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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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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芥川賞)은 1935년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념하여 제정된 일본의 문학상이다. 일본문학진흥회가 후원하며, 1년에 두 번, 신인 또는 중견 작가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본격 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시상한다. 수상자에게는 회중시계와 100만 엔의 상금이 수여된다. 심사위원은 문학 평론가, 작가, 과거 수상자 등으로 구성되며, 때때로 심사위원 간의 의견 불일치로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쿠타가와상은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 수상 이후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학생 작가의 수상 시 언론의 큰 관심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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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 [상(Prize)]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름아쿠타가와상 (芥川龍之介賞)
로마자 표기Akutagawa Ryūnosuke Shō
수여 대상신문·잡지에 발표된 순수문학 단편의 무명 또는 신진작가
주최일본문학진흥회 (사실상 문예춘추사와 공동 주최)
수여 국가일본
수여 장소도쿄회관 → 제국호텔
최초 수여 년도1935년 상반기
최근 수여 년도2024년 상반기
상금1,000,000엔, 회중시계
공식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역사
제정일1935년 8월 10일
수상자
최근 수상자아사히나 아키, 마쓰나가 K 산조

2. 역사

1935년 기쿠치 간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아쿠타가와 상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시상이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부활했다.[3] 수상자에게는 회중시계와 100만의 상금이 수여된다.[2]

심사위원들은 때때로 수상작 선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수상작에 대한 논쟁이나 작품 질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에는 수상자가 없을 수도 있다.[3] 실제로 1935년 하반기, 1942년 상반기, 1950년 하반기, 1952년 상반기, 1953년 하반기, 1956년 하반기, 1958년 하반기, 1959년 하반기, 1961년 상반기, 1962년 하반기, 1964년 하반기, 1966년 상반기에는 수상작이 없었다.

1972년에는 수상자 미야하라 아키오가 표절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8][9] 2018년에는 후보작인 호죠 유코의 《아름다운 얼굴》이 비픽션 출처 자료의 텍스트를 출처 표기 없이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일본문학진흥회는 해당 작품을 후보 목록에서 제외하지 않았다.[10]

2004년에는 와타야 리사 (19세)와 카네하라 히토미 (20세)가 공동 수상하며 최연소 수상 기록을 세웠고,[5] 2013년에는 구로다 나쓰코가 75세로 최고령 수상자가 되었다.[7]

문예춘추는 일본문학진흥회를 대신하여 현재 및 과거 수상자들의 공식 기록 보관을 관리하고 있다.[12]

2. 1. 제정 배경

1935년 당시 문예춘추 편집장이었던 기쿠치 간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업적을 기념하여 나오키상과 함께 제정하였다.[40] 1927년에 사망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름을 딴 신인상 구상은 1934년 기쿠치 간이 『문예춘추』 4월호에 게재된 연재 칼럼에서 처음 언급되었다.[41] 아쿠타가와는 『문예춘추』 창간 이래 매호 머리말에 "난쟁이의 말"을 게재하는 등 『문예춘추』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기쿠치 간은 이러한 친구에 대한 생각에서 아쿠타가와 상을 설립하게 되었다.[41]

1934년 문예춘추사가 발행하던 『문예통신』에서 가와사키 타케이치가 콩쿠르상이나 노벨상 등 해외 문학상을 소개하며 일본에서도 권위 있는 문학상을 설립해야 한다고 쓴 글을 기쿠치 간이 읽은 것도 아쿠타가와 상 제정의 동기가 되었다.[41]

1935년 1월, 『문예춘추』에서 "아쿠타가와·나오키상 선언"이 발표되면서 공식적으로 아쿠타가와 상이 설립되었다.[41] 설립 당시부터 정상(상패)으로 기념 시계가 수여되었으며, 부상은 500엔이었다.[42] 심사위원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친분이 있고 문예춘추와도 관계가 깊은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토 하루오 등 11명이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시상이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부활했다.[3][40]

아쿠타가와 상은 설립 당시 기쿠치 간이 생각했던 것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43] 1954년에 수상한 요시유키 준노스케는 자신의 수상 당시 아쿠타가와 상에 대해 "사회적 화제가 되지 않았고, 수상자가 갑자기 바빠지는 일은 없었다"고 회상했다.[44] 1955년에 수상한 엔도 슈사쿠도 당시에는 "쇼가 아니고 정말 상이었다"며 화제성이 낮았음을 표현했다.[45]

전환점이 된 것은 1956년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 수상이었다. 작품의 선정적인 내용과 학생 작가라는 점 등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태양족"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고 이시하라 신타로의 헤어스타일을 본뜬 "신타로 컷"이 유행하는 등 "신타로 붐"이라는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44] 이후 아쿠타가와 상은 저널리즘에 크게 다루어지는 상이 되었고, 1957년 하반기 가이타케 켄, 1958년 상반기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했을 무렵에는 신문사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취재가 몰려들었고, 신작의 게재권을 놓고 잡지사가 경쟁할 정도가 되었다.[46]

2. 2. 초기 운영 및 심사

1935년 기쿠치 간이 문예춘추 편집장으로 있을 당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기 위해 아쿠타가와 상을 제정하였다.[1] 초기 심사위원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토 하루오 등 아쿠타가와와 친분이 있고 문예춘추와도 관계가 깊었던 11명이 맡았다.

1934년 기쿠치 간은 『문예춘추』 4월호에 게재된 칼럼에서 그해 2월에 사망한 나오키 산주고와 1927년에 사망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름을 딴 신인상 구상을 밝혔다. 이는 아쿠타가와와 나오키가 『문예춘추』 창간 이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데 대한 감사와 친구로서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41] 가와사키 다케이치가 쓴, 일본에서도 권위 있는 문학상을 설립해야 한다는 글을 기쿠치 간이 읽은 것도 상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41]

아쿠타가와 상 설립 당시부터 기념 시계가 수여되었고, 부상으로는 500JPY이 주어졌다.[42] 그러나 초기에는 기쿠치 간의 기대와는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43] 1954년 수상자 요시유키 준노스케는 당시 아쿠타가와 상이 사회적 화제가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으며,[44] 1955년 수상자 엔도 슈사쿠도 당시에는 화제성이 낮았다고 말했다.[45]

1956년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 수상이 큰 전환점이 되었다. 선정적인 내용과 학생 작가라는 점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태양족', '신타로 컷' 등의 신조어가 유행하며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44] 이후 아쿠타가와 상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 상이 되었으며, 1957년 하반기 가이타케 겐, 1958년 상반기 오에 겐자부로 수상 무렵에는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취재가 몰려들 정도였다.[46]

2. 3. 전후 변화 및 발전

1945년부터 1948년까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혼란으로 인해 시상이 중단되었다.[3] 1949년 아쿠타가와상이 부활했지만, 노마 히로시(野間宏), 나카무라 신이치로(中村真一郎), 시이나 린조(椎名麟三), 우메자키 하루오(梅崎春生), 다케다 야스하루(武田泰淳),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등 "전후파" 작가들은 이미 신인이 아니라고 여겨져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50]

시마키 켄사쿠(島木健作), 타미야 토라히코(田宮虎彦), 김달수(金達寿), 이노우에 코우세이(井上光晴) 등은 후보에 올랐음에도 "무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제외되기도 했다.[50] 제23회(1950년 상반기)에 타미야가 후보가 되었을 때, 사카구치 안고는 "아쿠타가와상 부활 때, 미시마 씨까지는 이미 기성 작가로 인정하여 수상하지 않는 것이 기정 사실상의 방침이었지만, 타미야 씨가 수상하게 된다면, 미시마 씨는 물론이고, 우메자키 씨나 다케다 씨도 [...] 후보에 넣어주어야 한다"고 반대했다.[50]

반면 제5회(1937년 상반기) 수상자 오자키 카즈오(尾崎一雄)는 이미 신인이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묻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수상했다.[50] 제38회(1957년 하반기)에 카이코 켄(開高健)과 경쟁하여 낙선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다음 제39회(1958년 상반기)에도 후보가 되었지만, 신인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51]

2004년 제130회 아쿠타가와상에서는 와타야 리사(Risa Wataya) (19세)와 카네하라 히토미(Hitomi Kanehara) (20세)가 공동 수상하며 최연소 수상 기록을 세웠다.[5] 이전까지 최연소 수상자는 이시하라 신타로(Shintaro Ishihara)와 오에 겐자부로(Kenzaburō Ōe) 등 23세 남성이었다.[6] 2013년에는 쿠로다 나츠코(Natsuko Kuroda)가 75세로 최고령 수상자가 되었다.[7]

2. 4. 현재

현재 심사위원은 오가와 요코(小川洋子), 오쿠이즈미 히카루(奥泉光), 카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히라노 케이이치로(平野啓一郎), 마츠우라 토시키(松浦寿輝),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 카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의 9명이다(2024년 상반기부터).[40] 심사회는 요리집 신기락 1층에서 열린다(참고로 나오키상 심사회는 2층에서 열린다). 수상자 기자회견과 그 다음 달 시상식은 오랫동안 도쿄 가이칸(東京會舘)에서 열렸으나, 해당 건물의 재건축에 따라 현재는 임페리얼호텔(帝国ホテル)에서 열리고 있다.

아쿠타가와상은 단편·중편 작품을 대상으로 하며 길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지만, 대략 원고지 100매에서 200매 정도의 작품이 후보로 선정되고 있다. 제1회 수상자이자 이후 심사위원도 역임한 이시카와 다쓰조(石川達三)는 대상 작품의 길이에 대해 "기껏해야 150매 이내의 단편"이라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지만, 제51회(1964년 상반기) 수상작인 시바타 쇼(柴田翔)의 「されどわれらが日々―」는 150매를 크게 넘는 280매의 작품이었다.[52]

참고로 "작품의 길이가 짧은 것"은 책으로 출판되었을 때 읽기 쉽고 가격도 저렴해지는 것에서, 나오키상에 비해 작품의 매출이 잘 오르는 이유가 되고 있다.[54]

3. 심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은 심사 과정과 기준에 대한 논란이 종종 있어왔다.

설립 초기에는 '신인'의 기준이 모호하여 심사위원들 간의 논쟁이 잦았다.[50] 1949년 아쿠타가와상 부활 후, 미시마 유키오 등 '전후파' 작가들은 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시마키 켄사쿠, 김달수 등은 후보에 올랐지만 '무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50] 제5회(1937년 상반기) 수상자 오자키 카즈오는 이미 신인이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묻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수상했다.[50]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제정되었지만, 대중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나오키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제6회(1937년 하반기) 나오키상 수상자 이부세 마스지는 순수문학 작가였지만, 나오키상 심사위원 구메 마사오는 "이 정도의 명문은 당연히 대중문학의 세계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55]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떤 ‘고쿠라 일기’ 전」으로 1952년 하반기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는데, 이 작품은 원래 나오키상 후보였다.[56]

제46회(1961년 하반기)에는 우노 코이치로가 아쿠타가와상을, 이토 케이이치가 나오키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문예평론가 히라노 켄은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바뀐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57] 제111회(1998년 상반기)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단 이치오, 시바타 렌사부로 등처럼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가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으며, 1950년대까지는 두 상 모두에 후보로 오른 작품도 있었다.

상의 저널리즘적 성격은 종종 비판을 받지만, 설립자 키쿠치 칸은 "물론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은 반은 잡지의 선전을 위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명언해 두었다"라며 상업적 성격이 있음을 인정했다.[58] 일본문학진흥회를 설립하여 상의 공적인 성격을 부여하려 했지만, 재원은 문예춘추의 기부에 의존하고 이사진도 주로 문예춘추 관계자가 맡고 있어(사무소도 문예춘추 사내) 한계가 있었다.[58]

오모리 노조무와 토요사키 유미는 저서 『문학상 메타자르리!』에서 현재 아쿠타가와상의 문제점으로 선고위원의 '종신제', 선고위원 구성의 경직성, 선고위원 수 과다, 수상작의 『문학계』 편중 등을 지적했다. 토요사키는 개선책으로 선고위원 임기 4년 제한, 문예평론가 선고위원 포함 등을 제시했다.[59]

3. 1. 심사 과정

현재 심사위원은 오가와 요코(小川洋子), 오쿠이즈미 히카루(奥泉光), 카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히라노 케이이치로(平野啓一郎), 마츠우라 토시키(松浦寿輝),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 카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의 9명이다(2024년 상반기부터).[40] 심사회는 요리집 신기락(新喜楽) 1층에서 열린다(참고로 나오키상 심사회는 2층에서 열린다).[40] 수상자 기자회견과 그 다음 달 시상식은 오랫동안 도쿄 가이칸(東京會舘)에서 열렸으나, 건물이 재건축되면서 현재는 임페리얼호텔(帝国ホテル)에서 열리고 있다.[40]

상반기에는 전년 12월부터 그 해 5월까지, 하반기에는 6월부터 11월까지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40] 후보작 압축은 일본문학진흥회의 위탁을 받은 문예춘추 직원 20명으로 구성된 선고 스태프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고 스태프는 5명씩 4개의 반으로 나뉘어, 각 반에는 10일에 한 번 정도의 주기로 매회 3~4작품씩 작품이 할당된다. 스태프는 작품을 읽고 반 회의에서 그 반이 추천하는 작품을 고른다. 그 후 각 반의 추천 작품을 모아 본회의를 열고 작품을 더욱 압축한다. 이 과정이 총 12~14회 반복되어 최종적으로 후보작 5~6작품을 결정한다. 반 회의와 본회의 모두 멤버는 각 작품에 ○, △, ×로 사전 채점을 하고 회의에 임한다.

최종 후보작이 결정되면 후보자에게 수상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최종 후보작을 발표한다. 선고회는 상반기는 7월 중순, 하반기는 1월 중순에 쓰키지의 요정·신기락 1층에서 열린다. 선고회 사회는 『문예춘추』 편집장이 맡는다. 선고 위원은 마찬가지로 미리 후보작을 ○, △, ×[48]로 채점하여 평가해 두고, 각 위원이 평가를 공개한 후 심의가 이루어진다.[49]

3. 2. 심사 기준 논란

아쿠타가와상은 "무명 또는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지만, 초기에는 "신인"의 기준이 모호하여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잦았다.[50] 특히, 1949년 아쿠타가와상 부활 후,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등 "전후파" 작가들은 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시마키 켄사쿠(島木健作), 김달수(金達寿) 등은 후보에 올랐지만 "무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외되기도 했다.[50]

제5회(1937년 상반기) 수상자 오자키 카즈오(尾崎一雄)는 이미 신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경력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묻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수상했다.[50] 제38회(1957년 하반기)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카이코 켄(開高健)에게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지만, 이후에도 화제작을 발표하며 다음 회에 다시 후보가 되었으나, 신인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51]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제정된 아쿠타가와상이지만, 대중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나오키상(直木三十五賞)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제6회(1937년 하반기) 나오키상 수상자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는 순수문학 작가였지만, 나오키상 심사위원 구메 마사오(久米正雄)는 "이 정도의 명문은 당연히 대중문학의 세계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55]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는 「어떤 ‘고쿠라 일기’ 전」으로 1952년 하반기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는데, 이 작품은 원래 나오키상 후보였다.[56]

제46회(1961년 하반기)에는 우노 코이치로(宇能鴻一郎)가 아쿠타가와상을, 이토 케이이치(伊藤桂一)가 나오키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문예평론가 히라노 켄(平野謙)은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바뀐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57] 제111회(1998년 상반기)에도 구루마야니 나가키치(車谷長吉)가 나오키상을, 하나무라 만게쓰(花村萬月)와 후지사와 슈(藤沢周)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여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단 이치오(檀一雄), 시바타 렌사부로(柴田錬三郎) 등처럼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가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 1950년대까지는 두 상 모두에 후보로 오른 작품도 있었다.

젊은 나이에 수상하거나 학생 작가가 수상하는 것은 큰 화제가 된다.[60]

최연소 수상 기록
순위수상자수상 시기수상 당시 나이
1와타나베 리사2003년 하반기(제130회)19세 11개월
2카나하라 히토미2003년 하반기(제130회)20세 5개월
3우사미 린2020년 하반기(제164회)21세 8개월
4마루야마 켄지1966년 하반기(제56회)23세 0개월
5이시하라 신타로1955년 하반기(제34회)23세 3개월
6오에 겐자부로1958년 상반기(제39회)23세 5개월
7히라노 케이이치로1998년 하반기(제120회)23세 6개월
8아오야마 나나에2006년 하반기(제136회)23세 11개월
9무라카미 류1976년 상반기(제75회)24세 4개월



최고령 수상 기록
순위수상자수상 연도수상 당시 나이
1쿠로다 나츠코2012년 하반기(제148회)75세 9개월
2와카타케 치사코2017년 하반기(제158회)63세
3모리 아츠시1973년 하반기(제70회)61세 11개월
4미우라 키요히로1987년 하반기(제98회)57세 4개월
5요네야 후미코1985년 하반기(제94회)55세 2개월


3. 3. 역대 심사위원

연도심사위원
2003년야마다 아미(山田亜弥)
2007년카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 오가와 요코(小川洋子)
2010년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2012년오쿠이즈미 히카루(奥泉光)
2016년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
2019년마츠우라 히사키(松浦寿輝)
2020년히라노 케이이치로(平野啓一郎)[38]
2024년카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39]
2024년 상반기부터오가와 요코(小川洋子), 오쿠이즈미 히카루(奥泉光), 카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히라노 케이이치로(平野啓一郎), 마츠우라 토시키(松浦寿輝),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 카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 (9명)


4. 논란 및 비판

1972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미야하라 아키오가 표절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8][9] 2018년에는 호죠 유코의 후보작 《아름다운 얼굴》이 비픽션 출처 자료의 텍스트를 출처 표기 없이 재사용한 사실이 드러나 유사한 논란이 발생했지만, 일본문학진흥회는 해당 작품을 후보 목록에서 제외하지 않았다.[10]

제1회 아쿠타가와상에서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다자이 오사무도 후보가 되었다. 당시 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인 파비나르(옥시코돈)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약값 때문에 빚까지 있었기에 상금 500엔을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수상하지 못했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다자이에 대해 “사토 하루오 씨는 『역행』보다는 『도깨비꽃』을 통해 작가 다자이 씨를 대표하는 의견이었다. (중략) 거기에 재능도 보이고, 확실히 『도깨비꽃』쪽이 작가의 생활과 문학관을 가득 담고 있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작가의 현재 생활에 불쾌한 구름이 있어 재능이 순수하게 발휘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라고 말했다.[66]

이에 대해 다자이는 『문예통신』에서 “새를 기르고, 무도회를 보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삶인가. 찌른다. 그렇게도 생각했다. 대악당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반박했다.[68]

이 비판에 대해 가와바타는 다음 달에, “다자이 씨는 위원회의 상황 따위는 모른다고 할지도 모른다. 모른다면 더더욱 근거 없는 망상이나 추측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반박하며, 이시카와 다쓰조의 『창망』과 다자이의 작품의 득표 수가 근접했던 것이 아니며, 다자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도 없었다고[69], “그렇게 따지면, 내가 〈세상〉이나 〈금전 관계〉 때문에, 평론에서 고의적으로 다자이 씨의 험담을 썼다는 다자이 씨의 추측도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69] 사생활에 관한 인격 공격을 한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사과했다.

그 후, 다자이는 제3회 심사 전에 가와바타에게 “제발 저에게 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내거나[70], 심사위원 중 다자이의 이해자였던 사토 하루오에게 여러 번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 제2회, 제3회 후보가 되도록 『문예춘추』에 신작을 계속 보냈지만, 전회 후보에 올랐던 작가나 투표 2표 이하의 작가는 후보로 하지 않는다는 당시의 조건 때문에 다자이는 후보가 되지 못했다.[67] 가와바타는 이 규정 결정 시에 결석하고 있었고, “이 두 가지 조건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71][67]

5. 수상의 의미와 영향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친구 키쿠치 칸이 1935년 나오키상과 함께 제정했다.[40] 제2차 세계 대전1945년부터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부활했다. 신인 작가의 단편·중편 작품을 대상으로 하며, 수상자에게는 회중시계와 부상으로 100만이 수여된다.[40] 수상작은 『문예춘추』에 게재된다.[40]

1934년 키쿠치 칸은 『문예춘추』 4월호에 게재된 칼럼에서 나오키 산쥬고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름을 딴 신인상 구상을 밝혔다.[41] 1924년 키쿠치가 『문예춘추』를 창간한 이래, 아쿠타가와는 매호 머리말에 "난쟁이의 말"을 게재하고 나오키도 문단 가십을 기고하는 등 『문예춘추』 발전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41] 가와사키 타케이치의 회상에 따르면, 1934년 곤쿠르상이나 노벨상 등 해외 문학상을 소개하며 일본에도 권위 있는 문학상이 필요하다는 글을 키쿠치가 읽은 것도 계기가 되었다.[41]

설립 당시 정상(상패)은 기념 시계였고, 부상은 500JPY이었다.[42]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토 하루오 등 11명이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을 맡았다.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은 현재 저널리즘에 크게 다루어지지만, 설립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43] 1954년 수상자 요시유키 준노스케는 수상 당시 아쿠타가와상에 대해 "사회적 화제가 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44] 1955년 수상자 엔도 슈사쿠도 당시에는 "쇼가 아니고 정말 상이었다"고 말했다.[45]

전환점은 1956년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 수상이다. 작품의 선정적인 내용과 학생 작가라는 점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태양족"이라는 신조어와 "신타로 컷"이 유행하는 등 "신타로 붐"이라는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44] 이후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은 저널리즘에 크게 다루어지는 상이 되었고, 1957년 하반기 가이타카 켄, 1958년 상반기 오에 겐자부로 수상 무렵에는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에서 취재가 몰려들었다.[46] 오늘날에도 수상자가 학생 작가인 경우 저널리즘에 크게 다루어지고 수상작은 종종 베스트셀러가 된다.[47]

6. 주요 수상자 및 작품

수상자 이름의 유래가 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상은 1935년 문예춘추의 사장이었던 기쿠치 간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념하여 제정한 상이다. 일본문학진흥회가 후원하며, 신인 또는 중견 작가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최고의 본격 문학 작품에 수여된다.[2] 수상자에게는 회중시계와 100만의 상금이 수여된다.[2]

1945년부터 1948년까지는 전후 혼란으로 인해 시상이 중단되었다.[3] 심사위원 간 의견 불일치로 수상자가 없는 경우도 있었고,[3] 두 명이 공동 수상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4]

2004년에는 와타야 리사와 가네하라 히토미가 각각 19세와 20세의 나이로 공동 수상하며 최연소 수상 기록을 세웠다.[5] 이전까지 최연소 수상자는 23세 이상의 남성이었으며, 이시하라 신타로오에 겐자부로 등이 있었다.[6] 2013년에는 구로다 나쓰코가 75세로 최고령 수상자가 되었다.[7]

#연도작가작품발표 잡지
11935년 상반기이시카와 다쓰조蒼氓|소보일본어星座|세이자일본어
21935년 하반기시상 없음
31936년 상반기小田嶽夫|오다 다케오일본어城外|조가이일본어文學生活|분가쿠 세이카쓰일본어
鶴田知也|쓰루다 도모야일본어コシャマイン記|코샤마인키일본어小説|쇼세쓰일본어
41936년 하반기이시카와 준普賢|후겐일본어作品|사쿠힌일본어
冨澤有爲男|도미자와 아리오일본어地中海|지추카이일본어東陽|도요일본어
51937년 상반기尾崎一雄|오자키 가즈오일본어暢氣眼鏡 他|논키메가네 호카일본어人物評論|진부쓰 효론일본어
61937년 하반기히노 아시헤이糞尿譚|훈뇨탄일본어文學会議|분가쿠카이기일본어
71938년 상반기나카야마 기슈厚物咲|아쓰모노자키일본어분가쿠카이
81938년 하반기나카자토 쓰네코乗合馬車 他|노리아이바샤 호카일본어
91939년 상반기半田義之|한다 요시유키일본어鶏騒動|니와토리 소도일본어文藝首都|분게이 슈토일본어
長谷健|하세 겐일본어あさくさの子供|아사쿠사노 고도모일본어
101939년 하반기寒川光太郎|사무카와 고타로일본어密獵者|미쓰료샤일본어創作|소사쿠일본어


6. 1. 최연소·최연장 수상 기록

순위수상 작가수상 시기수상 당시 나이
1와타야 리사2003년 하반기 (제130회)19세 11개월
2가네하라 히토미2003년 하반기 (제130회)20세 5개월
3마루야마 겐지1966년 하반기 (제56회)23세 0개월
4이시하라 신타로1955년 하반기 (제34회)23세 3개월
5오에 겐자부로1958년 상반기 (제39회)23세 5개월
6히라노 게이치로1998년 하반기 (제120회)23세 6개월
7아오야마 나나에2006년 하반기 (제136회)23세 11개월
8무라카미 류1976년 상반기 (제75회)24세 4개월



현재까지 아쿠타가와상 최연소 수상자는 19세에 『차고 싶은 등』으로 상을 받은 와타야 리사이다. 이전 최연소 수상자는 『거의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수상한 무라카미 류였다.

6. 2. 주목할 만한 수상자 및 작품

회차수상 연도작가작품
25회1951년아베 코보벽 S·카르마씨의 범죄
75회1976년무라카미 류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77회1977년이케다 마스오에게해에 바친다
78회1977년미야모토 테루반딧불강
100회1988년이양지유희
104회1990년오가와 요코임신 캘린더
110회1993년오쿠이즈미 히카루돌의 내력
115회1996년가와카미 히로미뱀을 밟다
116회1996년유미리가족시네마
116회1996년쓰지 히토나리해협의 빛
119회1998년후지사와 슈부에노스아이레스 오전 0시
120회1998년히라노 게이치로일식
124회2000년호리에 도시유키곰의 포석
125회2001년겐유 소큐중음의 꽃
126회2001년나가시마 유맹스피드 엄마
127회2002년요시다 슈이치파크 라이프
128회2002년다이도 다마키이렇게 째째한 로맨스
130회2003년와타야 리사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130회2003년가네하라 히토미뱀에게 피어싱
131회2004년모브 노리오간병입문
132회2004년아베 가즈시게그랜드 피날레
133회2005년나카무라 후미노리흙 속의 아이
134회2005년이토야마 아키코바다에서 기다리다
135회2006년이토 다카미8월의 길 위에 버리다
136회2006년아오야마 나나에혼자있기 좋은날
137회2007년스와 데쓰시안드로메다 남자
138회2007년가와카미 미에코젖과 알
139회2008년양 이시간이 스며드는 아침
144회2010년니시무라 겐타고역열차
146회2011년엔조 도어릿광대의 나비


7. 다자이 오사무와 아쿠타가와 상

1934년 기쿠치 간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나오키 산주고의 이름을 딴 신인상 제정을 발표하면서 아쿠타가와 상이 시작되었다.[41] 다자이 오사무는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으나,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다자이의 사생활을 비판하며 수상이 무산되었다.[66] 이에 다자이는 가와바타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고,[68] 가와바타 역시 다자이에게 반박하며 논쟁이 벌어졌다.[69] 이후 다자이는 가와바타에게 편지를 보내 수상을 간청하는 등[70]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 규정 때문에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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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Akutagawa Prize http://www.booksfrom[...]
[4] 서적 The Father-Daughter Plot: Japanese Literary Women and the Law of the Father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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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뉴스 直木賞の委員に三浦しをんさん 芥川賞は平野啓一郎さん https://www.asahi.co[...] 朝日新聞社 2020-03-04
[77] 뉴스 芥川賞新選考委員に川上未映子さん 7月の第171回の選考会から参加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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