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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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언종은 1937년 전라남도 고흥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공직에 입문했다. 내무부 차관, 전라남도지사, 체신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광주광역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체신부 장관 재임 중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고, 이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5공화국 출범 이후 1982년 6월 23일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어[6] 5년 동안 3부 부장을 하면서 전국 17만 지역정화위원 조직관리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임 전라남도 도지사가 지방 청와대 집기 은폐 사건으로 사임하자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내무부 차관에 임명되었다.[7][8] 내무부 차관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후보 전담 경호팀을 구성하고 투·개표장 집단 소란에 대비하는 등 공정선거관리 임무를 수행했으며,[9]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재신임되었다.
[1]
뉴스
매일경제
1987-09-15
2. 생애
1988년 3월 8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하여 "4월 총선에 이어 5월에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농번기와 올림픽 대비 문제 등에 비추어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다"며 "가능한 아무리 늦어도 올림픽 이후 연내에는 지방의회를 구성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10] 이용훈 의원이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문제를 제기하자 법제처 의견을 따랐다고 답했다.[11]
1988년 5월 19일,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역 출신 관료를 시도지사에 배치하는 대폭 개각이 이루어지면서 내무부 차관에서 경질되었다.[12] 내무부 차관 재임 기간은 2개월 14일로, 노태우 정부 최단명 각료 기록이었다.[13] 1988년 10월 4일 전남도지사로 임명되었다. 전남도지사 재임 중 윤근환 농림수산부 장관에게 고추 수매 물량 증대를 요청하였고,[14] 국정감사에서는 건설공사 공개입찰 원칙을 약속했다.[15] 1988년 11월 15일 고향 고흥군 초도 순시에서 환영을 받았으며,[16] 11월 21일 5.18 민중항쟁 부상자 동지회 회원들의 도청 점거 농성에 대해 김형중의 사인 조사를 약속하였다.[17] 1989년 2월 21일에는 도지사 공관에 화염병 투척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본인의 부덕한 소치"라며 사과했다.[18][19]
1989년 3월 22일 시장·군수회의에서 "대통령 특별담화의 본 뜻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소임 완수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20] 1989년 9월 19일 국정감사에서 중소기업진흥공단 자금 지원 문제에 대해 담보능력 부족을 언급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21] 1990년 6월 21일 시도지사 인사에서 경질되자 "호남 인사에 대한 보복적 인사조처"라는 평가를 받았다.[23]
1990년 전남도지사를 마지막으로 내무부에서 물러난 후, 1990년 12월 27일 노재봉 총리 등을 임명하는 개각을 하면서 체신부 장관에 임명되었다.[24] 체신부 장관으로서 통신방송위성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는 등 미래 정보화 사회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고,[26] 결국 사업자 선정을 백지화하고 "차기 정부에서 선정한다"고 밝혔다. 연기군 관권 부정사건 발생 후 김영삼 민자당 총재가 체신부 장관 경질을 요구하였으나[28] 유임되었으며, 김영삼 정부 출범 후 1993년 2월에 체신부 장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경선 과정에서 과거 군사정권 행정관료 경력으로 비판받았다.[37] 광주광역시장에 당선되면서 "지방자치제 정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고, 1996년 8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5.18 관련 피고인들에 대해 정치적 고려에 의한 사면은 안된다는 것이 광주시민들의 여론"이라고 말했다.[39] 1998년 6월 재선에 도전했으나 새정치 국민회의 경선에서 고재유에게 밀려 후보 선출에 실패했다.[41]
광주광역시장 재선 실패 후, 1993년 2월 24일 사법연수원 등록을 거쳐 3월에 입소했다.[29] 1995년 2월 16일 24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를 개업했다.[29] "행정경험을 살려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며 "무료변론 등을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30]
2. 1. 초기 생애 및 공직 입문
1937년 전라남도 고흥군의 여산 송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1] 1962년 전라남도 내무국 수습행정 사무관으로[1] 공직에 입문하여 전라남도에서 근무하였다. 1963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지만,[2] 이후 내무부 지방행정과장,[3] 장흥군수, 광주시장을 거쳐 경상남도와 경기도에서 부지사를 역임하였다.
2. 2. 행정 관료 경력
宋彦宗|송언종중국어은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1962년 전라남도 내무국 수습행정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1] 이후 전라남도에서 근무하다 1963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으나,[2] 내무부 지방행정과장,[3] 장흥군수, 광주시장을 역임하고 경상남도와 경기도에서 부지사로 재직하였다. 경상남도 부지사 시절에는 도지사와 함께 갑당 300KRW하는 은하수 담배를 애용하여, 도청 내 직원들도 은하수를 애용하게 하였다.[4]
5공화국 출범 이후인 1982년 6월 23일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6] 5년 동안 3부 부장을 역임하며 전국 17만 지역정화위원 조직관리 능력을 인정받았다. 1987년 10월 4일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내무부 차관에 임명되었다.[7][8] 내무부 차관으로 재임하면서 대통령 후보 경호팀을 구성하고 투·개표장 소란 대비 등 공정선거관리 임무를 수행하였으며,[9]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재신임되었다.
1988년 3월 8일 국회 법사위에서 "4월 총선에 이어 5월에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농번기와 올림픽 대비 문제 등에 비추어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다"고 발언했다.[10] 1988년 5월 19일 내무부 차관에서 경질되었는데, 이는 노태우 정부 최단명 각료 기록(2개월 14일)이었다.[13]
1988년 10월 4일 문창수 전남도지사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전남도지사 재임 중 윤근환 농림수산부 장관에게 고추 수매 물량 증대를 요청하였고,[14] 국정감사에서는 건설공사 공개입찰 원칙을 약속했다.[15] 1988년 11월 15일 고향 고흥군 초도 순시에서 고향 친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16] 1988년 11월 21일 5.18 민중항쟁 부상자 동지회 회원들의 도청 점거 농성에 대해 김형중의 사인 조사를 약속하였다.[17] 1989년 2월 21일에는 도지사 공관에 화염병 투척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본인의 부덕한 소치"라며 사과하고 폭력 반대 공감대 형성을 촉구했다.[18][19]
1989년 3월 22일 시장·군수회의에서 "대통령 특별담화의 본 뜻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소임 완수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20] 1989년 9월 19일 국정감사에서 중소기업진흥공단 자금 지원 문제에 대해 담보능력 부족으로 인한 탈락을 언급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21]
1990년 6월 21일 시도지사 인사에서 경질되자 "호남 인사에 대한 보복적 인사조처"라는 평가를 받았다.[23]
2. 3. 5공화국 시절
5공화국 출범 이후 1982년 6월 23일 송언종은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어[6] 5년 동안 3부 부장을 하면서 전국 17만 지역정화위원 조직 관리를 맡았다.[6]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내무부 차관에 임명되었으며,[7][8] 내무부 차관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후보 전담 경호팀을 구성하고 투·개표장 집단 소란에 대비하는 등 공정선거관리 임무를 수행했다.[9]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에도 재신임받아 내무부 차관으로 계속 기용되었다.[9] 1988년 5월 19일 내무부 차관에서 경질되었는데,[12] 이는 노태우 정부 최단명인 2개월 14일 만의 경질이었다.[13] 전남도지사 재임 중에는 5.18 민중항쟁 부상자 동지회 회원 30여 명이 도지사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자 김형중의 사인 조사를 약속했고,[17] 1989년 2월 21일에는 도지사 공관에 화염병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18]
2. 4. 내무부 차관 및 전라남도지사
1987년 9월 14일 전임 전라남도 도지사가 지방 청와대 집기 은폐 사건과 관련하여 사표를 제출해 의원면직되자, 전두환 대통령은 송언종을 내무부 차관에 임명했다.[7][8] 내무부 차관으로 재직하면서 10명 이내의 대통령 후보 전담 경호팀을 구성하고 투·개표장 집단 소란에 대비하는 등 공정선거관리 임무를 수행했으며,[9]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재신임을 받아 내무부 차관으로 계속 기용되었다.
1988년 6월로 예정되었던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988년 3월 8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하여 "4월 총선에 이어 5월에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농번기와 올림픽 대비 문제 등에 비추어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다"며 "가능한 한 아무리 늦어도 올림픽 이후 연내에는 지방의회를 구성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라고 밝혔다.[10] 이용훈 의원이 "지방자치법 본문에 자치단체장을 선출하기로 해놓고 부칙에는 이와 반대로 임명 조항을 경과규정으로 삽입해도 법 체계상 맞는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하자, "임명 조항을 본문 중에 단서로 넣기보다는 부칙에 넣는 것이 좋다는 법제처 의견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변했다.[11]
1988년 5월 19일,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우리 지역 사람을 시도지사로 배치해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시도지사에 지역 출신 관료를 배치하는 대폭 개각이 이루어지면서 송언종은 내무부 차관에서 경질되었다.[12] 그의 내무부 차관 재임 기간은 2개월 14일로, 노태우 정부 최단명 각료 기록을 세웠다.[13]
1988년 10월 4일, 도지사 공관 집기 은폐와 관련하여 사의를 표명한 문창수 전남도지사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전남도지사 재임 중 윤근환 농림수산부 장관이 벼 작황을 살펴보기 위해 헬기 편으로 전국을 순회하다 급유차 광주 비행장에 잠시 기착했을 때, 급히 비행장으로 차를 몰아 "장관님, 전남의 고추 재배 면적이 전국의 12%입니다. 그런데 배정된 정부의 고추 수매 물량은 1180톤에 불과합니다. 이를 최소 3천 톤으로 늘려주셔야 합니다"라며 면담을 요청했다.[14]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주암다목적댐 공사를 재벌업체인 동아그룹과 독점 수의계약한 이유와 군도와 지방도 시설공사까지 대기업에 수의계약을 상신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앞으로 건설공사는 법이 허용하는 한 원칙적으로 공개입찰로 처리하겠다"면서 "모든 공사는 도내 업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변했다.[15]
1988년 11월 15일, 고향인 고흥군을 초도 순시했을 때 고향 친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여산 송씨 대표 송중석은 "5공화국 비리 중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가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며 "문중에선 도지사에게 어떤 청탁이나 이권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의했다"고 말했고, 고흥군 번영회 회장도 "고향 출신 도지사를 돕는 길은 어떤 청탁도 하지 않는 것"이라며 "고흥군민들은 송 지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16]
1988년 11월 21일, 5.18 민중항쟁 부상자 동지회 회원 30여 명이 전남도청 도지사실을 점거하고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 구속 처단과 광주항쟁 때 입은 부상으로 목포 애중원에 입원 중 숨진 김형영의 사인 규명 및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김형중의 사인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17] 1989년 2월 21일, 송언종 도지사가 출근을 위해 공관 정문을 여는 순간 정문 경비실에 사과탄 1개와 화염병 10개가 투척되었고, 괴한들이 정문에서 30미터 떨어진 도지사 전용 숙소 1, 2층에 화염병 20개를 던지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도지사 집무실 거실, 침실 등 100여 평과 경비실 60여 평이 전소되었다.[18] 송언종은 "본인의 부덕한 소치로 이 같은 불상사가 일어났다"며 "어떤 경우든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화염병을 던지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19]
1989년 3월 22일,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 평가 보류 발표 이틀 후 열린 도내 시장·군수 회의에서 "대통령 특별담화의 본뜻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일체의 동요나 혼란 없이 소임 완수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야당세가 강한 전남 지방에서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돼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했다"고 덧붙였다.[20] 1989년 9월 19일 전남도청 국정감사에서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시설근대화 자금이 전남도에선 1개 업체도 지원받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시설근대화 자금과 창업지원자금을 타도보다 적게 받은 게 사실"이라며 "추천을 해도 담보 능력이 없어 탈락되어 안타깝다"고 해명했다.[21]
"너무 고집이 세다"고 할 만큼 강직하고 "조리에 맞지 않으면 안 통한다"고 할 정도로 '조리', '송곳'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22] 송언종은 1990년 6월 21일 차관 및 시도지사 인사에서 경질되었다. 이는 "호남 인사에 대한 보복적 인사 조처에 따른 희생양"이라는 평가와 함께 "원칙이나 조리에 맞지 않으면 안 통하는 도지사의 고집이나 소신이 여야 의원의 압력이나 기업들의 이권 청탁이 통하지 않아 부담스러웠을지는 몰라도 역대 도백 중 그만한 사람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23]
2. 5. 체신부 장관
宋彦宗|송언종중국어은 1990년 12월 27일 노재봉 총리 등을 임명하는 개각을 하면서 체신부 장관에 임명되었다.[24] 체신 행정에 대해 경험이 전혀 없었던 송언종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기초적인 용어에서부터 복잡한 통신체계에 이르기까지 물어서 실무 국장을 당황하게 했지만,[25] 체신부 장관으로서 통신방송위성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는 등 미래 정보화 사회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관련하여 "선정작업을 끝내고 사업자를 확정발표할 때 평가기준 및 채점내용을 낱낱이 공개하겠다"고 했지만 '2차 집계표' 중에 290점이 배점된 혼선방지대책의 적정성이란 항목에 선경 223점, 포철 203점, 코오롱 200점을 받은 것으로 공표되었고 구체적인 세부 득점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26] 그러자 선경이 사업권을 반납하자 "행정행위의 취소는 중대한 하자를 전제로 해야 하는데 체신부의 사업자 선정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면서 "사업권 반납이 선경 자체의 귀책 사유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다음 사업자 선정에 선경의 참여가 제한될 수 밖에 없다"며 "선경을 상대로 허가 대상자 지정 통보를 취소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27] 이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백지화하고 "차기 정부에서 선정한다"고 밝혔다.
연기군 관권 부정사건이 발생하자 1992년 9월 16일 김영삼 민자당 총재가 체신부 장관을 포함하여 대폭적인 경질을 요구하였으나[28] 유임되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 2월에 체신부 장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2. 6. 광주광역시장 당선 및 5.18 관련 활동
1995년 민주당 광주광역시장 후보로 선출된 송언종은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문민정부 탄생 배경도 5.18로 정리될 수 있다"라고 말하자, "불의와 독재에 항거해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라고 생각하지만 현 집권층에는 가해자의 일부가 포함돼 있어 과연 공정한 처리가 되겠는가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38] "당시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전라남도 국방대학원 학생 신분이었다"라고 답했다.[38]
광주광역시장에 당선된 후, 1996년 8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5.18 관련한 피고인들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고려에 의한 사면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광주시민들의 여론"이라고 말했다.[39]
2. 7. 광주광역시장 재선 실패 및 변호사 활동
송언종은 1995년 민주당 신기하 원내총무의 천거로 광주시장 후보로 나섰다.[35] 1995년 4월 25일 열린 민주당 대의원 대회에서 "광주가 민주화 성지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의 시범시가 되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하며 지지를 호소했다.[36]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125표를 얻어 86표를 얻은 이영일 후보를 제치고 광주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36] 후보 선출 소감으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정권교체의 밑거름이 되겠다"고 밝혔다.[37]
경선 과정에서 과거 군사정권에서 행정관료로 일했던 경력이 비판받기도 했다.[37]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문민정부 탄생 배경도 5.18로 정리될 수 있다"고 하자, 송언종은 "불의와 독재에 항거해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했다.[38] 5.18 당시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는 질문에는 "전라남도 국방대학원 학생 신분이었다"고 답했다.[38]
광주광역시장에 당선된 후 "지방자치제 정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한 송언종은 1996년 8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5.18 관련 피고인들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고려에 의한 사면은 안된다는 것이 광주시민들의 여론"이라고 말했다.[39]
1998년 6월 재선에 도전하며 "재임 시절 시작한 지역 사업을 마무리하고 21세기에 대비한 도시발전기틀을 확고히 다지겠다"고 했으나,[40] 1998년 4월 25일 열린 새정치 국민회의 대의원 경선에서 고재유 전 광주 광산구청장에게 밀려 후보 선출에 실패했다.[41]
광주광역시장 재선 실패 후, 송언종은 1993년 2월 24일 사법연수원 등록을 거쳐 3월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29] 고시 합격 32년만인 1995년 2월 16일 291명과 함께 24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를 개업했다.[29] 그는 "공직을 그만둔 뒤 여생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한 끝에 행정경험을 살려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며 "무료변론 등을 통해 어려운 사람이나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고 싶다. 특히 행정소송 분야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고 말했다.[30]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사법연수원 원장 표창을 받았다.[31]
3. 경력
기간 직책 ~ 1967년 10월 9일 내무부 서무과 행정계장 내무부 행정과장 1967년 10월 10일 내무부 기획관리실장[42] 1967년 5월 6일 전라남도 내무국 지방과장[43] 전라남도 기획감사실장[44] 1970년 3월 3일 전라남도 장성군 군수[45] 1971년 8월 20일 전라남도 장흥군 군수[46] 1972년 6월 5일 내무부[47] 1974년 11월 13일 내무부 행정과장[48] 1976년 7월 24일 내무부 지방국 새마을담당관[49] 1976년 8월 9일 내무부 새마을담당관[50] 1977년 7월 20일 ~ 1979년 7월 15일 제30대 광주시장 1979년 7월 10일 국방대학원 입교[51] 1979년 7월 14일 내무부 본부[52] 1979년 10월 17일 이사관 승진[53] 1980년 8월 1일 경상남도 부지사[54] 1981년 6월 25일 경상남도 제1부지사[55] 1981년 12월 2일 경기도 부지사[56] 1982년 6월 23일 ~ 1987년 9월 13일 사회정화위원회 위원(1급 상당)[57] 1987년 9월 14일 ~ 1988년 2월 제39대 내무부 차관 1988년 3월 4일 ~ 1988년 5월 19일 제40대 내무부 차관 1988년 10월 4일 ~ 1990년 6월 20일 제24대 전라남도지사 1990년 12월 27일 ~ 1993년 2월 25일 제39대 체신부 장관
4. 역대 선거 결과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95년 지방 선거 민주당 469,570표 (89.71%) 1위 당선 초선, 민선 1기
5. 수상
수상 내역 1995년 2월 16일 사법연수원 원장 표창장[58] 제58회 광주저국체전 유공자 문교부 장관 감사장[58]
6. 가족 관계
배우자 박수자 자녀 슬하 3남 2녀 (송상헌, 송상민, 송상희, 송상경, 송상호)
참조
[2]
뉴스
경향신문
1987-09-14
[3]
뉴스
동아일보
1988-10-05
[4]
뉴스
경향신문
1980-10-03
[5]
뉴스
매일경제
1982-06-24
[6]
뉴스
동아일보
1983-01-27
[7]
뉴스
동아일보, 매일경제
1987-09-14
[8]
뉴스
매일경제
1988-10-04
[9]
뉴스
경향신문, 동아일보
1987-12-09
[10]
뉴스
동아일보
1988-03-08
[11]
뉴스
동아일보
1988-03-09
[12]
뉴스
경향신문
1988-05-20
[13]
뉴스
동아일보
1992-10-17
[14]
뉴스
경향신문
1988-11-02
[15]
뉴스
경향신문
1988-10-13
[16]
뉴스
경향신문
1988-11-18
[17]
뉴스
한겨레
1988-11-22
[18]
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9-02-22
[19]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9-03-01
[20]
뉴스
동아일보
198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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