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사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손사의는 청나라 건륭제 치세에 활약한 관료이자 군인이다. 1761년 진사가 된 후, 내각중서, 한림원시독 등을 거쳐 사천정주고, 미얀마 원정, 호남정주고 등 요직을 역임했다. 이후 대만 임상문의 난, 베트남 원정, 구르카와의 전쟁, 백련교도의 난 진압 등에서 활약했으며, 양광총독, 사천총독, 양강총독 등을 두루 거쳤다. 베트남 원정 실패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이후 다시 기용되어 여러 차례 봉기 진압에 공을 세웠다. 1796년 호북성에서 사망하여 공작 작위와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나라의 사천총독 - 보르지기트 키샨
보르지기트 키샨은 청나라 시대의 관료로, 형부 원외랑, 양강 총독, 쓰촨 총독, 즈리 총독 등을 역임했으며, 린쩌쉬를 대신하여 영국과 평화 협상을 진행했으나 파면된 후 관직에 복귀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다 사망했다. - 청나라의 양강총독 - 좌종당
좌종당은 청나라 말 군인이자 정치가로, 태평천국의 난, 둥간 혁명, 신장 수복 등 주요 사건에서 활약하며 신장 지역의 야쿱 벡의 난을 진압하고 신장성 설치를 건의하여 국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 청나라의 양강총독 - 심보정
심보정은 청나라 말기의 관료로, 임칙서의 사위이며,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양무운동 시기 푸저우 병창을 설립하여 해군 육성에 기여했으며, 모란사 사건 이후 일본과의 협상을 담당하고 대만 방위를 위해 행정 개혁을 단행하다가 사망 후 태자태보로 추증되었다.
손사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중국어 간체 | 孙士毅 |
중국어 병음 | Sūn Shìyì |
자 (字) | 지야 (智冶) |
호 (號) | 부산 (補山) |
관직 정보 | |
직위 | 대리사경 |
임기 시작 | 1789년 |
임기 종료 | 1789년 |
직위 1 | 문연각 대학사 |
임기 시작 1 | 1792년 |
임기 종료 1 | 1796년 |
직위 2 | 협판대학사 |
임기 시작 2 | 1791년 |
임기 종료 2 | 1792년 |
직위 3 | 사천총독 |
임기 시작 3 | 1795년 |
임기 종료 3 | 1796년 (대리) |
전임자 3 | 허린 (和琳) |
후임자 3 | 푸닝 (富寧) |
직위 4 | 양광총독 |
임기 시작 4 | 1789년 |
임기 종료 4 | 1790년 |
전임자 4 | 리스제 (李侍堯) |
후임자 4 | 보오닝 (博寧) (대리) |
직위 5 | 이부상서 |
임기 시작 5 | 1791년 |
임기 종료 5 | 1792년 |
공동 재임 5 | 푸캉안 |
전임자 5 | 펑위안루이 (彭元瑞) |
후임자 5 | 류융 |
직위 6 | 양강총독 |
임기 시작 6 | 1790년 |
임기 종료 6 | 1791년 |
전임자 6 | 푸송 (富嵩) |
후임자 6 | 창린 (常麟) |
직위 7 | 병부상서 |
임기 시작 7 | 1789년 |
임기 종료 7 | 1790년 |
공동 재임 7 | 칭구이 (慶桂) |
전임자 7 | 펑위안루이 (彭元瑞) |
후임자 7 | 리스제 (李侍堯) |
직위 8 | 양광총독 |
임기 시작 8 | 1786년 |
임기 종료 8 | 1789년 |
전임자 8 | 푸러훈 (富勒渾) |
후임자 8 | 푸캉안 |
임기 시작 9 | 1785년 |
임기 종료 9 | 1786년 |
전임자 9 | 수창 (舒常) |
후임자 9 | 푸러훈 (富勒渾) |
그 외 | 대학사, 군기대신 |
개인 정보 | |
출생 | 1720년 |
출생지 | 항저우, 저장성 |
사망 | 1796년 |
사망 장소 | 라이펑현, 후베이성 |
칭호 및 작위 | |
시호 | 문정 (文定) |
작위 | 일등모용공 (一等謀勇公) |
2. 생애
손사의는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활동한 문신이자 무신으로, 내정과 군사 양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791년(건륭 56년), 건륭제는 손사의를 이부상서, 협판대학사로 임명했다. 같은 해 청나라가 구르카와 전쟁을 벌이자, 사천총독을 도와 군량 조달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쌍안화령을 하사받고, 문연각대학사 겸 예부상서에 제수되었으며, 잠시 사천총독을 대행했다.
1795년(건륭 60년), 호남성 묘족 봉기를 진압했다. 1796년(가경 원년)에는 호북성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던 중 호북성 시남부 내봉현에서 사망했다.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정(文靖)을 받았으며, 손자 손균이 백작 작위를 세습했다.[4]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건륭 26년(1761년) 신사은과(辛巳恩科)에서 진사(進士)가 되었다.[4] 이듬해 1762년 내각중서(內閣中書)와 한림원시독(翰林院侍讀)에 제수되었다.[4]2. 2. 주요 관직 역임
건륭 33년(1768년), 무자과(戊子科) 사천정주고(四川正主考)로 임명되었다.[4] 이듬해 1769년 봄, 대학사 부항(傅恆)을 따라 군대를 통솔하여 미얀마 원정에 참여하였고, 군공으로 호부광서사낭중(戶部廣西司郞中)으로 제수되었다. 곧이어 경인향시(庚寅鄕試) 호남정주고(湖南正主考)로 임명되었고, 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승진하였으며 광서포정사(廣西布政使)로 부임하여 운남으로 파견되었다. 얼마 안가 순무(巡撫)로 승진하였으나 총독 이시요(李侍堯)가 탐독(貪瀆)으로 면직되자, 자신은 감찰을 소홀히 한 것으로 이리로 유배되어 수비를 맡았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문서에 기록되었는데, 건륭제가 그의 청렴함을 가상히 여겨 다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로 제수되었었고, 《사고전서》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편찬 이후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다시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 광서순무(廣西巡撫), 광동순무(廣東巡撫)로 부임하였으며, 건륭제의 조서를 받들어 서상(舒常)을 대신해 양광총독(兩廣總督) 겸 관월해관무(管粵海關務)를 맡았다.[4]2. 3. 군사적 업적
손사의는 1769년 미얀마 원정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웠다. 1786년 대만 천지회의 임상문 봉기, 1788년 베트남 떠이선 왕조의 응우옌후에가 후 레 왕조를 공격했을 때, 1791년 구르카와의 전쟁, 1795년 호남(湖南) 묘인(苗人)의 봉기, 1796년 호북(湖北) 백련교 교도의 봉기 등에서 군사 활동을 펼쳤다.[4]2. 3. 1. 대만 천지회 진압
건륭 51년(1786년) 대만 천지회의 임상문 봉기 진압을 위해 조주로 가서 경비하였다. 이듬해 1787년 태자태보로 승진하였다.[4]2. 3. 2. 베트남 원정
1788년, 베트남 떠이선 왕조의 응우옌후에가 후 레 왕조를 무너뜨리고 제위를 빼앗자, 후 레 왕조의 군주 레 민제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손사의는 군사를 이끌고 진남관에서 방비를 갖추었으며, 건륭제에게 이 일을 보고하였다. 건륭제는 손사의가 일의 경중을 인식하고 요점을 안다면서 표창하였고, 운남총독(雲南總督) 오대경과 병사를 나누어 두 갈래 길로 베트남을 공격하여 민제를 귀국 및 복위하도록 명했다.[4]손사의가 이끄는 양광(兩廣)의 병사는 파죽지세로 탕롱을 공파하니 오대경의 운남 병사보다 더욱 신속하였다. 건륭제는 크게 기뻐하며 손사의를 일등모용공(一等謀勇公)으로 봉하고 홍보석정(紅寶石頂)을 하사하였으나 손사의는 이를 사양하였다. 건륭제는 민제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책봉한 뒤 손사의에게 개선을 명했으나, 손사의는 군공을 탐하여 안남에 머물렀다.
1789년 정월, 응우옌후에는 춘절(春節)을 틈타 탕롱을 기습하였고, 민제는 진남관으로 도망쳤다. 청나라군은 대패하였고, 손사의는 창졸간에 관내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건륭제는 손사의가 조서를 받들어 회군하지 않았다고 하여 봉작에서 파하고, 홍보석정과 쌍안화령(雙眼花翎)을 철회하고 총독직을 해제하였으며, 진남관에 머물러 일을 다스리도록 명했다. 오래지 않아 수도로 소환한 뒤[5]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고, 군기대신(軍機大臣)으로 임명하였다. 이해 겨울, 사천총독(四川總督)으로 배속하였다가 곧이어 양강총독(兩江總督)으로 대신하였다. 이때 서주(徐州)에서 황하의 제방이 터지자 손사의는 모성(毛城)을 쌓고 패언(壩堰)을 펼쳐 이재민을 구원하였고, 건륭제의 지의(旨意)라고 일컬었다.
2. 3. 3. 구르카와의 전쟁
청나라가 廓爾喀|구르카중국어와 전쟁을 벌인 건륭 56년(1791년), 건륭제는 손사의에게 사천총독을 도와 급료를 조달하도록 명했다. 궤운(饋運)에 결함이 없었으므로 그 공로로 다시 쌍안화령(雙眼花翎)을 하사하였고,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 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제수하였으며, 잠시 사천총독을 대신하도록 했다.[4]2. 3. 4. 백련교도의 난 진압
가경 원년(1796년), 호북의 백련교 교도들이 봉기를 일으켜 사천 유양(酉陽) 경내로 침입하자 손사의는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고,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공로로 삼등남작(三等男爵)으로 봉해졌다.[4]2. 4. 사망과 사후
가경 원년(1796년), 백련교 교도들이 호북에서 봉기를 일으켜 사천 유양(酉陽) 경내로 침입하자, 손사의는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다.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공로로 삼등남작(三等男爵)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6월, 호북성 시남부(施南府) 내봉현(來鳳縣)의 군중에서 졸하였다. 공작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그의 손자인 손균(孫均)이 백작 작위를 세습하였다.[4]3. 저서
손사의가 지은 시를 모아 만든 百一山房詩集|백일산방시집중국어 시부 12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4. 평가
손사의는 국가의 안정을 위해 헌신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당대 청나라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베트남 떠이선 왕조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초기 성과와 타이완 천지회(天地會) 봉기 진압에서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4] 또한, 구르카와의 전쟁에서 보급을 원활하게 처리한 공로도 인정받았다.[5]
행정 관료로서 손사의는 여러 지역의 총독과 순무를 역임하며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황하 제방 붕괴와 같은 자연재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이재민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손사의는 청렴한 관리로도 유명했다. 건륭제는 그의 청렴함을 가상히 여겨 여러 차례 포상했을 정도였다. 그의 검소한 생활과 백성을 위한 헌신은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손사의는 군사적 능력과 행정적 역량을 겸비한 인물로,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충신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청렴함과 백성을 위한 노력은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조
[1]
서적
Brotherhoods and secret societies in early and mid-Qing China: the formation of a tradition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Regents of nations: systematic chronology of states and their political representatives in past and present : a biographical reference book, Volume 3
K. G. Saur
[3]
서적
A Chinese Biographical Dictionary
[4]
문서
《舊典備征》卷二 朱彭壽,「賜紅寶石頂者孫土毅 乾隆五十三年」
[5]
문서
《春冰室野乘》裡說,孫士毅在乾隆帝接見時,送給皇帝一隻鼻煙壺。後來和珅向皇帝索去。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