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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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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이기는 진(秦)나라 말기, 유방을 도와 외교적 활약을 펼친 인물이다. 그는 독서를 즐겼으나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유방을 만나 진류성을 항복시키고 제나라를 설득하는 등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신의 제나라 공격으로 인해 제나라 왕 전광에게 배신자로 몰려 삶아 죽임을 당했다.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한 후 역이기의 아들을 고량후에 봉하여 그의 공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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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기원전 268년경
출생지카이펑, 허난성
사망기원전 204년 (64세)
사망지산둥성
가족형제: 이상
자녀: 이제
직업철학자, 정치인

2. 생애

역이기는 유방의 측근으로, 제후들을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진류 현령을 속여 진류성을 유방에게 바치고, 제왕 전광(齊王 田廣)을 설득하여 항복하도록 했다.

기원전 206년, 서위왕 위표가 배반하자, 유방은 역이기에게 서위왕을 설득하면 만 호의 영주로 봉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설득에 실패했다.[3] 항우와 대치하게 되자 역이기는 유방에게 육국의 후손을 제후로 봉하면 모두 유방의 신하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유방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장량은 제후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며, 육국의 유신들도 고향으로 돌아가 각자의 주군을 따를 것이라고 하여 역이기의 계책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후 역이기는 육가와 함께 제후들을 설득하는 데 힘썼다. 전한 건국 후, 유방은 역이기의 아들 역개(酈疥중국어)를 고량후(高粱侯중국어)에 봉했다.

2. 1. 초기 생애와 유방과의 만남

역이기는 유방진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유방에게 합류했다. 유방은 학자를 싫어하여 역이기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역이기는 "나는 학자가 아니라 고양 출신의 술꾼이다!"라고 소리쳐 유방을 만났다. 역이기는 유방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었고, 유방은 당황하여 사과한 후 진류를 정복할 방법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역이기는 진류로 돌아가 현령을 설득하여 유방에게 항복하도록 하려 했지만, 현령은 거절했다. 그러자 역이기는 부하들을 이끌고 현령을 죽이고 유방에게 사자를 보냈다.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진류를 공격했고, 진나라 군인들은 현령이 죽은 것을 보고 항복했다. 유방은 진류를 정복한 후 1만 명 이상의 새로운 병력과 많은 물자를 얻었다.[3]

역이기는 평소 독서를 즐겼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마을의 성문을 관리하는 감문리로 있었다. 술을 즐기고 능력을 드러내지 않아 사람들은 은둔 선생이라고 불렀다.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항량 등이 세력을 일으키자, 때를 기다렸던 역이기는 유방을 만나 그 뜻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승, 항량 등의 거병 이후, 60세 전후로 섬길 만한 인물을 찾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숨어 지냈다. 그 후, 유방이 진류를 공격했을 때, 역이기는 유방을 마음에 들어 하여 연줄을 통해 면회를 요청했다. 유방은 유학자를 혐오하여 유학자의 을 벗겨 그 안에 오줌을 누는 인물이었기에, 역이기와의 만남을 꺼렸다. 그러나 역이기는 개의치 않고 유방과 면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방은 하녀에게 발을 씻게 하면서 역이기를 맞이하는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2. 2. 외교적 활약과 제나라 설득

기원전 204년, 초한전쟁유방항우의 군대에 의해 성양에서 포위되었을 때, 역이기는 유방에게 전국 시대의 이전 국가들을 재건하고 각 왕가의 후손들을 그들의 왕좌에 앉힐 것을 제안했다. 이 계획은 유방이 항우와의 전쟁에서 그를 도울 제후국 통치자들의 지지를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3] 유방은 처음에는 이기의 제안을 칭찬했지만, 장량의 의견을 듣고 이 제안을 기각했다. 장량은 당시 초나라가 군사력 면에서 한나라보다 우월했기 때문에, 국가들이 초나라를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3]

그해 말, 역이기는 제나라를 설득하여 유방에게 항복시키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제나라로 가서 전광 (제나라 왕)을 설득하여 유방에게 복종하게 했다. 그러나, 처음 제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유방의 장군 한신은 계획 변경을 알지 못했다. 괴통의 조언에 따라 한신은 제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역하구와 고대 임치 (제나라 수도)를 정복했다. 전광은 이기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고, 이기를 산 채로 삶아 죽였다.[3]

2. 3. 배신과 죽음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항량 등이 세력을 일으키자, 역이기는 유방에게 가담하여 주로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진류 현령을 속여 진류성을 유방에게 바치고, 전광(齊王 田廣)을 설득하여 제나라의 70여 성을 항복시켰다.[3]

그러나 한신이 제나라를 공격하면서 제나라 왕 전광은 역이기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그를 삶아 죽였다.[3] 역이기는 죽기 전 제나라 왕에게 "큰일을 이루는 자는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전언을 바꾸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 4. 사후

역이기는 초한전쟁에서 유방에게 제나라와의 평화 교섭을 성공시켜 70여 성을 귀순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신과 괴통이 독단적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평화 협정이 파기되면서, 분노한 제나라 왕 전광에게 삶아 죽임을 당했다.[3]

유방은 전한 건국 후 역이기를 포상하고 그의 아들 역개(酈疥중국어)를 고량후(高粱侯중국어)에 봉했다. 역개의 손자 역평(酈平)은 죄를 지어 작위가 몰수되었으나, 선제 때 역이기의 현손 역사(酈賜)가 작위를 회복했다. 후한 시대에는 역이기의 후손이라 칭한 여염이 있었으나, 젊은 나이에 옥사했다.[4]

3. 가계

역이기는 독서를 좋아했지만, 가난하여 가업을 갖지 못했다. 마을문지기가 되었지만, 주변에서는 '광생(미친 선생)'이라고 불렸다.[3]

진승, 항량 등이 거병한 후, 60세 전후로 섬길 만한 인물을 찾다가 유방이 진류를 공격했을 때 유방을 마음에 들어 하여 연줄을 통해 면회를 했다. 유방은 유학자를 싫어하여 유학자의 을 벗겨 오줌을 누는 인물이었기에, 주변에서 만류했으나 역이기는 유방과 면회했다. 유방은 하녀에게 발을 씻게 하면서 역이기를 만나는 무례를 범했고, 역이기는 "연장자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꾸짖었다. 유방은 당황하여 하녀를 물리고 사과했다. 역이기는 유방에게 진류의 진나라 군의 항복을 설득하여 성공시키고, 광야군(廣野君)에 봉해졌다. 이때, 동생 역상을 추천했다.[3]

이후, 육가와 함께 제후들을 설득하는 데 힘썼다. 기원전 206년, 위표를 설득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실패했다.[3] 항우와 대치하게 되자, 역이기는 유방에게 육국의 후손을 제후로 봉하라고 설득했다. 유방은 처음에는 받아들였지만, 장량의 반대로 기각했다.[3]

한신 공략이 진행될 때, 역이기는 제나라와의 평화 교섭에 임하여 70여 성을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신과 괴통이 독단적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평화 협정이 파기되었고, 분노한 제나라 왕 전광에 의해 역이기는 삶아 죽임을 당했다.[3]

유방은 전한 왕조를 수립한 후, 역이기를 포상하여 아들 역계(酈庎)를 고량후(高梁侯)에 봉했다. 후에 무수후(武遂侯)로 전봉했다.[3]

기원전 122년에 역계의 손자 역평(酈勃, 역수[2]의 아들)이 형산유사에게서 칙명을 위조하여 백 근의 금액을 사기 친 죄로 처형될 예정이었지만, 병사했다. 그 때문에 뒤를 이은 역평의 아들(역승?)은 작위를 몰수당했다.[3] 선제 때, 역이기의 현손인 역사(酈賜)가 원래의 작위를 받았다.[3]

후한 시대에 려이기의 자손이라고 칭한 범양(현재의 허베이성바오딩시딩싱현) 사람인 여염이 영제 시대에 있었다.[4] 그는 변설, 문장, 시, 효성, 음률에 뛰어났다. 조정에서 관료로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정신적인 병과 치매에 걸려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내도 사망했다. 175년에 주군은 여염을 체포하여 투옥했고, 가혹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향년 28세. 스승 노식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덕행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4]

역이기곡주경후 역상
고량공후 역계역기무정후 역견
고량후 역수무강후 역수성
고량후 역평무회후 역세종
역사무후 역종근
역공


4. 평가

역이기는 유방이 진류를 공격할 때 유방을 마음에 들어하여 연줄을 통해 면회를 요청했다. 유방은 유학자를 혐오하여 유학자의 관을 벗겨 오줌을 누는 인물이었기에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역이기는 개의치 않고 유방과 면회했다. 유방은 처음에는 하녀에게 발을 씻게 하면서 역이기를 만나는 무례한 태도를 보였으나, 역이기는 "연장자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꾸짖었고, 유방은 당황하여 사과했다. 역이기는 유방에게 진나라 군의 항복을 설득하여 성공시키고 광야군(廣野君)에 봉해졌다.[3]

이후 역이기는 육가와 함께 제후들을 설득하는 데 힘썼다. 기원전 206년에는 서위왕 위표를 설득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실패했다. 항우와 대치 중에는 유방에게 "(전국 칠웅에서 진을 제외한) 육국의 후손을 제후로 봉하면, 모두 기뻐하며 폐하의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유방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장량은 "지금 제후를 봉하더라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육국의 유신들도 고향으로 돌아가 각자의 주군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라며 반대하여 역이기의 계책은 기각되었다.

한신 공략이 진행될 때, 역이기는 제나라와의 평화 교섭에 임하여 70여 성을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신과 괴통은 역이기가 공적을 독차지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독단적으로 제나라를 공격했고, 분노한 제나라 왕 전광에 의해 역이기는 삶아 죽임을 당했다. 역이기는 죽기 전 제나라 왕에게 "네가 한나라 군을 멈출 수 있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큰일을 이루는 자는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전언을 바꾸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유방은 전한 왕조를 수립한 후 역이기를 포상하여 그의 아들 역계를 고량후(高梁侯)에 봉했다. 후에 역계는 무수후(武遂侯)로 전봉되었다. 기원전 122년 역계의 손자 역평이 황족에게 사기를 친 죄로 처형될 예정이었지만 병사하여 작위를 몰수당했다. 선제 때 역이기의 현손인 역사가 원래의 작위를 받았다.

후한 헌제 시대의 사가 순열은 『한기』에서 역이기의 "육국의 후손을 세우라"는 진언을 장량이 부정했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5] 진승이 거병했을 때 장이진여는 육국의 후예를 세워 아군을 늘릴 것을 설했는데, 이는 역이기와 비슷한 헌책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토벌 세력과 진나라와의 다툼이었고, 초한의 대립은 아니었다. 진승의 경우에는 누구를 아군으로 삼아도 토벌 세력이 되었고, 제후로 봉해도 그 토지는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손해가 없었다. 즉 "허울뿐인 은혜로 실질적인 복을 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한왕의 경우에는 육국의 후예를 봉하여 제후로 삼아도 아군이 된다는 보장이 없고, 줄 땅은 자기 영토를 떼어 주어야 했다. 즉 "헛된 명성을 얻기 위해 실질적인 재앙을 받는" 셈이 된다. "일을 같이 하면서 형세가 다르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다.

역이기는 술에 심하게 탐닉하고 방종하며 자제력이 없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가오양 주투(高陽酒徒)"라는 중국어 용어의 유래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참조

[1] 문서
[2] 서적 漢書
[3] 서적 史記
[4] 서적 後漢書
[5] 서적 漢紀 後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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