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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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불출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시기까지 활동한 만담가, 연극 배우이다. 본명은 신흥식이며, 일제강점기 사회 비판 만담으로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다 우익 단체에게 피습당하고 월북하여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했으나, 이후 숙청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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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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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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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신영일, 신흥식, 신상학 |
출생 | 1905년 3월 25일 |
출생지 | 대한제국 경기도 개성 |
사망 | 1976년 8월 2일 (향년 71세)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분야 | 만담 |
2. 생애
신불출은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본명은 신흥식이나, 대한민국 측 기록에서는 신영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기록에서는 신상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신불출이라는 이름은 본인이 직접 지은 예명으로, 억압받고 혼란스러웠던 일제강점기에 차라리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에서 '불출(不出)'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언어유희적인 만담에 능했으며 당대 유명 연예인이었지만, 어린 시절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1925년 연극계에 등장한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 비판 만담으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되자 "될대로 되어라"라는 의미의 추임새로 해석될 수 있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로 일본식 이름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2] 1931년에는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의 대사를 바꾸어 외쳤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가 크게 제약되던 시기라 신불출은 이후 풍성한 해학과 풍자를 담은 정치적 발언을 시작했고, 1933년에 출시된 만담 음반 《익살맞은 대머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미관에서 창씨개명 비판 공연 때 김두한이 관람하였고, 공연이 끝난 후 김두한이 신불출을 만나러 와 함께 종로회관에서 술을 마시며 친분을 맺었다. 또, 함께 있던 정진영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걷게 하였고, 정진영에게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김해숙이라는 큰술집 여직원을 소개해 결혼하게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영화동맹 간부로 좌익 활동에 참가했다. 1946년 6.10 만세 운동 20주년 행사에서 태극기에 빗대어 미군정 체제를 풍자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가, 귀가 중 우익 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 소속 김두한과 부하들에게 총격을 당해 왼쪽 어깨, 팔, 옆구리에 중상을 입었다.[3] 이후 미군정에 의해 치안 교란, 연합국 비방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어 벌금 2만원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47년 복역 후 월북했다.
한국 전쟁 때는 선무 방송에 참여했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배우로 선출되었으며, 신불출만담연구소 소장을 맡는 등 정치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4]
그러나 대본을 검열하는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며 자유로운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는 등 북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결국 1960년대 초 한설야 계열이 몰락할 때 또는 1960년대 후반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청 이후 지방의 노동교화소나 협동 농장, 정치범 수용소로 추방되어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1976년경에 사망했다는 소문[4]만 전해질 뿐, 사망한 시기도 분명치 않다. 같이 수감되었던 탈북자 김영순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의 신불출은 수용소 내에서 병마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특유의 유머를 보이며 수감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한다.
김정일도 신불출의 유머를 좋아하여 사후 그의 만담집을 출간하는 등 그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한설야, 최승희, 심영 등 비슷한 시기에 숙청당한 문화예술계 월북 인사들과는 달리 복권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2. 1. 일제 강점기 활동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2] 본명은 신흥식이나, 대한민국 측 기록에서는 신영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기록에서는 신상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신불출이라는 이름은 본인이 직접 지은 예명으로, 당시의 억압받고 혼란스러웠던 일제시대를 살면서 차라리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에서 '불출(不出)'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언어유희적인 만담에 대단히 능했으며 당대의 유명 연예인이었지만 어린 시절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1925년 연극계에 등장한 이래 193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세태를 풍자하고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해학적인 만담과 연극을 공연하여 인기를 모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 비판 만담으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으며,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되자 "될대로 되어라"라는 의미의 추임새로 해석될 수 있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로 발음되도록 일본식 이름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2]
본래 연극 배우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던 신불출이 만담가가 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설봉의 증언에 따르면 신불출은 1931년에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사를 바꾸어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 여러분, 삼천리 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 사람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라고 외쳤다가 경찰서에 연행된 일이 있다.
표현의 자유가 크게 제약되던 시기라 신불출은 이후 풍성한 해학과 풍자를 담은 정치적 발언을 시작했다. 흥행의 귀재 이철에 의해 출시된 《익살맞은 대머리》(1933년)라는 만담 음반은 대성공을 기록하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전시 체제가 강화되어 독자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기 전까지 신불출의 만담은 예리한 언어 감각과 날카로운 풍자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우미관에서 창씨개명 비판공연때 김두한은 관람하였고 공연이 끝난 후 김두한이 신불출을 만나러왔다. 함께 종로회관으로 가서 술을 마시자며 초대했고 김두한과 친분을 맺었고 함께있던 정진영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걷게하였다. 또한 정진영에게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김해숙이라는 큰술집에 일하는 여직원을 소개하였고 그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2. 2. 해방 이후 ~ 한국 전쟁 시기
해방 후 신불출은 조선영화동맹 간부로 좌익 활동에 참여했다. 1946년 6.10 만세 운동 20주년 행사에서 태극기에 빗대어 미군정 체제를 풍자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3] 이 연설로 인해 귀가 도중 우익 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 소속 김두한과 부하들에게 총격을 당해 왼쪽 어깨, 팔, 옆구리에 중상을 입었다.[3] 신불출은 미군정에 의해 치안 교란, 연합국 비방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어 벌금 20000KRW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47년 복역 후 월북했다.한국 전쟁 때는 선무 방송에 참여했다.
2.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활동과 숙청
한국 전쟁 때 신불출은 선무 방송에 참여했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배우로 선정되었으며, 신불출만담연구소 소장을 맡는 등 초기에는 정치적으로 성공했다.[4]그러나 신불출은 대본 검열 등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며 자유로운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는 등 북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그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결국 1960년대 초 한설야 계열이 몰락할 때, 또는 1960년대 후반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청 이후 신불출은 지방의 노동교화소나 협동 농장, 정치범 수용소로 추방되어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1976년경에 사망했다는 소문[4]만 전해질 뿐, 사망한 시기도 분명치 않다. 같이 수감되었던 탈북자 김영순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의 신불출은 수용소 내에서 병마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특유의 유머를 보이며 수감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한다.
김정일도 신불출의 유머를 좋아하여 사후 그의 만담집을 출간하는 등 그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한설야, 최승희, 심영 등 비슷한 시기에 숙청당한 문화예술계 월북 인사들과는 달리 복권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3. 평가
신불출은 만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될대로 되어라'라는 의미의 추임새로 해석될 수 있는 '에하라노아라'로 발음되도록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비꼬며 비판하기도 했다.[5]
4. 신불출을 연기한 배우들
김종국이 SBS 드라마 《야인시대》 (2002년 ~ 2003년)와 KBS2 드라마 《일말의 순정》 (2013년)에서 신불출을 연기했다.
참조
[1]
뉴스
(CULTURE) 만담가 ‘신불출’을 아시나요?
https://news.naver.c[...]
주간동아
2009-05-20
[2]
뉴스
"[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노들강변 ③ - 신불출 '특유의 만담'으로 日 비꼬아"
http://cctoday.co.kr[...]
충청투데이
2007-05-26
[3]
뉴스
노변야화 제33화 좌익의 단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쇄
http://dbs.donga.com[...]
동아방송
1969-11-21
[4]
뉴스
'최승희ㆍ신불출 수용소서 비참한 최후' - 北 요덕수용소서 8년 수감생활 무용배우 출신 김영순씨 증언
http://nk.chosun.com[...]
2004-06-10
[5]
뉴스
신불출
http://www.hani.co.k[...]
한겨레
200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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