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바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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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비 바르탕은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가수로, 1944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태어나 1952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1960년대 예예(yé-yé) 열풍을 이끌며 가수로 데뷔하여,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프랑스 및 국제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65년 조니 할리데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혼했고, 2005년에는 세계 보건 기구 친선 대사로 임명되어 사회 활동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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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바르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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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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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실비 조르주 바르타니앙 |
출생일 | 1944년 8월 15일 |
출생지 | 불가리아 왕국 이스크레츠 |
국적 | 프랑스 |
거주지 | 파리, 프랑스 |
가족 | 에디 바르탕 (형제) 마이클 바르탕 (조카) |
혼인 정보 | |
배우자 | 조니 할리데이 (1965년 4월 12일 결혼, 1980년 11월 4일 이혼) 토니 스코티 (1984년 6월 2일 결혼) |
자녀 | 2명 (그중 다비드 할리데이) |
음악 활동 | |
장르 | 예-예 로큰롤 팝 디스코 솔 재즈 |
직업 | 가수 배우 |
활동 기간 | 1952년–현재 |
레이블 | 데카 RCA 유니버설 |
웹사이트 | 실비 바르탕 공식 웹사이트 |
2. 생애
## 생애
### 불가리아에서의 유년 시절과 프랑스로의 이주 (1944-1952)
실비 바르탕은 1944년 8월 15일 불가리아 소피아 근교 소피아주 스보게 시 이스클레츠(Iskrets)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22] 아버지 조르주 바르타니안(Georges Vartanian, 1912–1970)은 불가리아인 어머니 슬라브카와 아르메니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3][4] 소피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했다. 가족은 바르타니안이라는 이름을 바르탕으로 줄였다. 어머니 일로나(결혼 전 성은 마이어, 1914–2007)는 저명한 건축가 루돌프 마이어의 딸로, 헝가리계 유대인 혈통이었다.[2][5][6] 실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프랑스 출신이며, 아버지는 소피아의 프랑스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그 문화에 심취했기 때문에 실비는 그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다재다능하여 오페라를 사랑하고 피아노를 치고 작곡도 하며 그림도 그렸지만, 프로 조각가였기 때문에 정부의 요청[23]으로 스탈린과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제2차 세계 대전 후 성립된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초대 수상)와 함께 청동상을 제작했다.[24]
1944년 9월 소련군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자 불가리아 왕국은 붕괴되었고, 바르타니안 가족의 집은 국유화되어 소피아로 이사했다. 1952년, 실비의 아버지 친구이자 영화 감독인 다코 다코브스키는 그녀에게 오스만 제국 점령에 맞선 불가리아 반군에 관한 영화인 ''Pod igoto''에서 여학생 역할을 제안했다.[7] 이 영화에 참여하면서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의 꿈이 이루어졌다.[2]
전후 불가리아의 어려움으로 인해 가족은 1952년 12월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2] 처음에는 레알 근처 리옹 다르장 호텔에 머물렀고, 조르주는 그곳에서 직업을 구했다. 그 후 4년 동안 앙글레테르 호텔의 단칸방에서 지냈다. 어린 실비는 학교에서 뒤처지지 않고 급우들과 어울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배우는 데 2년을 보냈다.[2] 1960년, 그녀의 가족은 미셸 비조 애비뉴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2]
### 가수 데뷔와 예예(yé-yé) 스타 (1960-1970)
1960년, 실비 바르탕은 오빠 에디 바르탕(Eddie Vartan프랑스어)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 1961년, 에디는 실비에게 프랑스 록 가수 프랭키 조던과 함께 "Panne d'essence"를 녹음할 기회를 주었다. 이 곡은 예상을 뛰어넘는 히트를 기록했고,[2] 비록 음반 표지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바르탕이 처음으로 프랑스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다.[2] 언론은 그녀에게 "트위스트 소녀"라는 별명을 붙였다.[2]
"Panne d'essence"의 성공 이후, 실비는 빅토르 위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2] 그녀는 Sue Thompson의 "Sad Movies (Make Me Cry)"를 커버한 "Quand le film est triste (슬픈 영화)"가 수록된 데뷔 EP를 발매하여, 1961년 12월에 판매를 시작했다.[2] 이 곡 역시 히트하며, 1961년 12월 12일 파리 올랭피아 홀에서 첫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2] 레이 찰스의 "What'd I Say"를 커버한 "Est-ce que tu le sais?"가 빠르게 발매되었고, 그녀는 두 번째 콘서트를 위해 파리 올랭피아에서 빈스 테일러의 오프닝을 맡았다.[2] 1962년 가을에는 The Loco-Motion을 EP로, 첫 번째 LP ''Sylvie''를 발매했다.[2] 1962년에 EP로 발매된 "Tous mes copains"는 그녀의 다음 히트곡이 되었다.[2]
1963년, 폴 앵카는 그녀에게 "I'm Watching You"라는 곡을 주었고, 이 곡은 일본과 한국에서 그녀의 첫 국제적인 히트곡이 되었다.[1] 1963년 늦겨울, 바르탕은 조니 할리데이와 함께 프랑스 투어를 했고, 그와 함께 영화 ''D'où viens-tu, Johnny?''에 출연했다.[1] 그 해 말 그들은 테네시주 내슈빌로 가서 조데이너스와 함께 앨범을 녹음했는데, 이 녹음은 프랑스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1]
앨범 ''Sylvie à Nashville''에는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와 "Si je chante"라는 히트곡과 영어로 된 3곡(그중 한 곡은 폴 앵카가 참여)이 수록되었다. 영화 ''Cherchez l'idole''과 함께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가 수록된 EP는 프랑스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일본에서 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으며, 한국과 스페인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2] 1964년 1월, 그녀는 비틀즈의 지원 공연 중 하나로 파리 올랭피아에 출연했다(트리니 로페즈도 포함).[8]
"Renown" 의류 라인의 광고와 영화 ''Patate''에서의 조연은 그녀의 명성을 높였다. 그녀는 또한 ''The Ed Sullivan Show, Shindig!, Hullabaloo''에 출연했고, 캐나다, 남아메리카, 폴리네시아를 포함한 국제 콘서트 투어를 했다. 도쿄에서는 12일 동안 13번의 콘서트를 열었다.[2]
1964년 12월, 할리데이가 군 복무를 시작하자 실비의 동생 에디는 믹 존스 (기타)를 포함한 두 명의 영국 작곡 세션 뮤지션을 고용하여 뉴욕에서 녹음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히트곡 "Cette lettre-là"를 썼다.[1] 1964년 1월 16일, 실비는 비틀즈와 함께 공연했으며 올림피아에서 그들의 쇼를 열었다.[9] 세련된 디자인의 ''J.C. Averty 쇼''에서 "Cette lettre-là"는 실비 바르탕의 TV 버라이어티 쇼 공연의 시작이었다.[10]
1965년, 실비 바르탕은 팝 록 가수 조니 할리데이와 결혼하여,[19] 아들 다비드 할리데이를 낳았다. 1968년 4월 11일, 바르탕은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지만, 8월에 투어를 재개했다.[2] 그녀는 1968년 12월 4일 "Jolie poupée" 쇼에서 프랑스 TV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섹시한 카바레 댄서 이미지를 선보였다.[2]
### 1970년대 이후의 활동과 사회 공헌
실비 바르탕은 1970년에 두 번째 교통사고를 겪었지만,[2] 꾸준히 공연하며 음반을 녹음했다.[1] 1972년에는 영화 ''말페르튀''에 출연했고, RCA 레이블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했다. 대표곡으로는 "J'ai un probleme", "L'amour au Diapason", "Parle moi de ta vie", "Petit rainbow", "Bye Bye Leroy Brown", "Disco Queen", "Nicolas", "Caro Mozart" 등이 있다. 1976년에는 존 콩고스의 곡을 디스코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Qu'est-ce qui fait pleurer les blondes?"로 프랑스 차트 1위를 차지했다.[2]
1965년, 조니 할리데이와 결혼하여 아들 데이비드 할리데이를 낳았지만, 1980년 11월 4일에 이혼했다.[19] 이후 음반 프로듀서 토니 스코티와 재혼하여 불가리아 소녀 다리나를 입양했다.[2]
1990년, 소피아의 문화 궁전에서 콘서트를 열고 불가리아 노래로 시작하고 마무리하며, 이민 후 처음으로 소피아를 방문했다.[2] 같은 해, 오빠 에디와 함께 불가리아 인도적 지원 단체 "Sylvie Vartan pour la Bulgarie"를 설립하여 신생아 의료 지원 활동을 펼쳤다.[31]
2005년, 세계 보건 기구(WHO) 친선 대사로 임명되었다.
2. 1. 불가리아에서의 유년 시절과 프랑스로의 이주 (1944-1952)
실비 바르탕은 1944년 8월 15일 불가리아 소피아 근교 소피아주 스보게 시 이스클레츠(Iskrets)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22] 아버지 조르주 바르타니안(Georges Vartanian, 1912–1970)은 불가리아인 어머니 슬라브카와 아르메니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3][4] 소피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했다. 가족은 바르타니안이라는 이름을 바르탕으로 줄였다. 어머니 일로나(결혼 전 성은 마이어, 1914–2007)는 저명한 건축가 루돌프 마이어의 딸로, 헝가리계 유대인 혈통이었다.[2][5][6] 실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프랑스 출신이며, 아버지는 소피아의 프랑스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그 문화에 심취했기 때문에 실비는 그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다재다능하여 오페라를 사랑하고 피아노를 치고 작곡도 하며 그림도 그렸지만, 프로 조각가였기 때문에 정부의 요청[23]으로 스탈린과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제2차 세계 대전 후 성립된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초대 수상)와 함께 청동상을 제작했다.[24]1944년 9월 소련군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자 불가리아 왕국은 붕괴되었고, 바르타니안 가족의 집은 국유화되어 소피아로 이사했다. 1952년, 실비의 아버지 친구이자 영화 감독인 다코 다코브스키는 그녀에게 오스만 제국 점령에 맞선 불가리아 반군에 관한 영화인 ''Pod igoto''에서 여학생 역할을 제안했다.[7] 이 영화에 참여하면서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의 꿈이 이루어졌다.[2]
전후 불가리아의 어려움으로 인해 가족은 1952년 12월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2] 처음에는 레알 근처 리옹 다르장 호텔에 머물렀고, 조르주는 그곳에서 직업을 구했다. 그 후 4년 동안 앙글레테르 호텔의 단칸방에서 지냈다. 어린 실비는 학교에서 뒤처지지 않고 급우들과 어울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배우는 데 2년을 보냈다.[2] 1960년, 그녀의 가족은 미셸 비조 애비뉴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2]
2. 2. 가수 데뷔와 예예(yé-yé) 스타 (1960-1970)
1960년, 실비 바르탕은 오빠 에디 바르탕(Eddie Vartan프랑스어)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 1961년, 에디는 실비에게 프랑스 록 가수 프랭키 조던과 함께 "Panne d'essence"를 녹음할 기회를 주었다. 이 곡은 예상을 뛰어넘는 히트를 기록했고,[2] 비록 음반 표지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바르탕이 처음으로 프랑스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다.[2] 언론은 그녀에게 "트위스트 소녀"라는 별명을 붙였다.[2]"Panne d'essence"의 성공 이후, 실비는 빅토르 위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2] 그녀는 Sue Thompson의 "Sad Movies (Make Me Cry)"를 커버한 "Quand le film est triste (슬픈 영화)"가 수록된 데뷔 EP를 발매하여, 1961년 12월에 판매를 시작했다.[2] 이 곡 역시 히트하며, 1961년 12월 12일 파리 올랭피아 홀에서 첫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2] 레이 찰스의 "What'd I Say"를 커버한 "Est-ce que tu le sais?"가 빠르게 발매되었고, 그녀는 두 번째 콘서트를 위해 파리 올랭피아에서 빈스 테일러의 오프닝을 맡았다.[2] 1962년 가을에는 The Loco-Motion을 EP로, 첫 번째 LP ''Sylvie''를 발매했다.[2] 1962년에 EP로 발매된 "Tous mes copains"는 그녀의 다음 히트곡이 되었다.[2]
1963년, 폴 앵카는 그녀에게 "I'm Watching You"라는 곡을 주었고, 이 곡은 일본과 한국에서 그녀의 첫 국제적인 히트곡이 되었다.[1] 1963년 늦겨울, 바르탕은 조니 할리데이와 함께 프랑스 투어를 했고, 그와 함께 영화 ''D'où viens-tu, Johnny?''에 출연했다.[1] 그 해 말 그들은 테네시주 내슈빌로 가서 조데이너스와 함께 앨범을 녹음했는데, 이 녹음은 프랑스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1]
앨범 ''Sylvie à Nashville''에는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와 "Si je chante"라는 히트곡과 영어로 된 3곡(그중 한 곡은 폴 앵카가 참여)이 수록되었다. 영화 ''Cherchez l'idole''과 함께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가 수록된 EP는 프랑스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일본에서 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으며, 한국과 스페인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2] 1964년 1월, 그녀는 비틀즈의 지원 공연 중 하나로 파리 올랭피아에 출연했다(트리니 로페즈도 포함).[8]
"Renown" 의류 라인의 광고와 영화 ''Patate''에서의 조연은 그녀의 명성을 높였다. 그녀는 또한 ''The Ed Sullivan Show, Shindig!, Hullabaloo''에 출연했고, 캐나다, 남아메리카, 폴리네시아를 포함한 국제 콘서트 투어를 했다. 도쿄에서는 12일 동안 13번의 콘서트를 열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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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실비 바르탕은 팝 록 가수 조니 할리데이와 결혼하여,[19] 아들 다비드 할리데이를 낳았다. 1968년 4월 11일, 바르탕은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지만, 8월에 투어를 재개했다.[2] 그녀는 1968년 12월 4일 "Jolie poupée" 쇼에서 프랑스 TV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섹시한 카바레 댄서 이미지를 선보였다.[2]
2. 3. 1970년대 이후의 활동과 사회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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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소피아의 문화 궁전에서 콘서트를 열고 불가리아 노래로 시작하고 마무리하며, 이민 후 처음으로 소피아를 방문했다.[2] 같은 해, 오빠 에디와 함께 불가리아 인도적 지원 단체 "Sylvie Vartan pour la Bulgarie"를 설립하여 신생아 의료 지원 활동을 펼쳤다.[31]
2005년, 세계 보건 기구(WHO) 친선 대사로 임명되었다.
3. 주요 작품
'''음반'''
실비 바르탕은 다양한 음반을 발표하며 음악적 경력을 쌓아왔다. 1962년 데뷔 앨범 ''실비''를 시작으로, ''트위스트와 샹트''(1963), ''실비 아 내슈빌''(1964), ''파리에서 온 선물''(1965) 등을 발표했다. 1966년에는 ''나에게는 두 명의 소녀가 있다''를 발표했고, 1968년 ''라 마리차''를 발표했다. 1973년 ''나에게 문제가 있다''를, 1976년 ''실비 바르탕 (당신의 사랑스러운 마녀)''와 ''금발은 왜 울까?''를 발표했다.
1985년 ''Made in USA''를 발표했으며, 1996년 ''모든 여성에게는 비밀이 있다''를 발표했다. 2007년 ''누벨 바그''를, 2013년 ''내슈빌의 실비''를 발표했다.
일본에서는 1963년 12월 빅터 레이블(SS-1380)로 언제나 당신을과 슬픈 빗소리가 일본 데뷔 싱글로 발매되었다. 1964년 7월에는 ''사랑의 눈물''과 트위스트 앤 샤우트가, 1964년 11월에는 아이돌을 찾아라가 발매되었다. 1970년대에는 ''슬픔의 병사'', ''사랑의 경험'' 등이 발매되었다. 1983년에는 나카지마 미유키의 악녀를 프랑스어로 커버한 곡이 발매되었다.
연도 | 음반명 |
---|---|
1962 | Sylvie |
1963 | Twiste et chante |
1964 | 실비 아 내슈빌 |
1965 | 파리에서 온 선물 |
1966 | 나에게는 두 명의 소녀가 있다 |
1967 | 2분 35초의 행복 |
1967 | 소년처럼 |
1968 | La Maritza |
1970 | 날 사랑해줘 |
1971 | 심파티 |
1973 | 나에게 문제가 있다 |
1974 | 나는 스와니를 위해 노래한다 |
1974 | 샹 샹 아 랑 |
1976 | 금발은 왜 울까? |
1976 | 당신의 사랑스러운 마녀 |
1977 | 조르주 |
1977 | 댄싱 스타 |
1978 | 환상 |
1979 | 나는 밤이 끝나기를 원치 않아 |
1979 | 분별없는 |
1980 | 어서와요 고독 |
1981 | 잘 안 돼 |
1982 | 이것저것 |
1983 | 당신의 삶을 춤춰요 |
1984 | 욕망의 시간 |
1985 | Made in USA |
1986 | 비라주 |
1989 | 컨피단스 |
1992 | 방데스트 |
1994 | 어쿠스틱 세션 |
1996 | 모든 여성에게는 비밀이 있다 |
1998 | 센시블 |
2004 | 실비 |
2007 | 누벨 바그 |
2009 | 모든 슬픔을 합쳐서 |
2010 | 솔레이 블루 |
2013 | 내슈빌의 실비 |
2015 | 음악 속의 삶 |
2018 | 당신과 함께 |
2021 | 응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화'''
실비 바르탕은 5세 때 아버지 친구인 영화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를 꿈꿨으나, 가수로 데뷔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964년 《빠따뜨(Patate)》, 1972년 《말페르튀 (Malpertuis)》, 1994년 《검은 천사(L'ange noir)》 등에 출연했다. 《검은 천사》는 찬반 양론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실비 바르탕은 같은 해 11월 《ELLE》와 《카예 뒤 시네마》 표지를 장식했다.
실비 바르탕은 《쉘부르의 우산》, 《미치광이 삐에로》, 《성에서의 생활》 등의 시나리오를 받았으나, 당시 삼엄한 경호로 인해 전달되지 못했다. 장 뤽 고다르는 실비 바르탕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연애시대》에서는 그녀의 데뷔곡이 흘러나오고, 《남성, 여성》에서는 그녀의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비 바르탕은 "영화는 좋아하지만 아무거나 연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해 영화 출연이 적다고 밝혔다.
그 외 출연작으로, 1952년 《멍에 아래에서》, 1962년 《모뵈주에서의 달빛(Un clair de lune à Maubeuge)》, 1963년 《우상 찾기(Cherchez l'idole)》, 《자니, 넌 어디서 왔니?(D'où viens-tu, Johnny?)》, 1964년 《파타트(Patate)》, 1971년 《말페르튀 (Malpertuis)》, 1994년 《검은 천사 (L'ange noir)》, 2001년 TV 영화 ''Mausolée pour une garce'', 2014년 《미셔너리 (The Missionaries)》 등이 있다.
3. 1. 음반
실비 바르탕은 다양한 음반을 발표하며 음악적 경력을 쌓아왔다. 1962년 데뷔 앨범 ''실비''를 시작으로, ''트위스트와 샹트''(1963), ''실비 아 내슈빌''(1964), ''파리에서 온 선물''(1965) 등을 발표했다. 1966년에는 ''나에게는 두 명의 소녀가 있다''를 발표했고, 1968년 ''라 마리차''를 발표했다. 1973년 ''나에게 문제가 있다''를, 1976년 ''실비 바르탕 (당신의 사랑스러운 마녀)''와 ''금발은 왜 울까?''를 발표했다.1985년 ''Made in USA''를 발표했으며, 1996년 ''모든 여성에게는 비밀이 있다''를 발표했다. 2007년 ''누벨 바그''를, 2013년 ''내슈빌의 실비''를 발표했다.
일본에서는 1963년 12월 빅터 레이블(SS-1380)로 언제나 당신을과 슬픈 빗소리가 일본 데뷔 싱글로 발매되었다. 1964년 7월에는 ''사랑의 눈물''과 트위스트 앤 샤우트가, 1964년 11월에는 아이돌을 찾아라가 발매되었다. 1970년대에는 ''슬픔의 병사'', ''사랑의 경험'' 등이 발매되었다. 1983년에는 나카지마 미유키의 악녀를 프랑스어로 커버한 곡이 발매되었다.
연도 | 음반명 |
---|---|
1962 | Sylvie |
1963 | Twiste et chante |
1964 | 실비 아 내슈빌 |
1965 | 파리에서 온 선물 |
1966 | 나에게는 두 명의 소녀가 있다 |
1967 | 2분 35초의 행복 |
1967 | 소년처럼 |
1968 | La Maritza |
1970 | 날 사랑해줘 |
1971 | 심파티 |
1973 | 나에게 문제가 있다 |
1974 | 나는 스와니를 위해 노래한다 |
1974 | 샹 샹 아 랑 |
1976 | 금발은 왜 울까? |
1976 | 당신의 사랑스러운 마녀 |
1977 | 조르주 |
1977 | 댄싱 스타 |
1978 | 환상 |
1979 | 나는 밤이 끝나기를 원치 않아 |
1979 | 분별없는 |
1980 | 어서와요 고독 |
1981 | 잘 안 돼 |
1982 | 이것저것 |
1983 | 당신의 삶을 춤춰요 |
1984 | 욕망의 시간 |
1985 | Made in USA |
1986 | 비라주 |
1989 | 컨피단스 |
1992 | 방데스트 |
1994 | 어쿠스틱 세션 |
1996 | 모든 여성에게는 비밀이 있다 |
1998 | 센시블 |
2004 | 실비 |
2007 | 누벨 바그 |
2009 | 모든 슬픔을 합쳐서 |
2010 | 솔레이 블루 |
2013 | 내슈빌의 실비 |
2015 | 음악 속의 삶 |
2018 | 당신과 함께 |
2021 | 응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3. 2. 영화
실비 바르탕은 5세 때 아버지 친구인 영화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를 꿈꿨으나, 가수로 데뷔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964년 《빠따뜨(Patate)》, 1972년 《말페르튀 (Malpertuis)》, 1994년 《검은 천사(L'ange noir)》 등에 출연했다. 《검은 천사》는 찬반 양론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실비 바르탕은 같은 해 11월 《ELLE》와 《카예 뒤 시네마》 표지를 장식했다.실비 바르탕은 《쉘부르의 우산》, 《미치광이 삐에로》, 《성에서의 생활》 등의 시나리오를 받았으나, 당시 삼엄한 경호로 인해 전달되지 못했다. 장 뤽 고다르는 실비 바르탕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연애시대》에서는 그녀의 데뷔곡이 흘러나오고, 《남성, 여성》에서는 그녀의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비 바르탕은 "영화는 좋아하지만 아무거나 연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해 영화 출연이 적다고 밝혔다.
그 외 출연작으로, 1962년 《모뵈주에서의 달빛(Un clair de lune à Maubeuge)》, 1963년 《우상 찾기(Cherchez l'idole)》, 《자니, 넌 어디서 왔니?(D'où viens-tu, Johnny?)》, 1972년 ''Absences répétées'', 1967년 ''Les Poneyttes'', 2001년 TV 영화 ''Mausolée pour une garce'' 등이 있다.
4. 한국과의 관계
실비 바르탕은 일본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아이돌을 찾아라'''", "'''슬픔의 병사'''", "'''당신의 포로'''", "'''슬픔의 심포니'''" 등의 대표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65년 5월, 20세의 나이로 세계 투어의 일환으로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하네다 공항에는 천 명이나 되는 팬들이 몰려들었다. 실비는 자서전에서 프랑스와 멀리 떨어진 극동의 나라에서의 성공과 공항에서의 열렬한 환영에 놀랐다고 회상했다. 당시 일본은 관광객이 많지 않았고, 앵커리지를 경유하는 비행기는 거의 실비 바르탕 일행의 전세와 같았다. 하네다 공항 도착 직후에는 "Bienvenue!! SYLVIE VARTAN"이라는 현수막을 배경으로 기자 회견에 참석했고, 오빠 에디 바르탕 오케스트라와 함께 약 3주간 일본 전국 투어를 진행했다.
1971년 5월, 6년 만에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하여 약 한 달간의 투어에서 재니스 조플린의 "미 앤 바비 맥기", 비틀즈의 "겟 백"을 선보였다. 체류 중에는 일본어로 레코드를 녹음하여 "'''연인 시대'''", "'''여자의 시간'''" 등을 훌륭한 발음으로 불러 "친일파"라는 평가를 받았다. "추억의 마리차", "나의 모든 것"의 일본어 버전도 녹음했다. 1973년에는 자크 브렐의 "가지 마"를 열창했다.
1978년에는 더욱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댄스 장면을 선보였다. 1985년에는 코카콜라 라이트의 CM에 출연, "'''라이트한 관계'''"가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1992년 6월, 일본 전국 투어를 통해 신곡 "'''세 파탈'''", "'''런던에 비가 내려'''" 등을 선보였고,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하며 불가리아 민요 "Moya Goro"를 아카펠라로 불렀다. 1995년 6월에는 요코하마 프랑스 영화제에 주연작 "L'Ange Noir (검은 천사)"를 가지고 단장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2000년대 들어, 2005년과 2008년에 도쿄 공연을 통해 신곡 "'''영원히 당신의 포로~사랑하는 실비'''", "'''누벨 바그'''"를 선보였다. 시부야 Bunkamura 오차드 홀은 연일 만원이었다. 2005년에는 레나운의 CM 곡 "레나운 원사카 아가씨"를 처음 무대에서 선보였고, 2008년에는 "슬픔의 병사", "슬픔의 심포니"를 약 30년 만에 선보였다.
2010년 11월, 재일 프랑스 상공 회의소의 연례 이벤트 갈라 (GALA2010)에 초청되어 ANA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특별 콘서트를 했다. 최신 팝 앨범 "Soleil Bleu (푸른 태양)"에서 동명의 신곡을 작가인 줄리앙 도레와 듀엣으로 처음 선보였다.
2011년 4월 30일,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지원 자선 콘서트에 출연하여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 (아이돌을 찾아라)", "La Maritza (추억의 마리차)", "Sous ordonnance des étoiles (별의 처방전)" 총 3곡을 불렀다.
2013년 2월, 빌보드 라이브 도쿄, 오사카 공연에서 총 15곡을 선보였다.[56] 2014년 4월, 빌보드 라이브 도쿄, 오사카 공연에서 총 15곡을 선보였다. 라디오 인터뷰[57]에서 "변화하는 것",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오랜 활동의 비결이라고 밝혔다.
2018년 5월, NHK 가요 프로그램 "노래의 컨시어지"에 출연하여 "아이돌을 찾아라", "당신의 포로" 2곡을 선보였다.
4. 1. 여러 차례의 내한 공연
실비 바르탕은 1965년 5월 8일부터 20일까지 첫 방한을 한 이후,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7년, 1978년, 1992년에 걸쳐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1983년에는 도쿄, 나고야, 오사카에서, 1984년에는 도쿄, 오사카, 교토에서 공연을 가졌다. 특히 1984년 4월 25일에는 호텔 메르디앙 도쿄에서 디너 쇼를 열었다. 1999년에는 도쿄 롯폰기 스위트 바질에서 매일 밤 2회씩 총 12회 공연을 했다. 2005년과 2008년에는 도쿄 시부야 분카무라 오차드 홀에서 3회 공연을 펼쳤다. 2010년에는 ANA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재일 프랑스 상공 회의소 GALA2010에서 특별 콘서트를 가졌다. 2013년에는 Billboard Live 도쿄와 오사카에서, 2014년에는 Billboard Live 오사카와 도쿄에서 매일 밤 2회씩 공연을 했다. 2018년에는 NHK 오사카 홀과 도쿄 시부야 분카무라 오차드 홀에서 공연을 진행했다.4. 2. 한국 팬들과의 꾸준한 소통
4. 3. 한국어로 된 노래 발표
4. 4.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5. 사회적 영향
2005년, 실비 바르탕은 세계 보건 기구의 친선 대사로 임명되어 유럽 지역의 산모 및 아동 건강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14] 바르탕은 게이 아이콘으로 여겨진다.[15][16]
5. 1. 시대의 아이콘이자 문화적 현상
실비 바르탕은 1960년대 프랑스 예예(yé-yé) 열풍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청순한 외모와 허스키한 목소리로 큰 인기를 얻었다. 2005년에는 세계 보건 기구의 친선 대사로 임명되어 유럽 지역의 산모 및 아동 건강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14] 바르탕은 게이 아이콘으로 여겨진다.[15][16]5. 2. 프랑스 대중문화의 중요한 부분
실비 바르탕은 2005년 세계 보건 기구의 친선 대사로 임명되어 유럽 지역의 산모 및 아동 건강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14] 또한 바르탕은 게이 아이콘으로 여겨진다.[15][16]5. 3. 패션 스타일
실비 바르탕은 1960년부터 1970년대에 긴 팔다리와 가녀린 실루엣으로 주목받아, 엘르나 보그 지상에서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프랑스어 등 쿠튀리에가 제작한 오트 쿠튀르(점프 수트부터 미니 드레스까지 다양한 패션)를 입고 헬무트 뉴턴 등의 촬영에 응했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Création Sylvie Vartan"(크리에이션 실비 바르탕)이라는 이름으로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을 발표했다. 엘르의 표지를 장식하며 매번 소개되었으며, 빅토르 위고 거리(Avenue Victor-Hugo)에 파리 1호 부티크를 열었으며, 프랑스에 3개 매장과 벨기에에도 출점했다. 2015년 11월 프랑스에서 출판된 패션 사진집 "LE STYLE VARTAN"에 파리 부티크 사진이 게재되었다.5. 4.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자아실현에 대한 새로운 관점 제시
실비 바르탕은 2005년 세계 보건 기구의 친선 대사로 임명되어 유럽 지역의 산모 및 아동 건강을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14] 게이 아이콘으로 여겨진다.[15][16]6. 수상 및 서훈 내역
- 1970년, 25e 누이 뒤 시네마에서 바리에테 최고상을 수상했다.[69]
- 198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여받았고, 2011년에는 동 훈장 코망되르를 수여받았다.
- 1987년 11월 13일 국가 공로 훈장 슈발리에(기사)를 수여받았고,[17] 2006년 오피시에(장교)로 승급했다.[17]
- 1996년 불가리아 정부로부터 마다라 훈장 슈발리에를 수여받았다.
- 1998년 11월 14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기사)를 수여받았고,[18] 2009년 오피시에(장교)로 승급했다.[18]
- 2004년 불가리아 정부로부터 스타라 플라니나 훈장을 수여받았다.
- 2005년 세계 보건 기구(WHO)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다.
- 2011년 파리에서 불가리아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생 시릴 앤 메토드 앤 레 시에클 도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 2014년 4월 22일, 소피아 시 명예 시민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는 실비 바르탕이 1990년에 설립한 "실비 바르탕 불가리아 구제 기금"이 병원에 기증한 신생아 의료기기(5만 유로) 및 그 공헌 활동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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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ルヴィ「私達は冷静で本心から歌っていた」、フランソワーズ「その通り。アメリカやイギリスの影響を受けたりコピーしたりで真のオリジナリティーを欠いたかもしれないが、屈託ない私達はとにかくその音楽に夢中で17歳の年齢なりに直向き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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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では翌2005年3月来日記念盤とし発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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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tes peines confondues」は日本では「恋の手紙」の別タイトルで2011年1月12日発売。「恋の手紙 (Une lettre d'amour)」は収録曲でシルヴィ自身が作曲。2010年録音の「あなたのとりこ」「アイドルを探せ」が日本のみ追加収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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観客が存在しないかのような録音を聴くのは苦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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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e Vartan, une Americaine a Paris, retour gagnant de Nash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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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TV (Alsace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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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e Vartan et Eddy Mitchell saluent leurs vieux cop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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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の[[ヴィクトワール・ド・ラ・ミュジーク]]および[[セザール賞]]に相当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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