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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다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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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카와 다쓰조는 1905년 일본 아키타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1935년 브라질 이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창맹》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중일 전쟁 당시 종군 작가로 활동하며 난징 대학살을 다룬 소설 《살아있는 병사》를 집필했으나, 검열과 신문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후에는 사회 소설을 주로 집필했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인간의 벽》, 《금환식》 등이 대표작이다. 1969년 기쿠치 칸 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펜 클럽 회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85년 위궤양 악화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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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다쓰조
기본 정보
이시카와 다쓰조
이시카와 다쓰조 (1954년)
출생1905년 7월 2일
출생지일본 아키타현 히라카군 요코테정 (현재의 요코테시)
사망1985년 1월 31일
사망 장소일본 도쿄도 메구로구 나카메구로 도쿄 공제 병원
묘지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 나유타의 리
국적일본
직업소설가
언어일본어
학력와세다 대학 영문과 중퇴
작품 활동
활동 기간1931년 - 1985년
장르소설
대표 작품창민 (1935년)
살아 있는 병사 (1938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1950년 - 1951년)
48세의 저항 (1956년)
인간의 벽 (1959년)
청춘의 좌절 (1968년)
데뷔 작품최근 남아메리카 왕래기 (最近南米往来記) (1931년)
수상
수상 내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 (1935년)
분게이슌주 독자상 (1964년)
기쿠치 간 상 (1969년)
가족 관계
기타

2. 생애

일본 아키타현 요코테시에서 태어나 교토시, 오카야마현 등 여러 곳에서 자랐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 1930년 브라질로 건너가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창맹'(蒼氓)으로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17][18][19]

1937년 12월, 출판사 주오코론의 특파원으로 중일 전쟁 중이던 중국 난징에 파견되었다.[22] 그는 난징 대학살 직후의 참상을 목격하고, 일본군의 잔혹 행위와 병사들의 염전 사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 《살아있는 병사》(生きている兵隊)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내용의 민감성 때문에 발표 직후 검열되어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고, 이시카와는 필화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3][5][24] 이 사건은 그의 작가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한동안 가정 문제나 연애를 다룬 작품에 집중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46년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전후 혼란기와 사회상을 반영한 소설들을 발표했으며, 특히 요코하마 사건을 다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사교조 사건을 소재로 한 '인간의 벽' 등 사회 비판적인 대작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35] 이러한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69년 기쿠치 간상을 수상했다.[37]

일본 문예가 협회 이사장, 일본 펜 클럽 회장 등을 역임하며 문단 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만년에는 '두 개의 자유' 발언 등으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44][45] 일본 예술원 회원이었으며, 1985년 도쿄도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51]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아키타현히라카군 요코테마치(현 요코테시)에서 아버지 이시카와 유스케와 어머니 운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형제자매는 7명, 후에 이복 동생 4명).[3] 아버지는 난부번유필을 지낸 가문의 넷째 아들로, 아키타현립 요코테 중학교의 영어 교사였고, 어머니는 센보쿠군가쿠노다테마치의 소봉가 출신이었다.[3] 그의 백부로는 이시카와 고이치가 있다.[4]

아버지의 직장 이동으로 인해 2살 때(1908년) 아키타시나라야마 혼신마치로, 7살 때(1912년) 도쿄부에바라군오이마치(현 도쿄도시나가와구)로 이사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오카야마현조보군 다카하시마치(현 다카하시시)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5] 1914년, 9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도쿄의 숙부 이시카와 로쿠로의 집에 잠시 맡겨졌으나, 1915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5][6]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도쿄부립 제1중학교에 지원했으나 불합격했다. 고등소학교에서 1년을 보낸 뒤, 1919년 아버지가 교감으로 있던 오카야마현립 다카하시 중학교에 입학했다.[7] 3학년 때 아버지가 전근하면서 오카야마시의 사립 간세이 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이후 제6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7], 1년간 재수하며 시마자키 도손,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등의 작품을 읽었다.[7]

1925년,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대학 제2고등학원에 입학했다. 학우들과 동인지 '장미 도둑'을 만들어 소설을 발표하거나,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현상 소설에 응모하고, '산요 신보'에 작품을 투고하는 등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8] 1926년에는 '산요 신보'에 '쓸쓸했던 예수의 죽음'이 게재되어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활자화되었다.[9] 이 시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학업을 포기하고 필리핀이나 만주로 건너갈 생각도 했으나, 같은 해 '오사카 아사히 신문' 현상 소설에 '행복'(원제 '행불행')이 당선되어 상금 200JPY을 받게 되었다.[10][11] 이 덕분에 1927년 와세다 대학문학부영문과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학비 부족으로 1년 만에 중퇴하고 말았다.[12] 이후 국민시론사에 취직하여 전기 업계지 '국민시론'의 편집 일을 하며[13]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 소설가의 꿈을 키웠으나, 여러 출판사에 작품을 투고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7]

2. 2. 브라질 이민과 아쿠타가와상 수상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학비 부족으로 1년 만에 중퇴하였다.[12] 이후 국민시론사에 취직하여 전기 업계지 '국민시론' 편집에 종사하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으나[13],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7]

1930년 3월, 정부 보조를 받는 단독 이민 자격으로 브라질로 건너갔다. 이는 이민 알선 회사인 남양흥업에 근무하던 형 친구의 도움으로 특별히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14] 이시카와는 도항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시론사를 퇴직하는 형식을 빌려 퇴직금 600JPY을 받았다.[15] 브라질에서는 산토 안토니오 농장에서 약 1개월간 일하고, 이후 '우에치 여관'에 머물며 일본인 농장 등을 전전하다가 같은 해 8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국민시론사에 잠시 복직했다가 다시 퇴직하고 촉탁으로 일했으며, 1931년 6월에는 '신 와세다 문학'의 동인이 되어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16]

1935년 4월, 브라질 농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민을 강요당한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소설 '창맹'(蒼氓)을 동인지 '별자리' 창간호에 발표했다.[17] 이 작품은 소재의 참신함과 사실주의에 입각한 견실한 작법으로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18], 같은 해 8월 제1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당시 신문은 그를 '무명 작가'로 보도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19] 이 수상으로 문단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개조사에서 '창맹'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 3. 종군 작가 활동과 《살아있는 병사》

1937년 12월, 이시카와는 출판사 주오코론의 특별 통신원 자격으로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 난징으로 파견되었다.[22] 상하이를 거쳐 1938년 1월 난징에 도착했는데, 이때는 일본 제국 육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난징 대학살을 자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난징 대학살에 연루된 부대에 합류하여 일본군이 중국 민간인에게 저지른 잔혹 행위와 일본 병사들 사이에 퍼져 있던 염전(厭戰) 사상을 목격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시카와는 소설 《살아있는 병사》 生きている兵隊|이키테이루 헤이타이일본어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일본군의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와 병사들의 고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큰 파장을 예고했다. 내용의 민감성 때문에 '주오코론' 1938년 3월호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 검열을 통해 삭제되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는 발행되자마자 신문지법 제41조(사회 질서 문란) 위반 혐의로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23] 이시카와 본인을 포함해 편집자와 발행인 3명은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기소되었고, 이시카와는 금고 4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5]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문학사에서 중요한 필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24]

《살아있는 병사》의 완전판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12월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완전한 영어 번역본은 ''Soldiers Alive'' (번역: Zeljko Cipris, 호놀룰루: 하와이 대학교 출판부, 2003)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필화 사건으로 인한 좌절감 때문인지, 이시카와는 한동안 작품의 주제를 가정 내부나 연애, 결혼 등으로 한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결혼의 생태'(1938년)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지혜의 푸른 풀'(1939년), '전락의 시집'(1940년), '삼대의 긍지'(1940년) 등 '여성물'이라고 불리는[21]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인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25]

1942년 5월에는 남양 군도를 여행하며 동남아시아를 취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적도제 일지'(赤道祭日誌)[3] 등을 발표했다. 1943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보도반원으로 징용되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현재의 베트남 호찌민시)에 파견되기도 했다.[3]

2. 4. 전후 활동과 사회 참여

1946년, 그는 1946년 일본 총선에서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전후에도 신문 소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폭넓은 사회 감각과[28]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반영한[29] 작품들을 발표했다. 시시 분로쿠, 이시자카 요지로 등과 함께 전성기 신문 소설계를 이끌며 큰 인기를 누렸고, 때로는 독특한 작풍과 기법으로 문단의 이단아로 여겨지기도 했다.[30] 전쟁 중부터 이어온 여성물은 풍속 소설과 결합하여[21], 실업 군인을 중심으로 세태를 풍자한 '바람 없는 것에 아니다'는 1947년 7월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31] 이후에도 여성의 행복을 탐구한 '행복의 한계'(1948년 주쿄 신문 외 연재), 아름다운 부부애를 그린 '진흙에 덮여'(1949년 신초사 간), 신구 세대의 갈등을 다룬 '푸른 혁명'(1952-1953년 마이니치 신문 연재), 현대인의 절망과 파멸을 그린 '악의 즐거움'(1953년 요미우리 신문 연재), 이기주의자들의 추악함을 묘사한 '자신의 구멍 속에서'(1954년-1955년 아사히 신문 연재), 중년 남성의 바람기를 다룬 '48세의 저항'(1956년 요미우리 신문 연재), 현대인의 충실한 삶을 모색한 '채워진 생활'(1961년 신초사 간), 결혼의 의미를 질문한 '우리들의 실패'(1961년 요미우리 신문 연재), 애정의 다양한 모습을 그린 '어리고 사랑을 모르는'(1964년 주오코론사 간), 이기주의의 비극을 그린 '청춘의 좌절'(1968년 마이니치 신문 연재) 등 사회 속 개인의 삶, 사랑, 결혼, 인생 등을 주제로 한 화제작을 연이어 발표하며[32]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했다. '바람 없는 것에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48세의 저항', '청춘의 좌절' 등 일부 작품 제목은 그대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33]

한편, '조사한 예술'이라는 르포르타주 기법을 활용하여 사회 소설 대작에도 힘쓰며 작가적 역량을 발휘했다. 다소 통속적인 면이 지적되기도 했으나, 사회 정의감과 휴머니즘에 기반한 그의 작품들은[18] 기록적인 수법과 함께 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34] 특히, 요코하마 사건을 소재로 전쟁 전후 자유주의자들의 수난을 그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1949년-1951년 마이니치 신문 연재)와 사교조 사건을 바탕으로 정치와 교육의 갈등을 그려 베스트셀러가 된 '인간의 벽'(1957년-1959년 아사히 신문 연재) 등은 사회 소설의 명작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35] 자본가의 횡포를 그린 '상처투성이 산하'(1964년 신초사 간)나 구두룡강 댐 오염 사건을 소재로 정계 부패를 고발한 '금환 식'(1966년 같은 회사 간) 역시 화제를 모았다.[36] 이러한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아[37] 1969년 기쿠치 간상을 수상했다. 마이니치 신문사가 매년 실시하는 독서 여론 조사에서는 전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좋아하는 작가' 순위 상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38]

그 외에도 재판 과정을 다룬 순문학 계열의 '가미사카 시로의 범죄'(1949년 신초사 간)나 실험적인 작품 '마지막 공화국'(1952년 주오코론사 간) 등이 있으며,[39] 이 작품들에서도 이시카와 특유의 개성과 사회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40] 자전적 소설 '나 혼자만의 나'(1965년 분게이슌주 신사 간)는 60년 생애를 돌아보며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아버지에 대한 비판, 공리적인 숙부 부부의 모습 등을 통해 유년기를 회상하는 동시에 작가 고유의 인생관을 제시하여 감동을 주었고,[41] 분게이슌추 독자상을 받았다. '약속된 세계'(1967년 신초사 간), '해방된 세계'(1971년 같은 회사 간), '그 마지막 세계'(1974년 같은 회사 간) 등은 이시카와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며 주목받았다.[42]

쇼와 30년대(1955년 이후) 무렵부터는 사회 활동이 활발해져, 일본 문예가 협회 이사장(1952년-1956년), A·A 작가 회의 도쿄 대회 단장(1961년), 일본 문예 저작권 보호 동맹 회장, 일본 펜 클럽 제7대 회장(1975년-1977년)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적 발언도 늘어났으며, 그의 발언은 종종 문단과 논단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56년 아시아 연대 문화 사절단 단장으로 세계 각국을 방문한 후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과도한 '자유'를 비판했고, 이듬해에는 가와사키 조타로나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의 작품을 외설적이라며 지나친 언론의 자유를 비난하기도 했다.[43] 1975년 일본 펜 클럽 회장 취임 시에는 "언론의 자유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유와 양보할 수 있는 자유 두 종류가 있으며, 포르노 등은 후자에 속한다"는[44] 소위 "두 개의 자유"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키 히로유키 이사 등 개혁 성향의 젊은 회원들로부터 항의를 받았으며,[45] 특히 노사카 아키유키 이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한 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아 펜 클럽은 이듬해까지 혼란을 겪었다.[46] 결국 임원회의 중재로 이시카와는 사실상 발언을 철회해야 했고 혼란은 일단 수습되었지만,[47] 이시카와는 회장 재임을 사퇴했다.[48] 하지만 후임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돌연 펜 클럽을 탈퇴하며 회장직에서 물러났다.[49][50] 문학평론가 오쿠노 다케오는 "만년에는 사회 양식을 대표한다는 입장이 오히려 고집스럽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이시카와를 평했다.[51]

2. 5. 만년

1946년, 1946년 일본 총선에서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전후에도 신문 소설을 중심으로 활발한 작가 활동을 이어갔으며, 매우 폭넓은 사회 감각과 시대 풍조를 예민하게 반영한 작품으로 인기를 누렸다.[28][29] 그는 시시 분로쿠, 이시자카 요지로 등과 함께 전성기 신문 소설의 대표 작가로 꼽혔다.[30]

전후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 정의감과 휴머니즘에 기반하여 기록적 수법을 사용했으며,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18][34] 특히 요코하마 사건을 다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1949년-1951년)나 사교조 사건을 소재로 한 '인간의 벽'(1957년-1959년) 등은 사회 소설의 명작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35] 또한 '상처투성이 산하'(1964년), 구두룡강 댐 오염 사건을 소재로 정계 부패를 고발한 '금환 식'(1966년) 등도 화제를 모았다.[36] 이러한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1969년에는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37] 그는 마이니치 신문의 독서 여론 조사에서 전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좋아하는 저자' 상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38]

쇼와 30년대(1955년 이후) 무렵부터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져, 일본 문예가 협회 이사장(1952년-1956년), A·A 작가 회의 도쿄 대회 단장(1961년), 일본 문예 저작권 보호 동맹 회장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일본 펜 클럽 제7대 회장(1975년-1977년)을 맡았으나, 1975년 회장 취임 시 "언론의 자유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유와 양보할 수 있는 자유 두 종류가 있으며, 포르노 등은 후자에 속한다"는[44] '두 개의 자유' 발언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노사카 아키유키 이사 등 개혁파 회원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45], 격렬한 논쟁 끝에[46] 이시카와는 사실상 발언을 철회해야 했다.[47] 그는 회장직 재임을 사퇴했으며[48], 후임이 정해지지 않자 펜 클럽을 탈퇴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49][50] 오쿠노 다케오는 이시카와에 대해 "만년은 사회 양식을 대표한다는 입장이 오히려 고집스럽다고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평가했다.[51]

1983년 무렵부터 심장병을 앓는 등 만년에는 병치레가 잦았다.[51] 1985년 1월 21일,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어 토혈하고 도쿄 교제 병원에 입원했으며, 이후 폐렴이 발병하여 같은 달 31일 사망했다.[51] 그는 일본 예술원의 회원이었다.

3. 작품 세계

이시카와 다쓰조는 사회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인간의 모습을 깊이 있게 그려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브라질 이민자들의 고난을 그린 『창맹』(1935), 중일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여 발매 금지 처분을 받은 『살아있는 병사』(1945), 그리고 정계와 재계의 유착을 다룬 『금화식』(1966)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3. 1. 초기 작품 경향

영문학자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요시오는 이시카와의 문학 저변에는 "시골뜨기이고 소시민"이라는 성격이 흐르고 있으며, 이것이 일부 독자를 멀어지게 하기도 하지만 일관된 강점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나카노는 이시카와가 다이쇼 시대에 자유주의자로서 자아를 형성했으며,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52]

이시카와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고, 선배 작가에게 사사하여 문단에 등단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시가 나오야, 우노 고지, 도쿠다 슈세이와 같은 사소설 작가들에게 처음부터 뚜렷한 이질감을 느꼈다고 한다.[53] 영향을 받은 작가로는 아나톨 프랑스에밀 졸라를 꼽았다. 마쓰모토 세이초와 야마자키 도요코가 언급한 풍부한 스토리 구성 능력은 이들 외국 작가에게서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문학 내에서는 기쿠치 칸, 야마모토 유조, 시마키 켄사쿠와 같은 사회파 작가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54]

전후 평론가 이와가미 준이치로부터 문제작 『살아있는 병사』가 반전 문학이 아니라 침략 전쟁의 본질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받았을 때, 이시카와는 중일 전쟁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전장에서의 전쟁 자체를 소설로 재현하려 했을 뿐이며 "어떤 전장에도 침략 전쟁의 본질 같은 것은 굴러다니지 않았다"고 반박했다.[55]

3. 2. 사회 소설과 휴머니즘


4. 주요 작품 목록

wikitext

작품명원제발표 연도비고
창맹蒼氓일본어1935년
살아있는 병사生きている兵隊일본어1945년2003년 영어 번역
금환식金鐶蝕일본어1966년


5. 수상 내역


  • 1935년: 아쿠타가와상 - 《소보(蒼氓)》[1][65]
  • 1969년: 기쿠치 간 상[65]

참조

[1] 웹사이트 芥川賞受賞者一覧 https://bungakushink[...] Bungeishunjū
[2] 서적 石川達三 平凡社 1976
[3] 간행물 石川達三 明治書院 1965
[4] 웹사이트 石川儀平 https://www2u.biglob[...]
[5] 간행물 あきた青年広論 1988
[6] 문서
[7] 간행물 石川達三 明治書院 1965
[8] 서적 石川達三・人と作品 中央公論社 1971
[9] 서적 石川達三研究 双文社 2008
[10] 서적 石川達三研究 双文社 2008
[11] 서적 群青 朝日新聞社 1928
[12] 서적 石川達三・人と作品 中央公論社 1971
[13] 서적 石川達三ノート 秋田書房 1985
[14] 서적 石川達三・人と作品 中央公論社 1971
[15] 서적 石川達三の文学 戦前から戦後へ、『社会派作家』の軌跡 アーツアンドクラフツ 2019
[16] 서적 石川達三研究 双文社 2008
[17]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18] 서적 石川達三 小学館 1973
[19] 뉴스 蒼眠 中外商業新報 1935-08-11
[20] 간행물 石川達三 明治書院 1965
[21] 서적 石川達三 平凡社 1976
[22] 서적 石川達三ノート 秋田書房 1985
[23] 뉴스 日本移植民の原点探る=レジストロ地方入植百周年 ◇戦後編◇(108)=筆禍事件起こした石川達三=実は『植民』編集部に勤務 http://www.nikkeyshi[...] ニッケイ新聞 2014-01-22
[24] 뉴스 日本移植民の原点探る=レジストロ地方入植百周年 ◇戦後編◇(108)=筆禍事件起こした石川達三=実は『植民』編集部に勤務 http://www.nikkeyshi[...] ニッケイ新聞 2014-01-22
[25] 서적 日本文学案内 近代篇 朝日新聞社 1977
[26] 간행물 あきた青年広論 1988
[27] 간행물 あきた青年広論 1988
[28] 서적 石川達三 平凡社 1964
[29] 서적 石川達三 講談社 1971
[30] 학술 マスメディアの中の小説家-<新聞小説家> としての石川達三- 2007
[31] 서적 日本文学案内 近代篇 朝日新聞社 1977
[32] 서적 日本文学案内 近代篇 朝日新聞社 1977
[33] 뉴스 新聞小説を変えた『人間の壁』 1988
[34] 뉴스 反骨・信念貫いた生涯 社会の不正に激しい怒り_石川達三氏死去 朝日新聞 1985-01-31
[35] 서적 日本文芸鑑賞事典 近代名作1017選への招待 15 昭和23〜26年 ぎょうせい 1988
[36] 뉴스 反骨・信念貫いた生涯 社会の不正に激しい怒り_石川達三氏死去 朝日新聞 1985-01-31
[37] 서적 日本文学案内 近代篇 朝日新聞社
[38] 서적 読書世論調査30年―戦後日本人の心の軌跡― 毎日新聞社
[39] 간행물 石川達三 明治書院
[40] 웹사이트 ほくとライブラリー明徳館 石川達三記念室 https://www.city.aki[...] 秋田市 2018-06-29
[41] 서적 日本文学案内 近代篇 朝日新聞社
[42] 서적 日本文学案内 近代篇 朝日新聞社
[43] 간행물 マスメディアの中の小説家-<新聞小説家> としての石川達三-
[44] 뉴스 言論の自由めぐり再び激論 石川・野坂両氏 ペンクラブは困惑 朝日新聞 1976-06-08
[45] 뉴스 石川発言に抗議へ 五木氏ら有志十数人 朝日新聞 1975-07-16
[46] 뉴스 '「人間の壁」探り続け 石川さん79歳の大往生 流行語生む話題作' 読売新聞 1985-01-31
[47] 뉴스 けんか両成敗 日本ペンクラブの『二つの自由』論争 朝日新聞 1976-07-02
[48] 뉴스 石川会長、再任を辞退 ペンクラブ総会で意向表明 朝日新聞 1977-04-06
[49] 뉴스 石川会長が退会意思 朝日新聞 1977-06-15
[50] 문서
[51] 뉴스 '「人間の壁」探り続け 石川さん79歳の大往生 流行語生む話題作' 読売新聞 1985-01-31
[52] 서적 筑摩現代文学大系50 石川達三集 筑摩書房
[53] 서적 筑摩現代文学大系50 石川達三集 筑摩書房
[54] 서적 筑摩現代文学大系50 石川達三集 筑摩書房
[55] 서적 筑摩現代文学大系50 石川達三集 筑摩書房
[56] 간행물 目標喪失の文学
[57] 뉴스 難解すぎる若手の小説 混乱承知で新奇追う 朝日新聞 1972-06-03
[58] 서적 石川達三の文学 戦前から戦後へ、『社会派作家』の軌跡 アーツアンドクラフツ
[59] 문서
[60] 문서
[61] 서적 戦中派不戦日記 講談社文庫
[62] 문서
[63] 웹사이트 70年、日本人2人が文学賞候補 ノーベル賞、石川達三と伊藤整 https://www.47news.j[...] 共同通信 2021-05-10
[64] 웹사이트 Nomination archive https://www.nobelpri[...] ノーベル賞委員会
[65] 웹인용 ja:芥川賞受賞者一覧 http://www.bunshun.c[...] Bungeishunjū 2010-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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