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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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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소 씨는 진무 천황의 아들인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의 후손으로, 일본에서 황실 다음으로 오래된 혈통을 가진 가문이다. 아소 신사의 궁사 직위를 세습하며,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를 시조로 한다고 전해진다. 고대에는 아소 지역을 다스리는 유력 가문이었으며, 중세에는 무사단을 형성하여 세력을 키웠다.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를 지지하며 가문 내 분열을 겪었고, 센고쿠 시대에는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세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1585년 시마즈 씨에게 패배하여 멸망했다. 이후 가토 기요마사의 지원으로 아소 신사의 대궁사 가문으로 부활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남작위를 받았다. 아소 씨는 대대로 아소 신사의 궁사를 배출했으며, 현재는 92대 아소 하루타카가 궁사직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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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씨
개요
아소 씨의 문장
아소 씨의 문장
창시자가무야이미미
모체일본 황실
씨족 정보
유형신사
무가
화족(남작)
본관히고국 아소
주요 인물아소 고레나오
아소 고레즈미
후예오사토 씨
나카무라 씨
사카나시 씨 등
역사
기원게이코 천황 시대에 아소 신사를 창건한 다케이와타쓰노미코토의 후손
아소 씨의 지배아소 신사의 대궁사직을 세습하며 아소 지역을 지배
남북조 시대남조에 속하여 활약
센고쿠 시대센고쿠 다이묘로서 세력을 확장
에도 시대구마모토 번에 속하게 됨
메이지 시대화족에 편입되어 남작 작위를 받음
관련 씨족
관련 씨족무나카타 씨
기타
참고다케이와타쓰노미코토의 후예 씨족인 아소 씨

2. 고대 아소 씨

리처드 폰손비-페인은 아소 씨의 역사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4] 고대의 아소 씨는 진무 천황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1] 히고국 아소군을 본관으로 하는 황별 씨족이다. 성은 군이었다.

기록된 역사에서 아소 씨는 쿠니노미야츠코라고 불리는 조정의 지방관으로 시작하여 해당 지역의 제사 활동을 관리했다. 점차 세력을 키워 아소 지역의 유력한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이 시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4]

아소 신사의 궁사 직위는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아소 가문은 일본 황실 다음으로 오래된, 기록상 확인되는 가계 혈통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7][1] 씨족의 많은 구성원들은 나카도리 고분군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5]

2. 1. 기원 및 전설

『고지키』에 따르면, 아소씨는 진무 천황의 황자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를 시조로 한다.[1] 오오씨, 호씨, 오이타씨 등과 동족 관계로 여겨진다. 오타 료진무 천황이 본거지를 긴키 지방으로 옮긴 후, 원래 본거지였던 규슈를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에게 맡겼고, 그 자손이 규슈 각지에서 번영했기 때문에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의 후예가 규슈에 많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9]

아소씨 스스로는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도 한다.[1] 전승에 따르면 진무 천황은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의 후손인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를 규슈에 파견했다.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는 아소에서 아소쓰히메노미코토와 결혼했으며,[1]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하야미케타마노미코토'''는 "고쿠조혼기"에 따르면 스진 천황 시대에 초대 '''아소 국조'''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아소씨는 이 하야미케타마노미코토의 자손으로, 아소 국조의 지위를 대대로 이어온 씨족으로 여겨진다. 아소 신사 부근에는 하야미케타마노미코토와 그의 아내 아메노미야히메노미코토를 모시는 국조 신사도 존재한다.

또한, 게이코 천황의 규슈 순행 때 아소쓰히코(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와 아소쓰히메노미코토 신이 천황을 맞이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아소 가문은 아소 신사의 궁사 직위를 세습하며, 일본 황실 다음으로 오래된, 기록된 가계 혈통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7][1] 많은 씨족 구성원들이 나카도리 고분군(中通古墳群)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5]

2. 2. 고분 시대

아소 씨는 진무 천황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의 아들인 카무야이마미의 후손이거나, 혹은 진무 천황에 의해 큐슈에 파견된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1]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는 아소 지역에서 아소쓰히메노미코토와 결혼하여 하야미케타마노미코토를 낳았으며, 하야미케타마노미코토는 스진 천황 시대에 초대 아소 국조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아소 씨는 이 하야미케타마노미코토의 자손으로 여겨진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아소 가문은 쿠니노미야츠코라는 황실의 지방 대표자로 시작하여 해당 지역의 제사 활동을 관리했다. 점차 세력을 키워 아소 지역의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4] 또한, 게이코 천황이 큐슈를 순행했을 때 아소쓰히코(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와 아소쓰히메 두 신이 직접 맞이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아소 씨 일족의 많은 사람들은 아소 계곡 동북부에 위치한 나카도리 고분군(中通古墳群|나카도리 고분군일본어)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5]

2. 3. 역사 기록

아소씨는 고분 시대에 아소 계곡 동북부를 근거지로 삼았다.[10] 아소시 이치노미야마치 나카도리에 있는 나카도리 고분군은 아소씨 일족의 묘로 여겨진다.[11]

기록된 역사에서 이 가문은 쿠니노미야츠코라고 불리는 황실 대표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해당 지역의 숭배 활동을 관리했으며, 점차 권력을 얻어 아소 지역의 지도자가 되었다.[4]

일본서기』에는 아소씨와 관련된 초기 기록이 나타난다. 센카 천황 원년 (서기 536년[12]) 5월 1일에 천황이 기근 대책을 위해 '''아소 죠군'''(阿蘇仍君)을 파견했다는 내용이다. 아소 죠군은 가와치국 이바라키군의 둔전(이바라키 둔전)에 있는 곡물을 추가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3. 중세 아소 씨

히고국아소 신사 대궁사를 세습하던 신관 가문에서 출발한 아소 씨는 중세에 들어 무사 가문으로 성장하여 구마모토현 아소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혔다. 기쿠치 씨, 사가라 씨와 함께 구마모토 지방을 대표하는 강력한 호족으로 성장했으며,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높은 관직을 받았다. 내부 분열을 반복하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가계를 이어왔다. 아소 씨는 황실이나 이즈모 대사의 센가 가, 기타지마 가 등과 같이 신(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의 자손으로서 고대 신화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유서 깊은 혈통을 지닌 가문으로 여겨진다.[14][15][16]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남작 가문에도 포함되었다.

3. 1.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의 여러 기록에서 아소씨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백련초』 간지 원년(1087년) 4월 기록에는 '아소사 축 항부(阿蘇社祝恒富)'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중우기』 간지 2년(1088년) 8월 7일 기록에는 스모 선수 '아소 유이엔(阿蘇惟遠)'이, 『장추기』 덴에이 2년(1111년) 8월 기록에는 스모 선수 '아소 시로 우지 유이토시(阿蘇四郎宇治惟利)'의 이름이 각각 보인다.

12세기 전반, '''아소 유이노부(阿蘇惟宣)''' 대에 이르러 아소씨는 아소 지역을 기반으로 무사단을 형성하였다. 유이노부는 고지 원년(1142년) 12월의 문서(우지 유이노부 해, 宇治惟宣解)[17]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되는 인물이며, 『속군서류종』에 수록된 아소 씨 계도에서 실재가 증명되는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유이노부의 손자(혹은 아들)로 여겨지는 '''유이타다'''는 지쇼・주에이의 난 당시 규슈 북부에서 일어난 친제이 반란에 가담하여 겐씨 편에서 활약하였다. 유이타다 대에 이르러 '아소(阿蘇)'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공식적으로 '''아소 씨(阿蘇氏)'''라 칭하게 되었다[18].

3. 2.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된 후, 아소사의 영지는 호조 도키마사의 예소(預所, 영지 관리 대행)가 되었고, 이로 인해 아소 씨는 호조 씨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196년 (겐큐(建久) 7년)에는 호조 도키마사가 아소 고레쓰구(阿蘇惟次)를 아소사의 대궁사(大宮司)로 임명하는 하문(下文, 상급 기관에서 하급 기관으로 내리는 문서)을 발급하기도 했다.

3. 3. 전성기: 하마노야카타 시대

아소 코레쓰구 이후, 아소 씨는 본거지를 미나미아소에서 미나미 외륜산을 넘어 야베 향(현 야마토정의 일부)의 하마노야카타(현 구마모토현립 야베 고등학교 부지)로 옮기면서 최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아소 씨는 기쿠치 씨나 사가라 씨와 함께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일대 호족으로 성장했다.

3. 4. 남북조 시대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소 씨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4] 아소 씨는 남조를 강력하게 지지했는데,[2][4] 이는 가문 내 분열을 초래하고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인 1333년(겐코 3년), 고다이고 천황의 토막 운동(막부 타도 운동)으로 겐코의 난이 일어나자, 아소 고레토키는 남조 측 고레요시 친왕의 령지(영지)를 받아 아시카가 타카우지 등과 함께 교토로쿠하라 단다이 공격에 참여했다. 고레토키의 아들 아소 고레나오 역시 기쿠치 씨와 함께 친제이 단다이 토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시작된 겐무의 신정 하에서 기쿠치 씨는 히고국의 고쿠시가 되었고, 아소 씨는 고쿠조시가 되었다. 이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두 가문이었지만, 기쿠치 씨가 고쿠시로서 아소 신사 보호권을 갖게 되고 아소 신사의 영지가 황실을 본가로 하는 장원이 많았던 점 때문에, 황실(다이카쿠지 통・친제이부)과 기쿠치 씨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아소 씨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9]

이후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겐무 정권에서 이탈하자, 아소 고레토키는 남조 측 무장으로서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하고 은퇴했다. 고다이고 천황의 반격으로 교토에서 쫓겨난 타카우지가 규슈로 피신하여 쇼니 씨의 환영을 받자, 고레토키로부터 가독을 계승한 아소 고레나오는 기쿠치 씨와 연합하여 아시카가・쇼니 군과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맞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당주 고레나오와 그의 동생 고레시게(고레토키의 차남)가 전사하여, 아소 가문의 본가(소료 가문)는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아소 고레카게의 후손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장남 고레스케는 에라 성을, 삼남 고레쿠니는 우지 성을, 사남 고레하루는 사카나리 성을 각각 칭했다.

아소 고레나오의 사망 후, 교토에 있던 아소 고레토키가 당주로 복귀했다. 고레토키는 자신의 사위이자 기쿠치 가문과 관계가 깊었던 에라 고레즈미(아소 고레즈미)에게 접근하여 그를 남조 측 대궁사로 삼으려 했다. 이는 아소 가문이 남조 세력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북조 측의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어교서를 내려 고레토키의 서자인 사카나리 손구마마루를 아소 가문의 당주로 인정하고 북조 대궁사직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 아소 고레즈미는 남조 대궁사로, 아소 손구마마루는 북조 대궁사로 나뉘어 서로 다투게 되었다. 1341년, 고레즈미가 손구마마루를 난고 성에서 공격해 살해하면서 남조 측의 세력이 잠시 우세해졌다.

하지만 아소 가문의 분열을 우려한 고레토키는 북조 측으로 돌아서서 고레즈미의 장남인 아소 고레무라를 북조 대궁사로 옹립하고, 오히려 고레즈미 토벌에 나섰다. 아시카가 막부와 오토모 씨가 고레무라를 지원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말년에 고레즈미는 가문 내분을 종식시키기 위해 북조 측의 고레무라에게 남조 대궁사 직을 양보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고레즈미 사후, 남조 세력 회복을 노리던 기쿠치 다케미쓰가 고레무라의 동생에게 자신의 이름 한 자인 '무(武)'를 주어 고레타케(아소 고레타케)라 칭하게 하고, 아소 가문의 분열을 다시 조장했다. 이에 호응하여 남조의 정서부(征西府)가 고레타케를 남조 대궁사로 임명하면서 가독 쟁탈전이 재개되었다. 결국 1376년, 무로마치 막부에서 파견된 오우치 요시히로와 오토모 친요가 고레타케를 토벌하면서 북조 대궁사가 아소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1451년, 고레타케의 증손자인 아소 고레토시가 고레무라의 손자인 아소 고레타다의 양자가 됨으로써 양측은 화해하는 듯했으나, 곧 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소 씨는 다시 고레토시・고레이에 부자와 고레타다・고레노리 부자 사이에서 당주 자리를 둘러싼 분쟁을 겪게 된다.

3. 5. 센고쿠 시대

1484년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 마몬바라 전투에서 아소 고레노리가 승리하여 분열되었던 씨족을 잠시 통일했다. 그러나 고레노리의 아들 대에 이르러 아소 씨는 다시 내부 분열에 휩싸였다.

1507년, 고레노리의 아들 아소 코레나가는 히고의 슈고였던 기쿠치 씨를 축출하고 스스로 기쿠치 타케쓰네라 칭하며 세력을 넓혔다. 그는 동생 아소 코레토요에게 아소 신사의 대궁사 직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1513년, 코레나가는 시마즈씨와 손을 잡고 동생 코레토요를 공격하여 휴가국으로 쫓아냈다. 이후 코레나가는 자신의 아들 아소 코레마에를 대궁사로 앉히고 세력 확장을 위한 원정을 계속했다. 1517년, 추방되었던 코레토요는 휴가 국의 구니진이었던 가이 치카노부 등의 도움을 받아 반격에 나서 코레나가 부자를 몰아내고 본거지인 야베를 되찾았다.

코레토요는 가이 치카노부와 그의 아들 가이 소운 부자의 보좌를 받으며 아소 씨의 세력을 다시 일으켰다. 비록 1523년에는 코레나가 부자에게 가타시타성을 빼앗기고 고우사, 토요, 나카야마 지역까지 내주었으나, 1543년에 가타시타성을 탈환하면서 30년에 걸친 내부 분열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코레나가에게 쫓겨났던 코레마에와 그의 아들 코레카타는 사가라 씨에게 의탁하여 도망쳤으며, 1590년 코레카타가 당시 당주였던 아소 고레미쓰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내부 항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덴분 18년(1549년), 코레토요는 고쇼 수리 비용으로 1만 히키를 헌납한 공으로 고나라 천황으로부터 종2위에 서임되며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그는 오토모씨, 사가라 씨와 동맹을 맺어 영토의 안정을 꾀했다.

아소씨의 가보로 여겨졌다는 명검 호타루마루


그러나 아소 코레마사가 당주가 된 덴쇼 6년(1578년), 동맹이었던 오토모 씨가 미미가와 전투에서 시마즈씨에게 크게 패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히고 국의 다른 구니진들이 시마즈 씨나 새롭게 떠오르던 류조지씨와 손을 잡으면서 아소 씨의 영토는 다시 위협받기 시작했다. 코레마사는 가문의 숙로였던 가이 소운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 덕분에 간신히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덴쇼 9년(1581년), 남쪽의 사가라 씨마저 시마즈 씨에게 항복하면서 시마즈 씨의 압박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덴쇼 13년(1585년) (덴쇼 11년(1583년)이라는 설도 있음)에는 아소 씨의 버팀목이었던 가이 소운과 그의 부하 타시로 소덴이 사망했다. 뒤이어 당주 아소 코레마사가 덴쇼 11년(1583년)에, 그 뒤를 이은 아소 코레타네가 덴쇼 12년(1584년)에 잇따라 사망하면서 아소 씨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덴쇼 시대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사쓰마를 포함한 규슈 정벌에 나섰을 때, 아소 씨의 당주는 어린 아소 고레미쓰였다. 아소 씨는 히데요시를 환영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는 결국 비극으로 이어졌다. 1593년, 고레미쓰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히데요시에 의해 살해당했다.[8] 이로써 센고쿠 시대 동안 명맥을 이어오던 아소 씨의 독립적인 세력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6. 아소 합전

1585년 (덴쇼 13년), 당시 신무기였던 철포로 무장한 시마즈씨 군대가 히토요시사가라씨를 항복시킨 후 아소씨 영내로 침공했다. 아소군은 무력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히고국 중부에 있던 아소씨의 여러 성들은 모두 함락되었다.

당시 아소씨의 당주였던 아소 고레미츠는 겨우 2살의 어린아이였다. 고레미츠는 동생, 어머니와 함께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규슈 산속 깊은 곳인 메마루(구마모토현야마토정 내대신 입구 부근)로 피신했다. 이곳은 헤이케의 패잔병 전설이 남아있을 정도로 외진 곳으로, 미도리가와강과 내대신 강의 깊은 계곡 사이에 있어 숨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고레미츠를 숨겨준 메마루 마을 사람들은 시마즈 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남자는 봉술, 여자는 나기나타를 익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오늘날 야마토정의 향토 예능인 '메마루 봉춤'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아소 영지의 여러 장수들이 시마즈 군에 항복하는 상황 속에서도, 아소 가문의 중신 다카모리 고레노리는 혈연관계인 오토모씨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북상하는 시마즈 군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1586년(덴쇼 14년), 히고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다카모리성마저 함락되자 고레노리는 할복했다. 이로써 시마즈씨는 히고 전역을 평정하게 되었고, 규슈의 유력 전국 다이묘 가문이었던 아소씨는 사실상 멸망했다. 시마즈씨가 짧은 기간에 규슈 내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아소씨를 비롯한 여러 호족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철포라는 신무기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4. 근세 이후 아소 씨

센고쿠 시대 말기, 규슈 정벌에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에서 아소 씨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당주 아소 유이테루는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일부 보장받고 아소 신사의 대궁사 지위는 유지했지만, 다이묘로서의 권력은 잃게 되었다.[20] 이는 아소 씨가 오랜 세월 누려온 지역 호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설상가상으로 분로쿠 2년(1593년), 우메키타 잇키에 가신이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유이테루는 히데요시로부터 자결을 명령받았다. 이로 인해 아소 가문은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고국의 영주가 된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으로 아소 가문은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유이테루의 동생 아소 유이젠에게 약간의 영지를 주고, 아소 신사의 대궁사직을 맡도록 배려했다.[4] 이후 아소 씨는 에도 시대 동안 아소 신사의 대궁사 가문으로서 존속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84년에는 당주 아소 유이아츠가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 아소 신사의 궁사는 제92대 아소 하루타카이다.

4. 1. 다이묘 가문 복귀 시도와 좌절

규슈를 제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아소 유이테루는 보호를 요청하여 약간의 영지를 받고 아소 신사 궁사로서의 지위도 인정받았으나, 다이묘로서의 특권은 모두 박탈당했다.[20] 이는 아소 씨족이 센고쿠 시대의 유력 호족에서 히데요시 정권 하의 일개 신관 가문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한다.

분로쿠 2년(1593년), 우메키타 잇키에 아소 유이테루의 가신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히데요시로부터 자결을 명령받아 사망하면서 아소 가문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은 중앙 권력에 의해 지방 세력이 억압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고 국에 입봉한 가토 기요마사의 배려로 유이테루의 동생인 아소 유이젠에게 소령이 주어지고, 기요마사가 부흥시킨 아소 신사의 대궁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4] 이를 통해 아소 가문은 가문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과거와 같은 다이묘의 지위를 회복하지는 못했다.[4]

4. 2. 아소 신사 대궁사 가문 복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과정에서 아소 씨는 큰 위기를 맞았다. 당주 아소 고레미쓰는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고[8], 아소 유이테루는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20] 분로쿠 2년(1593년)에는 히데요시에 의해 자결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상황이 변했다. 히고 국을 다스리게 된 가토 기요마사는 아소 씨족에게 호의적이었다.[4] 가토 기요마사의 배려로, 자결한 아소 유이테루의 동생인 아소 유이젠에게 소령(小領)이 주어졌다. 또한 아소 유이젠은 가토 기요마사가 재건을 도운 이치노미야 아소 신사(아소시 미야지 소재)의 대궁사 직책을 맡게 되면서, 아소 씨는 신사 가문으로서 명맥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아소 씨는 에도 시대를 거쳐 메이지 시대까지 존속하였다. 메이지 17년(1884년)에는 당시 당주였던 아소 유이아츠가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 아소 신사의 궁사는 제92대 아소 하루타카이다.[1]

4. 3. 에도 시대

에도 시대 동안 아소씨는 히고국아소 신사 대궁사 가문으로서 존속하였다. 아소씨는 황실이나 이즈모 대사의 센가 가, 기타지마 가 등과 같이[14][15] 신(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의 자손으로서 신대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가계로 여겨졌으며[16],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도 시대를 거치며 가문의 명맥을 유지했다.

4. 4. 메이지 시대 이후

에도 시대를 거쳐 메이지 시대에 이른 아소씨는 1884년 당주인 아소 유이아츠가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현재 아소 신사 궁사는 92대 아소 하루타카이다.

5. 역대 아소 대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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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비고
우지 고레노부
우지 스케나가
아소 고레야스
아소 고레쓰구『사적통고』에 따르면 쇼겐 원년(1207년)에 아소난고에서 진노우치(현재의 야마토정 조헤이)로 옮겼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음.
아소 고레요시
아소 고레타다1235년 8월 27일까지 대궁사. 1415년에 출생한 아소 고레타다와는 다른 인물.
아소 고레카게
아소 고레스케요절
아소 고레쿠니
아소 고레토키
아소 고레나오다타라하마 전투 패주 중, 동 지역 부근에서 교전 후 자결.
아소 손구마마루
아소 고레즈미남조 세력 최성기의 인물. 호타루마루의 소유자.
아소 고레무라종삼위. 히고수호. 북조. 대궁사 은퇴 후, 토요마치의 하야쿠스(현 구마모토현 시모마시키군 미사토정)에서 사망.
아소 고레타케남조 대궁사
아소 고레사토
아소 고레타다정삼위
아소 고레토시
아소 고레이에
아소 고레노리
아소 고레나가기쿠치 다케쓰네 기쿠치 씨의 혼란을 틈타 기쿠치 씨로부터 히고 수호직을 빼앗음. 후에 퇴위.
아소 고레토요아소 씨의 전성기. 하위 → 종삼위 → 종이위로 승격. 1549년, 조정에 어소 수리료로 1만 필을 헌납하고, 고나라 천황으로부터 종이위에 서임됨.
아소 고레마에
아소 고레마사 (1520년 - 1583년)제75대 대궁사. 아소 고레토요의 아들.
아소 고레타네 (1540년 - 1584년)제76대 대궁사. 아소 고레마사의 동생. (묘지 오탓초상. 아소 씨 몰락 시작 무렵)
아소 고레미쓰 (1582년 - 1593년)제77대 대궁사. 아소 고레타네의 아들. 시마즈 씨에게 공격받아 험준한 산간부로 도망(메마루오치).
아소 고레요시 (1583년 - 1654년)제78대 대궁사. 아소 고레미쓰의 동생.
아소 도모사다 (1617년 - 1704년)제79대 대궁사. 아소 고레요시의 아들.
아소 도모타카 (1648년 - 1718년)제80대 대궁사. 아소 도모사다의 아들.
아소 도모나 (1692년 - 1726년)제81대 대궁사. 아소 도모타카의 동생.
아소 마나미 (1705년 - 1765년)제82대 대궁사. 아소 도모사다의 동생 오사토 고레마사의 아들 오사토 고레신의 아들.
아소 고레노리 (1732년 - 1793년)제83대 대궁사. 오사토 고레신의 아들 오사토 고레에이의 아들.
아소 고레케이 (1775년 - 1817년)제84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노리의 아들.
아소 고레쇼 (1803년 - 1822년)제85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케이의 아들.
아소 고레하루 (1808년 - 1877년)제86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쇼의 동생.
아소 고레아쓰 (1830년 - 1893년)제87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하루의 아들. 남작위를 받음.
아소 고레타카 (1864년 - 1936년)제88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아쓰의 아들.
아소 고레키제89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타카의 아들.
아소 고레토모제90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키의 아들.
아소 고레유키 (1951년 - 2012년)제91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토모의 아들.[21]
아소 하루타카제92대 아소 대궁사. 아소 고레유키의 친동생. 아소 고레유키의 적남 아소 고레무라(고레쿠니)가 신관이 된 지 1년 만에 계승.


6. 아소 씨의 묘지와 보리사

아소 가문의 묘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며, 중세 시대 주요 인물들의 묘는 야마토정 하마마치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 아소 고레나오의 묘 ===

사가현 텐잔 정상(해발 1046.2m)에 위치하며, 아소 지역의 연기가 보이는 곳이다.

=== 아소 고레무라 (북조 대궁사)의 묘 ===

구 토요마치 오아자 하야구스에 있는 "하야구스 신사" 내에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속칭 "오탓쵸산"이라 불렀는데, 이는 "어전중님"이라는 말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22] 신전 바로 아래에는 무로마치 시대 중기 양식으로 보이는 호쿄인탑이 세워져 있다.

=== 아소 고레타케 (남조 대궁사)의 묘 ===

구 토요마치 미와 묘지 근처에도 호쿄인탑이 있으며, 속칭 '''오탓치요'''라고 불린다. 이는 아소 고레무라의 동생인 아소 고레타케의 묘일 가능성이 제기된다.[23]

=== 아소 고레토요의 묘 ===

구마모토현 야마토정 시모이치에 있으며, 츠우준교와 이와오성이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미치노에키에서 걸어서 2분 거리이며, 최근 지역 주민들에 의해 정비되었다.

=== 아소 고레타네의 묘 ===

과거 하마의 관 무가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평지 근처 구릉부에 있다. 하마의 관 방면이 잘 보이며, 현지에서는 '''오탓쵸상'''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세 기의 묘석이 있으며, 지역 마을 볼런티어들이 관리하고 있다. 구마모토현 야마토정 하타의 국도 218호 교차로 근처(도보 1분)에 있다.

=== 아소 고레타다의 묘 ===

2012년 8월, 카조지(구마모토현 야마토정 카타히라) 부지에서 야마토정 비상근 직원(학예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소 씨의 보리사야마토정의 야베 고등학교 운동장 근처에 있는 후쿠오 사찰(천태종)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많은 위패가 보관되어 있으며, 중세 아소 씨 묘지에 싯담 문자(범자)가 많이 사용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아소 씨의 계보

아소 씨는 진무 천황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의 아들인 카무야이마미의 후손으로 여겨진다.[1] 가문 구성원 다수는 中通古墳群|나카도리 고훈군일본어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5] 다카시 다나카는 아소 씨의 계보를 연구했다.[6] 아소 신사의 궁사 직위는 세습되며, 가문의 맏아들이 대대로 신사 대표를 맡는다. 아소 가문은 일본 황실 다음으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록된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7][1] 스스로는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1]

기록된 역사에서 이 가문은 쿠니노미야츠코라 불리는 황실 대표로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해당 지역의 제사 활동을 관리했으며, 점차 권력을 얻어 아소 지역의 지도자가 되었다.[4] 『고지키』에 따르면,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황자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가 아소씨(성은 기미)의 조상이다. 오오씨 (성은 오미), 호씨 (성은 기미), 오이타씨 (성은 기미) 등과는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

오타 료는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의 후예가 규슈에 많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진무 천황이 본거지를 긴키 지방으로 옮긴 후 원래 본거지였던 규슈를 카무야이미미노 미코토에게 주었고, 그 자손이 각지에서 번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9]

진무 천황의 황손 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의 아들인 아소 국조 하야미카타마노미코토를 시조로 하는 아소씨는 히고국 아소 신사의 대궁사 가문이다. 이들은 구마모토의 아소 지역에서 유래했지만,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아소 남쪽 야베고 (구마모토현 가미마시키군 야마토정 일부)로 거점을 옮긴 후의 "하마노야카타" 시대였다. 이 시기 아소 씨는 기쿠치 씨, 사가라 씨와 함께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강력한 호족이었다.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높은 관위를 받았으며, 내부 분열을 겪으면서도 오랫동안 가계를 이어왔다. 황실이나 이즈모 대사의 센게 가, 기타지마 가 등과 마찬가지로[14][15] 신(다케이와타츠노미코토)의 자손으로서 신화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가진 가문으로 여겨진다.[16]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남작 가문으로 편입되었다.

8. 아소 씨의 서가(庶家)


  • 에라 씨
  • 다케자키 씨
  • 쿠라하라 씨
  • 오사토 씨 (아소 씨 계)
  • 다카모리 씨
  • 나카무라 씨
  • 사카나시 씨
  • 니시 씨 (구마모토)
  • 미쓰나가 씨
  • 미야니시 씨
  • 아소시나 씨
  • 다케나가 씨
  • 쓰야 씨
  • 카시와 씨
  • 사루와타리 씨
  • 우지 씨
  • 아나호베 씨
  • 사카타니 씨
  • 니다미즈 씨
  • 가미시마 씨
  • 이치하라 씨
  • 쓰치다 씨

9. 센고쿠 시대 아소 씨 가신


  • 가이씨 (가이 지카노부, 가이 지카나오, 가이 지카히데)
  • 다카모리씨 (다카모리 고레나오, 다카모리 고레이)
  • 나카무라씨 (나카무라 고레후유)
  • 니타미즈씨 (니타미즈 고레히사, 니타미즈 고레에이)
  • 무라야마씨 (무라야마 고레타미, 무라야마 고레나오)
  • 카시와씨 (카시와 고레토모, 카시와 지부쇼유)
  • 사카나시씨 (사카나시 고레츠)
  • 니시씨 (니시 고레겐, 니시 고레에이, 니시 고레노부, 니시 겐베)
  • 와타나베씨 (와타나베 군베 - 그의 손자 와타나베 겐사츠(고레키요)가 전기 『습집옛이야기』를 남김)
  • 사도씨 (사도 시게유키)
  • 기타자토씨 (기타자토 시게요시, 기타자토 마사요시)
  • 이데씨 (이데 세이에몬노조 토요노부)

10. 위계도 및 이본 아소 계도 논란

쇼와 31년(1956년), 다나카 다쿠는 아소 가문을 방문하여 "이본 아소 족보"를 입수했다. 이 족보에는 "나카타 겐신 증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나카는 이 족보가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으나, 실제로는 메이지 8년(1875년) 나카타 겐신이 작성한 것이었다.

이 족보는 타케 이와타츠노 미코토를 시조로 삼아, 한 갈래는 시나노 국조를 거쳐 스와 대사의 오호리 가문으로, 다른 한 갈래는 아소 국조 하야타마노 미코토를 시조로 하여 아소 대궁사 가문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대 율령제 하에서 아소씨의 지위 변천(에서 으로의 행정구역 변경, "우지" 성씨 수여, "아소 궁사" 임명 등)과 중세에 대궁사 가문이 "우지"를 칭하게 된 이유 등을 설명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에 알려진 아소씨 족보는 『속군서류종』에 수록된 것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전설적 시조 유이토부터 아소 코레요시를 거쳐 그의 아들 아소 토모사다 대까지 전해진 소전을 바탕으로, 진무 천황부터 유이토까지의 신계를 추가하여 아소 토모타카 대에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상세한 내용을 담은 이본 족보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기존의 『속군서류종』 족보 편찬 시 참고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중세 아소 문서에서도 이본 족보의 존재를 암시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나카타 겐신 증정"이라는 표기는 이 족보가 외부에서 만들어져 제공되었음을 시사한다.

쇼와 58년(1983년), 이다 미즈호는 이본 족보에 나타나는 국조 → 군독 → 대령이라는 직함 변천이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하며, 스즈키 마넨과 같은 국학자들이 족보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위작 의혹을 암시했다.

헤이세이 8년(1996년), 무라사키 마치코는 이본 아소 족보의 신빙성을 명확히 부정했다. 무라사키는 이본 족보의 원류가 메이지 초 나카타 겐신의 작업이며, 스와 대사의 "신씨 족보"(이 역시 위작으로 의심됨)와의 관련성을 지적했다. 그는 스와 대사 궁사였던 이다 타케사토가 초안을 만들고 나카타 겐신이 족보 형태로 완성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이본 아소 족보의 아소 국조 및 시나노 국조 관련 부분은 후대에 이다와 나카타 등이 관여하여 위작된 것이다.

이다 타케사토, 나카타 겐신, 그리고 또 다른 위작 족보 제작자로 알려진 스즈키 마넨은 모두 국학자 히라타 테츠타네의 제자였다. 이들은 『신편 상륙국지』 등을 통해 군(郡)과 효(評)의 역사적 관계 등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위작한 족보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국조 → 군독 → 대령"과 같은 직함 변천 과정을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본 족보를 발견한 다나카 다쿠는 이러한 지식의 존재를 알면서도 "전혀 위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의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며 위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하치다이 시립 박물관장 등을 역임한 아소 시나오는 아소씨의 역사적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족보는 아소 코레노부 이후이며, 나카타 등이 위작한 족보가 아소씨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했다.[24]

마에다 료타로는 『아소 씨 약계도』(이본 족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에 기록된 아소씨와 시나노 국조의 동족설이나 "효도쿠" 같은 직책의 시대적 정합성은 이미 학계에서 부정되었으며, 따라서 이 족보는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25]

11. 우지(宇治) 성씨 사용 이유

아소 씨는 고지 원년(1142년) 12월자 우지(宇治) 유이센 해[26]에서 보이듯이,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우지(宇治)라는 성을 사용했다. 『다자이 관내지』에 따르면, 이는 건반룡명이 산성의 우지 지역에서 아소로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무로마치 시대의 기록을 보면 이미 그 유래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아소 학두방 문서" 중 오에이 12년(1405년) 6월 26일자 문서에는 아소 유이마사가 자신을 "우지 아손 유이마사"라고 서명했으며, "아소 문서" 중 덴분 13년(1544년) 9월 16일자 문서에는 아소 유이토요가 "정사위 우지 유이토요 스쿠네"라고 서명했다. 이는 성이 아손에서 스쿠네로 격이 낮아진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에도 우지 성 사용의 정확한 이유를 알기 어려웠음을 시사한다.

또한, 『히고 지지략』에서도 아소 씨를 "우지 아손"으로 표기하면서 그 유래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12. 히고 국 외 아소 씨

아소씨는 히고국 외 다른 지역에도 거주했음이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미노국 구리스노사토 다이호 2년(702년) 호적」에는 '''아소군족 도지매'''라는 이름이 보인다.

『정사요략』에 따르면, 조평 5년(935년) 6월 13일 관부(官符)에 사누키국 오오치군 시라토리향의 호주인 '''아소 토요나리'''의 호적에 속한 '''탄정소소 대초위하·아소 공 광원'''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후 광원은 『유취부선초』 덴교 9년(944년) 8월 13일 관부에 따르면 종7위하 좌소사로 기록되었고, 덴랴쿠 3년(949년) 7월 25일 관부에서는 우대사가 되었다. 더 나아가 『조야군재』와 『정사요략』에 수록된 덴랴쿠 5년(951년) 1월 30일 관부에 따르면, 같은 해 1월 30일에 우대사에서 좌대사로 옮겼으며, 정6위상과 숙녜(宿禰) 성을 하사받아 '''좌대사 정6위상·아소 숙녜 광원'''이 되었다.

본조세기쇼랴쿠 4년(994년) 10월 1일 조에는 우소사 '''아소 유사'''의 이름이 보인다.

간코 원년(1004년)의 사누키국 오오치군 이루노향 호적에는 호주인 아소 씨종을 비롯하여 씨정, 씨광, 광정, 무녀, 사충, 자녀, 풍미녀, 종자, 중지, 비모녀, 정미 등 아소 일족의 이름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History and Festivals of the Aso Shrine Aso Shrine
[2]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3] 간행물 Kuni no miyatsuko https://archive.toda[...] Encyclopedia of Shinto 2023-10-25
[4] 서적 Studies In Shinto & Shrines Routledge 2016-05-11
[5] 웹사이트 Aso Kofun & Shouranzan https://www.aso-denk[...] 2020-06-24
[6] 간행물 Methodology for Analyzing the Genealogy of Ancient Japanese Clans https://www.waseda.j[...] WIAS Research Bulletin 2015
[7] 웹사이트 Friends of Japan Series: Japanese Shrines https://www.tt.emb-j[...] 2019-10-09
[8] 서적 Beiträge zur Japanologie https://books.google[...] Institut für Japanologie an der Universität Wien 2023-10-25
[9] 서적 日本古代史新研究 磯部甲陽堂
[10] 웹사이트 阿蘇君 http://www.aso-dm.ne[...] 2018-07-25
[11] 웹사이트 中通古墳群 http://www.aso-dm.ne[...] 2018-07-26
[12] 문서 日本書紀
[13] 서적 中世の阿蘇社と阿蘇氏─謎多き大宮司一族 戎光祥出版
[14] 서적 矢部町史
[15] 서적 古代出雲を知る事典 東京堂出版
[16] 서적 一ノ宮町史 阿蘇社と大宮司 一の宮町
[17] 문서 平安遺文
[18] 문서 角川日本史辞典第三版
[19] 논문 鎮西府の肥後国支配 -菊池氏と阿蘇氏との関わりをめぐって- 今江廣道 編『中世の史料と制度』(続群書類従完成会)
[20] 문서 本藩人物誌 阿蘇新九郎
[21] 웹사이트 訃報 阿蘇神社 阿蘇惟之宮司 http://blog.livedoor[...] 2012-03-02
[22] 서적 砥用町史 下益城郡砥用町役場
[23] 서적 砥用町史 下益城郡砥用町役場
[24] 서적 阿蘇社と大宮司―中世の阿蘇(自然と文化阿蘇選書 2) 熊本日日新聞社
[25] 논문 大祝本『神氏系図』・『阿蘇家略系譜』再考―再構成される諏訪の伝承― 国語国文研究 161号(北海道大学国文学会
[26] 문서 平安遺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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