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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노 모토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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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마노 모토마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모리 모토나리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1569년, 아마노 씨의 가독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데릴사위로 들어가 가문을 이었고, 이후 모리 씨의 일문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578년 고즈키 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했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말년에는 모리 씨로 성을 복귀하고 스오 국 미쓰오카에 봉해졌으며, 1609년 하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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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노 모토마사
기본 정보
씨명오에 성 모리 씨 → 후지와라 성 아마노 씨 → 다타라 성 미기타 씨 → 모리 씨
씨족다타라 씨
이름아마노 모토마사
이명모리 치요마루 (어린 시절 이름) → 아마노 모토마사 → 모리 모토마사 → 소큐 (호)
통칭쇼후쿠로쿠로, 로쿠로자에몬노죠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에이로쿠 2년 (1559년)
사망게이초 14년 4월 29일 (1609년 6월 1일)
묘소야마구치현 슈난시 센류지 절터, 야마구치현 호후시 텐토쿠지
관위종5위 하, 소부노카미, 사누키노카미
계명텐토쿠세이신다이코지, 텐토쿠세이신
섬긴 주인모리 데루모토
조슈 번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모리 모토나리, 어머니: 노미오오가타
양아버지: 아마노 모토사다, ,
양어머니: 아소누마 히로히데 딸
형제자매모리 다카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니노미야 나리카쓰, 호이다 모토키요, 모리 모토아키, 데와 모토토모, 모토마사, 스에쓰구 모토야스,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등
배우자정실: 아마노 모토사다 딸
계실: 아소누마 히로히데 딸, 기나시 다카모리 딸, 나가시마 씨 딸
자녀모리 모토토모, 모토이, 아소누마 모토사토, 모토마사, 나리모토, 모리 모토요시, 모리 모토노부 정실, 호소카와 모토후유 실, 스기노 모토치카 실, 딸 (바이코지 센요 케이)

2. 생애

1559년 (에이로쿠 2년), 아키 국의 센고쿠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노미 오가타이며, 호이다 모토키요·고바야카와 히데카네와는 배다른 형제이다.

쇼조산(生城山) 아마노 씨는 인접한 긴묘잔(金明山) 아마노 씨와 마찬가지로 가마쿠라 시대의 아마노 도게이를 시조로 하는 아키 국의 국인이었다. 1569년 아마노 씨 당주 모토사다[1]가 사망한 후, 가독 상속을 둘러싸고 가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이에 아버지 모토나리가 이 내분에 개입하여 일곱째 아들인 센토라마루(모토마사)를 모토사다의 데릴사위로 삼아 가독을 잇게 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했다.

모토마사는 모리 씨의 일문으로서 많은 전투에 출진했고, 1578년의 고즈키 성 전투에서는 형 모토키요와 함께 스스로 군대의 선두에 서서 고즈키 성을 함락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그 후에도 모리 씨의 중추 인물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1596년 (게이초 원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1600년 (게이초 5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했다.

후에 성을 모리로 복귀시키고 1603년 (게이초 8년), 스오 국구마게 군 미쓰오카에 봉해졌다. 모토마사는 모토나리의 빠진 이를 받아 소중히 간직했지만, 이 해가 모토나리의 33주기였기 때문에 공양탑을 세우고 유치를 봉납했다. 이어서 우다 1만 3,000석을 받았다. 모리 성을 되찾았지만, 아들 모토마사, 모토요시에게는 아마노 성을 쓰게 했다. 1605년 (게이초 10년)의 하기 성 축성을 둘러싼 가신들 간의 싸움(고로타이시 사건)에 관해서는 아마노 모토노부, 마스다 모토요시의 주장을 조사하여 모리 데루모토에게 보고했다.

1609년 (게이초 14년) 4월 29일, 하기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

2. 1. 가문 계승과 내분 수습

1569년 모토사다[1]가 사망한 후, 아마노 가문의 가독을 둘러싸고 가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모리 모토나리는 이 내분에 개입하여 자신의 일곱째 아들인 센토라마루(모토마사)를 모토사다의 데릴사위로 삼아 가독을 잇게 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했다.

2. 2. 주요 전투 활약

1578년 고즈키 성 전투에서 형 모토키요와 함께 군대의 선두에 서서 고즈키 성을 함락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1] 임진왜란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했다.[2]

2. 3. 모리 가문 복귀와 말년

1569년 모토사다가 사망한 후, 아마노가의 가독을 둘러싸고 문중의 내분이 벌어졌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모리 모토나리가 여기에 개입하여 자신의 7남인 모토마사를 모토사다의 양자로 들여보내 가독을 잇게 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1]

1578년 고즈키 성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이나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후 모토마사는 모리 성(毛利姓)으로 돌아와, 스오 미기타에 13000석을 받아 미기타 모리 가문(右田毛利家)의 시조가 되었다. 1609년(게이초 14년) 4월 29일 향년 51세로 하기에서 사망했다.

3. 인물

모토마사는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의 빠진 이를 받아 늘 소중히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4.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모리 모토나리
어머니노미노 가타
정실아마노 모토사다의 딸 (생년 미상 - 1606년 9월 26일)[4]
키나시 다카모리의 딸 (생년 미상 - 1641년 11월 2일)[4]
장남
나가시마 씨의 딸 (생몰년 미상)[4]
장녀
생모 불명 장녀(생년 미상 - 1653년 1월 28일)[4], 법명은 바이코지 센요에이[4]


참조

[1] 문서 天野興定
[2] 문서
[3] 문서
[4] 서적 閥閲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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