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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헤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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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도 헤이시는 간무 천황의 후손인 다이라노 다카모치가 가즈사 지방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카모치는 아들들과 함께 현지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웠고, 혼인 관계와 미개간지 개발을 통해 기반을 다졌다. 이들은 무사단을 조직하여 다카모치류 간무 헤이시의 기초를 다졌으며, 이세 헤이시, 히타치 헤이시, 지치부 헤이시, 보소 헤이시, 사가미 헤이시 등의 분파로 이어졌다. 반도 헤이시는 반도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다양한 인물과 가문을 배출했고, 계보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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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헤이시
씨족 정보
고대
씨성다이라노 아손(平朝臣)
시조간무 천황(제50대)
씨조다카모치 왕(高望王, 다이라노 다카모치)
종별황별(皇別)
본관가즈사, 무사시 외
인물다이라노 구니카(平國香)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
다이라노 요시부미(平良文)
후예이세 헤이시(伊勢平氏)
히타치 헤이시(常陸平氏)
보소 헤이시(房総平氏)
지치부 헤이시(秩父平氏)
나카무라토(中村党)
미우라토(三浦党)
가마쿠라토(鎌倉党) 등

2. 반도 헤이시의 성립

간무 천황의 후손인 다카모치 왕은 889년 우다 천황에게서 다이라 성을 받고 간토 지방에 정착했다. 이들은 현지 세력과 혼인 관계를 맺고, 토지를 개발하고, 무사단을 조직하여 세력을 확장했다.[1][2][3]

다카모치 왕의 후손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다이라노 사다모리의 후손은 이세 헤이시(伊勢平氏)가 되었고, 사다모리의 동생 시게모리의 후손은 히타치 헤이시(常陸平氏)가 되었다. 사다모리의 차남 고레마사의 손자 다이라노 나오카타의 자손은 호조씨(北条氏)와 구마가야 씨가 되었다. 요시카네의 장남 긴마사와 그 아들 무네요리가 있었다. 요시마사의 셋째 아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반도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신황을 자처하기도 했다. 다카모치 왕의 서자 요시후미는 무라오카 고로를 칭하며 반도 하치헤이시의 파조가 되었다. 반도 하치헤이시에서는 지치부 헤이시, 보소 헤이씨, 사가미 헤이시 등이 갈라져 나왔다.[6]

2. 1. 다카모치 왕의 간토 부임

간표(寛平) 원년 음력 5월 13일(889년 6월 14일), 우다 천황의 명으로 다이라 성을 받고 신적강하한 다이라노 다카모치(다카모치 왕)는 가즈사노스케로 임명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지방관은 실제로 부임하지 않고 교토에 머무르는 요임 고쿠시(遥任国司)였으나, 다카모치는 이례적으로 아들 구니카(国香), 요시카네(良兼), 요시마사(良将)와 함께 임지인 가즈사로 내려갔다.[1] 이들은 임기가 끝난 후에도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옛 왕족이라는 혈연을 바탕으로 혼인 관계를 통해 재지 세력과의 제휴를 강화했다. 또한 가즈사, 시모우사, 히타치의 미개간지를 개발하여 사영전(私営田)을 경영하며 세력을 확대했고,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사단을 형성했다. 이는 훗날 각지로 퍼져나가는 다카모치류 간무 헤이시의 기반이 되었다.[2][3]

2. 2. 세력 확장과 무사단 형성

889년 6월 14일(음력 5월 13일) 우다 천황의 명으로 다이라 성을 받고 신적강하하여 가즈사노스케로 임명된 다이라노 다카모치(다카모치 왕)는 지방관 관직은 받아도 실제로 부임은 하지 않고 교토에 머무르던 이른바 요임 고쿠시(遥任国司)가 많았던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아들 구니카(国香), 요시카네(良兼), 요시마사(良将)와 함께 임지 가즈사로 내려갔다.[1] 이들은 임기가 지나고도 교토로 돌아가지 않았고, 옛 왕족이라는 혈연을 무기삼아 혼인관계를 통해 재지세력과의 제휴를 깊게 하였으며, 가즈사, 시모우사, 히타치의 미개간지를 개발하여 사영전(私営田)을 경영하며 세력을 확대했다.[1] 그리고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사단을 형성, 그 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는 다카모치류 간무 헤이시의 기반을 다졌다.[2][3]

3. 주요 분파 및 인물

889년(간표 원년) 우다 천황의 명으로 다이라 성을 받고 신적강하한 다이라노 다카모치(다카모치 왕)는 아들 구니카, 요시카네, 요시마사와 함께 임지인 가즈사로 내려갔다. 이들은 임기가 끝난 뒤에도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옛 왕족이라는 혈연을 무기 삼아 혼인 관계를 통해 재지 세력과 제휴를 깊게 하였다. 또한 가즈사, 시모우사, 히타치의 미개간지를 개발하여 사영전을 경영하며 세력을 확대했다.[1] 이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사단을 형성했고, 이것이 다카모치류 간무 헤이시가 각지로 퍼져나가는 기반이 되었다.[2][3]

다카모치류 간무 헤이시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발전했으며, 주요 분파와 대표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그 외 분파 및 인물'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3. 1. 그 외 분파 및 인물

889년 우다 천황에게서 다이라 성을 하사받고 신적강하한 다이라노 다카모치는 아들 구니카, 요시카네, 요시마사 등과 함께 가즈사로 내려가 세력을 확장했다.[1][2][3]

다카모치류 간무 헤이시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요시카네: 다카모치의 아들. 그의 장남 긴마사와 긴마사의 셋째 아들 무네요리가 있다.
  • 요시마사: 다카모치의 아들. 그의 셋째 아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반도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신황을 자처하기도 했다.
  • 다이라노 사다모리: 구니카의 장남으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했다.
  • 그의 넷째 아들 고레히라의 후손이 이세 헤이시이다.
  • 사다모리의 동생 시게모리의 후손은 히타치 헤이시이다.
  • 사다모리의 차남 고레마사의 손자 다이라노 나오카타의 자손이라고 호조 씨와 구마가야 씨가 주장했다.
  • 그 외에 다카모치 왕의 서자 요시요리, 요시히로, 요시모치, 요시시게, 요시마사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 다카모치의 측실 소생으로 여겨지는 요시후미는 사가미가마쿠라에 정착하여 무라오카 고로를 칭하고 반도 하치헤이시의 시조가 되었다. 반도 하치헤이시로부터는 지치부 헤이시, 보소 헤이시, 사가미 헤이시 등이 갈라져 나왔다.[6]

4. 반도 헤이시의 계보

다카모치 왕
구니카, 요시카네, 요시마사, 요시부미, 요시시게(良茂)
사다모리(貞盛), 시게모리(繁盛) (히타치 헤이시), 긴마사(公雅), 마사카도(将門), 다다요리(忠頼), 다다미쓰(忠光), 요시마사(良正)
고레마사(維将), 고레히라(維衡) (이세 헤이시), 다다쓰네(忠常) (보소 헤이시), 마사쓰네(将恒) (지치부 헤이시), 요리타카(頼尊), 다다미치(忠通)
고레토키(維時), 쓰네토(常遠), 미우라 다메미치(三浦為通) (미우라토), 가마쿠라 아키나(鎌倉章名) (가마쿠라토)
나오카타(直方), 쓰네무네(常宗)
고레카타(維方), 아타미 세이한(阿多見聖範), 나카무라 무네히라(中村宗平) (나카무라토)
모리카타(盛方), 호조 도키이에(北条時家) (호조 씨)
구마가이 나오사다(熊谷直貞) (구마가이 씨)



위 계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호조 씨와 구마가이 씨는 다이라노 나오카타의 자손을 칭하였다.
  • 『겐페이 투쟁록』에서는 호조 씨를 다이라노 고레히라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 『지바 대계도』(千葉大系図)에서는 다이라노 쓰네토를 다이라노 다다쓰네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 『만쇼지 차상계도』(満昌寺差上系図)에서는 미우라 씨의 시조를 다카모치의 아들인 요시카네로 하였다.
  • 무로마치 시대의 『손피빈먀쿠』에서는 미우라 씨, 가마쿠라 씨, 나가오 씨, 오오바 씨, 가지와라 씨, 도이 씨 등 사가미 헤이시의 시조를 요시부미라고 하지 않고, 요시시게의 아들인 요시마사, 또는 요시카네의 아들인 긴마사로 하고 있다.

참조

[1] 문서 구주쿠리 해변|다마우라
[2] 웹사이트 桓武平氏 https://kotobank.jp/[...]
[3] 웹사이트 さらに詳しく 桓武平氏の台頭 https://www.maff.go.[...]
[4]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角川書店
[5] 웹사이트 桓武平氏概観 http://wwr2.ucom.ne.[...]
[6] 웹사이트 坂東平氏系図 http://izakamakur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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