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피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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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피스트리는 태피스트리 직조 기술을 사용하거나 구상적인 디자인을 가진 섬유 벽걸이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고대부터 제작되었으며, 중세 유럽에서 융성하여,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플랑드르가 생산의 중심지였다. 태피스트리는 육체적인 노동이 많이 필요한 직조 방식으로 제작되며, 예술가와 직공의 분업 체제로 제작되었으나 현대에는 예술가가 직접 제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현대에는 장 뤼르사가 태피스트리 부흥을 주도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예술가가 직접 직조에 참여하는 현대 태피스트리가 발전했다. 한국에서도 전통 공예의 일환으로 자수 병풍 등이 사용되었으며, 근현대에는 전통 소재와 기법을 활용한 현대적인 태피스트리 작품이 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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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피스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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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피스트리 | |
![]() | |
종류 | 직물 예술 |
기법 | 전통적으로 수직 직조기에서 직조 |
특징 | 가로 방향의 씨실로 세로 방향의 날실을 감싸 그림을 표현 |
역사 | |
기원 | 고대 이집트 |
주요 사용 시기 | 중세 시대 |
주요 사용 목적 | 벽 장식, 가구 덮개 |
유명한 예시 | 바유 태피스트리 |
제작 | |
재료 | 양모, 리넨, 실크, 금사, 은사 |
도구 | 직조기 |
기법 설명 | 씨실을 사용하여 날실을 완전히 덮어 그림을 표현 |
용도 | |
현대적 용도 | 벽걸이 장식, 예술 작품 |
전통적 용도 | 벽걸이 장식, 가구 덮개, 의복 |
관련 용어 | |
관련 용어 | 자수, 퀼트, 아플리케, 콜라주 |
2. 용어와 어원
영어 단어 "태피스트리(tapestry)"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태피스트리 직조 기술을 사용한 작품을, 둘째는 구상적인 디자인을 가진 다소 큰 섬유 벽걸이를 의미한다. 바이에 태피스트리와 같은 일부 자수 작품은 두 번째 정의에는 부합하지만 첫 번째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7]
태피스트리는 틀을 사용하여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날실(세로실)은 주로 면사나 아마(린넨)사를 사용하고, 씨실(가로실)은 양모(울), 면사, 견사, 금사, 은사 등을 사용한다. 표면에 나타나는 씨실에 의해 다채로운 무늬나 그림을 표현하며, 날실은 씨실에 완전히 가려 보이지 않는다.
태피스트리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기원전 15세기에 사망한 이집트 제18왕조 투트모세 3세의 묘에서 선명한 마(麻) 태피스트리가 출토되었다. 태피스트리는 헬레니즘 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동서 교역을 통해 널리 유통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풍의 태피스트리 일부가 중국 서부 타림 분지의 삼풀에서 발견되었다.[68]
"태피스트리"라는 단어는 고대 프랑스어 tapisserie|타피스리fro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tapisser|타피세fro,[9] "두꺼운 천으로 덮다, 카펫을 깔다"를 의미한다. 다시 tapis|타피fro, "두꺼운 천"에서 유래되었고, 이는 라틴어 tapes|타페스la(tapetis|타페티스la),[10]로, 이는 그리스어 τάπης|타페스grc(; τάπητος|타페토스grc, ), "카펫, 러그"의 라틴어화이다.[11] 이 단어의 가장 초기에 증명된 형태는 미케네 그리스어 𐀲𐀟𐀊|타페야gmy, 이며, 선문자 B 음절 문자로 쓰여졌다.[12]
"태피스트리"는 고전 시대가 거의 끝날 때까지 일반적인 영어 용어가 아니었다. 단순히 "벽걸이" 또는 "천"이라고 불리지 않으면, 아라스가 주요 생산 중심지였던 시대부터 "arras"로 알려졌다. ''Arazzo''는 이탈리아어에서 여전히 태피스트리를 지칭하는 용어이며, 많은 유럽 언어는 프랑스 공장인 고벨랭 공방을 기반으로 한 변형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어와 헝가리어 모두 ''gobelin''을 사용한다 (덴마크어에서 ''tapet''은 벽지를 의미한다).[13]
3. 제작 방법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카르통(밑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와 태피스트리를 직접 짜는 직공의 분업 체제로 제작되었다. 중세 후기부터는 전문 예술가가 카툰 제작을 맡았고, 직조공은 이 카툰을 바탕으로 태피스트리를 제작했다. 라파엘로 카툰은 이러한 카툰의 희귀한 예시 중 하나이다.[14] 시스티나 성당 태피스트리나 ''아브라함 이야기'' 세트와 같이, 귀금속이 사용된 버전과 그렇지 않은 버전으로 제작된 유명한 디자인도 있다.[15]
현대에는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르 코르뷔지에 등 많은 예술가들이 직공과의 협업을 통해 태피스트리 제작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 버전을 여러 점 제작했는데, 그 중 하나는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회의장 앞에 장식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염직이나 공예도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지만, 서양에서는 응용 예술로 여겨져 순수 예술가가 직접 염직을 하는 것을 특이하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캔버스워크나 니들포인트와 같이 캔버스 천에 자수를 놓아 만드는 작품도 태피스트리와 유사한 외관 때문에 종종 태피스트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태피스트리는 방음재로도 사용된다.
4. 역사
11세기에 동방의 카펫이 유럽으로 전래되었다. 화려한 융단을 신발로 밟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벽에 걸어두었더니, 방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벽의 틈새 바람을 막고 단열 효과도 있었다. 이로부터 유럽에서의 수요가 높아져, 14세기 초부터 유럽에서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68] 처음에는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활발하게 제조되었고, 점차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로 확대되었다.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는 직물로 번성하였다. 고급 양모로 짠 태피스트리는 유럽 각지의 성과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수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서 아라스의 태피스트리 대부분은 짜여진 금실을 뽑아내기 위해 불태워져, 현재는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아라스"는 오늘날에도 산지를 불문하고 고급 태피스트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16세기까지 플랑드르가 유럽 태피스트리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17세기에는 플랑드르에서 태피스트리가 가장 중요한 생산품이었으며, 이 시대에 제작된 많은 종류의 것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 태피스트리는 무늬와 색채의 복잡한 세부 사항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블랭이 태피스트리의 대명사가 된 것은 프랑스 왕의 힘에 의해서이다. 15세기 중반, 파리 시가지 바로 밖에서 장 고블랭과 그 가족이 염색 공장을 시작하여, 매우 성공했다. 앙리 4세는 17세기 초에 플랑드르에서 두 명의 장인을 초청하여 고블랭 공장에서 왕궁용 벽 장식으로 사용하는 태피스트리를 생산하게 하여, 고블랭 직조라는 이름이 유명해졌다. 1662년, 루이 14세 시대에 재무총감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고블랭 공장을 왕립 가구 공장의 일부로 하고, 화가 샤를르 르브룅의 운영과 감독 아래에서 많은 뛰어난 화가에게 밑그림을 그리게 한 태피스트리를 생산했다. 고블랭 공장은 17세기 말, 정부의 재정난으로 폐쇄되었지만, 후에 태피스트리 생산을 재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1. 고대
태피스트리의 초기 역사는 명확하지 않다. 현존하는 유물이 드물고, 고대 문헌의 기록도 태피스트리 기법을 설명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마포를 사용한 태피스트리 직조 조각이 투트모세 4세(기원전 1391년 또는 1388년 사망)와 투탕카멘(기원전 1323년경)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장갑과 로브 형태였다.[25]
타림 분지의 호탄 근처 삼풀(샴풀라)과 다른 유적지에서는 양모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약 2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헬레니즘 세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26] 삼풀 태피스트리로 알려진 가장 큰 조각들은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는 대형 벽걸이용이었으나 바지로 재사용되었다.
기원전 15세기에 사망한 이집트 제18왕조 투트모세 3세의 묘에서도 마(麻) 태피스트리가 출토되었다. 태피스트리는 헬레니즘 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동서 교역을 통해 널리 유통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풍의 태피스트리 일부가 중국 서부의 타림 분지의 삼풀에서 발견되었다.
4. 2. 중세
500~550년경 비잔틴 이집트에서 제작된 헤스티아 태피스트리는 훼손되지 않은 양모 작품으로, 헤스티아 여신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시기에도 그리스-로마 이교주의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27] 1000년경부터는 높이가 낮고 길이가 긴 프리즈 형태의 태피스트리가 발전했다. 성 게레온의 천은 비잔틴 실크에서 가져온 모티프를 가지고 있지만, 라인란트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8]
스웨덴에서 발견된 오베르호갈 태피스트리는 1100년경의 작품으로, 동물들이 인간보다 훨씬 많은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프리즈 형태의 작품은 바이에 태피스트리로, 1066년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을 묘사한 자수 작품이다.[29] 이는 앵글로색슨 시대의 장르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엘리 서''에는 버트노스의 미망인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태피스트리를 엘리 대성당에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다.[29] 1200년경 독일 할버슈타트 대성당을 위해 제작된 작품은 로마네스크 미술 양식을 담고 있으며, 특정 공간에 맞게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다.[30] 이 시기에는 반복되는 장식 모티프, 문장이 자주 사용되었으며, 비잔틴 실크와 같은 고급 직물의 스타일과 유사한 디자인이 일반적이었다.[31]
14세기 후반에는 태피스트리가 "공식적인 군사 미술"의 가장 훌륭한 매체로 부활하여, 의뢰한 사람의 승리를 기념했다.[37] 필리프 2세는 1382년 로스베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대규모 태피스트리 세트를 의뢰했다.[38]
4. 3. 전성기 (1350년경 이후)
유럽 태피스트리 역사에서 1350년경은 결정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이 시기부터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으로 인해 주요 기간이 끝날 때까지 이 산업의 패턴이 설정되었다.[32] 극소수의 고객을 위해 제작되던 태피스트리는 이제 매우 크고 비쌌으며, 종종 세트로 제작되었고, 많은 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복잡한 서사 또는 우화 장면을 보여주었다.[21]
태피스트리 생산은 북부 프랑스와 남부 네덜란드(영국산 양모 공급원 근처)의 여러 도시에 집중된 대규모 작업장에서 이루어졌다. 관례에 따라 이 모든 것을 "플랑드르 태피스트리"라고 부르지만, 실제 대부분의 생산 중심지는 플랑드르 백작령에 있지 않았다.
1600년 이전의 현존하는 태피스트리가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1528년부터는 주요 중심지였던 브뤼셀에서 어떤 크기의 태피스트리든 도시의 표식과 직조공 또는 상인의 표식을 표시하도록 했다.[33] 1350년부터 1600년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가장 크고 훌륭한 왕실 주문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은 한두 곳에 불과했으며, 고도로 숙련된 직조공 집단은 전쟁이나 역병으로 인해 새로운 중심지로 이동해야 했다.
처음에는 파리가 선두를 달렸지만, 1418년 이후 영국군 점령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중심지였던 아라스로 이동했다. 아라스는 1477년에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투르네가 부상했다. 브뤼셀은 중요성이 커지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브뤼셀은 17세기 초에 부활했지만, 1650년경부터 프랑스 공장이 점점 더 브뤼셀을 따라잡았고, 나폴레옹 전쟁의 격변으로 대형 태피스트리에 대한 전통적인 수요가 사실상 종식될 때까지 우위를 유지했다.[34]
주요 직조 중심지는 후기 중세 시대에 매우 중요한 후원자였던 발루아 왕가의 프랑스 및 부르고뉴 공국 지부가 지배했다.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네 아들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재산 목록을 보면 그들이 수백 점의 태피스트리를 소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컬렉션에서 거의 유일하게 명확하게 남아 있는 것, 그리고 14세기의 가장 유명한 태피스트리는 1377년에서 1382년 사이에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위해 파리에서 제작된 매우 큰 세트인 거대한 ''요한 계시록 태피스트리''이다.[35]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아마도 훨씬 더 사치스러운 소비를 했으며, 유럽 전역의 다른 통치자들에게 많은 태피스트리를 선물했다. 여러 태피스트리 직조 중심지가 그의 영토에 있었고, 그의 선물은 대형 플랑드르 태피스트리에 대한 취향을 다른 궁정으로 확산하려는 성공적인 시도이자 그의 공국의 지위를 높이려는 시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부르고뉴와 프랑스를 제외하고, 태피스트리는 여러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가에게 주어졌으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아라곤, 밀라노의 통치자들에게, 그리고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공작의 아들을 위한 몸값 거래의 일부로) 주어졌다. 필리프가 의뢰한 태피스트리는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36]
밀플뢰르(millefleur)는 다양한 종류의 작은 꽃과 식물들을 배경으로 하는 스타일로, 풀밭에서 자라는 듯한 녹색 바탕에 표현된다. 종종 다양한 동물들이 추가되는데, 보통 같은 크기로 묘사되어 토끼나 비둘기, 그리고 유니콘의 크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40]
밀플뢰르 스타일은 약 1400년부터 1550년까지, 특히 1480년에서 1520년 사이에 다양한 주제에 사용되었다. 많은 작품에서 밀플뢰르 배경은 태피스트리의 상단까지 이어져 하늘이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하늘을 최소화하는 것은 이미 태피스트리 스타일의 특징이었다. 인물로 대부분 덮여 있지 않은 돋보이는 밀플뢰르 배경은 특히 우화적이고 궁정적인 주제의 특징이다. 파리에 있는 ''레이디와 유니콘'' 연작이 1500년경의 유명한 예시이다.[41]
밀플뢰르 배경은 문장이 새겨진 태피스트리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는 비교적 작고 세로로 긴 형태의 가장 인기 있는 유형 중 하나였다. 이 태피스트리는 보통 중앙에 후원자의 문장을 배치하고 넓은 꽃밭을 특징으로 했다. 앵기앵은 이러한 태피스트리를 전문적으로 제작한 작은 직조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4. 4. 르네상스 시대
시스티나 성당을 위한 세트는 1515~16년 라파엘이 디자인했으며, 완전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을 태피스트리에 도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최고의 북부 디자이너들은 이를 채택하려 했으나, 이는 그들에게 다소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 판화가 널리 유통되면서 그들에게 쉬운 길이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랐다.[46]
16세기는 태피스트리에 대한 취향이 계속되었으며, 이 매체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태피스트리 생산 도시는 대부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들은 발루아 가문을 대체하여 지배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세기 초 투르네는 아마도 여전히 가장 큰 직조 중심지였지만, 역병 이후 브뤼셀로 대체되었다. 브뤼셀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발루아와 합스부르크의 네덜란드 행정 수도였으며, 1500년까지 이미 최고 품질의 직조의 주요 중심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태피스트리가 짜여진 다른 많은 도시가 있었다.[43]
태피스트리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 왕에서 교황 레오 10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의 통치자들이 네덜란드에서 의뢰했다. 작은 태피스트리의 소유권 또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을 통해 더 널리 퍼져나갔다. 1528년부터 브뤼셀에서 제작된 더 큰 크기의 태피스트리는 그렇게 표시해야 했으며, 제작자 또는 딜러의 마크도 함께 표시하여 역사가들의 작업을 훨씬 쉽게 만들었다.[44] 1476년 관련 길드 간의 합의에 따라 주요 디자인의 카툰은 화가 길드의 구성원이 제공해야 했으며, 직공들은 특히 ''밀플뢰르'' 디자인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는 브뤼셀 작품의 높은 디자인 품질을 보장했다.[45]
세기 초에는 후기 고딕 양식이 지배했으며, 가장 유명한 ''밀플뢰르'' "유니콘" 태피스트리 세트가 15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아마도 파리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즉, ''귀부인과 유니콘''(현재 파리 소장)과 ''유니콘 사냥''(현재 뉴욕 소장)이다.
''막시밀리안 사냥(Les Chasses de Maximilien)은 1530년대 베르나르 반 오를레이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디자인한 12개의 거대한 브뤼셀 태피스트리 연작으로, 최신 르네상스 스타일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성공적인 시도 중 하나였다.[46] 기술적으로, 15세기 마지막 4분의 1세기 동안 브뤼셀 태피스트리는 이미 충분히 정교해져서 더 많은 환영적인 요소를 통합하기 시작했으며, 주제의 다른 질감을 구별하고 일반적인 인물이 아닌 개인(현재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음)의 초상화를 포함했다.[47]
4. 5. 17세기
17세기 초,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태피스트리에 대한 선호는 여전했지만, 회화가 점차 인기를 얻고 있었다. 브뤼셀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태피스트리 생산 중심지였으며, 안트베르펜을 기반으로 활동한 루벤스는 야코프 요르다엔스 등과 함께 웅장한 바로크 양식을 태피스트리에 도입했다.[48] 이후 유스투스 판 에흐몬트, 루트비히 판 스호르, 얀 판 오를레이 등이 중요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러나 브뤼셀의 작업장은 대형 플랑드르 바로크 회화가 시장을 잠식하고 프랑스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세기 후반에 다소 쇠퇴했다.
파리에서는 1608년부터 태피스트리 생산이 다시 활발해졌으나, 1640년대 내전으로 잠시 주춤했다. 1658년 니콜라 푸케가 작업장을 설립하면서 생산이 재개되었고, 그의 몰락 이후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이 작업장을 1663년 왕실을 위해 설립한 고블랭 매뉴팩처와 합병시켰다. 보베 매뉴팩처는 개인 기업으로, 콜베르가 1664년에 설립했지만 20년 후에야 중요해졌다. 오뷔송 태피스트리는 이전의 소규모 작업장을 이어받아 다음 세기에 더욱 중요해졌다. 궁정 예술가들이 최신 루이 14세 양식의 디자인을 제공하는 고블랭 작업장은 1700년경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고 모방되는 작업장이 되었다.[49]
런던 외곽의 모틀레이크 태피스트리 공방은 1619년 잉글랜드의 찰스 1세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플랑드르 직공들을 고용하여 1620년대와 1630년대에 유럽 최고 품질의 태피스트리를 생산했다. 피렌체의 메디치 공방은 계속 운영되었으며, 1630년부터는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시작한 로마의 공방과 합류했는데, 이곳에도 플랑드르 출신의 감독이 있었다. 모틀레이크와 로마의 공방은 모두 세기 말 무렵 쇠퇴했다. 독일에서는 1604년 뮌헨에 작업장이 설립되었고, 세기 말까지 9개의 도시가 더 생겨났으며, 많은 곳이 지역 통치자의 지원을 받았다.[50]
4. 6. 18세기
18세기 초에는 로코코 양식이 태피스트리에 도입되어 이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프랑수아 부셰는 보베 공방을 위해 45점의 밑그림을 제작했으며, 1753년에는 동물 화가 장-밥티스트 우드리가 고블랭의 예술 감독을 맡았다.[52] 우드리의 가장 유명한 세트는 1720년대부터 여러 차례 반복 제작된 여덟 점의 ''전원적 유희''였다. 이 시기에는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일부는 여전히 사냥 장면을 담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들은 시골 생활의 풍속을 묘사했다.
이 시대에는 새로운 작업장이 거의 세워지지 않았으며, 유일한 예외는 마드리드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스페인이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플랑드르 지역을 잃은 직후인 1720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인 펠리페 5세는 야코프 판 데어 고텐과 그의 아들 6명을 마드리드로 데려왔다. 가장 잘 알려진 태피스트리는 1775년부터 프란시스코 고야가 디자인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주로 연인이나 시골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풍속 장면을 묘사한다. 그의 만화와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태피스트리 모두 대부분 남아 있으며, 많은 만화는 프라도 미술관에, 태피스트리는 여전히 왕궁에 보관되어 있다.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당 태피스트리 만화와 마찬가지로, 현대 비평가들은 만화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 작품들은 1997년까지 판 데어 고텐과 그 후손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했으며, 마지막 가족 구성원은 2002년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전쟁 중의 중단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은 태피스트리를 계속 제작해 왔다.[51]
18세기 후반에는 브뤼셀의 주요 작업장들이 점차 문을 닫았으며, 마지막 작업장은 1794년에 폐쇄되었다. 태피스트리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어느 쪽에도 잘 맞지 않았으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대형 인물 태피스트리 제작이 거의 중단되었다.
4. 7. 19세기
19세기에 윌리엄 모리스는 머튼 애비에서 중세 양식의 태피스트리 제작 기술을 부활시켰다. 모리스 & Co.는 에드워드 번 존스의 그림을 바탕으로 인물들을 사용하여 가정용 및 교회용 태피스트리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제작했다. 1890년대에 제작된 여섯 점으로 구성된 ''성배 태피스트리'' 세트는 여러 번 반복 제작되었으며, 그들이 만든 가장 큰 작품이자 아마도 가장 성공적인 작품일 것이다.[18]
전통적인 태피스트리는 여전히 파리의 고블랭 공장과 마드리드의 왕립 공장에서 제작되고 있다. 이들과 몇몇 다른 오래된 유럽의 공방에서는 오래된 태피스트리를 수리하고 복원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영국의 주요 공방은 로열 컬렉션 트러스트의 부서인 햄프턴 궁전에 있다.[65]
4. 8. 근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태피스트리 분야는 예술가가 직접 직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장 뤼르사는 색상 선택을 간소화하여 생산을 단순화하고, 로잔에서 열린 비엔날레 전시회를 통해 태피스트리 부흥을 이끌었다.[54] 1962년 첫 비엔날레에 출품된 폴란드 작품들은 전쟁으로 인해 전통적인 작업장이 붕괴되고 미술 용품을 구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사이잘삼과 같은 비정형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매우 개성적인 작품을 선보였다.[55] 이러한 폴란드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태도는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55]
미국의 경우, 전쟁 전에는 태피스트리 생산을 위한 장기간의 워크숍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직조공들은 주로 독학으로 예술을 디자인하고 직조했다.[55] 1970년대에는 거의 모든 직조공이 다양한 기술과 재료를 탐구했으며, 이는 "현대 태피스트리"라는 새로운 예술 분야로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미국 태피스트리 연합(ATA)이 설립되어 격년으로 심사위원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태피스트리 예술가 커뮤니티가 형성되고,[58] 국제 태피스트리 네트워크(ITNET)가 창설되어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졌다.[58]
자카드 직기를 이용한 태피스트리 제작 기술도 발전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자카드 기술을 사용하여 태피스트리 가구 직물과 중세 시대 태피스트리 복제품을 생산했지만,[64] 최근에는 척 클로스와 같은 예술가들이 컴퓨터화된 자카드 공정을 미술 작품 생산에 적용하고 있다.[64] 이 방법은 점묘법과 유사하게, 반복되는 다색 실을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혼합된 색상을 만들어낸다.[65]
5. 유명한 태피스트리
- 삼풀 태피스트리: 양모 벽걸이로, 기원전 3–2세기에 제작되었으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68] 타림 분지의 삼풀에서 발견되었다.[69]
- 헤스티아 태피스트리: 6세기 동로마 제국 지배하의 이집트에서 제작되었다. 헤스티아 신이 묘사되어 있으며, 워싱턴 D.C.의 덤바턴 오크스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 성 게레온의 옷감: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럽 태피스트리이다.
- 창조의 태피스트리: 11세기에 스페인에서 제작되었다. 종교적 장면이 있는 대형 자수 걸이이다.
- 외베르호갈 태피스트리: 1040년부터 1170년까지 제작된 바이킹 걸이이다.
- 바이에 태피스트리: 1070년대에 잉글랜드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자수 천으로, 노르만 정복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길이는 약 70미터(230피트)에 달한다. 실제로는 태피스트리가 아니다.
- 요한 계시록 태피스트리: 요한 묵시록의 장면을 묘사하며, 1373년에서 1382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원래 140m(459피트)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100m가 앙제의 앙제 성에 전시되어 있다. 샤를 5세의 화가였던 장 드 브뤼주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니콜라 바테유가 제작했다.
- 레이디와 유니콘(귀부인과 유니콘): 15세기 말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6점의 태피스트리 연작이다. 파리 클뤼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유니콘 사냥: 1495년부터 1505년까지 제작된 7점의 태피스트리 연작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클로이스터스에 전시되어 있다.
- 라파엘로의 카툰: 1515–16년에 라파엘로가 디자인했으며, 시스티나 성당의 특별한 의식 때만 장식되는 태피스트리 제작용 밑그림(카르톤)이다. 카르톤은 영국 왕실의 로열 컬렉션이 되었으며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공개되고 있고, 태피스트리는 바티칸 미술관의 피나코테카(회화관)가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도 의식 때 시스티나 예배당에 장식된다.
- 막시밀리안의 사냥: 베르나르 판 오를레이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브뤼셀에서 제작된 12점의 태피스트리 연작이다.
- 야기에우워 왕조 태피스트리: 16세기 중반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 성에 있는 134점의 태피스트리 컬렉션으로, 다양한 종교, 자연 및 왕실 주제를 묘사한다. 아라스에서 제작된 이 유명한 태피스트리는 1506년에서 1572년 사이에 재위한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가 수집했다.
- 발루아 태피스트리: 1560년대와 1570년대의 프랑스 왕실 축제를 묘사하는 8점의 걸개 연작이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역사: 1622년에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이탈리아 예술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가 디자인한 태피스트리 연작이다.
- 폴리도로스의 죽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7점의 태피스트리 세트 중 하나이다.
6. 한국의 관점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직물을 이용한 다양한 공예가 발달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수 병풍, 보자기 등이 사용되었다. 근현대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을 활용한 현대적인 태피스트리 작품이 제작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태피스트리를 포함한 전통 공예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 태피스트리 예술가들은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한국 태피스트리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일본 위키백과 문서에서 기온 마츠리·나가하마 히키야마 마츠리의 야마를 장식하는 태피스트리가 언급된 것은 한일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례로 볼 수 있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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