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교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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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비뇽 교황궁은 1252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된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교황들의 거주지였다.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시기에 걸쳐 증축되었으며, 1378년 교황 분열과 대립 교황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다 1906년 국립 박물관이 되었으며, 현재는 연간 65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프랑스의 주요 관광 명소이자, 아비뇽 페스티벌, 국제 회의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995년에는 아비뇽 역사 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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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교황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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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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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아비뇽 교황청 |
프랑스어 이름 | Palais des Papes |
라틴어 이름 | Palatium paparum |
위치 | 아비뇽, 프랑스 |
건축 양식 | 고딕 건축 |
세계유산 정보 | |
명칭 | 아비뇽 역사 지구: 교황청, 감독파 앙상블, 아비뇽 다리 |
등재 연도 | 1995년 |
등재 기준 | (i), (ii), (iv) |
지정 번호 | 228 |
유네스코 지역 | 유럽 |
추가 정보 |
2. 역사
아비뇽 교황궁은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구 교황궁과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신 교황궁, 두 개의 건물이 연결된 형태이다.
교황궁 소장 도서관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2,000권 이상)였으며, 페트라르카 등 많은 성직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또한 기욤 드 마쇼, 필리프 드 비트리, 요하네스 치코니아 등 음악가들도 교황궁에 모여들었다.
교황궁은 교황청의 중앙 집중화와 행정 개혁을 이끌었다. 교황청(교회 행정) 인력은 13세기 말 200명에서 14세기 초 300명, 1316년에는 500명으로 늘어났고, 교황궁에는 1,000명 이상의 평신도 관리가 있었다.[3][4]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청 소재지가 성 베드로의 무덤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고, 프랑스 궁정과 추기경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귀환을 추진했다. 1370년 완전한 귀환이 이루어졌다.[4]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궁은 두 명의 대립 교황과 많은 추기경의 자리로 사용되었지만, 이전의 영광을 잃었다. 그러나 샤를 드 몽탈렘베르와 같은 프랑스 시인과 작가들은 교황궁의 아름다움, 단순함, 웅장함, 불멸에 대한 감각을 언급했다.[5]
건설은 1252년에 시작되었다.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갈등 이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9년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아비뇽 유수").[17][18] 교황 요한 22세는 이곳에 웅장한 시설을 설립했고,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낡은 주교 궁전 재건을 시작하여 후임자들이 1364년까지 이어나갔다. 궁전은 "팔레 비외"(구 궁전)와 "팔레 뇌프"(신 궁전)로 나뉘어 건설되었으며, 완공 당시 11000m2 면적을 차지했다.
팔레 비외는 베네딕토 12세의 지시로 피에르 푸아송이 건설했다. 원래 주교 궁전을 철거하고 요새화된 수도원 중심으로 건물을 세웠으며, 4개의 날개에 높은 탑을 배치했다.
클레멘스 6세, 교황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는 건물을 확장하여 팔레 뇌프를 완성했다. 장 드 루브르는 클레멘스 6세의 의뢰로 52m 길이의 대 예배당을 건설했고, 인노첸시오 6세 시기에는 두 개의 탑과 다리가 추가되었다. 우르바노 5세는 주요 안뜰(명예의 궁정)을 완성하고 주변 건물을 추가했다. 내부는 프레스코, 태피스트리, 그림, 조각, 나무 천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1377년 교황들이 로마로 돌아가면서 1378년 교황 분열이 시작되었고,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1403년까지 아비뇽을 거주지로 삼았다. 베네딕토 13세는 1398년 제프리 부시코 군대의 포위로 5년간 궁전에 갇혔다. 건물은 대립 교황 세력에 남아 1410-1411년 포위되었다가 1433년 교황 사절에게 돌아갔다.
이후 350년 이상 교황 통제 하에 있었지만(주변 도시, 콩타 베네생과 함께) 1516년 복원에도 불구하고 점차 쇠퇴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당시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고, 혁명군에 의해 점령, 약탈당했다. 1791년 반혁명군 학살 현장이 되었고, 시신은 팔레 비외 토르 데 라트린에 던져졌다.
이후 나폴레옹 프랑스 정부가 군사 병영과 감옥으로 사용했다. 군사 점령, 특히 반성직자적인 프랑스 제3 공화국 치하에서 내부 목공 제거, 프레스코 훼손 등 건물이 크게 손상되었지만, 껍질은 살아남았다. 1906년 국립 박물관이 되면서 비워졌고, 이후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찰스 디킨스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건물 주변 여행을 묘사하며, 안내자를 건물 과거를 자랑스러워하는 악마라고 표현했다.[6]
클레멘스 5세는 1309년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왕국의 대립에서 중립적인 위치에서 로마를 떠나 아비뇽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교황청을 설치했다.[17][18]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는 아비뇽에 요새풍 대궁전과 성벽 건설을 진행했다. 1348년 조반나 1세가 아비뇽 시 전체를 약 44426.7°C에 매입하여 인노첸시오 6세 재위 기간 동안 난공불락의 교황령 도시 건설이 완료되었다.[17] 베네딕토 12세는 도서관 설치 사업에도 착수했다.[19][20] 세 교황은 교회 조직 개혁을 추진하여 각 기관을 정비, 확충했고, 남프랑스 금융 활동 및 상공업과 결합하여 번영 시대를 맞았다.[17][21]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 시대에는 파리풍 궁정 문화와 인문주의가 꽃피어 유럽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17]
1398년 Geoffrey Boucicaut|제프루아 부시코영어 군대가 교황청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3개월 전투 후 아비뇽을 점령, 베네딕토 13세의 아비뇽 교황청을 5년간 포위했다. 이후 대립 교황이 궁전을 되찾았지만(1410-1411년 재포위), 1433년 로마 교황청 재산이 되었다.
1433년부터 350년 이상 로마 교황청 관리 하에 있었으나, 1516년 복원에도 황폐해졌다. 프랑스 혁명 발발 시 황폐한 상태였으며, 혁명 세력에 의해 강탈, 파괴되었다. 1791년 반혁명파 학살 현장이 되어 유해는 구 궁전에 버려졌다.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는 병영 및 형무소로 사용되었다. 군사 점령으로 프레스코화 등이 파괴되었다. 1906년 이후 국립 박물관으로 관리,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1995년 아비뇽 역사 지구로 유네스코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다.
2. 1. 아비뇽 유수 (1309-1377)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4세와의 갈등, 그리고 로마의 혼란을 피해 1309년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했다.[17][18] 이 사건은 "아비뇽 유수"로 알려져 있다.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의 도미니크 수도원에 머물렀고, 그의 후임인 교황 요한 22세는 그곳에 웅장한 시설을 설립했다.[17][18]
교황 베네딕토 12세(1334-1342)는 낡은 주교 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훨씬 더 큰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공격자들로부터 심하게 요새화된 수도원을 중심으로 지어졌으며, 4개의 날개에는 높은 탑이 있었다. 이것이 "팔레 비외"(구 궁전)이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장 드 루브르에게 의뢰하여 새로운 탑과 인접 건물, 그리고 길이 52m의 대 예배당을 건설하도록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 시기에는 두 개의 탑과 다리가 더 건설되었고,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주요 안뜰(명예의 궁정)을 완성하고 주변에 추가 건물을 지었다. 이것이 "팔레 뇌프"(신 궁전)이다.
이 시기 교황궁은 교황청의 중앙 집권화와 관료제 강화를 이끌었다. 교황청(교회 행정)의 인력은 13세기 말 200명에서 14세기 초 300명, 1316년에는 500명으로 늘어났고, 교황궁에는 1,000명 이상의 평신도 관리가 있었다.[3][4]
1348년에는 프로방스 여백작이자 나폴리 여왕인 조반나 1세가 아비뇽 시 전체를 80000플로린에 매입했다.[17] 교황 인노첸시오 6세 재위 기간 동안 난공불락을 목표로 한 교황령 도시 건설이 완수되었다.[17]
2. 2. 서방 교회 대분열 (1378-1417)
1377년 교황이 로마로 돌아온 후, 추기경단은 다시 분열되었다.[17] 프랑스인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로마 시민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아 아비뇽으로 돌아갔다.[17] 이후 클레멘스 7세부터 베네딕토 13세에 이르는 서방 교회 대분열 (1378년~1417년) 시기에는 아비뇽 교황청이 다시 이용되었다.[17][22]1398년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는 프랑스 귀족 Geoffrey Boucicaut|제프루아 부시코영어가 이끄는 군대가 하수구를 통해 침투하여 교황청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3개월 간의 전투 끝에 아비뇽을 점령하고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가 거주하는 아비뇽 교황청을 5년간 포위했다. 그 후 대립 교황은 궁전을 되찾았지만 (1410년부터 1411년까지 다시 포위됨), 1433년에 로마 교황청의 재산이 되었다.
2. 3.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1433년 교황궁은 로마 교황청의 통제 하에 돌아갔으며, 1516년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점차 쇠퇴해 갔다.[1]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는 이미 황폐한 상태였고, 혁명 세력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1] 1791년에는 반혁명 세력 학살 현장이 되어, 희생자들의 유해가 구 궁전에 버려지기도 했다.[1]나폴레옹 시대에는 교황궁이 군사 병영과 감옥으로 사용되었다.[1] 프랑스 제3공화국 등 군사 점령 기간 동안에는 마구간 등으로 이용되면서 프레스코화를 비롯한 많은 부분이 추가로 파괴되었다.[1]
1906년 교황궁은 국립 박물관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보수 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1] 1995년에는 아비뇽 역사 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다.[1]
3. 건축
아비뇽 교황궁은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구 교황궁과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신 교황궁, 두 개의 건물이 연결된 형태이다.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프랑스 건축가 피에르 페이송과 장 드 루브르가 설계를 맡았다. 화려한 장식은 시모네 마르티니와 마테오 조바네티가 담당했다.[3]
1252년 건설이 시작되어, 교황 클레멘스 5세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교황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1364년까지 낡은 주교 궁전의 재건이 계속되었다. "팔레 비외"(구 궁전)와 "팔레 뇌프"(신 궁전)로 나뉘며, 전체 면적은 11000m2이다.[4]
교황 클레멘스 6세, 교황 인노첸시오 6세, 교황 우르바노 5세 치하에서 증축된 신 궁전에는 52m 길이의 대 예배당이 건설되었다. 건물의 내부는 프레스코, 태피스트리, 그림, 조각품 및 나무 천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교황들은 1377년 로마로 돌아갔지만, 대립 교황 시기에는 다시 아비뇽이 교황의 거주지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군사 병영과 감옥으로 사용되다가 1906년에 국립 박물관이 되었다.
바닥 면적이 15000sqm에 달하는 이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 궁전이며[10], 비올레르뒥은 궁전의 두께와 높이, 성벽의 견고함 등을 언급하며 건축적 장점을 강조했다.
3. 1. 개요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구 궁전과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신 궁전으로 구성된 아비뇽 교황궁은 고딕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프랑스 최고의 건축가였던 피에르 페이송과 장 드 루브르가 설계를 맡았다. 구 궁전은 베네딕토 12세의 명으로 미르푸아 출신의 건축가 피에르 푸아송이 건설하였다. 원래의 주교 궁전을 철거하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더 큰 건물로 대체했으며, 4개의 날개에는 높은 탑이 있다.[3] 신 궁전은 클레멘스 6세, 교황 인노첸시오 6세, 교황 우르바노 5세 치하에서 확장되었다. 장 드 루브르는 클레멘스 6세의 의뢰를 받아 52m 길이의 대 예배당을 포함한 새로운 탑과 인접한 건물을 지었다. 인노첸시오 6세 치하에서 두 개의 탑과 다리가 더 건설되었고, 우르바노 5세는 주요 안뜰을 완성했다.[4] 건물의 내부는 프레스코, 태피스트리, 그림, 조각품 및 나무 천장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다.3. 2. 주요 건축물
아비뇽 교황궁은 크게 구 궁전 (Palais Vieux)과 신 궁전 (Palais Neuf) 두 부분으로 나뉜다.[23]
구 궁전 (Palais Vieux)교황 베네딕토 12세의 지시로 건축가 피에르 푸아송이 건설하였다. 베네딕토 12세는 이전의 주교 궁전을 허물고, 튼튼하게 요새화된 수도원 형태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 건물은 네 개의 날개 부분에 높은 탑이 설치되어 있다.[23]
층 | 구분 | 설명 |
---|---|---|
1층 | 추기경 회의실 | 시모네 마르티니의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23] |
1층 | 생장 예배당 | 마테오 조바네티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23] |
2층 | 대식당 (연회장) | 고블랭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다.[23] |
2층 | 생마르시알 예배당 | [23] |
2층 | 응접실 | [23] |
2층 | 교황의 침소 | [23] |
신 궁전 (Palais Neuf)교황 클레멘스 6세 때부터 교황 인노첸시오 6세, 교황 우르바노 5세에 걸쳐 증축되었다. 클레멘스 6세는 건축가 장 드 루브르에게 의뢰하여 새로운 탑과 부속 건물을 지었는데, 그 중에는 교황의 예배 장소로 사용된 52m 길이의 대 예배당이 있다. 인노첸시오 6세는 두 개의 탑과 다리를 추가로 건설했고, 우르바노 5세는 주요 안뜰(명예의 궁정)을 완성하고 주변에 추가 건물을 지었다.[23]
층 | 구분 | 설명 |
---|---|---|
1층 | 대법정 | 볼트에 마테오 조바네티가 그린 예언자 프레스코화가 있다.[23] |
1층 | 소법정 | [23] |
3. 3. 탑

교황궁에는 다음과 같은 탑들이 있다.
- 1 – 투르 드 트루이아스(Tour de Trouillas) (피레네 산맥 근처 템플 기사단이 자주 찾았던 트루이아스 마을의 탑)
- 2 – 투르 데 라트린(Tour des Latrines) (변소 탑) 또는 "드 라 글라시에르"(de la Glacière) (얼음 창고 탑)
- 3 – 투르 데 퀴진(Tour des Cuisines) (주방 탑)
- 4 – 투르 생-장(Tour Saint-Jean) (생-장 탑)
- 5 – 투르 드 레튀드(Tour de l'Étude) (연구 탑)
- 6 – 투르 데 장(Tour des Anges) (천사 탑) 또는 "투르 뒤 파프"(Tour du Pape) (교황 탑)
- 7 – 투르 뒤 자르댕(Tour du Jardin) (정원 탑)
- 8 – 투르 드 라 가르드-로브(Tour de la Garde-Robe) (옷장 탑)
- 9 – 투르 생-로랑(Tour Saint-Laurent) (생-로랑 탑)
- 10 – 투르 드 라 가슈(Tour de la Gache) (폐기물 탑) (''궁전 뒤편'')
- 11 – 투르 당글(Tour d'angle) (모서리 탑) 또는 "투르 데 그랑 디니테르"(Tour des Grands Dignitaires) (고위 관리 탑) (''지붕선 아래'')
- 12 – 투르 드 라 캄판(Tour de la Campane) (종탑)
4. 내부 장식과 예술
아비뇽 교황궁의 화려한 장식은 프랑스 최고의 건축가 피에르 페이송과 장 드 루브르가 설계를 맡았고, 시에나 학파 최고의 제자였던 시모네 마르티니와 마테오 조바네티가 담당했다.[3]
교황 클레멘스 6세, 교황 인노첸시오 6세, 교황 우르바노 5세 치하에서 건물은 확장되었는데, 내부는 프레스코, 태피스트리, 그림, 조각품 및 나무 천장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다.[23] 교황궁은 그 규모가 방대했기 때문에 교회의 일반적인 조직이 변화하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교황청의 요구에 맞게 서비스의 중앙 집중화와 운영 적응을 용이하게 하여 교회에 진정한 중앙 행정을 창출했다.[3] 교황청 (교회 행정)의 인력은 13세기 말 200명이었으나 14세기 초에는 300명을 넘어 1316년에는 500명에 달했으며, 여기에 교황궁에서 일하는 1,000명 이상의 평신도 관리가 더해졌다.[4]
4. 1. 프레스코화

시모네 마르티니와 마테오 조바네티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아비뇽 교황궁의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3]
추기경 회의실에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프레스코 벽화가 전시되어 있다.[3]
생장 예배당과 생마르시알 예배당은 마테오 조바네티의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3] 특히 생마르시알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는 성 마르시알의 생애 주요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위에서 아래로 읽도록 구성되어 있다.[11]

생장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는 세례자 요한과 복음사가 요한에게 봉헌되었으며, 마테오 조바네티가 그린 그림에서 복잡한 건축은 "''원근법적 구성과 그 이전의 어떤 그림보다도 더 환상적인 허구의 방과 장소를 발전시켰다''".[13]
클레멘스 6세의 서재(사슴의 방)에는 궁정 사냥 장면을 묘사한 14세기 프레스코화가 벽과 아치에 장식되어 있다.[3] 이 프레스코화는 세속 미술에서 흔한 주제였지만, 학문에 전념하는 방에 그려진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시에나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나 시모네 마르티니 및/또는 마테오 조바네티의 도움을 받은 프랑스 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4. 2. 기타 장식
교황궁 내부는 한때 프레스코화 외에도 태피스트리, 그림, 조각품, 나무 천장 등 다양한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23]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이후 훼손으로 인해 많은 장식들이 사라졌다.[23] 혁명 세력은 궁전을 강탈하고 파괴했으며,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는 병영 및 형무소로 사용되면서 프레스코화 등이 추가로 파괴되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궁에는 여전히 가치 있는 예술 작품들이 남아있다.[23]5. 현대의 활용
오늘날 아비뇽 교황궁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우선, 역사적, 건축적 랜드마크이자 관광 명소로서 연간 약 65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며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10위 안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7]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아비뇽 역사 지구로 등재되었다.
또한 교황궁은 보클뤼즈 주의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하며, 로마 프랑스 연구소와 ''텍스트 연구 및 역사 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직한 아비뇽 교황청 연구 센터를 포함하고 있다.
아비뇽 교황궁에서는 정기적으로 미술 전시회가 열린다. 이 전통은 1947년 미술 평론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와 시인 르네 샤르가 마티스,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피에트 몬드리안과 같은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시작되었다.[15] 이후 2차례의 피카소 전시회(1970년, 1973년), 2000년의 "La beauté in fabula",[16] "Les Papesses"(2013), 미겔 바르셀로 (2010), 슈테판 슈체스니 (2014) 개인전 등이 개최되었다.
5. 1. 관광 명소
오늘날 교황궁은 역사적, 건축적 랜드마크이자 주로 관광 명소로, 연간 약 65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명소 10위 안에 꾸준히 들고 있다.[7]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아비뇽 역사 지구로 등재되었다.교황궁은 정기적으로 전시 센터 역할을 한다. 최초의 주요 전시는 1947년 6월 27일부터 30일까지 대 예배당에서 르네 샤르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Exposition de peintures et sculptures contemporaines"(현대 화가 및 조각가 전시회)라는 제목으로, 나중에 아비뇽 페스티벌이 된 것의 시작점이 되었다.[8]
교황궁의 안뜰은 매년 7월에 열리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중심 공연 장소이다. 또한 전시회, 쇼 및 컨벤션을 포함한 많은 문화 및 경제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교황궁은 또한 1976년에 설립되어 오늘날 매년 많은 행사를 주최하는 국제 회의 센터[9]가 있는데, 여기에는 의회, 심포지엄, 재회 및 기타 모임이 포함되며, 가장 큰 방인 '그랜드 오디언스'는 최대 700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다.
5. 2. 문화 공간
오늘날 교황궁은 역사적, 건축적 랜드마크이자 주로 관광 명소이며, 연간 약 65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명소 10위 안에 꾸준히 들고 있다.[7] 또한 대규모 컨벤션 센터와 보클뤼즈 주의 기록 보관소를 수용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로마 프랑스 연구소와 ''텍스트 연구 및 역사 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직한 아비뇽 교황청 연구 센터가 포함되어 있다.교황궁은 정기적으로 전시 센터 역할을 한다. 최초의 주요 전시는 1947년 6월 27일부터 30일까지 대 예배당에서 르네 샤르에 의해 시작되었다. Exposition de peintures et sculptures contemporaines영어(현대 화가 및 조각가 전시회)라는 제목으로, 나중에 아비뇽 페스티벌이 된 것의 시작점이 되었다.[8]
교황궁의 안뜰은 매년 7월에 열리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중심 공연 장소이다. 또한 전시회, 쇼 및 컨벤션을 포함한 많은 문화 및 경제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교황궁은 또한 1976년에 설립되어 오늘날 매년 많은 행사를 주최하는 국제 회의 센터가 있다.[9] 여기에는 의회, 심포지엄, 재회 및 기타 모임이 포함되며, 가장 큰 방인 '그랜드 오디언스'는 최대 700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다.
아비뇽 교황궁은 정기적으로 미술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전통은 1947년 미술 평론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와 시인 르네 샤르가 마티스,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피에트 몬드리안과 같은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시작되었다.[15] 이후 개최된 전시회로는 2차례의 피카소 전시회(1970년, 1973년), 포괄적인 2000년 전시회 La beauté in fabula프랑스어[16], 그리고 최근의 "Les Papesses"(2013) 전시회, 미겔 바르셀로 (2010)와 슈테판 슈체스니 (2014)의 개인전 등이 있다.
5. 3. 국제 회의 센터
1976년에 설립된 국제 회의 센터는[9] 의회, 심포지엄, 회의 및 기타 모임을 개최하며, 가장 큰 방인 '그랜드 오디언스'는 최대 7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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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istoric Centre of Avignon: Papal Palace, Episcopal Ensemble and Avignon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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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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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Centre historique d'Avignon: Palais des papes, ensemble épiscopal et Pont d'Avi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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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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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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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entre International des Congrès du Palais des P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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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pe's Palace | welcome"
http://www.palais-de[...]
2017-07-06
[11]
웹사이트
Saint-Martial chapel
http://www.culture.g[...]
201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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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Jean cha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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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Prof. 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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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Lukas Verlag
2019
[15]
문서
See "Szczesny. Métamorphoses méditerranée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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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La beauté in fabula
http://www.cairn.inf[...]
200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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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橋口(2004)
[18]
문서
マックスウェル・スチュアート(1999)pp.163-165
[19]
문서
マックスウェル・スチュアート(1999)pp.169-170
[20]
문서
高齢で教皇となったベネディクトゥス12世は、教皇に選任される前は精力的で有能な異端審問官で、司教として赴任したパミエとミルポワ (アリエージュ県)|ミルポワからヴァルド派とアルビジョワ派を「異端」として一掃した。
[21]
문서
クレメンス6世は、神聖ローマ皇帝ルートヴィヒ4世 (神聖ローマ皇帝)|ルートヴィヒ4世を廃位、破門すると宣言、1346年にボヘミア王国|ボヘミア王のカール4世 (神聖ローマ皇帝)|カール4世に戴冠した。
[22]
문서
マックスウェル・スチュアート(1999)pp.176-177
[23]
문서
ミシュラン『プロヴァンス-南フランス』(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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