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교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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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교는 삼국 시대 조위의 관료로, 본래 유씨였으나 외가의 성을 따라 진씨로 바꾸었다. 손책과 원술의 초빙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진등을 도와 조조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손권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조조의 신임을 얻어 사공, 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조비의 즉위를 도왔다. 조비, 조예 시대에 요직을 두루 거치며 237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정후이다. 그의 아들들은 서진과 동진 시대를 거쳐 귀족으로 성장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인의 참모로 등장한다.
진교는 성실하고 진실한 성격을 지녔으며,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주군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간언할 정도로 호탕한 면모를 보였다.[1]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인의 참모로 등장한다. 적벽 대전 이후, 형주 남군에 침공한 손권 군의 주유의 침공을 방비한다. 조조에게 받은 비책을 사용하여 주유에게 독화살을 맞히는 등 고전하게 하지만, 마찬가지로 형주 제패를 노리는 유비 군의 제갈량에게 포로로 잡혀 인장을 빼앗긴 채, 그의 책략에 이용당한다.
[1]
서적
景初元年秋七月丁卯日
『三国志』魏書明帝紀
2. 생애
조조의 정식 초빙을 받아 사공연속, 상현령, 정남장사, 팽성 태수, 낙릉 태수, 위군 서부 도위를 역임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체포된 죄수를 사면하기도 했으며, 위군 태수 시절에는 전임자가 형벌의 경중에 얽매여 장기간 미결 상태로 방치한 죄수들을 스스로 조사하여 단기간에 판결을 내렸다.[1] 조조의 원정에는 승상 장사로 수행했고, 한중 정벌에도 참여했다. 귀환 후에는 상서가 되었다.[1]
조조 사후 낙양에서 조비에게 칙명을 기다리지 말고 위왕으로 즉위해야 한다고 진언하여 쟁란의 근원을 끊고자 했다. 조비는 즉위 후 진교를 이부·고릉정후·상서령으로 임명했고, 조예 시대에는 동향후가 되어 600호의 소유지를 받았다. 조예가 상서령 관청에서 직접 문서를 조사하려 하자 천자와 신하의 직분을 들어 간언하기도 했다. 이후 시중, 광록대부를 거쳐 사도까지 올랐다.[1]
237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정후이다.[1]
2. 1. 초기 생애와 강동 피난
삼국지 위서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에 따르면, 본래 성은 유(劉)였지만, 외가의 성(姓)인 진(陳)으로 고쳤다고 한다.[1] 전란을 피해 강동 일대로 피난했으며, 손책과 원술의 초빙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
2. 2. 진등과의 만남과 헌신
전란을 피해 일시적으로 강동으로 피난했다. 원술이나 손책의 초빙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태수 진등의 초빙에 응했다. (서선전에 따르면, 서선과 함께 군의 강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등에게 허와의 연락 역할을 맡는 등 후한 대우를 받았고, 친구와 같은 교제를 했다(이때 설제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강동의 손권이 북상하여 진등을 공격하자 조조에게 변설을 다해 원군을 요청했다. 감탄한 조조는 진교에게 가신이 될 것을 요구했지만, 진등이 궁지에 처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조조의 원군을 받은 진등은 철수하는 손권군을 추격하여 이를 크게 격파했다.[1]
2. 3. 조조와의 만남과 위나라 건국
진교는 성실하고 진실한 성격을 지녔으며,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주군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간언할 정도로 호탕한 면모를 보였다.
전란을 피해 일시적으로 강동으로 피난했으나, 원술과 손책의 초빙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태수 진등의 초빙에 응했다. 진등은 진교에게 허와의 연락 역할을 맡기는 등 후대했으며, 친구처럼 교제했다(이때 설제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서선전에 따르면, 서선과 함께 군의 강기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강동의 손권이 북상하여 진등을 공격하자, 진교는 조조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조조는 진교의 변설에 감탄하여 가신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진교는 진등이 궁지에 처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조조의 원군을 받은 진등은 철수하는 손권군을 추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이후 조조는 진교를 정식으로 초빙하여 사공연속, 상현령, 정남장사, 팽성 태수, 낙릉 태수, 위군 서부 도위를 역임하게 했다. 진교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 때문에 체포된 죄수를 사면하기도 했다. 위군 태수가 되었을 때는 전임자가 형벌의 경중에 얽매여 법률을 어긴 죄수를 장기간 미결 상태로 방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조사하여 단기간에 판결을 내렸다.
조조가 원정하면 승상 장사로 소환되어 수행했고, 원정에서 귀환하면 다시 위군 태수로 돌아가 서조속이 되었다. 조조의 한중 정벌에도 수행했으며, 귀환 후 상서가 되었다.
조조가 업으로 돌아가기 전 낙양에서 사망하자, 진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반해 조비에게 칙명을 기다리지 말고 위왕으로 즉위해야 한다는 취지의 진언을 했다. 이는 쟁란의 근원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진교의 처치가 적절하다고 평가한 조비는 즉위 후 진교를 이부·고릉정후·상서령으로 임명했다.
2. 4. 조비, 조예 시대의 활약과 죽음
조비가 즉위하자 이부·고릉정후·상서령이 되었다.[1] 조예 시대에는 동향후가 되어 600호의 소유지를 가졌다.[1] 조예가 상서령의 관청에 나아가 스스로 문서를 조사하려 했을 때, 천자와 신하의 직분을 설파하며 이를 간했다.[1] 시중·광록대부가 되었고, 사도까지 올랐다.[1]
237년에 사망했다.[1] 시호는 정후이다.[1]
장남 진본은 조방과 조모 시대에 정치에 참여하여, 통솔력과 행정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진북장군·가절·도독 하북 제군사에까지 승진했다.[1] 차남 진건은 사마소·사마염 부자에게 협력하여, 진의 성립과 발전에 협력한 인물이며, 『진서』에 입전되어 있다.[1] 진교전에 인용된 『세어』에서도 기략이 풍부한 발언이 실려 있다.[1] 진교의 자손은 서진·동진을 거쳐 귀족으로 이어졌다.[1]
3. 가계
4. 삼국지연의에서의 등장
참조
[2]
서적
삼국지 위서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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