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퍼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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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펜서 퍼시벌은 1809년부터 1812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다. 그는 법조인 출신으로, 1796년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801년 법무차관, 1802년 법무장관을 역임했다. 1807년 재무장관이 되었고, 1812년 하원 로비에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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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퍼시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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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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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The Right Honourable |
출생일 | 1762년 11월 1일 |
출생지 | 메이페어, 미들섹스, 잉글랜드 |
사망일 | 1812년 5월 11일 |
사망지 | 웨스트민스터, 미들섹스, 잉글랜드 |
사망 원인 | 암살 |
안장 장소 | 찰턴의 성 루크 교회 |
정당 | 토리당 |
배우자 | 제인 윌슨 (1790년 8월 10일 결혼) |
자녀 | 13명 (스펜서, 존 토마스 포함) |
아버지 | 제2대 에그먼트 백작 존 퍼시벌 |
모교 |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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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재임 시작 | 1809년 10월 4일 |
재임 종료 | 1812년 5월 11일 |
군주 | 조지 3세 |
섭정 | 조지, 왕세자 (1811~1812년) |
이전 총리 | 포틀랜드 공작 |
다음 총리 | 리버풀 백작 |
재임 시작 | 1807년 3월 26일 |
재임 종료 | 1812년 5월 11일 |
총리 | 포틀랜드 공작 본인 |
이전 재무장관 | 헨리 페티 경 |
다음 재무장관 | 니콜라스 반시타트 |
재임 시작 | 1807년 4월 |
재임 종료 | 1812년 5월 11일 |
총리 | 포틀랜드 공작 본인 |
이전 원내대표 | 호윅 자작 |
다음 원내대표 | 캐슬레이 자작 |
재임 시작 | 1807년 3월 30일 |
재임 종료 | 1812년 5월 11일 |
총리 | 포틀랜드 공작 본인 |
이전 장관 | 더비 백작 |
다음 장관 | 버킹엄셔 백작 |
재임 시작 | 1802년 4월 15일 |
재임 종료 | 1806년 2월 12일 |
총리 | 헨리 애딩턴 윌리엄 피트 |
이전 법무장관 | 에드워드 로 경 |
다음 법무장관 | 아서 피곳 |
재임 시작 | 1801년 |
재임 종료 | 1802년 |
총리 | 헨리 애딩턴 |
이전 법무차관 | 윌리엄 그랜트 경 |
다음 법무차관 | 토머스 매너스서튼 |
선거구 | 노샘프턴 |
재임 시작 | 1796년 5월 9일 |
재임 종료 | 1812년 5월 11일 |
이전 의원 | 찰스 콤프턴 |
다음 의원 | 스펜서 콤프턴 |
2. 생애
법정 변호사로 활동하다 1796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독실한 영국 국교회 신자로서 윌리엄 피트가 추진한 가톨릭 해방 법안에 반대했다. 재무장관 재임 중 윌리엄 윌버포스가 주도한 《노예 무역 폐지안》 통과에 기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영국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1811년에는 러다이트 운동이 발생하는 등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조지 3세 국왕의 정신 질환으로 섭정 왕세자 조지(훗날 조지 4세)가 실권을 잡자 퍼시벌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퍼시벌이 왕실 비용 증액 요구를 거부하자, 왕세자는 휘그당 성향의 퍼시벌을 경질하려 했으나 측근들의 만류로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긴장 상태에 놓였다.
1812년 5월 11일, 퍼시벌은 하원 로비에서 존 벨링햄에게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벨링햄은 퍼시벌 정부의 경제 정책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스펜서 퍼시벌은 1762년 11월 4일 런던 메이페어의 오들리 스퀘어(Audley Square)에 있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태어났다.[4][5] 아버지는 아일랜드 귀족인 제2대 에그몬트 백작 존 퍼시벌(1711~1770)이었고, 어머니는 초대 아든 여남작 캐서린 퍼시벌(1731~1784)이었다.[3] 어머니 캐서린은 노섬프턴 제4대 백작 조지 컴프턴의 손녀였으며,[3] 스펜서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숙부이자 전 영국 총리였던 윌밍턴 제1대 백작 스펜서 컴프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퍼시벌은 아버지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어머니에게서는 둘째 아들이었다.[3]
아버지 존 퍼시벌은 프레데릭 왕세자와 조지 3세의 정치 고문이었으며, 해군본부 장관(First Lord of the Admiralty)으로서 잠시 내각에 참여하기도 했다. 스펜서 퍼시벌이 여덟 살 때인 1770년에 아버지가 사망했다.[5] 퍼시벌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울위치 조선소 근처에 거주하기 위해 머물렀던 런던의 찰턴 하우스(Charlton House)에서 보냈다.[5]
1774년부터 1779년까지 해로우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8] 해로우에서 그는 규율이 잡히고 성실한 학생으로 평가받았으며,[9] 복음주의 성공회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되었다.[9] 또한 이곳에서 더들리 라이더를 만나 평생의 우정을 쌓았다.[9]
1780년 1월 14일, 형 찰스를 따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10] 트리니티 칼리지에서는 윌리엄 로트 맨셀(후일 브리스톨 주교)과 토머스 매시아스의 지도를 받았으며, 학구열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9] 그는 대학에서 영어 웅변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782년에 문학 석사(M.A.) 학위를 취득했다.[10] 대학 시절 퍼시벌은 아이작 밀너와 같은 소수지만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신앙을 더욱 발전시켰다.[9] 그는 당대의 정치가들 중 드물게 기독교 복음주의를 지지했으며,[15] 천년왕국설을 믿었다고도 알려져 있다.[8]
2. 2. 법조 경력과 결혼
귀족의 차남으로 태어나 상속받을 재산이 거의 없었기에[5], 퍼시벌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는 법조인의 길을 선택하여 링컨 법학원에서 공부했고, 1786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10] 이후 미들랜드 순회법원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문서 위조 사건에서의 연설로 명성을 얻었고, 해당 법원에서 최고의 변호사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5][12] 이 시기 퍼시벌과 알게 된 평생의 친구 사뮤엘 로미리는 그가 "학식은 부족하고 많은 문제에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이 좋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행동, 활발한 대화로 주변 사람들을 크게 기쁘게 했다"고 회고했다.[5]퍼시벌의 가족 관계는 그의 초기 경력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1790년 노샘프턴 부기록관 및 파산 관리위원, 1791년 주조소의 맥아 감독관 및 철 제련소 서기(연봉 119GBP의 명예직), 1794년 해군성 법률 고문 등의 직책을 얻었다. 또한, 정부 측 보조 변호사로서 토머스 페인의 명예훼손 재판(1792년)과 급진주의자 존 혼 투크의 반역죄 기소(1794년)에 참여했다.[5]
퍼시벌은 워렌 헤이스팅스 탄핵을 지지했으며, 사회 불안에 맞서 공공 질서를 옹호하는 익명의 팸플릿을 출판했다(1791년, 1792년).[5][9] 이 팸플릿들은 당시 총리였던 소피트 윌리엄의 주목을 받게 했다.[5] 1795년, 소피트는 퍼시벌에게 아일랜드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그는 변호사로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늘어나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5][8] 1796년, 33세의 나이로 국왕의 법률 고문이 되었고, 이로 인해 연간 약 1000GBP의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8] 같은 해 2월 4일 왕실 변호사로 선출되었고[8], 2월 26일에는 링컨 법학원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9][14]
1783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퍼시벌은 형 찰스(아든 경)와 함께 찰턴에 집을 빌려 살았다. 그곳에서 이웃에 살던 토마스 스펜서 윌슨 경의 두 딸과 사랑에 빠졌다. 형 아든 경은 이미 부유하고 국회의원이었기에 큰딸 마가레타와의 결혼을 쉽게 승낙받았다. 그러나 당시 아직 재정적으로 불안정했던 퍼시벌은 작은딸 제인 윌슨과의 결혼을 위해 그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790년 제인이 21세가 되었지만,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경은 여전히 퍼시벌의 경제적 능력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스트 그린스테드에서 특별 혼인 허가를 받아 1790년 8월 10일 결혼했다. 신혼 초기에는 런던 베드퍼드 로의 카펫 가게 위층 방에서 생활하다가, 나중에 링컨즈 인 필즈의 린지 하우스로 이사했다.[4][42]

퍼시벌과 제인은 독실한 영국 국교회 신자로서 신앙심이 깊었고, 가족은 매일 함께 기도하는 등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다.[9] 두 사람 사이에서는 총 12명의 자녀(아들 6명, 딸 6명)가 태어났다.[4]
아일랜드 귀족인 제2대 에그몬트 백작 존 퍼시벌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로 스쿨과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법정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796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결혼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5], 퍼시벌의 변호사 수입은 꾸준히 증가하여 1799년에는 1504GBP, 1800년에는 1807GBP에 달했고, 나중에는 연간 4,000~5,000 파운드(일부 자료에 따르면 1804년에는 1만파운드에 가까운 수입)를 올리게 되었다.[5][8] 1801년 법무차관(Solicitor General)에 임명되면서 왕좌 법원에서의 업무를 줄이고 대법원 업무에 집중했으며, 수임료를 두 배로 인상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했다.[5][8] 그는 1807년 재무장관에 취임하면서 변호사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15] 가족의 주거지도 수입 증가와 경력 변화에 따라 벨사이즈 파크, 클랩햄 등을 거쳐 1807년 말에는 다우닝가 10번지 관저로 옮겼으며, 1808년에는 이링에 교외 주택(Elm Grove)을 7500GBP에 구입하기도 했다.[8][15][41]
3. 정치 경력
그는 영국 국교회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정치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윌리엄 피트가 추진했던 가톨릭 해방 법안에 대해서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재무장관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주도한 노예 무역 폐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 경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륙 봉쇄로 인해 대외 무역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1811년에는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 운동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불안도 고조되었다.
조지 3세 국왕이 정신 질환으로 국정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퍼시벌은 정치적 입지를 다질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섭정 왕세자 조지(훗날 조지 4세)와는 왕실 비용 증액 문제 등으로 인해 대립 관계에 있었다. 왕세자는 퍼시벌을 탐탁지 않게 여겨 파면까지 고려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로 인해 총리와 왕세자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1812년 5월 11일, 퍼시벌은 하원 로비에서 퍼시벌 정부의 경제 정책에 불만을 가진 정신장애인 존 벨링햄에게 권총으로 저격당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퍼시벌은 영국 역사상 암살된 유일한 총리가 되었다.
3. 1. 초기 정치 경력: 1796–1801
1796년, 퍼시벌의 삼촌인 노섬프턴 제8대 백작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노섬프턴 제1대 후작이 백작위를 계승하고 상원 의석을 얻었다. 퍼시벌은 공석이 된 노섬프턴 지역구의 하원 의원직에 출마하도록 제안받았다. 5월 보궐선거에서 퍼시벌은 무투표 당선되었다. 몇 주 후 열린 총선에서는 경쟁이 예상되었다. 노섬프턴은 약 1,000명의 유권자가 있었고, 빈민 구호를 받지 않는 모든 남성 가장이 투표권을 가졌으며, 급진주의 전통이 강한 도시였다. 퍼시벌은 캐슬 애시의 지지를 받았고, 에드워드 부베리는 휘그당을, 윌리엄 월콧은 시 당국을 대표했다. 개표 결과 퍼시벌과 부베리가 당선되었다. 퍼시벌은 이후 16년간 노섬프턴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총리직을 역임한 유일한 노섬프턴 출신 의원이다. 1796년 선거는 그가 치른 처음이자 마지막 경쟁 선거였고, 이후 1802년, 1806년, 1807년 총선에서는 부베리와 함께 무투표 당선되었다.
1796년 9월 하원에 입성했을 때 퍼시벌의 정치적 견해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전기 작가 데니스 그레이에 따르면, 그는 '헌법과 피트를 지지했고, 폭스와 프랑스에 반대했다'. 1796-1797년 회기 동안 여러 차례 연설했으며, 항상 준비된 메모를 읽었다. 그의 연설 능력은 법대생 시절 크라운 앤 롤스 토론회에서 연마된 것이었다. 하원 의원이 된 후에도 법률 업무를 계속했는데, 당시 국회의원은 무보수였고 의회는 1년 중 일부 기간만 열렸기 때문이다. 1797년 여름 의회 휴회 중에는 반역죄로 기소된 존 빈스의 재판에서 왕실 측 수석 변호사를 맡았다. 새뮤얼 로밀리가 변호한 빈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률 업무 수입으로 퍼시벌은 햄프스테드의 시골집 벨사이즈 하우스를 임대했다.
다음 의회 회기인 1798년 1월, 퍼시벌은 부과세법(Assessed Taxes Bill)을 지지하는 연설을 통해 논쟁가로서의 명성과 미래의 장관 후보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 법안은 프랑스와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택, 창문, 남성 하인, 말, 마차 등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찰스 제임스 폭스와 그의 개혁 요구를 비판했다. 피트는 이 연설을 자신이 들어본 최고의 연설 중 하나라고 평가했으며, 같은 해 말 퍼시벌은 군수부 법무관(Solicitor to the Ordnance)에 임명되었다.
1801년 가톨릭 해방령 문제를 둘러싸고 소 피트가 총리직에서 사임했지만, 퍼시벌은 그와 함께 물러나지 않았다.[9] 피트의 후임으로 내각을 구성한 헨리 애딩턴은 의회 연설에서 내각 지지 기반이 약하다고 판단하여, 1801년 2월 에드워드 로 경을 법무장관에, 퍼시벌을 법무차관(Solicitor General)에 임명했다.[5][8] 당시 관례상 이 직책에는 기사 작위가 함께 수여되었으나, 퍼시벌은 백작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를 사양했다.[5] 이 시기에 그는 조지 캐닝, 카슬레이 자작, 호크스베리 남작 등과 함께 소 피트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9]
3. 2. 법무차관 및 법무장관: 1801–1806
1801년 피트가 가톨릭 해방 문제로 조지 3세와 충돌하여 사임했을 때, 퍼시벌은 국왕과 같은 입장이었기에 피트를 따라 사임하지 않았다.[9] 그는 헨리 애딩턴 내각 하에서 경력을 이어갔다. 1801년 법무차관(Solicitor General)에 임명되었으며,[5][8] 백작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기사 작위 수여는 거절했다.[5] 당시 그는 조지 캐닝, 카슬릴레이 자작, 호크스베리 남작 등과 함께 피트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9]
1802년 4월에는 법무장관(Attorney General)으로 승진했다.[5][18] 법무장관으로서 그는 급진주의자로 지목된 에드워드 데스파드 대령[15]과 언론인 윌리엄 코벳 등의 기소를 주도했다. 데스파드는 대역죄로, 존 펠티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1803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5] 1804년에는 코벳과 판사 로버트 존슨 역시 아일랜드 고위 관리들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여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5] 퍼시벌은 애딩턴 내각의 외교 정책 등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법률 문제에 대한 연설에 집중하며 하원에서 피트, 폭스 등 반대파의 공세로부터 내각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19]
1804년 애딩턴이 사임하고 피트가 두 번째 내각을 구성했을 때, 퍼시벌은 가톨릭 해방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법무장관직을 계속 맡았다.[5][19] 이 시기 그는 정부가 노사 문제에서 항상 고용주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초기 노동조합에 대한 기소를 거부했으며,[5] 뉴사우스웨일스로 이송된 죄수들의 처우 개선에도 관여했다. 또한 의회에서 아동 노동 규제와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 무역 폐지 운동을 지지했으나, 의회 개혁에는 반대했다.[9][19]
1806년 1월 피트가 사망하자, 퍼시벌은 그의 장례식에서 깃발을 들었다. 그는 그랜빌 경이 이끄는 모든 재능의 내각(Ministry of All the Talents) 참여를 거부하고 법무장관직에서 사임했다. 대신 하원에서 피트파 반대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야당 지도자 시절, 퍼시벌은 그의 법률 기술을 사용하여 "섬세한 조사(delicate investigation)" 중 웨일스 왕자(훗날 조지 4세)의 소원한 아내인 캐롤라인 공주를 변호했다. 공주는 사생아를 출산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웨일스 왕자는 이혼을 위한 증거를 얻기를 바라며 조사를 명령했다. 정부 조사는 주요 혐의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지만(해당 아동은 공주가 입양했음), 공주의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반대파는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고, 퍼시벌은 그녀의 고문이 되어 국왕 조지 3세에게 그녀를 지지하는 156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작성했다. ''The Book''으로 알려진 이 편지는 퍼시벌의 전기 작가에 의해 "그의 법률 경력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묘사되었다. 국왕이 캐롤라인이 법정에 복귀하는 것을 거부하자, 퍼시벌은 ''The Book''의 출판을 위협했지만, 그랜빌의 내각은 (다시 한번 가톨릭 문제에 대한 국왕과의 의견 차이로) ''The Book''이 배포되기 전에 붕괴되었다. 새 정부의 일원으로서 퍼시벌은 모든 혐의에 대해 캐롤라인을 무죄로 하는 내각 의사록을 작성하고 법정에 복귀할 것을 권고했다. 그는 린지 하우스에서 ''The Book''을 불태웠고, 정부 자금이 유실된 사본을 사들이는 데 사용되었다. 몇몇 사본은 남아 있었고, ''The Book''은 그의 사망 직후 출판되었다.
3. 3. 재무장관: 1807–1809
그렌빌 내각이 사임한 후, 포틀랜드 공작은 피트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구성하면서 퍼시벌에게 재무장관 겸 하원 원내대표직을 제안했다. 퍼시벌은 처음에는 검찰총장직에 남거나 내무장관이 되기를 선호하며 재정 문제에 대한 경험 부족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공국의 수입이 보장된다는 조건 하에 결국 제안을 수락했다. 당시 호크스베리 경(훗날 리버풀 백작)은 퍼시벌이 유서 깊은 영국 가문 출신이며 가톨릭 해방 문제에 대해 국왕과 같은 입장을 공유한다는 점을 들어 국왕에게 그를 추천했다.[8]
재무장관으로서 퍼시벌의 초기 과제 중 하나는 이전 그렌빌 내각에서 도입했던 국왕 칙령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륙 봉쇄에 대한 보복 조치로, 중립국과 프랑스 간의 무역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되었다.[5][9] 이 칙령의 기초 작업에는 참여했지만, 그 내용 대부분은 제임스 스티븐(James Stephen)이 1805년에 출판한 소책자의 내용을 따른 것이었다.[5][9] 또한, 그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추진하던 노예 무역 폐지 법안이 내각 교체기에 상원에서 무산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이 법안은 성공적으로 통과되었다. 퍼시벌은 1807년 4월 노예 무역 폐지법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아프리카 연구소(African Institute)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재정 운용 면에서 퍼시벌은 나폴레옹 전쟁의 막대한 비용을 조달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는 1808년과 1809년 예산안에서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 지출을 삭감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국채를 발행하여 재정을 충당했다.[9] 하지만 당시 경제 상황이 새로운 세금을 걷기 어려웠다는 점과 국채 발행이 재무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기에, 그의 예산 정책에 특별히 새로운 점은 없다는 평가도 있다.[9][8] 재무 분야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산안은 의회에서 큰 비판 없이 통과되었다.[8]
하원 원내대표로서 퍼시벌은 전쟁 수행, 가톨릭 해방, 정부 부패, 의회 개혁 등 다양한 현안을 놓고 강력한 야당의 공세에 맞서야 했다. 특히 요크 공작이 전 애인 메리 앤 클라크를 통해 군 장교직을 매매했다는 부패 혐의를 받았을 때, 퍼시벌은 성공적으로 그를 변호했다. 의회는 요크 공작의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의 행동 자체는 비판받았고 결국 퍼시벌의 권고에 따라 사임했다(1811년 복직).[8]
동시에 정부의 후원(patronage), 즉 연금, 한직(sinecure), 하원 의석 배분 등이 과도하다는 비판과 함께 한직 개혁 요구가 높아졌다.[9] 퍼시벌은 한직의 전면 폐지가 정권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았지만, 개인적으로 한직을 강하게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야당의 개혁안에 직접 반대하는 대신, 하원 의원이 보유한 한직과 연금 공개 법안의 적용 범위를 넓혀 보고서 완성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또한, 하원 의석 매수를 불법화하는 1809년 법안도 내용을 완화시켜 통과시켰다.[9]
헨리 뱅크스가 제출한 관직 복귀권(현직의 사망 후 즉시 관직에 취임하는 권리) 폐지 법안은 퍼시벌에게 큰 딜레마였다. 그의 형인 아든 경(Lord Arden)은 연봉 38000GBP에 달하는 한직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 법안에 강력히 반대했다. 퍼시벌은 1807년 형의 도움으로 상원에서 법안을 부결시켰으나, 1808년에는 법안 통과를 고려했음에도 형의 반대와 국왕의 중립적 태도로 인해 다시 부결되었다.[8] 이로 인해 의회에서 야당의 비판에 직면한 퍼시벌은 1809년 뱅크스와 타협하여 1년간 유효한 한시법 형태로 법안을 통과시켰다.[8] 뱅크스는 영구적인 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퍼시벌과 아든 경의 반대로 1812년 다시 한시법을 통과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8]
3. 4. 총리: 1809-1812
포틀랜드 공작 내각에는 퍼시벌, 호크스베리 경, 조지 캐닝 등 미래의 총리들과 엘돈 경, 캐슬레이 경 같은 주요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포틀랜드 공작의 지도력 부족과 건강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1809년 여름, 캐닝이 캐슬레이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면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고, 포틀랜드 공작은 뇌졸중으로 사임했다. 후임 총리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캐닝은 총리직 외에는 거부했고, 퍼시벌은 캐닝 밑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남은 내각 각료들은 그레이 경과 그렌빌 경에게 연립 내각 구성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조지 3세 국왕은 내각의 추천을 받아들여 퍼시벌을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5]
퍼시벌은 1809년 10월 4일 국왕의 손에 키스하고 총리직에 취임하여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하지만 캐슬레이와 캐닝이 결투를 벌여 내각에서 제외되면서 인선은 더욱 어려워졌다.[5] 퍼시벌은 재무장관직을 맡아줄 인물을 찾기 위해 캐닝, 니콜라스 밴시타트, 파머스턴 자작, 로버트 펨버튼 밀른스, 조지 로즈, 찰스 롱 등 6명에게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하자, 결국 자신이 겸직하기로 결정하고 재무장관 봉급은 받지 않기로 했다.[8][15] 이는 나중에 의회에서 야당의 비판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 1809년 12월 2일에야 내각 명단이 완성되었다.[5]
새 내각은 출범 당시부터 약체로 평가받았다.[5] 특히 하원에서의 기반이 약했는데, 내각 각료 중 하원 의원은 퍼시벌 자신과 내무장관 리처드 라이더 두 명뿐이었다.[8] 다행히 국왕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8]
직책 | 이름 | 재임 기간 |
---|---|---|
수상(제1대장경), 재무장관, 랭커스터 공국상 | 스펜서 퍼시벌 | 1809년 10월 – 1812년 5월 |
옥새상서 | 웨스트모얼랜드 10대 백작 | 1809년 10월 – 1812년 5월 |
추밀원 의장 | 캠던 후작 시드머스 자작 | 1809년 10월 – 1812년 4월 1812년 4월 – 1812년 5월 |
대법관 | 엘돈 백작 | 1809년 10월 – 1812년 5월 |
내무장관 | 리처드 라이더 | 1809년 10월 – 1812년 5월 |
외무장관 | 배서스트 백작 웰즐리 후작 캐슬레이 자작 | 1809년 10월 – 1809년 11월 1809년 12월 – 1812년 3월 1812년 3월 – 1812년 5월 |
전쟁식민부 장관 | 리버풀 2대 백작 | 1809년 10월 – 1812년 5월 |
해군장관 | 멀그레이브 백작 찰스 필립 요크 멜빌 자작 | 1809년 10월 – 1810년 5월 1810년 5월 – 1812년 3월 1812년 3월 – 1812년 5월 |
인도부 장관 | 로버트 던다스 (1811년 멜빌 2대 자작) 버킹엄셔 백작 | 1809년 10월 – 1812년 3월 1812년 3월 – 1812년 5월 |
병기총감 | 채텀 백작 멀그레이브 백작 | 1809년 10월 – 1810년 3월 1810년 3월 – 1812년 5월 |
무역청장, 조폐국장 | 배서스트 백작 | 1809년 10월 – 1812년 5월 |
무임소 장관 | 포틀랜드 3대 공작 해로비 백작 캠던 후작 | 1809년 10월 1809년 11월 – 1812년 3월 1812년 3월 – 1812년 5월 |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순탄치 않았다. 발케렌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반도 전쟁에서는 웰즐리 공작이 탈라베라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곧 후퇴해야 했다.[5] 1810년 1월 새 의회 회기 첫 주에 정부는 네 차례나 표결에서 패배했다. 이 중 하나는 발케렌 원정에 대한 조사 요구 동의안이었고, 나머지 세 개는 재정 위원회 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퍼시벌은 발케렌 원정을 옹호해야 했지만, 원정을 이끈 병기총감 채텀 백작이 보고서를 내각이 아닌 국왕에게 직접 제출한 사실이 드러나자, 퍼시벌은 채텀을 사임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5][8] 이후 예산안 통과에는 성공했으나, 헨리 뱅크스의 한직 개혁 법안 표결에서는 패배했다.[5]
또한, 급진파 의원인 프랜시스 버뎃 경이 정부가 언론의 조사 참여를 배제한 것을 비난하는 글을 윌리엄 코벳의 '정치 등록부'에 게재했다가 런던탑에 투옥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버뎃 경 체포 과정에서의 실수로 3일이나 소요되었고, 그를 지지하는 군중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자 군대가 동원되기도 했다.
재무장관으로서 퍼시벌은 나폴레옹 전쟁 중 웰링턴 공작이 반도 전쟁에서 벌이는 작전에 필요한 재원을 계속 마련했으며, 그의 전임자나 후임자보다 더 낮은 수준의 부채를 남겼다.
1808년 반도 전쟁 중 체결된 신트라 협정은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철수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캐닝은 영국군 사령관 아서 웰즐리를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퍼시벌과 캐슬레이는 이에 반대하며 1809년 초 의회에서 웰즐리를 변호했다.[8]
육군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1809년 1월 말, 영국 급진파의 구일림 로이드 워들이 요크 공작 프레더릭의 애인 메리 앤 클라크에 의한 육군 장교직 매매를 고발하며 요크 공작도 공범이라고 주장했다.[21] 두 달 가까운 심의 끝에 3월 9일, 워들은 요크 공작을 육군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21] 퍼시벌은 요크 공작이 직접 매관매직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해임보다는 문제 자체 해결을 주장했고, 3월 15일 워들의 동의안은 부결되었다(찬성 123, 반대 364). 그러나 요크 공작의 무죄 방면 동의안은 3월 17일 부결되었다(찬성 193, 반대 279).[21] 심의 중 클라크가 매관매직을 인정하고 요크 공작과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퍼시벌은 국왕에게 요크 공작이 사임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결국 요크 공작은 다음 날 사임했다.[8][21] 퍼시벌은 요크 공작의 사임이 임시방편임을 약속했고, 실제로 1809년 말 워들이 클라크에게 증언 대가를 약속한 사실이 드러나고 1810년 여름 클라크가 돈 때문에 증언했음을 인정하면서 워들은 신뢰를 잃었다. 결국 1811년 6월 11일 요크 공작의 복직이 가결되었다.[21]
퍼시벌 내각은 1810년 6월 21일 의회 휴회까지 버텼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다.[5] 시드머스파와 캐닝파의 지지가 필수적이었으나, 배서스트 백작은 일찌감치 지지를 철회했고 캐닝 역시 조각 과정에서의 갈등으로 내각을 지지하지 않다가 회기 말에는 야당으로 돌아섰다.[5][9] 퍼시벌은 시드머스와 캐슬레이에게 입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캐닝에게는 9월에 입각 제안조차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5] 캐닝과 캐슬레이, 캐닝과 윌리엄 허스키슨의 동시 입각안도 논의되었으나 각각 캐슬레이의 반대와 퍼시벌의 허스키슨 재정 정책 반대로 무산되었다.[8] 스코틀랜드 파벌을 이끄는 멜빌 자작과의 협상도 결렬되었다.[9]
1810년 10월, 국왕 조지 3세의 정신 질환이 재발했다.[5] 퍼시벌은 연이은 휴회 동의로 국왕의 회복을 기다리려 했지만, 의회의 피로감이 커지자 조치가 필요했다.[8] 퍼시벌은 과거 섭정왕세자 역할을 했던 웨일스 공 조지(후일 조지 4세)와 대립 관계였기에, 12월 20일 섭정 권한을 제한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5] 이는 1788년 섭정 위기 당시 소 피트가 제출했던 것과 유사한 내용으로, 휘그당은 왕세자의 섭정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5] 왕세자를 포함한 조지 3세의 아들들이 모두 항의했지만, 퍼시벌은 12월 31일 섭정법안을 제출했다.[5] 퍼시벌은 의회 변론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 의회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법안은 야당의 수정안을 포함한 형태로 가결되었다.[5] (다른 평가에 따르면 야당의 전략적 실수로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었다고도 한다.[9])
왕세자 조지는 섭정에 취임하면 퍼시벌 내각을 해임하고 그레이 백작 등을 중심으로 신내각을 구성할 계획이었다.[5] 그러나 그레이 백작은 왕세자가 측근(리처드 브린즐리 셰리든, 모이라 백작 등)의 정치 자문을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5] 또한 조지 3세가 회복하면 신내각을 해임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어서 왕세자도 정권 교체를 주저했다. 결국 1811년 2월 4일, 왕세자는 "정권 교체와 같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건으로 국왕의 회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 퍼시벌을 유임시켰다.[5] 이로써 왕세자와의 공개적인 대립이 피하면서 퍼시벌 정권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5] 1811년 의회 회기는 주로 아일랜드 문제, 영국의 금괴 논쟁(은행권을 법정 통화로 만드는 법안 통과), 반도 전쟁 군사 작전에 할애되었다.
야당의 위협은 줄었지만, 내각 내 갈등이 불거졌다.[5] 외무장관 웰즐리 후작과 퍼시벌의 대립이 심화된 것이다.[5] 웰즐리는 퍼시벌이 반도 전쟁 지원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했고, 퍼시벌은 웰즐리가 편견에 사로잡혀 예산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5] 1811년 가을, 웰즐리와 섭정왕세자 사이에 정권 교체 논의가 오갔고, 1812년 초 섭정 제한이 만료되면 퍼시벌을 경질하고 웰즐리를 총리로 임명하며 그 대가로 왕실 예산을 증액하는 계획까지 세워졌다.[5] 퍼시벌은 왕실 예산 증액에 반대했고, 각의에서 증
4. 암살
1812년 5월 11일 오후 5시 15분경, 퍼시벌은 국왕의 명령에 대한 조사를 위해 하원 의사당으로 가던 중이었다.[26] 그가 하원 로비에 들어섰을 때, 존 벨링햄이라는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퍼시벌의 가슴을 권총으로 근거리에서 쏘았다.[26] 퍼시벌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마지막 말로 "나는 살해당했다!"(I am murdered!eng) 또는 "오, 제 신이시여"(Oh my Godeng)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26]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인접한 방으로 옮겼으나,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5]
암살범 존 벨링햄은 도주하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다. 그는 상인 출신으로, 과거 러시아에서 부당하게 투옥되었다고 주장하며 영국 정부에 보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퍼시벌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5][26] 그는 수 주에 걸쳐 하원을 관찰하며 범행을 계획했다.[26] 처음에는 이 암살이 당시 확산되던 러다이트 운동과 연계된 봉기의 신호일 수 있다는 우려가 상류 사회에 퍼졌으나, 벨링햄이 단독으로 행동한 정신 질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소동은 가라앉았다.[27]
퍼시벌의 시신은 다음 날인 5월 12일 새벽에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로 옮겨졌고, 같은 날 아침 검시를 통해 고의 살인이라는 평결이 내려졌다. 벨링햄은 5월 15일 올드 베일리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정신 질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5] 그는 불과 사흘 뒤인 5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5] 벨링햄의 체포부터 처형까지 일주일 만에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사건은 비교적 빠르게 잊혔다.[27]
퍼시벌은 사망 당시 미망인 제인과 3세에서 20세 사이의 12명의 자녀를 남겼다. 그의 은행 계좌에는 106파운드 5실링 1펜스밖에 남아있지 않아 유족의 생계가 막막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42] 하원은 유족에게 5만파운드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미망인에게는 연간 2000GBP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5] 이 연금은 두 아들에게 상속될 수 있었으며, 상속 시에는 연간 3000GBP로 증액되도록 했다.[5]
퍼시벌의 장례식은 미망인의 요청에 따라 1812년 5월 16일 비공개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런던 찰턴에 있는 세인트 루크 교회의 가족 납골당에 안치되었다.[5][29] 하원은 연금 지급 외에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퍼시벌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5] 이 기념비는 조각가 리처드 웨스트마콧이 제작하여 1822년 12월 21일에 제막되었다.[29] 런던의 노샘프턴 스퀘어에는 그의 이름을 딴 퍼시벌 스트리트가 남아 있으며,[30] 201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세인트 스티븐스 홀에도 퍼시벌 기념비가 세워졌다.[32]
5. 유산
퍼시벌은 키가 작고 마르며 매우 창백한 사람이었고, 보통 검은색 옷을 입었다. 엘던 경은 그를 "Little P영어"라고 불렀다. 그는 전신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초상화는 미니어처이거나 사후에 조지프 놀레켄스가 만든 데스마스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33][42] 퍼시벌은 가발을 착용한 마지막 영국 총리였으며, 18세기 구식 스타일대로 가루가 뿌려진 가발을 묶어 착용하고, 무릎까지 오는 바지를 입었다.
그는 때때로 영국의 잊혀진 총리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주로 암살이라는 그의 죽음 방식으로만 기억된다. 영감을 주는 지도자로 평가받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독실하고 근면하며 원칙 있는 사람으로, 약한 정부의 수장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인물로 여겨진다. 당시 국회의원인 헨리 그래튼은 해군의 비유를 사용하여 퍼시벌을 "그는 전함이 아니지만, 많은 대포를 싣고 있으며, 견고하게 지어졌고 모든 악천후에도 나간다"라고 묘사했다.[9] 퍼시벌의 현대 전기 작가인 데니스 그레이는 그를 "빅토리아 시대의 선구자"라고 묘사했다.[9]
퍼시벌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애도를 받았다. 수석 대법관인 제임스 맨스필드 경은 암살범 존 벨링햄의 재판에서 배심원들에게 최종 의견을 말하는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노팅엄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그가 인기가 없었고, 그의 암살 소식에 모인 군중들이 오히려 환호하는 분위기였다는 기록도 있다.
퍼시벌의 가장 유명한 비평가 중 한 명은 성직자 시드니 스미스였는데, 특히 가톨릭 해방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스미스는 ''피터 플림리의 편지''에서 퍼시벌의 정책을 풍자하며 비판했다. 미국 역사가 헨리 아담스는 스미스의 이러한 묘사가 한 세대 동안 자유주의자들의 마음속에 퍼시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말의 『영국 인명 사전』은 퍼시벌이 변론과 행정 수완을 갖추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거의 혼자 힘으로 정적을 제압하고 나폴레옹 전쟁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가톨릭 해방에 대한 반대는 "현명하지 못했다"고 보았고, 재정 정책도 "잘 해봐야 임시방편"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완고함을 지적했다.[5] 데니스 그레이는 그의 1963년 전기에서 퍼시벌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했을 것이며, "젊은 피트 사망 당시의 폭풍 속에서 국가라는 배를 항구 입구까지 운반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34] 『영국 의회사』(1986년)는 퍼시벌이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의 파벌을 키우기보다는 연설로 의회를 설득하려 했다고 평가했다.[8] 『옥스퍼드 영국 인명 사전』(2004년)은 퍼시벌의 시야가 좁았으며, 런던 외의 세계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이로 인해 젊은 피트의 정책을 대체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전쟁 수행을 우선시한 그의 재정 정책이 결국 대프랑스 동맹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9]
퍼시벌을 기리기 위한 공공 기념물은 노샘프턴, 링컨스 인,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졌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기념비는 조각가 리처드 웨스트마콧이 제작했으며, 죽은 퍼시벌의 상과 함께 진실, 절제, 권력을 상징하는 애도하는 인물들이 하원에서의 암살 직후를 묘사한 부조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1] 2014년 7월에는 그가 암살당한 장소 근처인 의회 의사당 세인트 스티븐 홀에 보수당 의원 마이클 엘리스의 제안으로 기념 명판이 공개되었다.[2] 노샘프턴과 노샘프턴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런던의 노샘프턴 스퀘어 인근에도 스펜서 스트리트와 퍼시벌 스트리트가 남아 있다.[30]
퍼시벌에 관한 여러 권의 전기가 출판되었다. 그의 사후 직후 찰스 베럴럼 윌리엄스가 쓴 책, 손자인 스펜서 월폴의 1894년 전기, 필립 트레허네의 1909년 단편 전기, 그리고 데니스 그레이의 1963년 정치 전기가 대표적이다. 또한 그의 암살을 다룬 책으로는 몰리 길렌, 데이비드 한라한의 저서와 안드로 린클레이터의 ''왜 스펜서 퍼시벌은 죽어야 했는가'' 등이 있다. 그의 암살은 ''순교한 정치가에 대한 보편적 동정''(1812)과 같은 시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그의 사생활과 공적인 삶은 그러했으니,
:논쟁에서 의견이 달랐던 모든 이들,
:혹은 그의 계획과 의견이 달랐던 이들,
:한결같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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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Allen and Unwin
1967-01-01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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