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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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으로, 기원전 497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나 기원전 406/5년경 사망했다. 그는 극적 구성의 혁신, 등장인물 심화 묘사, 세 번째 배우의 추가 등을 통해 비극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엘렉트라》 등 7편의 현존하는 작품을 포함해 120편 이상의 희곡을 썼다. 소포클레스는 비극 경연에서 24회 우승하며 비극 예술의 완성자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운명, 자유 의지, 신의 섭리 사이의 갈등을 다루며, 오늘날까지도 문학, 연극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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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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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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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소포클레스 |
원어 이름 | Σοφοκλῆς |
로마자 표기 | Sophoklēs |
발음(고대 그리스어) | so.pʰo.klɛ̂ːs |
발음(영어) | /ˈsɒfəkliːz/ |
출생일 | 기원전 497/496년 경 |
출생지 | 콜로노스, 아티카 |
사망일 | 기원전 406/405년 (90–92세) |
사망지 | 아테네 |
직업 | 비극 시인 |
장르 | 비극 |
주요 작품 | |
작품 목록 | 아이아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왕 엘렉트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2. 생애
소포클레스의 생애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그의 전기가 남아 전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468년 디오니소스제의 비극 경연에서 아이스킬로스를 물리치고 첫 우승을 차지하며 극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경연은 심판을 제비뽑기로 정하는 관례 대신 아르콘이 키몬과 스트라테고이에게 승자를 결정하도록 요청하는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1]
소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전후로 정치에 참여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다. 페리클레스의 정치 노선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2] 델로스 동맹의 통솔자, 해군 제독 등으로 활약하며 아테네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사후에는 아테네 시민들이 덱시온이라는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2]
아테나이우스의 저서 ''향연''에는 소포클레스가 에우리피데스가 여자를 좋아했던 것과 같이 소년을 좋아했다는 언급이 있다.[22][23]
2. 1. 출생과 교육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7년아테네의 행정 구역 콜로노스에서 부유한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16살에는 살라미스 해전을 기리는 연회에서 선창 소년으로 뽑혀 노래했다.[2] 플루타르코스는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첫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현재 그의 첫 작품은 기원전 470년경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8]소포클레스는 아티카의 히페이오스 콜로노스라는 마을의 부유한 시민이었다. 그는 이 마을 출신으로 여겨진다.[52][56] 소포클레스가 태어난 해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 직전인 기원전 497년 또는 496년경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52][57]
그의 아버지 소피로스는 무기 제작 장인이었고, 그의 가족은 부유했다. 소포클레스는 높은 교양을 갖추었고, 기원전 468년 디오뉴시아 축제의 비극 경연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아테네의 비극 시인들 중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아이스킬로스를 제치고 얻은 영광이었다.[52][58]
2. 2. 극작가로서의 활동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68년 디오니소스제의 비극 경연에서 선배인 아이스킬로스를 물리치고 첫 우승을 차지하며 극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2]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심판을 제비뽑기로 정하는 관례 대신 아르콘이 키몬과 스트라테고이에게 승자를 결정하도록 요청하는 특이한 방식으로 승리했다.[11] 이후 소포클레스는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18회, 레나이아 축제에서 6회 우승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52]소포클레스는 세 번째 배우를 도입하고, 무대 미술을 사용하는 등 극작상의 혁신을 이루었다.[53] 세 번째 배우의 도입은 코러스의 역할을 축소하고,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더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게 했다.[53]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가 스케노그라피아(skenographia)라고 불리는 무대 미술을 처음 도입했다고 기록했다.[52] 그의 작품은 등장인물 묘사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이디푸스 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의 최고 걸작으로 언급되었다.[68]
소포클레스의 작품 대부분에는 숙명론적인 흐름과 함께 소크라테스적인 변론법의 초기 형태가 나타나며, 이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으로 이어졌다.[70][71]
2. 3. 정치 및 사회 활동
소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전후로 정치에 참여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다. 페리클레스의 정치 노선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43년 델로스 동맹의 통솔자 10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까지 여러 차례 해군 제독으로 활약했다. 그의 뛰어난 재능과 인품으로 아테네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2]기원전 443/2년, 소포클레스는 헬레노타미아이, 즉 아테나의 재무관 중 한 명으로서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부상 기간 동안 도시의 재정을 관리하는 데 기여했다.[2] 기원전 441년, ''소포클레스전''에 따르면, 그는 아테네의 행정관인 10명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페리클레스의 후배 동료로 선출되었으며, 사모스에 대한 아테네 원정에 참여했다.[13]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다".[14]
기원전 420년,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아테네에 도입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집에 아스클레피오스의 형상을 받아들였다.[15] 이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은 그에게 사후 칭호인 데키온(받는 사람)을 주었다.[16] 그는 또한 기원전 41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시칠리아에서 아테네 원정대가 괴멸된 것에 대응한 위원(프로부로이)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17]
2. 4. 만년과 죽음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06년에서 405년 사이 겨울에 90세 또는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생애 동안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의 승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유혈 사태를 목격했다.[2] 고대 그리스의 많은 유명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가지 이야기는 그가 숨을 쉬지 않고 안티고네의 긴 문장을 암송하려다 숨이 막혀 죽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아테네의 안테스테리아 축제에서 포도를 먹다가 질식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도시 디오니시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후 행복으로 죽었다는 것이다.[18] 몇 달 후, 한 희극 시인은 "뮤즈"라는 제목의 희곡에서 "소포클레스는 복 받았다. 그는 긴 삶을 살았고, 행복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었으며, 많은 좋은 비극을 쓴 작가였다. 그리고 그는 불행을 겪지 않고 삶을 잘 마무리했다."라며 찬사를 보냈다.[19]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아들들은 말년에 그를 무능력하다고 선언하려 했고, 그는 새로운 희곡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음으로써 법정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고 한다.[20]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이오폰과 손자 소포클레스(아리스톤의 아들)도 극작가가 되었다.[21]3. 작품 세계
소포클레스는 비극 예술의 완성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극작 경연에서 24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작가였다. 그는 123편에 달하는 작품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7편의 비극과 여러 단편들뿐이다.
소포클레스는 기존의 3부극 형식을 폐지하고 합창단의 규모를 늘리는 등 극의 형식을 과감하게 개혁했다. 또한 세 명의 배우가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기법을 도입하고, 소도구와 배경 그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극의 사실성과 몰입도를 높였다.[33] 이러한 혁신적인 시도들은 비극의 표현 범위를 넓히고,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을 가능하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가 무대 장치 회화('스케노그라피아')를 도입했다고 평가했지만, 비트루비우스는 사모스의 아가타르코스가 도입했다고 주장한다.[33]
소포클레스가 추구했던 것은 단순한 이야기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 속에 숨겨진 깊이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객관적인 대화 기법을 통해,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의 작품은 '해야 할 행위에 대한 결의'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영웅적 책임감'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힘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극이나 성격극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된다.
소포클레스는 디오뉘시아 축제와 레나이아 축제에서 50년 가까이 최고의 극작가로 인정받았다. 30번의 경연에 참가하여 18번이나 1등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모두 2등을 기록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55] 그의 명성은 그리스를 넘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여러 통치자들이 그를 궁정으로 초청하려 했지만, 소포클레스는 이러한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2]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으며 그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했다.[34]
현재 전해지는 7편의 비극 중,[35] 제작 연도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필록테테스(기원전 409년)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기원전 401년, 소포클레스 사후 상연) 두 작품뿐이다. 엘렉트라는 이 두 작품과 문체적으로 유사하여 소포클레스의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아이아스, 안티고네, 트라키스 여인들은 초기 작품, 오이디푸스 왕은 중기 작품으로 분류된다.[36]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은 대부분 초기 운명론과 그리스 비극의 전통적인 요소였던 소크라테스식 논리의 시작을 보여준다.[36][37]
플루타르코스의 『도덕론』에는 소포클레스가 작가로서 자신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다. 소포클레스는 첫 번째 단계에서 “아이스킬로스식의 과장된 수사”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83] 두 번째 단계에서는 아이스킬로스의 작법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84] 세 번째 단계에서는 대사 전달에 더욱 신경 써서 등장인물이 자연스러운 어투로 말하도록 노력하여, 개인적인 감정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85]
3. 1. 극작술의 혁신
소포클레스는 비극 예술의 완성자로 유명하며, 비극 경연에서 24회나 우승했다. 그는 3부극을 폐지하고 합창 대원을 늘리는 등 극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치밀한 구성과 완벽한 기교로 비극을 완성했다.[7]아이스킬로스와 달리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운명에 깃든 무한한 깊이를 추구했다. 그는 세 명의 배우를 동시에 대화하게 하는 기법, 소도구 연구, 배경화 등을 채용했다.[33] 당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극장 개축 및 관람 요금 지급 등 문화 진흥 정책으로 아테네의 연극 활동은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소포클레스 작품의 특징은 정교하고 치밀한 대화를 통해 모든 인물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을 단순한 입장의 노예가 아니라, 개개인 안에 제거할 수도, 서로 나눌 수도 없는 중핵적인 힘이 있음을 객관적인 대화 기법으로 지적한다. 드라마는 이러한 중핵적인 힘에 의해 지탱되며,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 왕>이 운명극이나 성격극으로 해석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에 사로잡혔던 인간이 자신의 의욕적인 성격을 일관함으로써 새로운 광명을 얻는 것도 소포클레스 작품의 특징이다.
소포클레스는 극적 구성의 혁신, 초기 극작가들보다 심화된 등장인물 개발,[7] 세 번째 배우 추가[33]로 유명하다. 이는 그리스 합창단의 역할을 축소하고 발전과 갈등의 기회를 증가시켰다.[7]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에게 무대 장치 회화인 '스케노그라피아'의 도입을 돌렸지만, 다른 사람에게 돌려지기도 한다.[33]
플루타르크의 저서 『덕의 진보에 관하여』에는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작가로서의 성장 과정을 논하는 구절이 있다.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단계를 거쳐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인물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어투로 변화했다고 말한다.[47]
소포클레스는 연작 비극을 만들지 않았으며,[86] 이는 하나의 작품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의 과감한 행동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변화를 가져왔다.[87]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세 번째 배우를 무대에 등장시킨 것과 무대 배경 미술을 배치한 것도 소포클레스의 창의성으로 여겨진다.[88][89][90] 세 번째 배우의 도입은 등장인물 간의 상호 작용과 갈등을 풍부하게 표현하고, 비극 전개에서 코러스의 중요성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87]
3. 2. 주요 작품 및 특징
소포클레스는 비극 예술의 완성자로 유명하며, 비극 경연에서 24회나 우승했다. 123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7편뿐이며, 그 외 다수의 단편들이 있다.소포클레스는 극에서 3부극을 폐지하고 합창 대원을 늘리는 등 극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치밀한 구성과 완벽한 기교로 비극을 완성시켰다.[7] 그는 세 명의 배우를 등용하여 동시에 대화를 갖게 함으로써 극을 진행시키는 기법을 사용하고, 소도구 연구나 배경화 등을 채용했다고 전해진다.[33]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가 무대 장치 회화('스케노그라피아')를 도입했다고 평가했지만, 비트루비우스는 사모스의 아가타르코스가 도입했다고 주장한다.[33]
소포클레스 작품의 특징은 화려함보다는 정교하고 치밀한 대화를 통해 인물들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 내면에 제거할 수도, 서로 나눌 수도 없는 중핵적인 힘이 깃들어 있음을 객관적인 대화 기법으로 지적한다. 드라마는 이러한 힘에 의해 지탱되며,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 왕》이 운명극이나 성격극으로 해석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에 굴복했던 인간이 의지를 통해 암흑에서 광명을 찾는 모습도 보여준다.
소포클레스는 디오뉘시아 축제와 레나이아 축제에서 50년 가까이 가장 찬사를 받은 작가였다. 30회 경연 중 18회 1위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모두 2위였다.[55] 그의 명성은 외국 통치자들이 궁정에 초대할 정도였지만, 초대를 수락하지 않았다.[2]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 최고 걸작으로 꼽았다.[34]
현존하는 희곡 7편 중,[35] 연대가 확실한 것은 《필록테테스》(기원전 409년)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기원전 401년, 사후 상연)뿐이다. 《엘렉트라》는 후기, 《아이아스》, 《안티고네》, 《트라키스 여인들》은 초기, 《오이디푸스 왕》은 중기 작품으로 추정된다.[36]
3. 2. 1. 테바이 3부작
테바이 3부작은 《오이디푸스 왕》(《오이디푸스 티란누스》 또는 《오이디푸스 더 킹》으로도 불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의 세 작품으로 구성된다.[38] 이 세 작품은 모두 오이디푸스 왕의 통치 기간과 그 이후 테베의 운명을 다룬다.[38] 이 작품들은 종종 한 권으로 출판되기도 하지만,[39] 소포클레스는 여러 해에 걸쳐 별도의 축제 경연을 위해 썼다. 테바이 3부작은 연속적인 서사로 제시되는 세 작품(3부작)도 아니고, 의도적인 연작도 아니다. 이 작품들에는 모순이 존재한다.[38] 소포클레스는 《에피고니》와 같이 테베와 관련된 다른 작품들도 썼지만, 단편만이 남아 있다.[40]오이디푸스 3부작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의 가족은 3대에 걸쳐 저주받았다.
-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주인공이다.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예언을 막기 위해 그의 유아 살해를 계획하지만, 그 일을 맡은 하인은 일련의 중개자들을 통해 아이를 아이 없는 부부에게 넘겨주고, 그들은 그의 과거를 모른 채 그를 입양한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델포이의 신탁의 예언을 알게 되고, 알고 있는 자신의 부모(이때 그는 자신이 입양된 것을 모른다)를 해치지 않고 운명에서 도망치려 한다. 오이디푸스는 하인들과 함께 길가에서 한 남자를 만나고, 그와 싸워 그 남자를 죽인다(그 남자는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였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통치자가 되어 과부가 된 왕비이자 자신의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델포이에서 나온 또 다른 진실이지만 혼란스러운 예언에 따라 진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테베를 떠난다. 극의 마지막에는 질서가 회복된다. 이 회복은 이오카스테의 형제 크레온이 왕이 된 것과, 오이디푸스가 망명 가기 전에 크레온에게 자신의 자녀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항상 수치심과 굴욕감을 짊어질 것이다.[41]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추방된 오이디푸스와 그의 딸 안티고네는 콜로노스 마을에 도착하여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를 만난다. 오이디푸스는 죽고 그의 아들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사이에 다툼이 시작된다. 그들은 싸우다가 서로 동시에 찔러 죽인다.
- 《안티고네》의 주인공은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이다. 그녀는 자신의 형제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도시 성벽 밖에 묻지 않고 야생 동물의 먹이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그를 묻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 땅의 왕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가 도시의 반역자였기 때문에 그의 매장을 금지했다. 안티고네는 그의 시체를 묻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크레온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결국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석방하도록 설득되지만, 그의 결정은 너무 늦었고 안티고네는 자살한다. 그녀의 자살은 크레온 왕과 가까운 다른 두 사람의 자살을 촉발한다. 안티고네와 결혼할 예정이었던 그의 아들 하이몬과,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을 잃고 자살한 그의 아내 에우뤼디케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들은 36년에 걸쳐 쓰여졌으며, 연대순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순서로 쓰여졌다. 또한 이 작품들은 함께 공연되는 3부작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 그룹의 희곡 중 남아있는 작품들이다. 그 결과, 몇 가지 불일치가 존재한다. 특히,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에서 크레온은 명실상부한 왕이며, 아폴론과 상의하여 오이디푸스를 테베에서 추방하기로 단독으로 결정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에서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의 딸들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돌보라는 지시를 받는다. 반면 다른 희곡들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아들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소포클레스는 이러한 불일치를 일관성 있는 전체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스메네는 오염된 가계 때문에 형제들이 처음에는 크레온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했지만, 결국 왕위를 차지하기로 결정하고, 각 형제가 서로의 계승권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설명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더욱 강력한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망명에 동의(429행, 테오도리디스 번역)했는데, 이는 아버지가 그들에게 던지는 가장 쓰라린 비난 중 하나이다.[38]
3. 2. 2. 그 외 작품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7편의 희곡 중 확실하게 연대가 확인되는 것은 《필록테테스》(기원전 409년)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기원전 401년, 그의 손자에 의해 사후에 상연됨)이다.[35] 다른 작품들 중 《엘렉트라》는 이 두 작품과 스타일이 유사하여 그의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아이아스》, 《안티고네》, 《트라키스 여인들》은 스타일 요소를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초기 작품으로 여겨지고, 《오이디푸스 왕》은 중기 작품으로 분류된다.[36]소포클레스의 테바이 3부작 외에도, 현재까지 네 편의 작품이 남아 있다. 《아이아스》, 《트라키스 여인들》, 《엘렉트라》, 그리고 《필록테테스》가 그것이며, 마지막 작품은 기원전 409년에 1등상을 수상했다.[42]
- 《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텔라몬의 아이아스가 오디세우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자살로 이끄는 이야기를 다룬다.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에게 아이아스의 장례를 허락하도록 설득하는 오디세우스의 노력이 돋보인다.
- 《트라키스 여인들》은 헤라클레스를 실수로 죽인 데이아네이라의 이야기를 다룬다. 데이아네이라는 헤라클레스의 옷에 독을 바르고, 이 독으로 인해 헤라클레스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는다. 진실을 알게 된 데이아네이라는 자살한다.
- 《필록테테스》는 렘노스 섬에 버려진 궁수 필록테테스의 이야기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록테테스의 활이 필요했던 그리스인들은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를 보내 그를 데려오려 하지만, 필록테테스는 그리스인들의 배신 행위 때문에 군대에 합류하기를 거부한다. 헤라클레스의 신의 개입만이 필록테테스를 트로이로 가도록 설득한다.
소포클레스와 관련된 120편 이상의 희곡 제목이 알려져 있지만,[43] 대부분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로크테테스》는 기원전 409년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손자가 주도하여 기원전 401년에 사후에 공연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리스 축제를 위해 희곡을 쓰는 관례는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사티로스극으로 구성된 4부작으로 제출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 희곡의 연대가 알려지지 않아 희곡들이 어떻게 그룹화되었는지도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테바이 3부작"은 소포클레스 생전에 함께 공연된 적이 없으며, 따라서 3부작이 아니다.
《이크네우타이》(《추적하는 사티로스들》)의 단편들은 1907년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44] 이들은 희곡의 약 절반에 해당하며, 에우리피데스의 《키클롭스》 다음으로 가장 잘 보존된 사티로스극이다.[44] 《에피고니》의 단편들은 2005년 4월 옥스퍼드 대학교의 고전학자들이 적외선 기술의 도움으로 발견하였다. 이 비극은 테베의 두 번째 포위 공격 이야기를 다룬다.[40]
소포클레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는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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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소포클레스 작품의 특징
그는 비극예술의 완성자로 유명하며, 비극 경연에서 24회나 우승했다. 123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7편뿐이며, 그 외 다수의 단편이 남아있다. 그는 3부극을 폐지하고 합창 대원을 늘리는 등 극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치밀한 구성과 완벽한 기교로 비극을 완성시켰다.[7]소포클레스가 추구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처럼 무한히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운명의 깊이였다. 그는 세 명의 배우를 동시에 대화하게 하여 극을 진행시키는 기법을 도입하고, 소도구와 배경화를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극장 개축과 관람료 지급 등 문화진흥정책으로 아테네 연극은 황금시대를 맞았다.
소포클레스 작품은 장대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정교하고 치밀한 대화를 통해 인물을 묘사한다. 인간을 단순한 입장의 노예가 아닌, 개개인 안에 제거할 수도, 나눌 수도 없는 핵심적인 힘이 있음을 객관적인 대화 기법으로 지적한다. 드라마는 '해야 할 행위에 대한 결의'로 시작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영웅적 책임감'으로 결정되는 과정이며, 이 핵심적인 힘에 의해 지탱됨을 보여준다.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 왕이 운명극이나 성격극으로 해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에 사로잡혔던 인간이 의욕적인 성격을 일관함으로써 암흑에서 새로운 광명을 얻는 것도, 성격 안에서 드라마의 근원을 발견하고 대화로 사건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소포클레스 작품이기에 가능했다.
소포클레스는 극적 구성의 혁신, 등장인물 개발 심화,[7] 그리고 세 번째 배우 추가[33]로 유명한데, 이는 그리스 합창단의 역할을 축소하고 발전과 갈등의 기회를 증가시켰다.[7] 아이스킬로스는 소포클레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품에 세 번째 배우를 채택했다.[7]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에게 무대 장치 회화인 '스케노그라피아' 도입을 돌렸지만, 다른 사람은 사모스의 아가타르코스에게 돌리기도 한다.[33]
기원전 456년 아이스킬로스 사후,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최고 극작가가 되었으며,[2] 18회의 디오니시아 축제와 6회의 레나이아 축제에서 우승했다.[2] 그의 명성은 외국 통치자들이 궁정에 초대할 정도였지만, 소포클레스는 초대를 수락하지 않았다.[2]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기원전 335년경)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 최고 업적으로 예시했다.[34]
현존하는 7편의 희곡 중[35] 《필록테테스》(기원전 409년)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기원전 401년, 사후 상연)만이 연대가 확실하다. 《엘렉트라》는 두 작품과 스타일이 유사하여 후기 작품으로, 《아이아스》, 《안티고네》, 《트라키니아이》는 초기 작품으로, 《오이디푸스 왕》은 중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소포클레스 희곡 대부분은 초기 운명론과 그리스 비극 전통의 주요 요소인 소크라테스적 논리의 시작을 보여준다.[36][37]
플루타르크의 『덕의 진보에 관하여』 7장에는 소포클레스의 작가적 성장 과정 논의가 있다. 플루타르크는 키오스의 이온이 쓴 『역병』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책에는 소포클레스와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헬레니즘 시대 비극 관련 대화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45] 이온은 소포클레스의 친구였고 그의 저서는 플루타르크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역병』에 소포클레스의 자기 발전 논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46] 플루타르크 글에 대한 일부 해석은 소포클레스가 아이스킬로스를 모방했다고 주장하지만, 문법적으로 맞지 않고, 아이스킬로스 작품을 조롱했다는 해석도 있다. 모리스 보우라는 다음 번역을 제시한다.
"아이스킬로스의 장엄함을 충분히 연마한 후, 나만의 고심 어린 독창성을 발휘하고, 이제 세 번째 단계에서 나는 인물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고 가장 효과적인 어투로 변화하고 있다." [47]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 작품 단계를 완료했다고 말하는데, 즉 아이스킬로스 스타일 모방 단계를 끝냈다는 의미다. 소포클레스의 아이스킬로스에 대한 견해는 복합적이었다. 경력 초기에는 작품을 모방할 만큼 존경했지만, 아이스킬로스 스타일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48] 모방을 계속하지 않았다. 아이스킬로스를 모방했던 소포클레스의 첫 단계는 "아이스킬로스적인 화려한 언어"로 특징지어진다.[49] 소포클레스의 두 번째 단계는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는 『아이아스』에서처럼 관객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50] 소포클레스는 발전에 대한 논의에서 세 번째 단계를 언급한다. 이 단계에서는 어투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등장인물들은 더 자연스럽고 개별적인 성격과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방식으로 말했다.[51]
아이스킬로스와 비교했을 때 소포클레스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의적 업적은 연작 비극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86] 소포클레스는 하나의 작품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의 과감한 행동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다.[87]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세 번째 배우를 무대에 등장시킨 것과 무대 배경 미술 배치는 소포클레스의 창의성이다.[88][89][90] 세 번째 배우 도입은 등장인물 간 상호 작용과 갈등을 풍부하게 표현했고, 비극 전개에서 코러스 중요성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87] 오레스테이아 관련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 작품은 『제사하는 여인들』처럼 코러스가 앞으로 나오지만, 소포클레스는 주인공 이름을 따서 『엘렉트라』라고 했다. 소포클레스 초기 구상은 에우리피데스 이야기 틀 안에 머물렀지만, 오레스테스 누이가 주역이 되었다. 소포클레스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인물이 비극 제목이 된다. 예외는 『트라키스의 여인들』이다.[87]
오이디푸스의 완고함은 윤리적 정당성이 없고, 가치관 반발과도 무관하다.[91] 소포클레스 두 작품을 제외하고, 남은 작품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작품 속 윤리적 행동 선택이 중심이라는 것이다.[92] 『안티고네』가 가장 잘 부합하며, 가족과 국가, 인정과 권력, 신앙과 법 준수 등 여러 “의무의 대립”(자클린 드 로밀리의 표현)이 대치된다.[93] 갈등은 인간 규칙과 신 규칙 갈등으로 귀결되지 않고, 장-피에르 베르낭 주석처럼 “완전한 경건과 완전한 불신앙이 대립되지 않는다. 신앙 형태에는 두 가지 다른 유형이 제시된다. 하나는 가족적이고 개인적인 신앙, 다른 하나는 공적인 신앙이며, 도시 국가 수호신이 국가 가치관과 하나가 된다.”[94] 오이디푸스 딸 안티고네 잘못은 광신에 있고, “죽음을 다스리는 디케”는 “하늘을 다스리는 디케”에게 말한다.[94]
『엘렉트라』에서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 살해 에피소드는 마지막에 삽입된다. 비극은 여주인공 심리를 펼쳐 보이고, 친모 살해로 이어지는 아버지 원수 갚기를 주제로 발전시킨다.[92] 나머지 작품들에도 윤리적 대립 구조가 보인다. 『아이아스』에서는 명예에 집착하는 주인공, 테크메사의 슬픔, 아이아스 명예 회복 시도와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겸손함, 아이아스 오만함이 대치된다. 『트라키스의 여인들』에서는 헤라클레스와 데이아네이라가 대치된다.[92] 『필로크테테스』는 네오프토레모스의 딜레마를 묘사한다. “정직한 것은, 영리한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며, 영웅은 타협을 거부한다.[95]
아이스킬로스 희곡에서는 신들이 중요하지만, 소포클레스 희곡에서 신들은 극중 사건에서 멀리 격리된 존재다. 볼드리에 따르면 소포클레스 희곡에는 그리스 비극 원점인 종교 의식 분위기가 없다.[96] 『아이아스』 서두 아테나만이 예외지만, 현존 작품 중 신들이 극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은 없다. 신들의 먼 거리는 인간 세계와 신들 세계 대조를 강조한다. 신들 세계가 코러스로 표현되는 작품은 『안티고네』[97] 및 『오이디푸스 왕』[98][99]이다. 소포클레스는 인간을 덧없는 존재,[100] 시간 앞에서 무력한 존재로 위치시킨다.[101] 『아이아스』에서 코러스는 “전능한 시간이 지워 버릴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노래한다.[102]
신들과 격리는 신적 개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소포클레스 희곡이 신들 개입을 받는 것은 신탁뿐이며, 아이스킬로스 희곡처럼 “신의 정의”가 제시되지 않는다. 신탁은 신이 정한 인간 배역표다.[99] 『트라키스의 여인들』 서두에서 데이아네이라는 신탁을 말한다.[103] 『아이아스』에서는 칼카스 예언을 전령이 전한다.[104] 필록테테스는 트로이에서만 치유될 수 있지만, 트로이에 도착할 수 있을까?[105] 신탁은 부정확하고 애매하므로, “희망을 품거나 잘못을 저지를 여지”가 있다.[107] 헤라클레스가 숨을 거두는 장면처럼, 예언하는 신들 간 타협이 해결책을 가져오기도 한다. 헤라클레스는 아버지에게 내려진 예언대로 죽는다. 죽음 안식을 주는 것은 네소스 피였다.[106] 신탁이 그대로 되지 않는 여지는, 인물 운명에 예상치 못한 전개를 가져온다. 로밀리에 따르면, 인간은 운명의 풍자 장난감이라는 생각 위에 소포클레스 희곡 구성(드라마투르기)이 성립한다.[107] 소포클레스에게 특징적인 것은, 비극 관객 눈에는 의미가 명확하지만, 극중 인물들에게는 명확하지 않은 비극적 아이러니다.[108]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비극에서 비극적 아이러니는 극중 인물이 다른 인물을 속이는 형태지만,[109][110] 소포클레스 비극에서는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극중 인물끼리 속이지 않는다. 『트라키스의 여인들』에서 데이아네이라가 헤라클레스를 죽이는 도구로 이용당하고, 영웅 죽음 앞에서 코러스가 희망 노래를 부른다.[111] 『아이아스』, 『안티고네』도 마찬가지다.[112][113][114] 소포클레스 비극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들이다.
신들 먼 거리와 비극적 아이러니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가장 성공적이다. “아버지 죽이고 어머니와 간음하는” 인물임을 아는 오이디푸스 “비극적 탐구”는 신탁에서 도망치기 위해 행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탐구로 고의 없던 행동 결과를 알게 되었다. 『오이디푸스 왕』 아이러니 완전성은 신들 잔혹함, 무관심 때문이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보호받는 운명에 있기 때문이다.[99] 경건한 소포클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이해하지 않더라도 숭배하는” 것이며, 크레온,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는 신들과 신탁을 경시한 대가를 치른다. 비극은 인간 잘못 때문에 초래된다.[115]
4. 영향
소포클레스는 아티카의 히페이오스 콜로노스 출신의 부유한 시민이자 희곡 작가였다. 기원전 497년 또는 496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52][57] 그는 높은 교양을 갖추었으며, 기원전 468년 디오뉴시아 축제의 비극 경연에서 아이스킬로스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명성을 얻었다.[52][58]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 승전 기념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찬가를 지휘했으며,[60] 정치인 키몬의 후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페리클레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기원전 443년부터 442년까지 델로스 동맹의 재무관인 헬레노타미아이를 맡아 아테네의 재정을 관리했다.[52] 기원전 441년에는 비극 『안티고네』의 성공에 힘입어 장군으로 선출되어 사모스 섬 원정에 참전하기도 했다.[61]
기원전 420년, 아스클레피오스 신을 아테네로 맞이하는 의식을 주관하여 사후 "덱시온"(맞이하는 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62] 기원전 413년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시칠리아 원정 실패에 대응하기 위한 특별 위원(프로불로스) 중 한 명으로 선출되기도 했다.[63]
기원전 406년에서 405년 사이 겨울, 90세 또는 91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페르시아 전쟁 승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그리스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경험했다.[52]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안티고네』의 긴 대사를 읊다가 숨이 막혔다는 등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64] 그의 아들 이오폰과 손자 소포클레스 역시 극작가의 길을 걸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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