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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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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은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진 캐나다인들을 지칭하며, 캐나다 역사와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1세기 초 바이킹 시대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의 북미 대륙 진출이 기록되었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는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로 캐나다 해양주, 온타리오, 퀘벡, 브리티시컬럼비아 등지에 정착하여 게일어를 사용하고 문화를 유지했다.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은 캐나다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오늘날에도 타탄 데이, 씨족 모임 등을 통해 스코틀랜드 문화 유산을 기념하고 있으며, 각 주와 준주에는 공식 타탄이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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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기본 정보
센서스 구역별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의 비율
총 인구4,799,010명
총 인구 대비 비율캐나다 전체 인구의 13.9% (2016년)
주요 거주 지역온타리오주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앨버타주
노바스코샤주
매니토바주
퀘벡주
뉴브런즈윅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사용 언어영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캐나다 게일어 방언)
프랑스어
스코트어
종교기독교 (장로교, 성공회, 침례교, 로마 가톨릭교회, 연합교회 포함)
관련 민족스코틀랜드인
잉글랜드인
스코치-아이리시
메티스
얼스터 스코트계 캐나다인
잉글랜드계 캐나다인
잉글랜드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로랜드 스코트인
얼스터 스코트인
기타 영국계 캐나다인
언어별 명칭
스코틀랜드 게일어Canèidianaich Albannach
프랑스어Canadiens écossais

2. 역사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은 캐나다와 오랜 역사를 함께 해왔다. 초기 스코틀랜드 정착민들은 탐험가, 상인, 군인 등 다양한 형태로 캐나다에 도착했다.

18세기와 19세기 스코틀랜드에서는 여러 어려움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로 이주하게 되었다. 1688년, 1715년, 1745년의 자코바이트 봉기 실패 후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고, 게일어권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추방된 후 캐나다로 이주했다.[1][2] 또한 영국 농업 혁명으로 인한 고지대와 저지대 정리 과정에서 크로프트(임대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1846년 감자 작물이 아일랜드 대기근을 일으킨 곰팡이 질병으로 피해를 입어 기근으로 인해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캐나다는 풍부한 토지와 일자리,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여 이민을 유인했다. 캐나다 정부는 1867년부터 1920년대 사이에 스코틀랜드 이민자를 모집하기 위해 에이전트를 파견하여 인구 밀도가 낮은 서부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이러한 스코틀랜드의 어려움은 꾸준한 이민자 유입을 만들어냈다. 대규모 이민은 1760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1815년까지 스코틀랜드인은 해양주의 3대 주요 민족 집단 중 하나를 형성했다. 이민자 대부분은 미숙련 게일어 사용 농부였으며, 해양주는 그들이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얼스터 스코틀랜드인 집단은 1761년 노바스코샤주 트루로로 이주했고, 1772년에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게일족의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1773년에는 배 ''헥터''가 200명의 게일족을 피크투로 데려와 새로운 하이랜드 이민의 흐름을 시작했다. 18세기 말에는 케이프 브레턴 섬이 스코틀랜드 게일족 정착의 중심지가 되었다.

1783년 미국에서 도망쳐 나온 영국 왕실에 대한 스코틀랜드 왕당파들이 온타리오주 동부와 노바스코샤에 도착했고, 1803년 토마스 더글라스 경 (제5대 셀커크 백작)은 800명의 식민주의자들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로 데려왔다. 1811년에는 레드 리버 식민지를 설립했다.

뉴브런즈윅주에는 1761년 하이랜드 연대가 포트 프레데릭에 주둔했고, 1762년에는 스코틀랜드 상인들이 이 지역을 찾았다. 미국 독립 혁명 중과 후에 스코틀랜드 출신 왕당파들이 도착하면서 스코틀랜드인들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캐나다 게일어는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온타리오의 글렌게리 카운티와 같은 지역에서 모국어로 사용되었으며,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였다.[1]

다음은 캐나다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의 인구 역사이다.[2][3][4][5][6][7][8][9][10][11][12][13]

연도인구
1871549,946
1881699,863
1901800,154
19111,027,015
19211,173,625
19311,346,350
19411,403,974
19511,547,470
19611,902,302
19711,720,390
19811,415,200
19863,918,055
19914,248,365
19964,260,840
20014,157,210
20064,354,155
20114,714,970
20164,799,005


2. 1. 초기 스코틀랜드 정착 (Early Scottish settlement)

스코틀랜드인들은 캐나다와 오랜 역사를 함께 했다. 알렉산더 매켄지 경의 이름을 딴 매켄지 만(유콘)을 비롯하여 스코틀랜드 탐험가와 상인들의 이름을 딴 마을, 강, 산이 많다. 캘거리 (스코틀랜드 해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또는 밴프, 앨버타 (밴프, 애버딘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와 같이 스코틀랜드 지명을 딴 곳도 있다. 노바스코샤는 라틴어로 "새로운 스코틀랜드"를 의미한다.

캐나다 지역에서 스코틀랜드인에 대한 최초의 문서 기록은 에릭 더 레드 사가와 바이킹빈란드 원정(1010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뉴펀들랜드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 왕자 토르핀 칼세프니는 두 명의 스코틀랜드 노예를 빈란드로 데려갔다. 스코틀랜드인들이 공격받지 않고 하루를 보낸 후, 바이킹들은 해안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이 원정은 3년 후 포기되었다.

지크니라는 선장의 1398년 항해는 오크니 백작 헨리 I 싱클레어의 항해로 추정되며, 이 역시 대서양 캐나다와 뉴잉글랜드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바스코샤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일부 지역(청록색)에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2. 1. 1. 이주 요인 (Push and Pull factors)

18세기와 19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여러 어려움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로 이주하게 되었다. 일부는 1688년, 1715년, 1745년의 자코바이트 봉기 실패 이후 정치적 망명을 선택했다. 전통적으로 게일어권은 가톨릭 신자였고, 많은 게일족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추방된 후 캐나다로 이주했다.[1][2]

1759년 이후에는 영국 농업 혁명으로 인해 양 방목을 위한 고지대와 저지대 정리 과정에서 크로프트(임대 토지)에서 쫓겨난 고지대 농부들이 주로 이민을 왔다.

또 다른 이민 요인은 기근이었다. 1846년에는 감자 작물이 아일랜드 대기근을 일으킨 곰팡이 질병으로 피해를 입었고, 대부분의 고지대 크로프터들은 감자를 식량원으로 매우 의존하고 있었다. 일부 지주들은 기근의 영향을 줄이려 노력했지만, 많은 지주들은 추방을 선택했다. 특히 클루니의 존 고든은 많은 크로프터들을 인버네스 거리에서 살게 하고, 그의 헤브리디스 크로프터들을 캐나다로 강제 이송하여 비판을 받았다. 더 동정심 많은 지주들은 무료 항해를 제공하기도 했다. 작물 실패는 185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기근 구호 프로그램은 반 영구적인 작전이 되었다. 1847년부터 10년 동안 16,000명 이상의 크로프터가 캐나다와 호주로 이주했다.

캐나다는 풍부한 토지와 일자리,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여 이민을 유인했다. 캐나다 정부는 1867년부터 1920년대 사이에 서부 캐나다에 정착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이민자를 모집하기 위해 에이전트를 파견했다. 이들은 인구 밀도가 낮은 서부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여러 도시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에이전트들은 포스터, 강연, 팸플릿 등을 통해 캐나다 생활의 장점을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에 동의했지만, 에이전트들은 미국, 뉴질랜드,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경쟁에 직면했고, 이민 반대자들은 캐나다의 어려움을 경고하기도 했다. 에이전트들이 '이민 열풍'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이민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불안감을 자극했다.[3]

2. 2. 대규모 이주 (Large-scale migration)

18세기와 19세기 스코틀랜드의 어려움은 꾸준한 이민자 유입을 만들어냈다. 일부는 1688년, 1715년, 1745년의 자코바이트 봉기 실패 이후 정치적 망명을 모색했다.[1] 게일어권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많은 게일족이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추방된 후 캐나다로 이주했다.[1]

1759년 이후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주로 영국 농업 혁명으로 인해 양 방목을 위해 고지대와 저지대 정리 과정에서 크로프트 (임대 토지)에서 쫓겨난 고지대 농부들이었다.[1]

다른 사람들은 기근의 결과로 이주했다. 1846년에는 감자 작물이 아일랜드 대기근을 일으킨 곰팡이 질병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고, 대부분의 고지대 크로프터들은 감자를 식량원으로 매우 의존했다.[1] 크로프터들은 끔찍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고, 일부 지주들은 기근이 그들의 소작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많은 지주들은 단순히 추방에 의존했다.[1] 특히 클루니의 존 고든은 많은 크로프터들이 인버네스의 거리에서 살게 되면서 신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 고든은 선단을 고용하여 그의 헤브리디스 크로프터들을 캐나다로 강제 이송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편리하게 캐나다 당국에 버려졌다.[1] 더 동정심 많은 일부 지주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무료로 항해를 제공했다.[1] 작물 실패는 185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기근 구호 프로그램은 반 영구적인 작전이 되었다.[1] 1847년 이후 10년 동안, 고지대 전역에서 16,000명 이상의 크로프터가 캐나다와 호주로 해외 이주했다.[1]

범스테드(Bumsted, 1981)는 1760년부터 1860년 사이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영국에서 이민을 갔다고 언급한다.[1] 1815년 이전에는 이민이 권장되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해양주로의 이민은 이러한 대규모 이동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였으며, 1815년까지 스코틀랜드인은 해양주의 3대 주요 민족 집단 중 하나를 형성했다.[1] 이민자 대부분은 고립된 지역 사회에 모여 살았던 미숙련 게일어를 사용하는 농부였다.[1] 해양주는 그들이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들을 끌어들였다.[1]

대규모의 얼스터 스코틀랜드인 집단은 그들 중 다수가 처음에는 뉴햄프셔에 정착했다가 1761년 노바스코샤주 트루로로 이주했다.[1] 1772년에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게일족의 이주 물결이 시작되었고, 1773년에는 배 ''헥터''가 200명의 게일족을 피크투로 데려와 새로운 하이랜드 이민의 흐름을 시작했다.[1] 이 마을의 슬로건은 "뉴 스코틀랜드의 발상지"이다.[1] 18세기 말에는 케이프 브레턴 섬이 스코틀랜드 게일족 정착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곳에서는 스코틀랜드 게일어만 사용되었다.[1]

1783년 미국에서 도망쳐 나온 수많은 영국 왕실에 대한 스코틀랜드 왕당파들이 온타리오주 동부에 있는 글렌게리 카운티와 노바스코샤에 도착했다.[1] 1803년, 몰락한 소작농 (고지대의 소작 농민)의 곤경에 공감했던 토마스 더글라스 경 (제5대 셀커크 백작)은 800명의 식민주의자들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로 데려왔다.[1] 1811년, 그는 나중에 매니토바주가 될 지역의 300000km2에 스코틀랜드 식민지화 프로젝트로서 레드 리버 식민지를 설립했다.[1] 이는 허드슨만 회사가 부여한 토지였으며, 셀커크 양도라고 불린다.[1]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PEI) 또한 스코틀랜드 게일족 정착민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1] PEI의 저명한 정착민 중 한 명은 글렌알라데일의 존 맥도날드였는데, 그는 컬로든 전투 이후 대규모로 게일족을 노바스코샤로 보낼 생각을 했다.[1] 맥도날드라는 이름은 18세기 말에 하이랜드 출신의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정착민들이 유입된 섬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다.[1] 또 다른 대규모의 게일족 집단은 1803년에 도착했다.[1] 이 이주는 주로 스카이 섬에서 왔으며, 셀커크 백작이 조직했다.[1]

뉴브런즈윅주는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의 고향이 되었다.[1] 1761년에는 하이랜드 연대가 포트 프레데릭에 주둔했다.[1] 2년 후 케이스네스 출신의 윌리엄 데이비드슨이 정착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1762년에 브루스 선장이 측량한 주변 토지는 많은 스코틀랜드 상인들을 끌어들였다.[1] 그들의 수는 미국 독립 혁명 중과 후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천 명의 왕당파들이 도착하면서 더욱 늘어났다.[1]

뉴브런즈윅과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연대 중 하나는 1776년에 창설된 "왕의 제1 미국 연대"였다.[1] 이 연대는 대부분 하이랜드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전통적인 킬트를 입고 백파이프 소리에 맞춰 싸웠다.[1] 이 연대는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워싱턴 군대를 격파하면서 명성을 떨쳤다.[1] 전쟁 후 해산되었을 때,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뉴브런즈윅에 정착했다.[1] 스코틀랜드와 얼스터에서 지속적인 이민자 유입으로 인해 1843년까지 뉴브런즈윅에는 30,000명이 넘는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다.[1]

캐나다 게일어는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온타리오의 글렌게리 카운티와 같은 "영국어 사용" 캐나다의 많은 지역에서 모국어로 사용되었다.[1] 게일어는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였다.[1]

3. 인구 통계 (Demography)

캐나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1871년부터 2016년까지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2][3][4][5][6][7][8][9][10][11][12][13] 1981년 조사에서는 복수 민족 기원 응답이 불가능하여 인구가 과소 집계되었고, 1996년 이후 조사에서는 "캐나다인"이라는 새로운 민족 기원 범주가 생겨나면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의 인구가 실제보다 적게 집계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3. 1. 인구 (Population)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인구 변동 (1871–2016)
연도인구전체 인구 대비 비율 (%)
1871[2]549,94615.8
1881[2]699,86316.2
1901[3]800,15414.9
1911[3]1,027,01514.3
1921[3]1,173,62513.4
1931[3]1,346,35013.0
1941[3]1,403,97412.2
1951[3]1,547,47011.0
1961[3]1,902,30210.4
1971[4]1,720,3908.0
1981[5]1,415,2005.9
1986[6][7]3,918,05515.7
1991[8]4,248,36515.7
1996[9]4,260,84014.9
2001[10]4,157,21014.0
2006[11]4,354,15513.9
2011[12]4,714,97014.4
2016[13]4,799,00513.9


  • 출처: 캐나다 통계청[2][3][4][5][6][7][8][9][10][11][12][13]
  • 1981년 캐나다 인구 조사에서는 복수 민족 기원 응답이 포함되지 않아 인구가 과소 집계되었다.
  • 1996년 이후의 인구 조사에서는 "캐나다인" 민족 기원 범주가 생성되어 인구가 과소 집계되었다.

3. 2. 지역별 분포 (Geographical distribution)

지방 및 준주별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2001-2016)
지방/준주2016[13]2011[12]2006[11]2001[10]
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
온타리오주
2,107,29515.91%2,080,54516.45%2,101,10017.47%1,843,11016.33%
브리티시컬럼비아주
860,77518.88%833,29019.27%828,14520.33%748,90519.36%
앨버타주
704,20017.70%670,95518.81%661,26520.31%556,57518.92%
노바스코샤주
272,88030.04%282,80531.21%288,18031.91%263,06029.31%
퀘벡주
215,0252.70%196,6702.54%202,5152.72%156,1402.19%
매니토바주
208,06016.77%210,81517.95%209,17018.45%195,57017.72%
서스캐처원주
193,33018.06%190,45018.88%182,79019.16%172,30017.89%
뉴브런즈윅주
134,45518.40%146,23019.87%142,56019.81%127,63517.73%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50,68536.29%53,96039.28%54,29040.45%50,70038.02%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34,6506.77%32,8106.47%34,9256.98%30,2955.96%
유콘 준주
8,29523.62%8,34025.05%7,00523.20%6,24521.89%
노스웨스트 준주
6,09014.81%5,68513.93%5,87514.31%5,19013.99%
누나부트 준주
3,2659.18%2,4207.63%2,0256.90%1,4755.53%
캐나다
4,799,00513.93%4,714,97014.35%4,719,85015.11%4,157,21014.03%


4. 지역별 역사와 문화 (Regional History and Culture)

스코틀랜드인들은 캐나다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캐나다 전역의 여러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와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알렉산더 매켄지 경의 이름을 딴 매켄지 만(유콘)과 같이 스코틀랜드 탐험가와 상인들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많은 마을, 강, 산들이 있다. 또한, 캘거리(스코틀랜드 해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또는 밴프, 앨버타(밴프, 애버딘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와 같이 스코틀랜드의 지명을 따서 명명된 곳도 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캐나다가 되기 전 지역에서 에릭 더 레드 사가와 바이킹빈란드 원정(1010 AD)에서 최초로 문서화된 기록을 남겼다. 바이킹 왕자 토르핀 칼세프니는 두 명의 스코틀랜드 노예를 빈란드로 데려갔고, 이들은 해안가를 달리며 탐험의 안전을 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오크니 백작 헨리 I 싱클레어로 추정되는 지크니라는 선장의 1398년 항해 역시 대서양 캐나다와 뉴잉글랜드에 도달한 것으로 주장된다.

현대에 들어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민자들은 은행업, 노동 조합,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캐나다의 사회, 정치, 경제 역사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대서양 연안의 노바스코샤 주는 "새로운 스코틀랜드"를 의미하는 라틴어이며, 스코틀랜드인들은 한때 유럽인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운동의 선봉을 형성했다.

4. 1. 노바스코샤 (Nova Scotia)

스코틀랜드인들은 노바스코샤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바스코샤 인구의 29.3%를 차지하는 가장 큰 민족 집단이다. 노바스코샤는 라틴어로 "새로운 스코틀랜드"를 의미하며, 노바스코샤 기는 스코틀랜드의 성 안드레아 십자기와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을 조합하여 디자인되었다.

1620년 스코틀랜드 정착민들이 노바스코샤를 잠시 식민지화했지만, 1624년 조약에 의해 제거되었고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에 넘어갔다. 이후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난 후 노바스코샤에 왕당파들이 재정착하고 스코틀랜드의 고원지대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스코틀랜드 정착이 크게 가속화되었다.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의 게일어 영향은 특히 음악에서 이 지역의 문화를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0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약 900명의 노바스코샤인들이 게일어에 능숙하며,[17] 노바스코샤 게일어 사무소는 현재 이 지역에 약 2,000명의 스코틀랜드 게일어 사용자가 있다고 밝혔다.[18]

핼리팩스에 있는 달하우지 대학교는 해양 지방에서 가장 큰 대학교로, 1818년 스코틀랜드 귀족 조지 램지에 의해 설립되었다. 앤티고니시에 있는 세인트 프란시스 자비에 대학교 역시 스코틀랜드인인 콜린 프란시스 매키넌 가톨릭 주교에 의해 설립되었다.

머독(1998)은 케이프 브레턴 섬이 게일어 문화의 마지막 보루라는 대중적인 이미지가 16세기 이후 섬의 복잡한 역사를 왜곡한다고 지적한다. 원래 미크마크 족 거주민, 아카디아 프랑스인, 아일랜드인, 뉴잉글랜드 출신 왕당파, 저지대 스코틀랜드인, 영국인들은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갈등뿐만 아니라 협력과 통합을 포함하는 역사에 모두 기여했다. 고원 스코틀랜드인들은 19세기 초에 가장 큰 공동체가 되었으며, 그들의 음악, 민속, 언어 유산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현재는 주로 관광객을 겨냥한 인공적인 상품화된 '타탄 씨족 인형 문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머독은 지적한다.[20]

4. 2. 퀘벡 (Quebec)

오래된 동맹 시대부터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프랑스에 고용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사령관 드 라메제 소령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퀘벡의 초대 영국 총독 역시 스코틀랜드인인 제임스 머레이였다. 그는 프랑스 사령관인 드 라메제 소령으로부터 도시의 열쇠를 받았다. 초기에 이 지역에 도착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소작농과 어부였다. 프랑스령 캐나다의 첫 번째 식민지화 물결 동안 ''돈 드 디유''(Don de Dieu)호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스코틀랜드인 에이브러햄 마틴이 이를 조종했다.

1802년에는 주로 로스셔 출신의 대규모 스코틀랜드인들이 ''넵톤''(Nephton)호를 타고 퀘벡에 정착하기 위해 도착했다.[1] 그들의 후손 중 많은 사람들이 몬트리올의 비즈니스, 금융 및 종교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1] 당시 황무지였던 이곳에는 뉴욕 트라이온 카운티에서 온 초기 정착민들이 많았고, 혁명 기간 동안 많은 하이랜더들이 합류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왕의 로열" 연대 전체가 합류했다.[1]

제임스 맥길


맥길 대학교글래스고에서 이주한 상인이자 정치가인 제임스 맥길이 유증한 재산에서 나온 수입으로 1821년에 설립되었다.[2] 초대 총장은 스트라찬의 제자인 스코틀랜드인 존 베툰이었는데, 설립이 지연되어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2] 또 다른 부유한 스코틀랜드인 피터 레드패스는 박물관, 도서관 및 대학교 강좌에 자금을 지원했다.[2]

4. 3. 온타리오 (Ontario)

글렌개리 군은 스코틀랜드 또는 게일어적 배경을 많이 가진 역사적인 지역이다. 이는 고지대 강제 이주 이후 많은 게일인들이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게일어 / 캐나다 게일어는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였지만, 화자 수는 크게 감소했다. 글렌개리의 맥스빌 공립학교는 여전히 이 언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글렌개리 하이랜드 게임이 열리며, 스코틀랜드 문화를 기념하기 위해 많은 스코틀랜드식 경연이 열린다. 글렌개리의 주요 스코틀랜드 도시는 오늘날 온타리오에 위치한 콘월이었다. 1786년, 맥도날드호가 520명의 새로운 개척민들을 싣고 그린노크에서 퀘벡에 도착하면서 이곳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곧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와 이곳을 가장 중요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공동체 중 하나로 만들었다. 글렌개리 씨족들은 나폴레옹과의 전쟁 중 영국 정부의 금수 조치 전에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 허드슨 베이 회사에서 은퇴한 많은 관리들도 글렌개리 정착지에 합류했다.

온타리오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유명한 스코틀랜드 지역은 스코틀랜드 군사적 기원을 가진 퍼스 정착지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종전 후 실업과 고통이 심화되자 영국 정부는 이전 정책을 뒤집고 이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1815년, 세 척의 수송선인 '아틀라스', '밥티스트 머천트', '보로시'가 그린노크에서 어퍼 캐나다로 출항했다. 1812년 전쟁이 끝난 후, 해산된 연대의 많은 군인들이 그들과 합류했다. 1816년에는 얼스터 출신의 사람들이 이 지역에 도착했다. 많은 퍼스 가문들이 주 및 국가 정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코틀랜드 기원의 교육 기관으로는 킹스턴의 퀸스 대학교가 있으며, 이곳은 저명한 학자 조지 먼로 그랜트의 노력으로 설립된 "캐나다의 애버딘"으로 불린다. 많은 교육 기관이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토론토 온타리오에 위치한 존 A. 맥도날드 컬리지에이트 인스티튜트이다. 이 학교의 문장에는 캐나다 지도와 맥도날드 씨족의 상징(흰색 작은 왕관, 갑옷을 입은 주먹, 교차된 작은 십자가)이 포함되어 있다. 빨간색, 로열 퍼플, 흰색은 존 경의 가족 씨족인 클랜라날드의 타탄에서 주를 이룬다.

4. 4. 브리티시 컬럼비아 (British Columbia)

허드슨 베이 회사는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식민 정착에 기여했는데, 이 회사는 스코틀랜드계 지배층이 주도했기 때문에 초기 식민 관료 중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이거나 스코틀랜드계 후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제임스 더글러스 경(아버지 출신이 스코틀랜드), 윌리엄 프레이저 톨미, 존 로스가 있었다.[4]

스코틀랜드의 영향력은 밴쿠버와 광역 브리티시컬럼비아 사회의 문화적 혼합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예를 들어, 밴쿠버의 세인트 앤드루스 캘리도니아 협회는 1886년 밴쿠버 시와 같은 해에 설립되었다. 1887년 세인트 앤드루스 날에, 협회는 해스팅스와 콜롬비아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맥도너 홀에서 성대한 세인트 앤드루스 무도회를 열었고, 도시 인구의 거의 절반이 참석했다. 시는 여전히 BC 하이랜드 게임으로 마무리되는 스코틀랜드 문화유산 주간을 기념한다.[5]

빅토리아에서는 도시의 가장 인상적인 랜드마크 중 두 곳인 크레이그다록 성과 해틀리 성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던스뮤어 가문에 의해 의뢰되었는데, 이 가문의 석탄 재벌 로버트 던스뮤어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민 와서 밴쿠버 아일랜드의 가장 부유한 사업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두 성은 스코틀랜드 바로니얼 양식 건축을 빅토리아의 매우 중요한 랜드마크에 도입했으며, 두 곳 모두 도시의 중요성으로 인해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로버트의 아들 제임스 던스뮤어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총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부총독이 되었다.[6]

캐나다 빅토리아의 크레이그다록 성, 스코틀랜드 바로니얼 양식 건축의 예


밴쿠버의 많은 지역 지명이 스코틀랜드 기원이다. 예를 들어, 돌라턴 지역은 로버트 달 선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웨스트 밴쿠버의 최초 유럽인 정착민인 존 로슨은 그의 재산을 가로지르는 "번" 또는 강 옆에 호랑가시나무를 심었고, 그의 지역 이름을 "홀리번"이라고 지었다. 아이오나 섬은 이전에 도널드 맥밀란이라는 스코틀랜드 정착민의 이름을 따서 맥밀란 섬이라고 불렸다. 웨스트 밴쿠버의 일부는 스코틀랜드의 던다레이브 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05년, 현재 밴쿠버의 웨스트 41번가에서 최근에 매킨논이라는 성을 가진 스코틀랜드 젊은 부부가 이 지역에 정착하여 새로운 역의 이름을 짓도록 초대받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전기 철도의 관리자인 R.H. 스털링은 매킨논 부인에게 윌슨 로드(오늘날 웨스트 41번가)에 있는 시외 전차 정류장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게를로크에 있는 그녀의 가족 집, 케리데일의 이름을 따서 "케리스 데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케리데일은 "요정의 작은 자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곧 케리스데일로 변질되었다.[7]

브리티시컬럼비아 개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영향력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주 전역의 거리, 공원, 개울 및 기타 지리적 특징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프레이저 강과 마운트 더글러스(PKOLS)이다.[8]

5. 문화 (Culture)

오늘날 캐나다에는 스코틀랜드 기념품이 넘쳐난다. 레이(2005)는 이를 타탄 데이, 씨족 모임, 하이랜드 게임, 영화 ''브레이브 하트'' 상영과 같이 고향의 농촌적이고 남성적이며 저항적인 과거의 이야기, 서사 또는 신화에 의해 형성된 스코틀랜드성에 대한 감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19]

다른 캐나다인들은 타탄주의를 게일 정체성의 피상적이고 상업화된 표현으로 거부하고, 애틀랜틱 게일 아카데미 및 게일 칼리지와 같은 기관을 통해 스코틀랜드 게일어와 문화를 수용한다. Comhairle na Gàidhlig는 "노바스코샤를 게일어, 문화, 그리고 공동체가 번성하는 곳으로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전념하는 단체이다.[21]

6. 저명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Notable Scottish-Canadians)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1847–1922): 과학자, 발명가
  • 노먼 베순 (1890–1939): 외과의사이자 의료개혁가[1]
  • 조지 브라운 (1818-1880): 기자, 정치인[2]
  • 제임스 캐머런: 영화감독[3]
  • 존 샌드필드 맥도널드 (1812–1872): 1862년 캐나다 자치령 총리, 1867년 온타리오 주 초대 총리[4]
  • 존 A. 맥도널드 경(1815–1891): 캐나다 자치령의 초대 총리[5]
  • 알렉산더 매켄지: 캐나다의 초대 자유당 총리(1873–78)[6]
  •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1838년 어퍼 캐나다 반란 주도, 캐나다 급진주의의 상징[7]
  • 윌리엄 맥두걸: 연방의 아버지 중 한 명[8]
  • 리처드 맥브라이드 경(1870–1917): 1903년부터 1915년까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총리[9]
  •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1874–1950): 캐나다 총리를 세 번 역임, 자유당 대표 30년 이상 역임[10]

7. 주 및 준주 타탄 (Provincial and territorial tartans)

노바스코샤 타탄은 캐나다 최초의 공식 주 타탄이다.


모든 주와 준주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타탄을 가지고 있지만, 퀘벡과 누나부트 준주는 예외적으로 타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없다. 타탄은 스코틀랜드 정착민들에 의해 처음 캐나다에 도입되었으며, 1955년 노바스코샤가 타탄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최초의 주였다. 여러 타탄은 스코틀랜드 문장관인 로열 라이온 법원의 서적에 등록되어 있다.[22]

참조

[1] 웹사이트 Immigration and Ethnocultural Diversity Highlight Tables http://www12.statcan[...] statcan.gc.ca 2017-10-25
[2] 웹사이트 Historical statistics of Canada, section A: Population and migration - ARCHIVED https://www150.statc[...] Government of Canada 1999-07-29
[3] 웹사이트 1961 Census of Canada : population : vol. I - part 2 = 1961 Recensement du Canada : population: vol. I - partie 2. Ethnic groups. https://publications[...] Government of Canada 2013-04-03
[4] 웹사이트 1971 Census of Canada: population : vol. I - part 3 = Recensement du Canada 1971 : population : vol. I - partie 3. Introduction to volume I (part 3). https://publications[...] Government of Canada 2013-04-03
[5] 웹사이트 1981 Census of Canada: volume 1 - national series: population = Recensement du Canada de 1981: volume 1 - série nationale : population. Ethnic origin. https://publications[...] Government of Canada 2013-04-03
[6] 웹사이트 Census Canada 1986 Profile of ethnic groups https://publications[...] Government of Canada 2013-04-03
[7] 웹사이트 1986 Census of Canada: Ethnic Diversity In Canada. https://publications[...] Government of Canada 2013-04-03
[8] 웹사이트 1991 Census: The nation. Ethnic origin. https://publications[...] Government of Canada 2013-04-03
[9] 웹사이트 Data tables, 1996 Census Population by Ethnic Origin (188) and Sex (3), Showing Single and Multiple Responses (3), for Canada, Provinces, Territories and Census Metropolitan Areas, 1996 Census (20% Sample Data) https://www12.statca[...] Government of Canada 2019-06-04
[10] 웹사이트 Ethnic Origin (232), Sex (3) and Single and Multiple Responses (3) for Population, for Canada, Provinces, Territories, Census Metropolitan Areas and Census Agglomerations, 2001 Census - 20% Sample Data https://www12.statca[...] Government of Canada 2013-12-23
[11] 웹사이트 Ethnic Origin (247), Single and Multiple Ethnic Origin Responses (3) and Sex (3) for the Population of Canada, Provinces, Territories, Census Metropolitan Areas and Census Agglomerations, 2006 Census - 20% Sample Data https://www12.statca[...] Government of Canada 2020-05-01
[12] 웹사이트 Ethnic Origin (264), Single and Multiple Ethnic Origin Responses (3), Generation Status (4), Age Groups (10) and Sex (3) for the Population in Private Households of Canada, Provinces, Territories, Census Metropolitan Areas and Census Agglomerations, 2011 National Household Survey https://www12.statca[...] Government of Canada 2019-01-23
[13] 웹사이트 Ethnic Origin (279), Single and Multiple Ethnic Origin Responses (3), Generation Status (4), Age (12) and Sex (3) for the Population in Private Households of Canada, Provinces and Territories, Census Metropolitan Areas and Census Agglomerations, 2016 Census - 25% Sample Data https://www12.statca[...] Government of Canada 2019-06-17
[14] 웹사이트 Scottish Studies - History https://www.sfu.ca/s[...] Simon Fraser University 2017-09-11
[15] 웹사이트 BBC – History – Scottish History https://www.bbc.co.u[...]
[16] 논문 Gaelic in Canada: new evidence from an old census. Dunedin Academic Press 2006
[17] 웹사이트 Canada 2006 Census http://www12.statcan[...]
[18] 웹사이트 "Oifis Iomairtean na Gaidhlig/Office of Gaelic Affairs" http://www.gov.ns.ca[...]
[19] 문서 Rae (2005)
[20] 간행물 Cape Breton: Canada's 'Highland' Island? 1998
[21] 웹사이트 Mission Statement http://www.gaelic.ca[...] Gaelic Council of Nova Scotia 2017-01-14
[22] 웹사이트 Symbols of Canada — Tartans http://www.pch.gc.ca[...] Government of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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