백 기병을 이끌고 성도왕 사마영의 부하 공사번과 합류했다. 이때 급상으로부터 '석(石)'씨 성을 받고 '륵(勒)'이라는 이름을 얻었다.[9][10] 석륵 등은 업을 공격했으나, 범양왕 사마교에게 패해 도주했다.[10]
사마영이 처형된 후, 307년에 급상은 대장군을 자칭하며 사마영의 복수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10] 석륵은 급상 밑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소로장군, 충명정후가 되었다. 급상 등은 업에 입성하여 사마등을 죽이고 약탈했으나, 태부 사마월이 보낸 구희에게 대패했다. 급상은 평원에서 참수되었고, 석륵은 낙평으로 도주했다.[9][10]
이후, 307년 석륵은 군사력과 근거지를 잃고 유연에게 항복했다. 유연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독자적인 병력을 이끄는 군단 수장이 되었다.[6]
2. 3. 한(漢)나라(전조)에서의 활약
307년, 석륵은 상당의 호인 부족장들을 이끌고 흉노의 유연이 일으킨 한(후의 전조)에 귀순하여 보한장군·평진왕으로 봉해졌다.[10] 당시 유연은 한왕이자 흉노의 대선우였는데, 석륵이 유연에게 귀순한 지 2개월 뒤에 귀순한 왕미가 한의 동래공으로 임명된 것에 비해, 석륵이 흉노의 칭호[11] 중 하나인 평진왕을 받은 것은 그만큼 석륵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10] 또한 유연의 초빙에 응하지 않았던 오환의 장복리도의 무리 2천 명을 복종시켜 귀순시키자, 도독산동정토제군사 직을 더했다.[10]308년 유총의 선봉이 되어 고관을 함락시켰고, 유연이 황제를 칭하자 평동대장군이 되었다. 이때 한인 장빈이 석륵의 진영에 합류했다. 309년 유연으로부터 안동대장군으로 임명되어 개부했다. 거록·상산을 공격하고, 군자영을 만들어 한인 지식인을 모았으며, 장빈을 모주로 삼고 18명의 기병 중 다수가 군 지휘관이 되었다. 그 후, 진동대장군으로 진급했고, 아울러 급군공에 봉하려 했지만, 군공에 관해서는 사퇴했다. 당시 석륵은 한나라 신하로서의 관작을 아직 받지 않았지만, 유연은 그것을 문제 삼을 수 없을 정도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10]
310년 유연이 사망하고 유총(소무제)이 즉위하자 병주자사가 되었고, 급군공에 봉해졌다. 정변으로 황위에 오른 유총에게 그동안 한나라 관작을 받지 않던 석륵이 관작을 받은 것은 큰 정치적 성과였고, 반대로 석륵에게도 유총을 지지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한과의 관계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10]
311년 동해왕 사마월의 장례 행렬을 습격하여 사마월의 아들인 진군장군 사마비 등 서진군의 주력을 궤멸시키고, 공장의 진언에 따라 사마비를 포획하고 태위 왕연 등 군 고관과 왕후 100명 이상을 포함한 10만 명 가까이를 살해했다. 같은 해, 대장군 구희를 살해하고, 대립했던 왕미를 살해하고 그 부하를 병합했지만, 강남 지방으로의 침공은 실패했다. 강남 공략 중에, 유곤이 헤어진 어머니 및 석륵의 종자인 석호를 보내 진으로의 귀순을 촉구했지만, 석륵은 정중하게 응대했지만 귀순은 거절했다.
312년 상당군공으로 개정되었고, 양국으로 거점을 옮겼다. 314년 유주의 왕준을 살해하지만, 단필제가 계에 들어가 이후 대립했다. 유총으로부터 표기대장군·동선우가 되었다. 315년에는 섬동백이 추가되지만, 공과 선우의 지위는 그대로이므로, (한나라의) 동방의 패자를 의미하는 칭호였던 것으로 보인다.[10]
316년 탁발부의 협력을 받은 유곤을 격파하고, 진의 병주를 항복시켰다. 유총은 정전을 명령했지만, 석륵은 무시하고, 삼국 정립을 염두에 두고 노골적으로 자립을 꾀했다. 석륵의 유연에 대한 복속 자체가 처음부터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고, 명목만 한나라 관작을 받고 있던 자립 세력인 석륵은 진과 싸우면서도 한나라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동방으로 더욱 세력 확대를 꾀했고, 유총은 왕미 살해 등에 대해서도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10] 같은 해 7월, 유총의 병세가 깊어지자, 석륵을 대장군·녹상서사에 임명하여 황태자유찬의 보좌를 명하지만, 석륵은 이를 굳게 사퇴한다. 이 때문에, 보좌 건을 중단하고 다시 대장군에 임명하여 10개 군을 준다는 사자를 파견하지만, 석륵은 이것 또한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총은 병사한다.[10]
311년 여름, 석륵은 중국 중부에 남아 있던 가장 큰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명성과 권력이 크게 상승했다. 진나라 섭정 사마월 동해왕이 그해 4월에 사망했고, 그가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는 그의 장례 행렬을 그의 영지인 동해(대략 현대 린이, 산둥성)로 호송하려 하고 있었다. 석륵은 그들을 굳현(苦縣, 현대 저우커우, 허난성)에서 가로막았고, 진나라 군대가 그의 군대보다 훨씬 컸지만, 석륵의 군대는 대부분 기병이었고, 진나라 군대의 행렬을 포위하고 교란하여 자멸하게 만들었다. 많은 진나라 왕족과 관리들이 석륵에게 사로잡혔고, 석륵은 그들을 모두 처형했다.
같은 해 7월, 석륵, 호연엄, 유요, 왕미를 포함한 몇몇 주요 한나라 장군들은 사마월에 의해 방어력이 없어진 진나라 수도 낙양으로 집결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수도는 함락되었고(영가 대란), 진나라 회제는 사로잡혀 313년에 처형되었다. 그 해 말, 석륵은 강력한 진나라 장군 구희를 사로잡아 동료 한나라 장군 왕미를 암살하고 그들의 군대를 자신의 군대와 합병했다. 석륵의 군대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젊은 먼 조카 석호를 장군으로 점점 더 신뢰하게 되었고, 폭력적이지만 재능 있는 석호 아래에서, 석륵의 군대는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처우로 유명했지만, 또한 훈련을 받아 전투에서 거의 패하지 않았다.
312년 봄, 석륵은 양쯔강을 건너 건업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진나라 장군 사마예 낭야왕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군대가 비에 갇히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진나라 군대가 공격할까 두려워 석륵의 핵심 고문인 조응(刁膺)은 사마예에게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다른 고문인 장빈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석륵이 이전에 진나라에 너무 많은 피해를 입혀 그들에게 항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석륵에게 북쪽으로 후퇴할 것을 조언했는데, 진나라 군대가 그를 너무 두려워해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방어 가능한 도시를 점령하여 본부로 삼아 영토를 확보하고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빈의 조언에 따라, 석륵은 그해 말 상국(襄國, 현대 싱타이, 허베이성)을 점령하여 자신의 본부로 삼았다. 그는 장빈의 조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고, 장빈을 너무 존경하여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또한 석륵이 구차 출신의 불교 승려 불도징을 소개받은 것도 이 시기였다. 불도징은 자신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예언으로 석륵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석륵은 그를 자신의 고문 중 한 명으로 영입했다.
313년 초, 유주 (현 베이징, 톈진, 북부 허베이)의 진나라 태수 왕준은 선비 단 추장 단질륙권 요서공과 동맹을 맺고, 아직 방어가 완료되지 않은 상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석륵의 장군 공창은 단군을 기습 공격하여 단질륙권의 사촌 단말배를 생포했다. 석륵의 장군 대부분은 단말배를 처형하려 했지만, 석륵은 대신 단말배를 예우하고 단군에게 돌려보냈다. 그러자 단은 물러서고 왕과 관계를 끊기 시작했다. 이 전투 이후 석륵은 상국을 작전 기지로 삼아 점점 더 넓은 영토를 장악해 나갔다. 여전히 한의 이름 아래 있었지만,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재능이 있지만 폭력적이고 낭비적인 유총이 쾌락에 빠져 한을 효율적인 국가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석륵은 더욱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314년 초, 석륵은 여전히 강력한 왕준을 멸망시킬 계획을 고려했다. 왕준이 자신의 이름이 황제의 이름으로 예언되었다고 믿어 황제가 되려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석륵은 그에게 복종할 준비가 된 척하며 황제의 자리를 제안했다. 왕준은 석륵의 의도를 믿고 더 이상 그를 방어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석륵은 조공을 바치는 척하며 계 (薊, 현 베이징)에 있는 왕준의 본부를 기습 공격하여 왕준을 생포하고 처형했다. 그러나 이때 석륵은 유주를 영구적으로 점령할 수 없었고, 유주는 여전히 진에 충성을 다하는 단 추장 단비제의 손에 들어갔다. 315년 가을, 유총은 석륵에게 동제국의 황실 권한을 공식적으로 부여하여 석륵의 영토 지배를 공식화했다.
317년 초, 석륵은 이전에 한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병주 진나라 태수 유곤을 격파하고 병주를 장악하여 유곤을 유주로 쫓아내 단에 합류하게 했다.
318년, 유총이 죽고 그의 아들 유찬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찬은 장인 진준의 쿠데타로 살해되었고, 진준은 수도 평양 (平陽, 현 린펀, 산시)에서 황실 유씨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학살했다. 석륵과 유총의 사촌 유요는 군대를 이끌고 진준에 대항했다. 유요는 스스로 황제를 칭했고, 석륵은 그 당시 유요의 권위에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유요는 그를 조공으로 임명했다. 이후 양쪽의 압박을 받은 진준은 암살당하고 그의 사촌 진명이 뒤를 이었는데, 진명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항복했다. 석륵은 수도에 입성했지만 점령하지는 않았다. 석륵은 평양의 궁궐을 불태웠다. 쿠데타와 그 이후의 전투로 수도가 심하게 훼손되자 유요는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다.
319년 초, 석륵은 유요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유요는 매우 기뻐하며 석륵을 조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후 유요는 석륵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하여 석륵의 수석 사절을 죽였다. 석륵은 분노하여 그해 말 조왕의 칭호로 독립을 선언했다.
3. 후조(後趙) 건국과 통치
석륵은 319년 조왕(趙王)을 칭하며 후조(後趙)를 건국했다. 329년, 유요의 전조(前趙)를 멸망시키고 화북 대부분을 평정하였다.
석륵은 혼란했던 하북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법률을 시행하고, 구품관인법을 결정했으며, 도량형을 통일했다. 호적을 작성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를 다졌다.
330년 2월,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333년, 석륵이 병으로 눕자, 석호가 궁궐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석륵 사후, 석호는 그의 시신을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게 하였다.
3. 1. 후조 건국과 전조와의 관계
319년 11월, 석륵은 조왕(趙王)에 즉위하여 조나라를 건국하였다. 장안의 유요도 국호를 조(趙)로 바꾸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하여 구분한다. 건국 이후 석륵은 주변 지역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여 산둥성 동부의 청주(靑州), 산둥 성 서부의 연주(兗州) 등을 점령하였다.324년부터 전조와 후조는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1]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의 전조에게 항복하였으며, 동진(東晉)의 사주(司州 : 허난성 중남부)도 유요에게 투항하여,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이 포위되게 되었다.[1] 석륵은 석호를 구원군으로 보내어 전조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였다.[1]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하였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였다.[1] 이로 인해 병주, 사주 일대를 후조가 모두 장악하였으며 화북의 동진 세력도 크게 위축되어 후조는 회수(淮水) 이북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1]
328년, 후조의 석호는 병주 지역에 남아있던 전조의 거점을 공격하였다.[2] 유요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며, 석호는 크게 패배하여 낙양 일대를 유요가 포위하였다.[2] 낙양 포위는 3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석륵은 구원군을 이끌고 낙양의 유요를 공격하였다.[2] 유요는 반격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여 석륵의 구원군이 근접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포위를 풀고 낙양 서쪽에 포진하였다.[2] 12월 5일,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공격하였으며, 유요가 술에 취한 채로 지휘하였기 때문에 석륵은 크게 승리하고 유요도 포로로 잡았다.[2] 석륵은 유요를 처형하였으며,[2] 329년에는 간쑤성 천수에 있는 상규(上邽)로 도망쳐 있던 전조의 잔당도 토벌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2]
3. 2. 화북 통일과 통치 정책
석륵은 319년 11월, 조왕(趙王)에 즉위하여 후조(後趙)를 건국하고, 주변 지역 평정에 주력하여 산둥성 동부의 청주(靑州)와 서부의 연주(兗州) 등을 점령하였다. 324년부터 전조(前趙)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1] 325년, 후조의 병주(幷州)가 전조에 항복하고, 동진(東晉)의 사주(司州 : 허난성 중남부)도 전조에 투항하여 낙양을 지키던 석생(石生)이 포위되자, 석륵은 석호를 보내 전조군을 격파하고 역포위하였다.[1] 전조의 유요(劉曜)가 직접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했으나, 군중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면서 병주, 사주 일대를 후조가 장악하고, 화북의 동진 세력도 크게 위축되어 회수(淮水) 이북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1]328년, 석호는 병주 지역에 남아있던 전조의 거점을 공격하였고, 유요는 10만 대군으로 반격하여 석호는 패배하고 낙양 일대를 포위당했다.[2] 3개월간의 포위동안, 석륵은 구원군을 이끌고 낙양의 유요를 공격하였고, 유요가 술에 취한 채로 지휘하여 크게 승리하고 유요를 포로로 잡았다.[2] 석륵은 유요를 처형하고, 329년에는 상규(上邽 : 간쑤성 천수)로 도망친 전조의 잔당을 토벌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2]
313년 초, 유주 (현 베이징, 톈진, 북부 허베이)의 진나라 태수 왕준이 선비 단 추장 단질륙권 요서공과 동맹을 맺고 상국을 공격했지만, 석륵의 장군 공창이 단군을 기습 공격하여 단말배를 생포했다.[3] 석륵은 단말배를 예우하고 돌려보내 단군을 물러서게 하고 왕준과의 관계를 끊게 했다.[3] 이후 상국을 작전 기지로 삼아 점점 더 넓은 영토를 장악해 나갔다.[3]
314년 초, 석륵은 왕준을 멸망시킬 계획으로, 황제가 되려는 왕준에게 복종하는 척하며 황제의 자리를 제안했다.[4] 왕준은 석륵의 의도를 믿고 방어하지 않았고, 몇 달 후 석륵은 계 (薊, 현 베이징)에 있는 왕준의 본부를 기습 공격하여 왕준을 생포하고 처형했다.[4] 315년 가을, 유총은 석륵에게 동제국의 황실 권한을 공식적으로 부여하여 석륵의 영토 지배를 공식화했다.[4] 317년 초, 석륵은 유곤을 격파하고 병주를 장악하여 유곤을 유주로 쫓아내 단에 합류하게 했다.[5]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뒤를 이었으나, 진준의 쿠데타로 살해되었고, 진준은 수도 평양 (平陽, 현 린펀, 산시)에서 황실 유씨 가문을 학살했다.[6] 석륵과 유요는 군대를 이끌고 진준에 대항했고, 유요는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며, 석륵은 유요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하고 조공으로 임명되었다.[6] 이후 양쪽의 압박을 받은 진준은 암살당하고 진명이 뒤를 이었으나,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항복했다.[6] 석륵은 평양의 궁궐을 불태웠고, 쿠데타와 전투로 수도가 심하게 훼손되자 유요는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다.[6] 319년 초, 석륵은 유요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고, 유요는 석륵을 조왕으로 임명했으나, 이후 유요는 석륵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하여 석륵의 수석 사절을 죽였다.[7]
석륵은 독립 초기에 중국 북부와 중부에 남아있는 서진 세력을 병합하는 데 집중했다.[8] 319년에 단비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유주를 점령했다.[8] 320년, 석륵은 석호와 공창을 보내 소속을 사로잡았다.[8] 321년 석호는 단비제마저 사로잡았다.[8] 황하 북쪽의 마지막 남은 서진 세력은 모용외였는데, 그는 서진의 신하라 자칭했지만 사실상 현대의 랴오닝성을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8] 석륵은 서진의 예주 자사(豫州, 현대 허난 동부와 안후이 북서부)인 조적과 교착 상태에 이르렀고, 결국 황하를 경계로 평화와 무역 관계를 맺었다.[8] 321년 조적이 사망한 후, 후조 군대는 황하와 회하 사이의 서진 영토를 점차적으로 점령했다.[8]
322년, 장빈이 사망했고, 석륵은 그의 죽음이 더 큰 업적을 완성하는 것을 막을지도 모른다고 슬퍼했다.[9] 그해 말, 석호는 태산군에 근거지를 둔 서간을 사로잡았다.[9] 323년, 석호는 현대 산둥성을 점령하고 있던 조니를 공격하여 사로잡고 그의 영토를 후조의 통제하에 병합했다.[10] 324년, 후조와 전조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했고, 몇 년 동안 국경 지역과 황하 근처의 서진 통치 지역을 두고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11] 325년, 석호는 전조의 장군 유악을 격파하고, 뤄양 지역 전체를 후조의 수중에 넣었다.[11] 328년에 전조가 반격해왔고, 유요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석호의 군대를 격파하고 뤄양을 포위했다.[12] 석륵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뤄양을 지원하여 유요와 전투를 벌여 그를 사로잡았다.[12] 유요가 항복을 거부하자 그를 처형했다.[12] 유희는 후조 군대를 두려워하여 전조의 수도 장안을 버리고 상규로 후퇴했다(上邽, 현대의 간쑤성 톈수이).[12] 328년 가을, 유은은 전조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탈환하려 했지만, 석호에게 패배했고, 이후 상규를 점령하고 유희, 유은, 그리고 다른 전조 귀족들을 살해하여 한조를 멸망시켰다.[12]
308년, 유총의 선봉이 되어 고관을 함락시켰고, 유연이 황제를 칭하자 평동대장군이 되었다.[13] 이때 한인 장빈이 진영에 합류했다.[13] 309년, 유연으로부터 안동대장군으로 임명되어 개부했다.[13] 거록·상산을 공격하고, 군자영을 만들어 한인 지식인을 모았으며, 장빈을 모주로 삼고 18명의 기병 중 다수가 군 지휘관이 되었다.[13] 그 후, 진동대장군으로 진급했고, 급군공에 봉하려 했지만, 군공에 관해서는 사퇴했다.[13]
310년에 유연이 사망하고 유총(소무제)이 즉위하자 병주자사가 되었고, 급군공에 봉해졌다. 311년, 동해왕 사마월의 장례 행렬을 습격하여 사마비 등 서진군의 주력을 궤멸시키고, 공장의 진언에 따라 사마비를 포획하고 왕연 등 군 고관과 왕후 100명 이상을 포함한 10만 명 가까이를 살해했다. 같은 해, 대장군 구희를 살해하고, 왕미를 살해하고 그 부하를 병합했지만, 강남 지방으로의 침공은 실패했다. 유곤이 헤어진 어머니 및 석륵의 종자인 석호를 보내 진으로의 귀순을 촉구했지만, 석륵은 정중하게 응대했지만 귀순은 거절했다. 312년, 상당군공으로 개정되었고, 양국으로 거점을 옮겼다. 314년, 유주의 왕준을 살해하지만, 단필제가 계에 들어가 이후 대립했다. 유총으로부터 표기대장군·동선우가 되었다. 315년에는 섬동백이 추가되었지만, 공과 선우의 지위는 그대로였다. 316년, 탁발부의 협력을 받은 유곤을 격파하고, 진의 병주를 항복시켰다. 유총은 정전을 명령했지만, 석륵은 무시하고, 삼국 정립을 염두에 두고 자립을 꾀했다.
316년 7월, 유총의 병세가 깊어지자, 석륵을 대장군·녹상서사에 임명하여 황태자유찬의 보좌를 명했지만, 석륵은 이를 굳게 사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총은 병사한다. 318년, 근준의 난으로 은제 유찬이 살해당했다. 장안에 있던 유요가 황제 즉위를 선언하자, 10월에 석륵에게 대사마, 대장군, 조공의 지위를 주고 구석을 수여하여 동서에서 근준을 협격하려 했다.
319년, 근준의 난을 평정한 후, 유요와 대립하게 되었다. 공장이 유주를 평정했다. 11월, 24군, 호수 29만으로 조왕을 칭하고, 후조를 건국하여 즉위년을 조왕 원년으로 삼았다. 장빈을 대집법으로 삼아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게 하고, 석호를 선우원보로 삼았다. 320년, 조적에 의해 황하 이남은 동진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석륵은 조적과의 융화에 힘써 황하 이남을 공격하지 않고 조적과는 휴전 상태가 되었다. 321년, 석호가 단필저와 단문앙을 항복시켰다.
석륵은 법률 시행, 구품관인법의 결정, 도량형의 통일, 호적 작성, 농업 장려를 행하여 혼란했던 하북의 질서를 회복해 나갔다.
322년, 석홍을 세자로 삼고, 황하 이남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장빈이 사망하고, 대신 정하에게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게 했다. 323년, 조억을 멸망시키고 청주를 평정했다. 325년, 동진과 전조의 세력을 몰아내고 낙양을 점령하고, 회하 북안까지 지배하에 넣었다. 326년, 석호 대신 석홍에게 업을 맡기고, 왕양에게 보좌하게 했다. 328년, 사환이 흑토를 헌상하고, 상서로운 징조로 태화로 개원했다. 7월, 회하를 넘어 수춘을 함락시켰다. 8월, 유요의 전조에게 낙양을 점령당했으나, 12월에 탈환하여 유요를 포로로 잡았다. 329년, 유요를 살해하고, 장안을 공략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장준이 사자를 보내 칭번하고 화북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330년에는 천왕을 칭하고, 후조를 진의 금덕에 이은 수덕의 왕조로 삼았다. 8월, 제위에 즉위하여 건평으로 개원했다.
3. 3. 황제 즉위와 최후
330년 2월,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333년, 석륵이 병으로 몸져눕자,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석호는 궁궐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그해 7월에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게 하였다.330년, 석륵은 "천왕(天王)" 칭호를 사용하고, 부인 유 부인을 황후로, 아들 석홍을 태자로 삼았다.[1] 또한 다른 아들 석홍(石宏, 글자가 다름)에게 진왕 작위를 내리고, 그가 통치하는 다섯 유목 부족(중국어로 오호로 통칭)의 공식 지도자로서 "대선우" 칭호를 수여했다.[1] 이는 석륵의 정복 사업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장군으로서, 자신이 태자 혹은 적어도 대선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산왕이라는 직위에 만족하지 못했던 석호의 은밀한 분노를 샀다.[1] 같은 해 말, 석륵은 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유 부인을 황후로 삼았다.[1]
석호의 속셈을 알지 못한 석륵은, 고문 정하 (태자 홍의 어머니 정비의 형제)와 서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석호를 매우 신뢰했다.[2] 정하와 서광은 석호의 권력을 점차 약화시키고 석홍에게 이양할 것을 권했다.[2] 332년, 석륵은 석호의 권한 일부를 석홍과 환관 엄진에게 이양했지만, 이는 석호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2]
333년, 석륵은 병이 들었고, 석호는 석륵이 병든 틈을 타 쿠데타를 준비하며 자신의 아들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기 시작했다.[3] 석륵이 가을에 사망하자, 석호는 즉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하와 서광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3] 석륵의 지시에 따라 그는 은밀하게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묻혔고, 빈 관이 대신 웅장한 의식과 함께 황릉에 매장되었다.[3] 석호는 석홍을 황위에 앉혔지만, 334년에 석홍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3] 석륵의 후손들은 모두 석호의 손에 죽게 되었다.[3]
건평 4년(333년) 7월, 석륵은 붕어했다.[4] 이후 석홍이 제위에 즉위했다.[4]
4. 석륵에 대한 평가
석륵은 고구려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술자리에서 신하 서광이 자신을 헌원에 비유하자, 자신은 유방을 만났다면 그를 섬겼을 것이고, 유수를 만났다면 천하를 다투었을 것이라며, 한 고조와 광무제의 중간에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13] 이는 그의 겸손함과 동시에 천하를 향한 야망을 드러내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4. 1. 긍정적 평가
석륵은 노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군사적, 정치적 능력으로 혼란한 시대를 평정하고 국가를 건설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한족 지식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등 포용적인 정책을 펼쳐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3]스스로 글을 읽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책을 읽게 하여 듣고 평론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특히 역이기의 육국을 잇는 것을 권하는 대목에 감명을 받았으며, 장량의 간언을 듣고 "이것에 의지할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식견이 높았다고 전해진다.[12]
또한 석륵은 과거의 군웅들에 대한 평가를 남기기도 했는데, "한 고조를 만났다면 그의 부하가 되어 한신, 팽월과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고, 광무제를 만났다면 천하를 다투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나 사마의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여 천하를 얻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냈다.[12]
석륵은 한인 사대부를 등용하여 율령과 관제를 정비하고, 《조서》 등의 사서를 편찬하게 했다. 또한 불교를 숭배하여 불도징을 신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4. 2. 부정적 평가
석륵은 잔혹한 정복 전쟁과 학살, 왕미 살해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3] 그의 사후, 석호의 전횡과 권력 투쟁으로 인해 후조가 혼란에 빠진 점도 지적된다.[13]4. 3. 석륵에 대한 종합적 평가
석륵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진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바탕으로 혼란했던 오호십육국시대에 후조를 건국하고 화북 지역을 통일하는 업적을 달성했다. 특히, 한족이 아닌 갈족 출신으로서 이룬 그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법률을 시행하고, 구품관인법을 결정했으며, 도량형을 통일하고 호적을 작성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썼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여 혼란했던 하북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12]그러나 석륵은 전쟁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잔혹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311년 동해왕 사마월의 장례 행렬을 습격하여 사마월의 아들 사마비를 포함한 서진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10만 명 가까이를 살해한 사건은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석륵은 스스로를 한 고조 유방과 후한 광무제 유수의 중간 정도로 평가했다. 그는 고구려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술자리에서 신하 서광이 자신을 헌원에 비유하자, 유방을 만났다면 그를 섬겼을 것이고, 유수를 만났다면 천하를 다투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겸손함과 동시에 천하를 향한 야망을 드러내는 발언으로 해석된다.[13]
석륵은 한족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소외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과 오호십육국시대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는 객관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다른 성은 필요 없다"는 풍조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의 양자를 여러 명 들여 일족 강화를 꾀했으며, 발해의 석박(석포의 증손)을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종실 대우를 하기도 했다.
5. 기타
| 구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주허주(周曷朱) 또는 킷이쟈(乞翼加) | 작은 저족 추장[7] |
| 어머니 | 왕 부인 | |
| 부인 | 유황후 | 330년 황후가 되었으나, 333년 석호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됨[7] |
| 주요 후궁 | 성비 척씨 | 정하의 누이, 태자 석홍의 어머니[7] |
| 자녀 | 석흥 | 원래의 황태자, 319년 이전에 사망[7] |
| 자녀 | 석홍 | 태자 (330년), 이후 황제[7] |
| 자녀 | 석홍 (石宏) | 석홍과는 다른 글자, 진왕(330년), 335년 석호에 의해 처형됨[7] |
| 자녀 | 석회 | 남양왕 (330년), 335년 석호에 의해 처형됨[7] |
| 자녀 | 석빈 | 석호의 아들 |
| 자녀 | 석감 | 구성은 전(田), 팽성왕 |
| 자녀 | 석생 | |
| 자녀 | 석총 |
석륵은 군주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십팔기(十八騎)라 불렀으며, 이들은 후조가 화북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9] 석륵은 330년에 부인 유씨를 황후로, 아들 석홍을 태자로 삼았다.[7] 그러나 석륵 사후, 석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석홍을 폐위시킨 뒤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7] 석륵의 후손들은 모두 석호에게 죽임을 당했다.[7]
5. 1. 석륵십팔기(石勒十八騎)
석륵이 군도를 하던 시절부터 따르던 자들을 석륵은 십팔기(十八騎)라 칭했다. 석륵이 군도가 되었을 때 처음부터 따랐던 자는 왕양(王陽), 기안(夔安), 지웅(支雄), 기보(冀保), 오예(呉豫), 유응(劉膺), 도표(桃豹), 녹명(逯明)의 8명이었고, 후에 곽오(郭敖), 유징(劉徴), 유보(劉宝), 장예복(張曀僕), 호연막(呼延莫), 곽흑략(郭黒略), 장월(張越), 공돈(孔豚), 조록(趙鹿), 지굴육(支屈六)의 10명이 합류하여 십팔기가 되었다.[9]석륵십팔기는 석륵의 패업을 지탱하며 후조의 화북(華北) 제패에 크게 공헌했다.
5. 2. 가족 관계
| 구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주허주(周曷朱) 또는 킷이쟈(乞翼加) | 작은 저족 추장[7] |
| 어머니 | 왕 부인 | |
| 부인 | 유황후 | 330년 황후가 되었으나, 333년 석호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됨[7] |
| 주요 후궁 | 성비 척씨 | 정하의 누이, 태자 석홍의 어머니[7] |
| 자녀 | 석흥 | 원래의 황태자, 319년 이전에 사망[7] |
| 자녀 | 석홍 | 태자 (330년), 이후 황제[7] |
| 자녀 | 석홍 (石宏) | 석홍과는 다른 글자, 진왕(330년), 335년 석호에 의해 처형됨[7] |
| 자녀 | 석회 | 남양왕 (330년), 335년 석호에 의해 처형됨[7] |
| 자녀 | 석빈 | 석호의 아들 |
| 자녀 | 석감 | 구성은 전(田), 팽성왕 |
| 자녀 | 석생 | |
| 자녀 | 석총 |
석륵은 330년에 부인 유씨를 황후로, 아들 석홍을 태자로 삼았다.[7] 그러나 석륵 사후, 석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석홍을 폐위시킨 뒤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7] 석륵의 후손들은 모두 석호의 손에 죽게 되었다.[7]
참조
[1]
기타
2nd month of the 5th year of the ''Xian'he'' era, per vol.94 of ''Zizhi Tongjian''
[2]
기타
wu'chen day of the 7th month of the 8th year of the ''Xian'he'' era, per vol.95 of ''Zizhi Tongjian''
[3]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漢字「㔨」:基本資料
http://chardb.iis.si[...]
[5]
기타
[6]
기타
[7]
기타
[8]
서적
『魏書』巻95
[9]
서적
『晋書』「石勒載記上」巻104
[10]
서적
『資治通鑑』巻86
[11]
기타
[12]
서적
『晋書』巻105「石勒載記下」
[13]
서적
진서 권105 석륵 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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