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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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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제는 후한 말, 조위의 관료로, 조조를 섬기며 여러 요직을 거쳤다.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는 동안 장막과 여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젊은 나이에 태산군 태수를 역임했다. 이후 합비 전투에서 조조의 지시대로 장료, 악진, 이전 등을 지휘하여 손권의 공격을 방어했다. 한중 정벌 후 위군 태수를 거쳐, 조비가 즉위한 후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237년에는 상서령에 이르렀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합비 전투에서 조조의 명령서를 보관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2. 생애

설제는 비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능력과 넓은 도량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94년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 장막여포의 반란을 정욱과 함께 진압하고 견성, 범, 동아 세 현을 지켜내는 공을 세웠다. 이후 태산태수 응소가 도망가자 22세의 젊은 나이로 태산태수에 임명되었다.[1]

조조가 기주를 평정한 후에는 왕국과 함께 장사에 임명되었고, 이후 중령군으로 전임되었다. 유수 정벌에 종군한 후에는 호군으로서 합비에서 장료, 악진, 이전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215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을 때, 조조의 명령에 따라 악진과 함께 성을 지켰다.[1]

한중 정벌 이후에는 위군태수가 되어 충절을 다하고 관용을 베푸는 간명한 통치를 했다. 220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자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237년에는 상서령이 되었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집안이 비천하였으나, 연주 조조가 종사(從事)로 발탁하였다.[1]

흥평 원년(194), 조조가 서주를 정벌 중이던 때에 장막 · 여포 등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주의 속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설제는 정욱과 함께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견성(鄄城) · 범(范) · 동아(東阿) 세 현을 지켜냈으며, 태산태수 응소가 군을 버리고 달아나자 스물두 살의 나이로 그 후임이 되었다.[1]

진교진등의 요청으로 허(許)에 갔을 때 태산에 들러 설제와 교류하였다. 당시 진교는 공조(功曹)일 뿐이었으나, 설제는 직위를 따지지 않고 진교와 친하게 지내었다. 또 설제는 고당륭을 독우(督郵)에 임명하였는데, 독군종사(督軍從事)가 언쟁을 벌이던 중 설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1] 고당륭은 칼을 쥐며 크게 화를 냈으나 설제가 이를 제지하였다. 이처럼 설제는 도량이 넓어 관리들의 모범이 되었다.[1]

2. 2. 관리로서의 면모

조조연주으로 있을 때 종사(從事)로 발탁하였다.[1] 194년,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는 동안 장막·여포 등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주의 속현들이 이에 호응하였으나, 설제는 정욱과 함께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견성(鄄城) · 범(范) · 동아(東阿) 세 현을 지켜냈으며, 태산태수 응소가 군을 버리고 달아나자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그 후임이 되었다.[1]

진교진등의 요청으로 허(許)에 갔을 때 태산에 들러 설제와 교류하였다. 당시 진교는 공조(功曹)일 뿐이었으나, 설제는 직위를 따지지 않고 진교와 친하게 지내었다.[1] 또 설제는 고당륭을 독우(督郵)에 임명하였는데, 독군종사(督軍從事)가 언쟁을 벌이던 중 설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1] 고당륭은 칼을 쥐며 크게 화를 냈으나 설제가 이를 제지하였다. 이처럼 설제는 도량이 넓어 관리들의 모범이 되었다.[1]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였을 때, 설제는 왕국(王國)과 함께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가 훗날 중령군(中令軍)으로 전임되었다.[1] 이후 유수(濡須) 정벌에 종군하였고, 조조가 돌아간 후 호군(護軍)으로서 합비(合肥)에서 장료 · 악진 · 이전을 감찰하였다.[1]

조조는 한중을 정벌할 적에 설제에게 명령서가 들어있는 상자를 맡겼었는데, 215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자 설제는 상자를 열어보았고, “장료 · 이전은 나아가 싸우고, 악진은 호군과 함께 지켜라”라는 명령서의 내용대로 악진과 함께 성을 지켰다.[1]

한중 정벌 후 설제는 상서(尙書)가 된 진교의 후임으로 위군태수가 되었는데, 항상 충절을 다하여 관용을 베풀고 간단명료한 통치를 하였다.[1]

220년, 후한이 멸망하고 문제가 조위를 창건하였을 때 설제는 왕사(王思) · 극가(郤嘉) 등과 함께 관내후에 봉해졌다.[1]

237년, 진교의 뒤를 이어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1]

2. 3.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조조는 설제의 집안이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연주 종사(從事)로 발탁하였다.[1]

흥평 원년(194), 조조가 서주를 정벌 중이던 때에 장막 · 여포 등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주의 속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설제는 정욱과 함께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견성(鄄城) · 범(范) · 동아(東阿) 세 현을 지켜냈으며, 태산태수 응소가 군을 버리고 달아나자 스물두 살의 나이로 그 후임이 되었다.[1]

진교진등의 요청으로 허(許)에 갔을 때 태산에 들러 설제와 교류하였다. 당시 진교는 공조(功曹)일 뿐이었으나, 설제는 직위를 따지지 않고 진교와 친하게 지내었다. 또 설제는 고당륭을 독우(督郵)에 임명하였는데, 독군종사(督軍從事)가 언쟁을 벌이던 중 설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1] 고당륭은 칼을 쥐며 크게 화를 냈으나 설제가 이를 제지하였다. 이처럼 설제는 도량이 넓어 관리들의 모범이 되었다.[1]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였을 때, 설제는 왕국(王國)과 함께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가 훗날 중령군(中令軍)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유수(濡須) 정벌에 종군하였고, 조조가 돌아간 후 호군(護軍)으로서 합비(合肥)에서 장료 · 악진 · 이전을 감찰하였다.[1]

한편 조조는 한중을 정벌할 적에 설제에게 명령서가 들어있는 상자를 맡겼었는데, 건안 20년(215),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자 설제는 상자를 열어보았고, “장료 · 이전은 나아가 싸우고, 악진은 호군과 함께 지켜라”라는 명령서의 내용대로 악진과 함께 성을 지켰다.[1] (합비 전투)

한중 정벌 후 설제는 상서(尙書)가 된 진교의 후임으로 위군태수가 되었는데, 항상 충절을 다하여 관용을 베풀고 간단명료한 통치를 하였다.[1]

2. 4. 위나라 건국 이후

흥평 원년(194), 조조서주를 정벌 중이던 때에 장막 · 여포 등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주의 속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설제는 정욱과 함께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견성(鄄城) · 범(范) · 동아(東阿) 세 현을 지켜냈으며, 태산태수 응소가 군을 버리고 달아나자 스물두 살의 나이로 그 후임이 되었다.[1]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였을 때, 설제는 왕국(王國)과 함께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가 훗날 중령군(中令軍)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유수(濡須) 정벌에 종군하였고, 조조가 돌아간 후 호군(護軍)으로서 합비(合肥)에서 장료 · 악진 · 이전을 감찰하였다.

한편 조조는 한중을 정벌할 적에 설제에게 명령서가 들어있는 상자를 맡겼었는데, 건안 20년(215),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자 설제는 상자를 열어보았고, “장료 · 이전은 나아가 싸우고, 악진은 호군과 함께 지켜라”라는 명령서의 내용대로 악진과 함께 성을 지켰다.

한중 정벌 후 설제는 상서(尙書)가 된 진교의 후임으로 위군태수가 되었는데, 항상 충절을 다하여 관용을 베풀고 간단명료한 통치를 하였다.

황초 원년(220), 후한이 멸망하고 문제가 조위를 창건하였다. 이때 설제는 왕사(王思) · 극가(郤嘉) 등과 함께 관내후에 봉해졌다.

청룡 5년(237), 진교의 뒤를 이어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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