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울 성당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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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 바울 성당 유적은 17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 통치 시기 예수회가 건설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가톨릭 성당의 유적이다. 이탈리아 선교사 카를로 스피놀라가 건설을 지휘했으며, 일본인 기독교 신자들이 건축에 참여하여 동양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1835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정면, 계단, 지하 납골당이 남아있다. 유적은 1990년대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되었으며,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마카오 역사 지구'에 등재되었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 노예 무역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인과 일본인 노예의 유해가 성당 근처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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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울 성당 유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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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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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Santo António, 마카오 |
종류 | 유적 |
재료 | 화강암 벽돌 청동 |
높이 | 26 미터 |
역사 | |
건축 | 1637–1640년 |
창립자 |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SJ |
원래 용도 | 가톨릭 교회 |
복원 | 1995년 |
복원 주체 | 마카오 문화국 |
건축 양식 | |
건축 양식 | 바로크 |
일반 정보 | |
관리 주체 | 마카오 문화국 |
공식 웹사이트 | 마카오 문화국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1602년부터 1640년까지 예수회에 의해 건설된 성 바울 성당은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가톨릭 교회였다.[1] 1835년 1월 26일 태풍으로 인한 화재로 파괴되었다.[1] 현재 유적은 돌로 된 정면과 68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2] 정면은 제단화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모 승천을 주제로 한다.[2]
성 바울 성당에는 성모 마리아가 일곱 머리의 레르나 괴물을 짓밟는 모습 등 아시아 전통에서 따온 독특한 이미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성모가 용의 머리를 짓밟는다"라고 적힌 중국어 글자로 설명되어 있다.[2] 건물 기단에는 돌로 조각된 여섯 마리의 중국식 수호 사자가 있다.[2]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마카오 문화국의 발굴 결과, 지하 납골당과 기초가 발견되어 건물의 건축 계획이 명확해졌다. 일본인 기독교 순교자와 예수회 신학교 설립자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를 포함한 수도승의 유골과 함께 많은 종교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적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수리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고 파사드는 콘크리트와 철골로 보강되었다. 관광객은 철제 계단을 통해 파사드 상단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나 유적 보존을 위해 계단 사용은 금지되었다. 몬테 요새가 유적을 내려다보고 있다.
2005년, 성 바울 성당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마카오 역사 지구"의 일부로 등재되었다.[6]
2. 1. 건설 배경
1602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같은 왕정 아래 있던 시기에 예수회가 성 바울 성당을 건설하였다.[1] 이 성당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 중 하나였다.[1] 건설 계획은 이탈리아인 선교사 카를로 스피놀라가 지휘했다.[4]당시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개신교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유럽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아시아 최초의 본격적인 기독교 대성당에 유럽의 가톨릭계 왕족들은 앞다투어 기증을 했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으로 인해 일본을 떠난 일본인 기독교 신자(기리시탄)들이 건설에 참여했다.[4] 특히 성당 조각 제작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참여하여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4]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가 일곱 머리의 히드라를 짓밟는 모습은 "성모가 용의 머리를 짓밟는다"라는 중국어 글로 설명되어 있다.[2] 건물 기단에는 돌로 조각된 여섯 마리의 중국식 수호 사자가 있다.[2]
2. 2. 소실과 유적
1835년, 성당은 태풍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었다.[5] 현재 유적은 남쪽의 돌로 된 파사드와 이 성당을 창설하고 유지한 예수회 신부들의 지하 납골당으로 이루어져 있다.[5] façade영어는 정면을, 納骨堂일본어는 납골당을 뜻한다. 파사드는 작은 언덕 위에 있으며, 68개의 돌계단이 이어진다.[2] 주강 삼각주(珠江デルタ)의 주요 항구 지위가 홍콩에 넘어가고 마카오의 중요성이 저하되자, 이 성당의 운명도 마카오와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기울었다.[5]2. 3. 한국과의 연관성
성 바울 성당에서 일했던 일본인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회에 의해 개종되었으며,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금지령으로 일본에서 추방되었다.[2]포르투갈 노예 무역에서 온 약 250명의 한국과 일본 노예의 유해가 성당 근처에 묻혀 있다.[3] 이는 당시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 지배와 노예 무역의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3. 건축 및 예술적 특징
성 바울 성당 유적은 1602년부터 1640년 사이에 예수회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 중 하나였다.[1] 건설 계획은 이탈리아인 선교사 카를로 스피놀라의 지휘하에 진행되었으며, 바테렌 추방령에 의해 일본을 떠난 기리시탄들이 성당 조각 제작에 참여했다.[4]
1835년 태풍으로 인한 화재로 파괴되었으나,[1] 남쪽의 돌로 된 파사드(정면)와 예수회 신부들의 납골당은 현재까지 남아있다.[5]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유적 발굴 결과, 지하 납골당과 기초가 발견되어 건물의 건축 계획이 명확해졌으며, 일본인 기리시탄 순교자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를 포함한 수도승의 유골과 함께 많은 종교 유물이 발견되었다.[5]
유적은 수리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으며, 파사드는 콘크리트와 철골로 보강되었다.[5]
3. 1. 건축 양식
현재 유적은 돌로 된 정면(Frontispiece (architecture))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68개의 돌계단이 이어지는 작은 언덕 위에 있다.[2]정면은 제단화(retable) 모양이며 성모 승천을 주제로 한다.[2] 일본인 기독교 장인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성 바울 성당 유적에는 성모 마리아가 일곱 머리의 레르나 괴물을 짓밟는 등 아시아 전통에서 따온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성모가 용의 머리를 짓밟는다"라고 적힌 중국어 글자로 설명되어 있다.[2] 건물 기단에는 돌로 조각된 여섯 마리의 중국 수호 사자가 있다.[2]
3. 2. 정면(파사드)의 조각
정면에는 아시아 전통에서 따온 이미지가 새겨져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일곱 머리의 레르나 괴물을 짓밟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는 중국어로 "성모가 용의 머리를 짓밟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2] 건물 기단에는 돌로 조각된 여섯 마리의 중국 수호 사자가 있다.[2] 그 밖에도 예수회 설립자들, 예수가 악령을 퇴치하는 모습, 날개를 펼친 비둘기 등이 조각되어 있다.[5]
4. 보존 및 활용
성 바울 성당 유적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파사드(건축물의 정면)가 기울어져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이에 마카오 문화국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유적을 발굴하고 역사적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지하 납골당과 기초가 발굴되어 건물의 건축 계획이 밝혀졌다. 또한, 일본인 기리시탄 순교자와 예수회 신학교 콜레지오(Colégio)의 설립자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를 포함한 수도승의 유골과 함께 많은 종교 유물이 발견되었다.
4. 1. 보존 노력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마카오 문화연구소(Instituto Cultural de Macau)의 주관으로 유적 발굴이 이루어져 역사적 과거를 연구하였다. 지하실과 기초가 발굴되어 건물의 건축 계획이 드러났다. 마카오 예수회 대학 설립자인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를 포함하여 중국인 기독교 순교자들과 수도회 성직자들의 유물과 함께 수많은 종교 유물이 발견되었다.유적은 마카오 정부에 의해 박물관으로 복원되었고, 정면은 콘크리트와 강철로 지지되어 정면의 미적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관광객들이 후면에서 정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강철 계단이 있었지만, 교회 보존에 대한 우려로 현재는 금지되었다.
4. 2. 현재 활용
유적은 수리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다. 파사드는 콘크리트와 철골로 보강되었다. 한때 관광객은 철제 계단으로 뒤쪽에서 파사드의 상단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나, 유적 보존을 위해 현재는 계단 사용이 금지되었다. 몬테 요새가 이 유적을 내려다보고 있다.2005년, 성 바울 성당 유적은 공식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마카오 역사 지구의 일부로 등재되었다.[6]
참조
[1]
뉴스
China
http://www.britishne[...]
British Newspaper Archive
2014-07-16
[2]
서적
Betting on Macau: Casino Capitalism and China's Consumer Revolu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3
[3]
비디오
KBS 역사추리 –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 2부 / KBS 19960913 방송
https://www.youtube.[...]
2024-02-09
[4]
웹사이트
マカオ政府公認ガイド
https://www.macao-gu[...]
2023-05-11
[5]
웹사이트
マカオ観光局
https://www.macaotou[...]
2023-05-09
[6]
웹사이트
UNESCO
https://whc.unesco.o[...]
202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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