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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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배는 위군 음안현 출신으로, 후한 말 원소 휘하의 장수이다. 젊은 시절부터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로 명성이 높았으며, 원소 사후 원상의 옹립을 주도했다.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원소의 사후 원상과 원담의 내분 속에서 원상을 지지하며 업성을 지켰다.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절을 높이 평가받았다.
초평 2년(191년), 한복에게서 기주(冀州)를 빼앗은 원소는 전풍을 기주별가로, 심배를 기주치중으로 임명하여 중용했다. 심배는 원소의 막부를 총괄했다.
원담은 청주(靑州)에서 군사를 이끌고 업(鄴)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심배가 기주를 장악하고 원상을 내세웠으므로, 후계자로 옹립될 수 없었다. 이에 원담은 업의 근교인 여양(黎陽|여양중국어)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자칭하였는데, 원소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칭한 이 관직을 원담이 칭함은 원상의 승계를 정면으로 불복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으며 사실상의 독립선언이었다.[1]
203년 겨울, 궁지에 몰린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해 원상에게 대항하였다. 조조가 북상하여 여양에 이르자 원상은 업으로 돌아갔다.
공융은 심배를 원소의 충신이라 평가했으나, 순욱은 심배를 고집이 세고 무계획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3] 공융은 심배를 "충절을 다한 신하"라고 평했지만, 순욱은 이에 반론하며 "심배는 독선적이고 무책이다"라고 평했다.
[1]
서적
先賢行状
2. 생애 전반기와 원상의 옹립
건안 4년(199년), 조조와의 전략 방침을 두고 곽도와 함께 단기 결전을 주장하며, 지구전을 주장하는 저수·전풍과 대립했다. 원소는 심배 등을 지지했으나, 건안 5년(200년) 관도 전투에서 원소군은 패배했고, 심배의 두 아들은 조조에게 사로잡혔다. 또한, 심배는 전투 전에 법률 위반을 이유로 허유의 가족을 수감했는데, 이는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하여 원소를 패배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다.
그 후, 평소 심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맹대가 심배를 참소하자, 곽도와 신평도 이에 동조했다. 이 때문에 맹대가 감군으로 임명되어 심배를 대신하여 업을 지키게 되었다. 이때,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 봉기가 심배를 변호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7] 봉기와는 일시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으나, 심배의 문서 등으로 미루어 보아 후에 다시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안 7년(202년) 원소가 병사하자, 심배는 봉기와 함께 원소가 총애했던 셋째 아들 원상을 옹립하고, 원담을 옹립하는 곽도·신평 등과 대립했다. 원소는 사망 전에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고, 《후한서》 원소전(袁紹傳)에 따르면 뭇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원담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심배 등은 원소의 유명을 위조해서까지 원상의 후계를 강행했다고 한다. 이후 원담과 원상은 대립을 심화시켜 무력 충돌을 반복하게 된다.
3. 여양 전투와 내전
이때 조조가 군대를 일으켜 북상하여 여양을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하였으므로 원담은 원상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심배는 거듭 논의하여 원상이 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했다. 이에 원담은 크게 노하여 원상 측에서 중재역으로 파견되어 있던 봉기를 죽였다. 다만 이 당시의 기록이 상당히 불명확한 점이 많은데 《한진춘추(漢晉春秋)》의 기록을 따르면, 오히려 원담이 봉기를 죽임으로써 양 진영이 화해하게 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봉기는 중재를 위해 원상에게서 파견되었으면서도 오히려 원담을 부추겨 불화를 조장했을 가능성이 높고 원상이 원담에게 군사를 보내지 않은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1]
어찌 되었든 봉기가 죽자 심배와 원상은 원담에게 원군을 보냈는데, 원담이 파견된 병사들을 빼앗아 자기 휘하에 소속시키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원상이 직접 출병해 원담을 구원하게 되었으며 심배는 남아서 업을 지켰다. 마침내 조조와 원담 · 원상은 여양성 아래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는 격전으로 약 8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한때 원담과 원상은 여양을 포기하고 업까지 철수하기도 했으나, 계속 진군해 오던 조조는 원상의 요격에 당하여 패퇴하게 된다. 이때 원담은 조조를 추격하면 궤멸시킬 수 있다고 진언했으나 원상은 이를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나자 청주로 돌아가지 않고 있던 원담군에 대한 무기와 병력의 보충도 중단했고 원담은 이 조치에 격노했다. 이때 곽도·신평 등은 원담을 부추기며 원담이 폐출된 까닭은 모두 심배가 뒤에서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모함했는데, 심배와 평소부터 사이가 나빴던 원담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겼고, 마침내 원담이 군사를 이끌고 원상을 공격해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1]
심배는 이 내전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한서》와 《한진춘추》에는 심배가 원담에게 보낸 서신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문장에 의하면 달아난 원담이 재차 업을 공격하려고 하자 심배와 심배의 도당들은 원담의 이같은 결정에 크게 분노하여 원상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원담과의 전쟁을 강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주석에 의하면 이때 참패한 원담군의 시체와 흐르는 피는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강력했던 심배의 권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편지의 내용 자체가 자아비판조이기 때문에 내전의 결정이 정말로 심배의 독단이었는지, 원상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것인지, 아니면 원상과 심배의 합작이었는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어쨌든 이런 강경한 대응은 결국 지나치게 궁지에 몰린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1]
4. 업성 공방전
204년 1월, 조조가 황하를 건너 돌아가자 원상은 심배를 남겨 업(鄴)을 지키게 하고 원담을 공격하러 떠났다. 이때 심배는 원상 진영의 대표로 원담에게 화해를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원담은 이를 듣지 않았다. 조조는 원상이 평원으로 향한 틈을 타 다시 북상했는데, 조조와 내응하고 있던 소유는 안에서 호응하려고 하다가 음모가 탄로나자 심배와 성내에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달아났다. 조조는 토산과 땅굴을 만들어 업을 공격하였으나 심배의 빠른 대처로 인해 모두 실패하였다. 이때 원상의 부장 윤해가 모성에 주둔하며 병주와의 길을 통하게 하였는데, 4월 조조는 조홍을 남겨 업을 계속 공격하게 하고 윤해와 저곡 등을 격파하고 5월에 다시 조홍과 합류하여 업을 공격했다.
이때 조조는 성 주위에 40리(16 km)에 걸쳐 구덩이를 파게 했는데, 깊이가 얕아 심배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조를 비웃었으나 조조가 하룻밤 사이에 이 구덩이를 2장(4.6m)이나 될 정도로 깊게 파고 장수를 무너뜨리자 업은 수몰되어 버렸다. 하지만 심배의 철저한 항전 때문에 공방이 계속되었는데, 성안의 아사자는 이미 절반이 넘었다.
7월, 업이 위급해졌다는 보고를 받은 원상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포위를 풀려 했고 심배도 원상에게 호응하였으나, 원상과 심배는 모두 대패하였다. 원상은 조조의 거듭된 급박한 추격에다 부하 장수들의 배신까지 겹쳤으므로 결국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대장군의 인수와 부절 등을 비롯한 개인 소지품까지 모두 버려둔 채 단기로 달아났다. 이를 노획한 조조가 이를 업성 쪽에 보이자 수비군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심배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조조가 업성에 가까이 접근해 시찰하자 쇠뇌를 일제히 조조에게 쏘게 했다. 이 중 몇 발은 조조에게 명중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조조를 죽이는 데에는 실패했다.[9]
8월, 동문을 지키던 심배의 조카 심영이 성문을 열고 조조군을 맞아들였다. 조조군이 성내에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심배는 곧바로 동문으로 달려가 싸웠지만 결국 사로잡혔다.
예전에 원담이 패하여 달아났을 때 기주에 있던 곽도 · 신비의 일족들도 모두 달아났으나 신평의 가족들만 사로잡혀 인질이 되었다. 동문이 열렸을 때 마침 심배는 동남쪽의 누각에 있었는데 조조의 병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곽도와 신평 형제가 기주를 패망시킨 것에 분노하여 사람을 옥중에 보내 신평의 일족을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했다.[10] 업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신비는 감옥으로 가서 신평의 가족을 풀어주려 하였으나, 이미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노한 신비는 붙잡힌 심배가 군막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말채찍으로 심배의 목을 후려치며 욕을 하자 심배는 신비에게 "이 개 같은 놈아! 너 때문에 조씨가 기주를 격파하게 되었으니,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외쳤다.
조조가 심배에게 "내가 포위망 가까이를 시찰할 때, 어찌 그리도 쇠뇌가 많았소?"라고 묻자, 심배는 "오히려 너무 적었던 것이 원망스럽다."라고 대답했다.
심배의 기백에 감탄한 조조는 심배를 살려주고 싶었으므로, "경이 원씨에게 충성을 바친 것처럼 나에게도 그리 할 수 없겠소?"라고 물었지만, 심배는 "살아서는 원가(袁家)의 신하요, 죽어서도 원가의 귀신이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굽히는 말이 전혀 없었고, 신비 등이 심배를 죽일 것을 간절히 원하며 호곡하는 것이 그치지 않으니 결국 심배를 베었는데, 끝까지 말과 기백이 장렬하였으므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에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형을 집행하게 되자 심배는 형을 집행하는 병사에게 "나의 임금이 북쪽에 계신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북쪽으로 앉히게 하고 죽었다.[8]
5. 평가
배송지는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심배를 한 시대의 열사(烈士)라고 평가했다.[3]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면서, 심배를 '원소의 막료 가운데 끝까지 충성을 바친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충절이 전해지는 한편, 권세를 휘두르는 모습도 전해진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에 인용된 『위서』의 조조가 내린 영에 따르면, 심배의 친족은 법을 어긴 죄인을 숨기고, 망명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지』 위서 왕수전에 따르면, 업성 함락 후에 심배와 그 외 장관들의 재화를 접수해 본 결과, 만 단위(건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를 기록했다고 한다. 원담에게는 봉기와 함께 오만하고 사치를 싫어했다고 한다.[3]
6. 심배의 친족관계
관계 이름 부친 심영 조카 심우 아들 ?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사로잡힘) 아들 ?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사로잡힘)
참조
[2]
서적
太尉陳球碑
[3]
서적
後漢書
[4]
서적
선현행장
[5]
간행물
예석
[6]
서적
삼국지
[7]
서적
영웅기
[8]
문서
장(丈)
[9]
서적
자치통감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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