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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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거이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에서 활약했으나 공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1545년에 태어나 1598년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이순신과 교류하며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을 구명하려 노력했다. 임진왜란 중 전라도병마절도사, 부원수 등을 역임하며 행주대첩, 울산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사후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1862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현재 고양시 행주서원과 전남 보성군 오충사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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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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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현지어 표기 | 宣居怡 |
호 | 친친재(親親齋) |
자 | 사신(思愼) 이중(怡仲) |
생애 | 1545년 ~ 1598년 |
태어난 곳 | 조선 전라도 보성군 |
죽은 곳 | 조선 경상도 울산군 울산왜성 |
본관 | 보성 |
기타 이력 | 1579년(선조 12년) 무과 급제 |
군사 정보 | |
복무 | 조선군 |
최종 계급 | 황해도 병마절도사 |
근무 | 거제현령, 진도군수, 성주목사, 전라수사, 전라병사, 충청병사, 황해병사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녹둔도 전투 임진왜란 독성산성 전투 행주대첩 장문포 해전 정유재란 제2차 울산성 전투 |
서훈 내역 | 선무원종공신 1등 추록 |
기타 정보 | |
사당 | 전남 보성군 오충사(五忠祠), 고양시 행주서원 |
2. 생애
선거이는 보성 선씨 시조 선윤지의 8세손으로,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좌찬성(종1품) ‘유성군 선형'이고, 할아버지는 오위도총부도사(종5품) 선숙철, 아버지는 의금부도사(종5품) 선상이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문신 중심의 정치적 환경과 권율과의 갈등으로 인해 그 공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1801년 충신정려를 하사받았으며, 1862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545년(명종 원년) 7월 25일에 태어나, 1569년(선조 2년) 공신(유성군 선형)의 후손 자격으로 겸사복(兼司僕, 대통령 경호실)으로 임명되었다. 1579년(선조 12년)에는 식년시(3년마다 보는 정규 시험)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북병마절도사 ‘이일’의 계청군관(啓請軍官, 정3품, 군단장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587년에는 동갑내기 친구인 ‘조산만호(종4품) 이순신’이 녹둔도에서 여진족과 싸웠으나, 북병사 이일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순신을 감옥에 가두었다. ‘선거이’는 이순신에게 술을 권하며 위로했고, ‘병조판서(정2품, 국방부장관) 정언신’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이후 두 사람은 여진족 토벌에 함께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종5품), 성주목사(정3품)를 거쳐 1589년 광릉헌관(조선 7대왕 세조의 제사를 책임지는 정3품 관리)이 되었다. 1590년에는 ‘전라우도수군절도사(정3품, 전라도 해남 우측 해군 전단장)’가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이었는데, ‘선거이’의 당상관(최고위 관리)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전라우수영을 방문했고, ‘선거이’는 이순신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다. 1591년 진도군(종4품)를 겸직했다.
1592년 3월 17일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 당시 군인으로 최고위 직책 전라도 군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임진왜란 발발로 임명장이 전달되지 못했다. 이 임명장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거이’는 후임으로 임명된 ‘이억기’에게 전라우수영을 넘겨주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취임한 친구 ‘이순신’과 함께 ‘진도군수’ 자격으로 한산도 대첩에 참전하여 승리했다.
1592년 11월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 전라도 군단장)로 다시 임명되어 ‘오산 독산성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왜군의 총탄에 부상을 입었다. 1593년 2월 ‘부원수 겸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로서 ‘도원수 겸 전라도관찰사(종2품, 전라도 도지사) 권율’과 함께 행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행주대첩의 병력 구성을 보면, ‘권율’이 지휘한 ‘전라감영’ 소속 병사 8백 명(6%), ‘수원부사 김천일’이 이끌던 ‘수원부’ 병력 1천 명(7%), 처영 스님이 이끌던 승병 1천 명(7%), 그리고 ‘선거이’가 지휘한 ‘전라병영’ 소속 병사 1만 2천 명(80%)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전체 병력의 80%를 지휘한 ‘선거이’의 공이 ‘권율’보다 크다고 볼 수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문관 우대 정책으로 인해 권율이 행주대첩 1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운봉전투, 금령전투, 사평전투에서 승리했으나, 1593년 6월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정부 명령에 반대하며 병력을 후방으로 보냈다. ‘선거이’는 병력 보존을 통해 북진을 저지하고 호남을 방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도원수 권율’을 설득했고, 결국 ‘권율’의 승인을 받았으나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선무공신 1등에 오르지 못했다.
1594년 9월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 충청도 군단장)’로 부임했다가 11월 ‘충청도 수군절도사(정3품, 충청도 해군 전단장)’로 좌천되었다. ‘선거이’와 ‘이순신’은 서로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순신’은 ‘선거이’가 풍습병(류마티즈 관절염)에 걸렸을 때 자주 문병했고, ‘선거이’가 ‘황해 병사’로 떠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난중일기에 남겼다.
1595년 9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심해져 부임하지 못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픈 몸을 이끌고 ‘부원수 겸 7도 병마절도사(명예직)’ 자격으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여 왜적 70여 명을 사살하고 1598년 1월 적의 총탄에 53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에서 초혼장(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들여 지내는 장례)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순신’ 장군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전우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육군과 해군 최고위 직책으로 근무했던 두 명의 군인으로서 문신들의 모함에 시달렸다. ‘선거이’ 장군은 임진왜란 마지막 육상 전투(1598년 1월)에서,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해상 전투(1598년 12월)에서 전사했다.
‘선거이’ 장군에게 예조(교육부, 문화부)에서 내린 금석문(금속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는 “임진란 당시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 불렸으며, 그 공로가 ‘이순신’과 비슷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쟁 후 ‘진주성 항명’을 이유로 선무공신에 오르지 못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었으며, 1801년에 조정으로부터 충신정려(충신을 기리는 솟을대문과 비석)를 하사받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충신정려문’이 세워졌고, 1862년 11월 병조판서(정2품, 국방부장관)로 추증(사망 후 특별승진)되었다.
고양시 ‘행주서원’에서 ‘도원수(문관) 권율’의 부원수(무관, 군인) 자격으로 예하 장수들과 함께 제향(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162 보병여단’의 별칭은 ‘선거이 부대’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오충사, 경기도 고양시 오충사, 전라남도 장흥군 포충사에서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3. 사후 평가 및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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