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황철은 일제강점기부터 북한에서 활동한 배우이다. 1912년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운전사로 일하던 중 사고로 결혼 후 야반도주하여 유랑극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연극사에 입단하여 연기 수업을 받고 동양극장에서 활동하며 '조선 최고의 배우'로 불릴 만큼 인기를 얻었다. 광복 후 남로당에 입당했다가 월북하여 한국 전쟁 시기 선무 공연 활동을 했으며, 미군 공습으로 팔을 잃었으나 김일성의 지원으로 의수를 착용하고 연기를 계속했다. 1955년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성 부상 등 요직을 역임했다. 연극 《리순신 장군》에 출연하고, 영화 《춘향전》을 마지막으로 은퇴 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극 배우 - 박영신 (배우)
일제강점기 연극 배우로 활동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문예행정 분야 핵심 관료로 활동하며 공훈배우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극 배우 - 신불출
신불출은 일제강점기 사회 부조리 풍자와 항일 정신을 담은 만담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며 숙청당했다는 설이 있는 만담가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배우 - 문예봉
문예봉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배우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배우 - 서광제
서광제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활동한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 감독으로, 카프 참여, 친일 영화 제작, 광복 후 좌익 활동, 월북 후 시나리오 작가 활동을 했으며,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황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황철 |
원래 이름 | 黃徹 |
출생일 | 1912년 1월 11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청양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거주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직업 | 은퇴 연극배우 출신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문정복(4혼) 일본 여성일본인 주재소장 딸.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처(결혼 후 도주로써 첫 이혼) 최씨(두번째 이혼) 이정순(세번째 이혼) |
경력 | |
국가 | 북괴 문화성 |
직책 | 초대 부상 |
임기 | 1960년 12월 27일 ~ 1961년 1월 28일 |
장관 | 한설야 북괴 문화성 문화상 박웅걸 북괴 문화성 문화상 |
후임 | 조명암 |
전임 | (초대) |
주석 | 최용건 |
수상 | |
수상 | 김일성 |
2. 생애
1912년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난 황철은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운전사로 일했다. 그러나 음주운전 사고로 일본인 주재소장의 딸에게 큰 화상을 입혀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2] 이후 야반도주하여 유랑극단에서 '황태철'이라는 가명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31년 조선연극사에 입단하여 연기를 배우고, 동양극장을 기반으로 한 극단 청춘좌에서 임선규의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철수' 역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극단 아랑, 낙랑극회에서 활동하며 "조선 최고의 배우"로 불렸다.
이정순과 결혼했으나, 양백명의 아내이자 이정순의 친구인 문정복과 불륜 관계를 맺어 곤란을 겪었다.[3] 이후 황철은 문정복과 결혼했다.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에 가입했다가 검거되었고, 춘천 공연 중 테러를 당한 후 1948년 월북했다.[1] 심영 등과 함께 최은희, 백인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납북했다.[1] 한국 전쟁 중에는 전선예술공작대 소속으로 활동하다 미군 전투기의 공습으로 오른쪽 팔을 잃었다.[1] 김일성은 황철에게 헝가리제 의수를 선물했고, 황철은 의수를 착용한 채 연기 생활을 계속했다.[1]
한국 전쟁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배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1955년에는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다.[1]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성 부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등 요직을 역임했다.[1]
북한에서 연극 《리순신 장군》, 영화 《춘향전》 등에 출연했다.[1] 공황장애 후유증 등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나,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 변기종은 황철을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연극쟁이"라고 평가했다.[1]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서정리사업으로 많은 연예인들이 숙청당했지만, 황철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1]
2. 1. 일제 강점기 (1912년 ~ 1945년)
1912년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청양군수를 지낸 아버지 황우정의 부임지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1930년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인기 직업이던 운전사로 일했다. 그러나 음주운전 사고로 동승한 일본인 주재소장의 딸의 얼굴에 3도 화상을 입게 하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일본인 주재소장의 딸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2] 하지만 이후 황철은 야반도주를 한 후 유랑극단으로 숨어들어갔고, 그때 '황태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1930년대 초반부터 유랑극단에서 단역 배우로 연극을 시작했다.1931년 말 경에 조선연극사를 찾아가 입단하여 정식으로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동양극장을 무대로 활동하던 극단 청춘좌로 옮긴 뒤 임선규 각본의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여주인공 홍도의 오빠 '철수' 역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극단 아랑, 낙랑극회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조선 최고의 배우"로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연기 생활 중 만난 극단 호화선의 여배우 이정순과 결혼하여 함께 여관을 경영하면서 부부 연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원만한 성격을 바탕으로 배우 중심의 극단인 아랑을 잘 이끌어갔고, 극작가 임선규와는 좋은 앙상블을 이루며 연기력에 대한 호평과 인기를 유지했다. 그러나 여자 문제가 복잡하여 잡음도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선배인 양백명의 아내이자 부인 이정순의 친구인 문정복과 불륜 관계가 되어 곤란을 겪기도 했다.[3] 후에 황철은 문정복과 결혼했다.
2. 2. 광복 후 ~ 한국 전쟁 (1945년 ~ 1953년)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가 검거되기도 했으며, 춘천에서 공연 도중 테러 피해까지 당하자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1948년 월북했다.[1] 월북 당시 심영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납북했는데, 그 중에는 배우 최은희와 의사 백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1] 하지만 최은희는 납북되자마자 바로 탈북했다.[1] 한국 전쟁 시기에는 전선예술공작대 소속으로 선무 공연 활동을 하기 위해 수원에 있다가 평택으로 가는 길목에서 미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오른쪽 팔을 절단했다.[1] 그러나 김일성이 이런 황철을 기특하게 여겨 헝가리에서 의수를 수입해다가 선물로 줬고, 황철은 김일성에게 선물받은 헝가리제 의수를 착용한 채 연기 생활을 계속했다.[1]2.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활동 (1953년 ~ 1961년)
한국 전쟁 참전 공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배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특히 1955년 받은 인민배우 칭호는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로 기록에 남아 있다.[1]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성 부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등 요직을 역임했다.[1]북한에서 출연한 작품으로는 연극 《리순신 장군》이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1] 1960년에 변학도 역으로 출연한 영화 《춘향전》이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다.[1] 오른 팔을 폭격으로 잃었을 때 받은 부상과 공황장애 후유증으로 인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사망했을 때 예술가로는 드문 사회장을 치렀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됐다.[1] 배우 변기종은 "한 달 동안 연극을 계속해도 목이 쉬지 않는 천부적 배우로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연극쟁이"라고 평했다.[1]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도서정리사업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예인들이 무더기로 숙청당했다.[1] 이때 문예봉, 심영, 최승희까지 모조리 숙청당했지만, 황철은 이미 고인이었기 때문에 숙청당하지 않았다.[1]
3. 출연 작품
1931년 말 경 조선연극사에서 정식으로 연기 수업을 받았고, 동양극장을 무대로 활동하던 극단 청춘좌로 옮긴 뒤 임선규 각본의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여주인공 홍도의 오빠 '철수' 역으로 유명해졌다.[2] 이후 극단 아랑, 낙랑극회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조선 최고의 배우"로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4. 황철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문서
일본인 주재소장 딸.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2]
뉴스
천부적 재능의 조선 최고의 스타 황철 - [한국영화스타 8-①] 영화배우 황철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1-29
[3]
뉴스
친일, 월북, 그리고 인민배우 - [한국영화스타8-②] 영화배우 황철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1-2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