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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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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비루 씨는 일본 혼슈의 가즈사국 아비루 군에서 발상하여, 813년 쓰시마섬으로 이주한 씨족이다. 쓰시마 국의 재청관인으로 성장하여 최대 세력을 이루었으며, 1019년 도이의 입구에서 공을 세우고, 1204년에서 1205년 사이에는 아비루 아키요리가 종5위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246년, 고려와의 교역을 이유로 다자이후의 경고를 무시한 아비루 치카모토가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 쓰시마 국에서의 지배력을 잃었다. 이후에도 쓰시마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현재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 가장 많은 성씨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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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루씨
개요
가문 이름아비루 씨
로마자 표기Abiru-shi
본성칭: 소아씨, 대마직씨?
가조알 수 없음
종별무가
출신지가즈사국아와비군
근거지가즈사국아와비군
대마국 전역
주요 인물알 수 없음
지류알 수 없음

2. 역사

아비루 씨의 발상지는 일본 혼슈가즈사국(上総国)의 아비루 군(畔蒜郡)이다.[5] 고닌(弘仁) 4년(813년) 쓰시마로 이주해 쓰시마 국의 재청관인(在庁官人)이 되었고 쓰시마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

간닌(寬仁) 3년(1019년)에 벌어진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에서는 도이(刀伊)의 장군 용우(龍羽)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가마쿠라 시대겐큐(元久) 연간(1204년 ~ 1205년)에는 아비루 아키요리가 종5위하의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나 간겐(寬元) 4년(1246년) 아비루 치카모토가 당시 국교가 없었던 고려와 교역을 했다는 이유로 다자이후(大宰府)의 경고를 받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치카모토는 결국 이를 반역죄로 간주한 다자이후(太宰府)의 명을 받은 재청관인 소 시게히사(宗重尚)에 의해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아비루 씨는 쓰시마 국의 지배자로써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1246년에 아비루 치카모토, 혹은 아비루 헤이타로 쿠니노부가 당시 국교가 없었던 고려와 교역하는 것을 다자이후가 책망했으나 따르지 않아, 반란자로서 다자이후의 재청 관인소 시게히사에 의해 현재의 미쓰시마초 지치에서 정벌되었다고 역사가 오랫동안 전해져 왔지만, 이는 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이 싸움에서 보이는 아비루 씨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4]


  • 아비루 쿠니노부
  • 아비루 토사노카미 (쿠니노부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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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비루 치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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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비루 쵸한 (메쓰 관음사의 벳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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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카미아가타군 다이료로 여겨지는 아비루 젠유보 쿠니토시는 쿠니노부를 도왔지만, 현재의 카미쓰시마정 후나시에서 전사했으며, 그 아이는 니시쓰야에 숨겨졌다고 한다.[4]

그러나 그 뒤로도 쓰시마 최대의 세력으로써 아비루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후로도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는 아비루 씨가 가장 많은 성씨에 해당한다.

후예로, 오에이 2년(1395년)에 모토시마 신사의 궁사가 된 쓰시마 다이엔아비루 마사유키나, 오에이 4년(1397년)에 케치 스미요시 신사의 궁사가 된 쓰시마 다이엔아비루 사부로 베이 등이 보인다.

또한 일본 가고시마현(鹿児島県) 이즈미군(出水郡)에도 아비루 씨가 살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한때 소 씨의 영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그 당시 지배계층의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2. 1. 기원과 초기

아비루 씨의 발상지는 일본 혼슈인 가즈사국(上総国)의 아비루 군(畔蒜郡)이다.[5] 813년(고닌 4년) 쓰시마로 이주해 쓰시마 국의 재청관인(在庁官人)이 되었고 쓰시마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 1019년에 벌어진 도이의 입구에서는 도이(刀伊)의 장군 용우(龍羽)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메쓰 관음당의 종에 따르면, 정6위 상 권전아비루 스쿠네 요시이에가 1008년(간코 5년) 8월 28일에 종을 주조했고, 같은 종에는 1153년(닌페이 3년)의 인물로 정6위 상 행전아비루 스쿠네 요시후사의 이름이 보인다.[2][3] 이즈하라 하치만구 신사의 고문서에는, 1128년(다이지 3년)에 권대전아비루 사다마사, 그의 조부 기모토, 아버지 타다요시의 이름이 보인다.[2] 1204년에서 1205년 (겐큐 연간)에는 아비루 아키요리가 조정으로부터 종5위하의 관직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아키요리는 후에 후지와라 씨를 칭하고, 후예는 쓰시마 총궁사직을 역임했다고 한다.[4]

1246년(간겐 4년) 아비루 치카모토가 당시 국교가 없었던 고려와 교역을 했다는 이유로 다자이후(大宰府)의 경고를 받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간주한 다자이후(太宰府)의 명을 받은 재청관인 소 시게히사(宗重尚)에 의해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아비루 씨는 쓰시마 국의 지배자로써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로도 쓰시마 최대의 세력으로써 아비루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후로도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는 아비루 씨가 가장 많은 성씨에 해당한다.

1395년(오에이 2년)에 모토시마 신사의 궁사가 된 쓰시마 다이엔아비루 마사유키나, 1397년(오에이 4년)에 케치 스미요시 신사의 궁사가 된 쓰시마 다이엔아비루 사부로 베이 등이 아비루씨 후예로 알려져있다.

또한 일본 가고시마현(鹿児島県) 이즈미군(出水郡)에도 아비루 씨가 살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한때 소 씨의 영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그 당시 지배계층의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2. 2. 도이의 입구

813년 아비루 씨는 가즈사국 아비루 군(畔蒜郡)에서 쓰시마로 이주하여 재청관인(在庁官人)이 되었고 쓰시마 최대 세력이 되었다.[5] 1019년에 벌어진 도이의 입구에서는 도이(刀伊)의 장군 용우(龍羽)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1204년에서 1205년사이에는 아비루 아키요리(阿比留秋依)가 종5위하의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246년 아비루 치카모토(阿比留親元)가 당시 국교가 없었던 고려와 교역을 했다는 이유로 다자이후의 경고를 받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간주한 다자이후의 명을 받은 재청관인 소 시게히사에 의해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아비루 씨는 쓰시마 국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쓰시마 최대의 세력으로써 아비루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후로도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는 아비루 씨가 가장 많은 성씨에 해당한다.

가고시마현 이즈미 군(出水郡)에도 아비루 씨가 살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한때 소 씨의 영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그 당시 지배계층의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2. 3. 고려와의 무역과 몰락

아비루 씨는 가즈사국 아비루 군(畔蒜郡)에서 발상하여[5] 813년 쓰시마로 이주해 재청관인이 되었고 쓰시마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5] 1019년에 벌어진 도이의 입구에서는 도이의 장군 용우(龍羽)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1204년에서 1205년사이에는 아비루 아키요리(阿比留秋依)가 종5위하의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1246년 아비루 치카모토(阿比留親元)가 당시 국교가 없었던 고려와 교역을 했다는 이유로 다자이후의 경고를 받았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결국 반역죄로 간주한 다자이후의 명을 받은 재청관인 소 시게히사(宗重尚)에 의해 치카모토는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아비루 씨는 쓰시마 국의 지배자로써의 지위를 잃게 되었으나 그 뒤로도 쓰시마 최대의 세력으로써 아비루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후로도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는 아비루 씨가 가장 많은 성씨에 해당한다.

가고시마현 이즈미 군(出水郡)에도 아비루 씨가 살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한때 소 씨의 영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그 당시 지배계층의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2. 4. 몰락 이후

간겐(寬元) 4년(1246년) 아비루 치카모토(阿比留親元)가 당시 국교가 없었던 고려(高麗)와 교역을 했다는 이유로 다자이후(大宰府)의 경고를 받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치카모토는 결국 이를 반역죄로 간주한 다자이후(太宰府)의 명을 받은 재청관인 소 시게히사(宗重尚)에 의해 잡혀 죽었다.[4] 이로 인해 아비루 씨는 쓰시마 국의 지배자로써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5] 그러나 그 뒤로도 쓰시마 최대의 세력으로써 아비루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후로도 일본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에서는 아비루 씨가 가장 많은 성씨에 해당한다.

1246년에 아비루 치카모토, 혹은 아비루 헤이타로 쿠니노부가 당시 국교가 없었던 고려와 교역하는 것을 다자이후가 책망했으나 따르지 않아, 반란자로서 다자이후의 재청 관인소 시게히사에 의해 현재의 미쓰시마초 지치에서 정벌되었다고 역사가 오랫동안 전해져 왔지만, 이는 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이 싸움에서 보이는 아비루 씨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4]

  • 아비루 쿠니노부
  • 아비루 토사노카미 (쿠니노부의 아들)
  • 아비루 토키노부 (쿠니노부의 동생)
  • 아비루 치카모토
  • 아비루 젠유보 쿠니토시 (쿠니노부의 동생)
  • 아비루 호우인
  • 아비루 쵸한 (메쓰 관음사의 벳토)
  • 아비루 쵸큐 (쵸한의 아들?)


덧붙여, 카미아가타군 다이료로 여겨지는 아비루 젠유보 쿠니토시는 쿠니노부를 도왔지만, 현재의 카미쓰시마정 후나시에서 전사했으며, 그 아이는 니시쓰야에 숨겨졌다고 한다.[4]

아비루 씨는 몰락했지만, 최대 세력이었던 명성이 남아 아비루는 쓰시마국 전역으로 퍼졌기 때문에, 현재의 나가사키현쓰시마시에서는 최다 성씨 중 하나이다.

후예로, 오에이 2년(1395년)에 모토시마 신사의 궁사가 된 쓰시마 다이엔아비루 마사유키나, 오에이 4년(1397년)에 케치 스미요시 신사의 궁사가 된 쓰시마 다이엔아비루 사부로 베이 등이 보인다.

또한 일본 가고시마현(鹿児島県) 이즈미 군(出水郡)에도 아비루 씨가 살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한때 소 씨의 영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그 당시 지배계층의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3.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http://kojiki.kokuga[...]
[2]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姓氏家系大辞典刊行会 1942
[3] 웹사이트 https://www.city.tsu[...]
[4] 간행물 津島記事
[5] 문서 현재의 일본 지바현 소데가우라시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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