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안골포 해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골포 해전은 임진왜란1592년 7월 10일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한 해전이다. 한산도 해전의 패배 소식을 접한 일본군이 안골포로 이동하자 이순신은 학익진 전술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 3960명을 사살하고 일본군의 기함을 격침시키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안골포 해전의 패배에 분노하여 해상 작전을 중단하고, 부산항 주변으로 활동 범위를 제한하도록 명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창원시의 역사 - 창원군
    창원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명칭과 위상이 바뀌며 경상남도에서 존속하다가, 마산항 개항 이후 중심지가 마산으로 이동하고 여러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1995년 창원시와 마산시에 통합되어 폐지된 군이다.
  • 창원시의 역사 - 미오야마국
    미오야마국은 변한의 소국 중 하나로, 경상북도 고령군 또는 경상남도 창원시에 위치했다는 설이 있으며,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이 이름이 일본의 '미마나(임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 임진왜란의 해전 - 벽파진 해전
  • 임진왜란의 해전 - 웅포 해전
    웅포 해전은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웅포에서 일본 수군을 기습하여 승리한 해전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일본 수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기여했다.
  • 1592년 일본 - 상주 전투 (1592년)
    상주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으로 조선군이 참패하여 왜군의 한양 진격을 용이하게 하고 조선의 국방 체계의 취약성을 드러낸 전투이다.
  • 1592년 일본 - 율포 해전
안골포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안골포 해전
전체임진왜란
날짜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장소조선 경상도 진해 안골포
결과조선 수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조선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이영남, 송희립, 정운, 황세득, 배흥립, 이영남, 어영담, 김완, 기효근, 우치적, 신호, 이언량, 이운룡
일본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준사 (항복)
병력 규모
조선 수군전선 56척
일본 수군전선 42척
사상자 규모
조선전사 19명, 부상 114명
일본전선 42척 모두 격침
기타 정보
관련 전투 목록한산도, 안골포

2. 경과

7월 10일 새벽, 이순신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본 수군을 선제 공격했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후방을 지원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서 예비대로 대기하며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1]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일본군은 응하지 않고 해안에 머물렀다. 이에 조선 수군은 번갈아 포구에 진입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억기의 함대까지 합세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조선 수군은 일본군 3960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육지로 도주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1] 특히, 조선 수군은 화력을 일본군 기함인 층각선에 집중시켜 격침시켰다.[1]

유인에 넘어가지 않자, 조선 수군은 전진하여 닻을 내린 일본 함대를 수 시간 동안 포격했고, 일본군은 내륙으로 후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다시 돌아왔지만 소형 보트를 이용하여 탈출했다.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모두 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2. 1. 전투 배경

7월 8일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한 조선 수군은 안골포(安骨浦)에도 일본 수군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이동하였다. 안골포에는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가 지휘하는 42척의 함대가 있었다.[1]

2. 2. 전투 과정

7월 10일 새벽, 이순신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본 수군을 선제 공격했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후방을 지원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서 예비대로 대기하며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1]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일본군은 응하지 않고 해안에 머물렀다. 이에 조선 수군은 번갈아 포구에 진입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억기의 함대까지 합세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조선 수군은 일본군 3960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육지로 도주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1] 특히, 조선 수군은 화력을 일본군 기함인 층각선에 집중시켜 격침시켰다.[1]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은 수 시간 안에 부산에 도달했고,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는 즉시 42척의 배를 이끌고 안골포로 출항했다. 그들은 해안 가까이에서 조선 수군과 교전하기를 희망했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움직임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안골포로 진격하여 그들과 대치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따라 넓은 해역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 해안에 머물렀다. 유인에 넘어가지 않자, 조선 수군은 전진하여 닻을 내린 일본 함대를 수 시간 동안 포격했고, 일본군은 내륙으로 후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다시 돌아왔지만 소형 보트를 이용하여 탈출했다.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모두 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3. 의의

안골포 해전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중요한 승리 중 하나로, 전략적, 정치적 측면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해전의 패배로 인해 보급로가 끊기면서 중국 정복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일본군은 부산으로 후퇴하여 호남 진출을 포기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 머무르게 되었다.

3. 1. 전략적 중요성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에서 연이어 패배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후퇴하여 호남 진출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 주저앉게 되었다.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군 지휘관들에게 불필요한 해상 작전을 중단하고 부산항 주변 지역으로 활동을 제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 2. 정치적 영향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에서 연이어 패배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후퇴하여 호남 진출을 포기했다. 이로써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에 머무르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안골포 해전의 패배에 크게 분노하여 해군 지휘관들에게 해상 작전 중단을 명령하고, 부산 인근으로 활동 범위를 제한하도록 지시했다.[1] 히데요시는 직접 해군을 이끌고 조선에 오겠다고 했지만, 건강 악화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는 모든 전투가 조선에서 벌어질 것이며, 평양이 일본군의 최북서쪽 진격 지점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비록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잠시 만주로 진격했지만, 만주는 당시 중국 제국의 일부가 아니었다.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조선에서의 이동을 방해하여, 그의 중국 정복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