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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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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시기, 일본군의 울산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로, 1597년 12월부터 1598년 1월까지 이어진 제1차 울산성 전투와 1598년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제2차 울산성 전투로 나뉜다. 제1차 전투는 명·조선 연합군이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방어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는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제2차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철수 과정에서 명·조선 연합군이 울산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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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
지도 정보
전투 정보
전투 이름울산성 전투
전투 시기1597년 12월 22일 ~ 1598년 2월 19일
전투 장소울산성
결과일본군의 철수 (성 공방전에서는 조선-명 연합군의 승리)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 포위
교전 세력
조선-명 연합군조선
명나라
일본군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지휘관
조선-명 연합군마귀
양원
모병성
김응서
이복남
조경
최언량
정기원
김경로
일본군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병력 규모
조선-명 연합군36,000명
조선군: 10,000명
명군: 26,000명
일본군60,000명
고니시 유키나가의 13,000명의 군대 (후에 30,000명으로 증가)
가토 기요마사의 20,000명의 군대 (후에 30,000명으로 증가)
피해 규모
조선-명 연합군사상자: 8,500명 이상
전사: 6,000명
부상: 2,500명 이상
일본군사상자: 12,000명 이상
전사: 10,000명 이상
부상: 2,000명 이상
기타
관련 전투정유재란
제2차 울산성 전투

2. 제1차 울산성 전투 (1597년 12월 ~ 1598년 1월)

1597년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울산성을 둘러싸고 1598년 1월 29일부터 2월 9일까지(율리우스력으로는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명나라조선 연합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모리 히데모토 등이 이끄는 구원군의 도착으로 인해 실패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명사》에는 명군 전사자가 2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9][10] 전투 후 일본 측은 10,386구의 시신을 확인했다.[12] 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명군 전사자가 3,000~4,000명,[13] 10,000명,[15] 1,000명[16]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 수 없다.

2. 1. 배경

임진왜란 초기 일본명나라 사이의 평화 협상이 결렬되고, 일본은 재침을 결정했다. 1597년 일본군의 주요 임무는 전라도충청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한 후, 일본군은 조선 남해안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했다.[19]

부산 주변에는 이미 왜성들이 있었지만, 일본군은 추가로 동쪽부터 울산성, 양산성, 창원(마산)성, 당도해협 입구(견노량)성, 고성성, 사천성, 남해성, 순천성 등 8개의 성을 더 쌓았다.

이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울산 지역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터를 잡고 1597년 11월 중순부터 모리 히데모토, 아사노 요시나가 등과 함께 울산왜성 축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성터로 선택된 도산은 울산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태화강이 흘렀다. 당시에는 바다 바로 옆이라 성 아래에 군함을 정박시킬 수 있었다.

한편, 명나라와 조선은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군 중 가장 강력한 장수로 여겼다. 양호, 마귀 등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은 기요마사를 사로잡아 일본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건설 중인 울산왜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약 56,900명(조선군 12,500명)의 병력이었다.

구분지휘관명나라군 병력조선군 병력
좌협이여매(부총병)12,600명 (기병·보병)4,000명 (이시언 충청병사)
중협고책(부총병)11,700명 (기병·보병)5,200명 (성윤문 경상우병사)
우협이방춘(부총병)11,600명 (기병·보병)3,300명 (정기룡 경상좌병사)
본군양호(경리), 마귀(총병)8,500명-


2. 2. 전투 경과

1597년 12월 22일, 명나라군의 선봉 부대가 울산성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울산성은 완공 직전이었고,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있어 성에 없었다. 아사노 유키나가 등은 성 밖 임시 진영에서 명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초기에는 총성을 백조 사냥 소리로 착각하여 대응이 늦어졌다. 이후 반격에 나섰지만, 명군의 유인과 삼면 공격으로 고전하며 46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성 안으로 후퇴했다.[3]

서생포에서 소식을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즉시 울산성으로 돌아와 일본군을 지휘했다. 12월 23일, 명·조선 연합군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의 총구(惣構)를 돌파했지만, 일본군은 내성으로 후퇴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명군은 이날까지의 공격으로 일본군 1300명을 죽였고,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일본군도 많았다고 한다.[20][21]

울산성 내부의 일본군 병력은 다음과 같이 배치되었다.[3]

위치담당 부대
본성 동측오타 이치키치
본성 남측아사노 유키나가
본성 서측가토군(가토 야스마사)
이중성가토 기요마사, 모리군(시시도 모토츠구·카츠라 마고로쿠)
삼중성가토군(가토 요자에몬·콘도 시로에몬), 모리군(쿠치와 모토요시·와치 모토모리·히노 모토시게·요시미 히로유키)
이중성과 삼중성 사이가토군(미노베 킨타유·쿠키 히로타카)



12월 24일부터 명·조선 연합군은 연일 울산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총격에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12월 25일, 양원권율에게 조선군 단독으로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도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2]

일본군은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큰 피해를 입혔지만,[23] 식량 부족과 추위로 어려움을 겪었다. 12월 29일, 가토 기요마사는 항복 의사를 밝힌 사자를 통해 포로 교환 협상을 시도하며 시간을 벌었다.

한편, 12월 26일부터 일본군 지원군이 서생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모리 히데모토, 쿠로다 나가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 주요 지휘관들이 이끄는 병력이었다.[26]

일본군의 울산왜성으로 향한 지원군(1월 2일) 총병력 약 13,000명
제1부대 계 4,550명
1,600명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베시마 카츠시게)
150명 (모리 요시나리, 모리 카츠나가, 아키즈키 타네나가, 다카하시 모토타네, 이토 스케히데, 사가라 요리후사)
2,200명 (하치스카 이에마사)
600명 (쿠로다 나가마사)
군감(하야카와 나가마사, 가키미 나오히사, 쿠마가이 나오모리, 타케나카 시게토시) 각각 소부대를 이끌고 뒤따름
제2부대 계 3,770명
70명 (가토 요시아키)
50명 (나카가와 히데나리)
500명 (이코마 카즈마사)
150명 (와키사카 야스지)
3,000명 (야마구치 무네나가)
불명 (이케다 히데오)
제3부대 계 3,900명
3,900명 (모리 히데모토)
수군 병력 불명
나가소노부 모토치카, 이케다 히데우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



일본 지원군의 도착으로 명·조선 연합군은 울산성을 빨리 함락시켜야 했다. 12월 29일 밤, 양호와 마귀는 전군을 독려하여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큰 피해를 입고 실패했다.[27]

1598년 1월 4일, 양호와 마귀는 성 공격 실패와 지원군 도착으로 인해 퇴각을 결정했다. 명군은 4개 부대를 후위로 하여 경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 지원군에서는 기카와 히로이에가 선봉으로 명군을 공격했고, 타치바나 무네시게[28] 등이 측면에서 추격했다. 명군은 패주하기 시작했고,[29][30] 많은 사상자를 냈다.[31] 기카와 히로이에는 명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연못으로 몰아넣고 큰 피해를 입혔다.[1]

일본군은 패주하는 명·조선군을 30리나 추격했다. 명군의 전사자는 매우 많았고,[32][33][34] 정확한 수는 은폐되었지만, 3,000명에서 4,000명으로 추정된다.[13] 중국 측 사료인 명사에는 명군 전사자가 2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35] 『아사노가 문서』에 따르면, 전투 후 일본 측은 10,386명의 적군 시체를 확인했다.[12]

2. 3. 결과 및 영향

1598년 1월 29일부터 2월 9일까지(율리우스력으로는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조선 경상도 울산에서 벌어진 제1차 울산성 전투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3]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명사》에 따르면 명군은 2만 명이 전사했고,[35] 전투 후 일본 측 조사에서는 성 주변에서 10,386구의 적군 시체를 확인했다.[12] 명군 지휘관 중에서는 유격 양만금[36], 천총 마래[37], 주도계[38], 이동빈[39], 파총 곽안민[40], 왕자화[41], 초총 탕문잔[42], 전응태[43], 장응원, 진관책[44]이 전사하고, 유격 진인[45], 진우충[46]이 부상당했다. 명나라 장수 양호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한성까지 퇴각했다.[47]

명군은 퇴각 중 마귀의 부하 달단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는 등 군기가 무너졌고, 조선인이 일본군 편에 섰다는 정보 때문에 명군 상층부가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형계는 1598년 2월 결과를 승리로 보고했지만, 내부에서 전사자가 1,621명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정응태는 전승이 허위 보고이며, 양호, 마귀, 이여매 등이 병력과 무기를 잃고 사실을 은폐했다고 상소했다. 진인, 주승의 참소도 있어, 만력제는 양호를 파면하고 만세덕으로 교체했다.[48][49]

한편, 일본군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후쿠하라 나가타카, 쿠마가이 나오모리, 카키미 이치조쿠는 울산 구원군 진영에 일부 명나라 군대가 공격했을 때, 선봉인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쿠로다 나가마사가 “전투를 하지 않았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50]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고, 특히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영지로 압송되는 명령을 받았다. 하야카와 나가마사, 타케나카 타카시게, 모리 타카마사도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영지로 압송되었다. 반면, 보고를 한 후쿠하라 나가타카, 쿠마가이 나오모리, 카키미 이치조쿠에게는 분고노쿠니 내에 새로운 땅이 주어졌다. 히데요시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치쿠고노쿠니, 치쿠젠노쿠니를 주려고 했으나, 미쓰나리가 사퇴하여 구라이리치의 다이칸에 임명하고 나가시마죠를 주었다.[53]

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 사건으로 미쓰나리가 실각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울산성 구원 장수들에게 “과실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라는 판결을 내리고 처벌을 철회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하치스카 이에마사, 쿠로다 나가마사는 동군에 가담한다.

울산성 전투 당시 견책을 받은 장수들 중에는 가토 기요마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히데요시에게 보고를 한 후쿠하라 나가타카의 인척인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 처분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반발했다. 이는 후에 “칠장”이라 불리는 반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의 한 원인이 되었다.[54]

3. 제2차 울산성 전투 (1598년 9월 ~ 10월)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의 철수가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2차 울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마귀가 이끄는 동로군 29,500명(명군 24,000명, 조선군 5,514명)[55]을 포함하여 4개 군으로 나뉘어 남하하며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9월 21일(음력), 동로군은 경주를 출발, 가토 기요마사가 방어하는 울산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기요마사는 철저한 농성 준비를 갖추었고, 명군은 일본군의 반격으로 피해만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마귀는 일본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기요마사는 응하지 않았다.

10월 6일, 명군은 사천 전투에서 중로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왜성에서 철수하여 경주로 돌아갔다.

3. 1. 배경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 각지에 왜성이 축조되어 있었고, 이들 왜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즉각 철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명나라는 증원군을 파견하여 조선과 함께 재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4개 군으로 나뉘어 남하를 시작했다. 동로군은 울산을, 중로군은 사천을, 서로군과 수군은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이 중 동로군은 마귀 총병이 지휘했으며, 병력은 29,500명(명군 24,000명, 조선군 5,514명)이었다.[55]

3. 2. 전투 경과

1598년 8월,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중 마귀가 이끄는 동로군 29,500명(명군 24,000명, 조선군 5,514명)[55]9월 21일 경주를 출발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기요마사는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58] 명군은 일본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기요마사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응하지 않았다.

사천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0월 6일 마귀는 울산왜성 공격을 포기하고 경주로 철수했다. 『명사』에는 일본군이 거짓 후퇴로 명군을 유인하여 매복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56][57] 조선 사료 『상촌고』에는 명군이 일본군을 유인하여 매복 공격으로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어 상반된 내용을 보인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따르면, 9월 18일 마귀가 이끄는 명군이 경주를 출발했고, 조선군 김응서는 동래를 거쳐 울산왜성을 공격하여 방책 등을 불태웠다고 한다.

경상도 좌방어사 권응수가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9월 19일 마귀는 부산의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해 김응서를 동래 온정에 보냈고, 다음 날 20일부터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명군은 일본군을 다시 성에서 나오게 하려 했지만, 일본군은 끝내 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약 10일간 포위를 계속했지만 성을 함락시킬 수 없자 철수했다고 한다.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수비에 전념한 덕분에, 동로군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역습을 받아 궤멸된 중로군이나, 고니시 유키나가순천왜성을 공격하다 식량을 버리고 후퇴한 서로군과 수군과 같은 큰 혼란 없이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3로 전투(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 순천 전투)에서 명·조선군이 모두 패퇴했고, 이로 인해 3로로 나뉜 명·조선군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도피 준비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9]

3. 3. 결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사천 전투에서 승리하고 순천왜성에서도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을 물리치며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59] 반면, 마귀가 이끄는 명나라군은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른 전선에서도 연이어 패배하면서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3로 전투(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 순천 전투)에서 명나라군과 조선군이 모두 패퇴하였고, 이로 인해 3로로 나뉜 명나라군과 조선군은 녹아내리듯 함께 붕괴되었으며,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도피 준비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9]

4. 전후 상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하였고,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진 채 10월 15일에 일본군의 귀국 명령이 내려졌다. 가토 기요마사는 11월 18일에 울산왜성에서 철수를 완료하고 귀국하였다.[1]

경주로 후퇴했던 마귀는 일본군의 철수 후 울산왜성을 점령하고 이를 자신의 전공으로 보고하였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진린, 류징에 이어 세 번째로 마귀의 공적이 평가되고 있다.[1]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주오구에는 "울산마치(ウル산마치)"라는 이름의 시전 정류장 및 버스 정류장이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진을 쳤던 울산, 또는 거기서 데려온 사람들을 살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전철역 이름의 한국어 표기에서는 "울산" 부분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지 않고 조선 한자음으로 읽은 울산마치한국어(Ulsanmachi)가 사용되고 있다.[1]

5. 관련 유물 및 사료


  • '''조선울산합전지도'''


마에다 이쿠토쿠카이 손케이카쿠 문고가 소장하는 담채색 그림이다.[60] 크기는 69.5cm×68.5cm이다.[60] 세키가하라 전투기이국 와카야마에 입부한 아사노 요키나가를 "기이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에도 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60] 참고로, 손케이카쿠 문고에는 「조선울산합전지도」 외에도 「울산도」라는 거의 같은 구도의 그림이 있다.[60]

  • '''조선군진도병풍'''


나베시마 호코카이가 소장하는 병풍으로, 원래 육곡이쌍(사첩)이었으나, 에도 시대에 한 첩이 유실되어 육곡삼첩이 되었다.[60]

참조

[1] 서적 大日本分県地図併地名総覧 昭和十二年 昭和礼文社 1989-12-00
[2] 서적 大辞林
[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1년 1월 16일 https://sillok.histo[...]
[4] 웹사이트 明史/卷259 https://zh.m.wikisou[...]
[5] 간행물 日本戦史・朝鮮役
[6] 서적 日本の戦史 朝鮮の役 徳間書店 1995-00-00
[7] 문서 清正高麗陣覚書
[8] 간행물 日本戦史・朝鮮役
[9] 웹사이트 明史/卷320 https://zh.wikisourc[...]
[10] 웹사이트 明史/卷259 https://zh.wikisourc[...]
[11] 웹사이트 明史紀事本末/卷62 https://zh.wikisourc[...]
[12] 서적 文禄・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00-00
[13] 문서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15]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16]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17]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18]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19] 문서 二月二十一日付朱印状 浅野家文書
[20]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2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22] 문서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3] 문서 명사 조선전
[24] 문서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5] 문서 慶長三年一月十七日付小早川秀秋宛豊臣秀吉朱印状 秀吉と桃山文化-大阪城天守閣名品展 1997-00-00
[26] 문서 浅野幸長蔚山籠城以下萬事覚書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968-00-00
[27] 문서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8] 웹사이트 蔚山の後詰・十時但馬惟由覚書、立花丹後鎮久覚書 https://dl.ndl.go.jp[...]
[29] 문서 清正高麗陣覚書
[30] 웹사이트 蔚山の後詰・十時但馬惟由覚書、立花丹後鎮久覚書 https://dl.ndl.go.jp[...]
[31] 문서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2] 웹사이트 明史/卷259 http://zh.wikisource[...]
[33] 웹사이트 明史/卷238 http://zh.wikisource[...]
[3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1598 http://sillok.histor[...] 2013-08-29
[35] 문서 명사 조선전
[36]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37]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38]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39]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0]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1]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2]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3]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4]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5]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6] 서적 朝鮮王朝実録・宣祖実録
[47] 서적 朝鮮の役 徳間文庫
[48] 웹사이트 明史 朝鮮伝 https://zh.m.wikisou[...]
[49] 웹사이트 明史 楊鎬伝 https://zh.m.wikis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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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서적 秀吉の軍令と大陸侵攻
[53] 문서 島津家文書
[54] 서적 加藤清正論の現在地 戒光祥出版
[55] 웹사이트 宣祖実録十月十二日条 http://sillok.histor[...]
[56] 서적 明史
[57] 서적 立斎旧聞記
[58] 서적 乱中雑録
[59] 웹사이트 宣祖実録十月十二日条 http://sillok.histor[...]
[60] 웹사이트 蔚山城合戦図をめぐって http://www.himoji.jp[...]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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