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수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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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광수(1925년)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대좌 안병범의 아들로, 1925년 경성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으며, 이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아버지 안병범과 동생들을 잃었으며, 육군 대령으로 예편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 주 휴스턴 총영사, 외무부 의전실장 등을 역임했다. 1974년 대사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암으로 사망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아버지 안병범과 함께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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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수 (192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안광수 |
현지어 표기 | 안광수 (安光銖) |
별명 | 해당 없음 |
본관 | 죽산 안씨 (竹山) |
출생 | 1925년 |
사망 | 1975년 1월 29일 (51세) |
출생지 | 일본 도쿄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7묘역 5번 8호 |
가족 정보 | |
부모 | 안병범(부) |
친척 | 안광호(형) |
군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5년 5월 12일 ~ 1961년 6월 3일 |
최종 계급 | 일본군: 소위 대한민국 국군: 대령(육군) |
근무 | 육군 수도사단 |
지휘 | 육군 수도사단 예하 연대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외무부 의전실장 |
2. 생애
안광수는 일본군 대좌를 지낸 안병범의 아들로, 194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1974년 대사로 승진하였으나, 본부 대기 중 암으로 사망했다.
육군본부 관리부 심사분석과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작전과장, 육군대학 교관 등을 역임했다.
1974년 대사로 승진[5]하였으나, 1975년 1월 29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아버지 안병범과 함께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복무
일본군 대좌를 지낸 안병범의 아들로 1925년 경성에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인 1945년 5월 12일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58기로 졸업했다. 정래혁, 신상철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이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여 약 3개월 동안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았다.[5]종전 후 미군정 조선으로 들어와 1947년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고, 아버지 안병범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부자가 함께 참전하였으며, 안병범은 개전 초기에 자결했다.[5]
1946년 1월 22일자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 (군번 10024번)하여 제1연대에서 장석륜 대위 휘하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잠시 후 군을 퇴직했으나, 1948년 10월에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을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11560번)하였다.[1]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 안병범은 자결하고, 동생 안광석, 안광진은 전사했다.[5]
2. 2. 한국전쟁 참전
안광수는 일본군 대좌를 지낸 안병범의 아들이다. 미군정 조선으로 들어와 1947년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고, 아버지 안병범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자가 모두 군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안병범은 개전 초기에 자결했다.[5]2. 3. 군 경력
1945년 5월 12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58기로 졸업했다. 정래혁, 신상철과 동기이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여 약 3개월 동안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았다.[5]종전 후 미군정 조선으로 들어와 1947년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고, 아버지 안병범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부자가 모두 군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안병범은 개전 초기에 자결했다.[5]
1946년 1월 22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군번 10024번)[1] 제1연대 근무 중대(중대장: 장석륜 대위) 소대장으로 복무하다 잠시 후 군을 퇴직했으나,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을 졸업하고 다시 소위로 임관했다.(군번 11560번)[1]
육군본부 관리부 심사분석과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작전과장, 육군대학 교관 등을 역임했다. 1959년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했다.
1961년 10월, 5·16 군사 정변 직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5]
2. 4. 외교관 경력
5·16 군사 정변 직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5] 이후 휴스턴 주재 총영사, 대한민국 외무부 의전실장을 역임했다.[5] 1974년에 대사로 승진[5]하여 본부대기 중 암으로 서울에서 사망했다.3. 평가
필립 찰스 하비브의 보고서에 따르면, 안광수는 장교로서 직무를 유기하고 군용 지프를 사적으로 사용하는 등 비위 행위를 저질렀다.[2] 이종찬, 정일권 등 당시 군 수뇌부의 비호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고 복권되었다.[2]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안광수를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로 등재했다.[3]
3. 1. 부정적 평가
필립 찰스 하비브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안광수는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직무를 유기하고 고향 집에 숨어 수개월간 칩거했다.[2] 1950년에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받았음에도 숨어 있었고, 군용 지프를 사적으로 사용했다.[2]이러한 행동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했으나,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안광수의 아버지 안병범을 존경하여 그를 군법회의에 넘기지 않고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징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2] 이후 참모총장이 된 정일권은 안광수를 복권시켰다.[2]
2008년 4월 2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안광수를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군 부문에 등재했다.[3]
4. 친일 논란
필립 찰스 하비브가 한국군 내 파벌에 대해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안광수는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직무를 유기하고 고향 집에 숨어 수개월간 칩거했다.[2] 1950년, 매우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도 숨어 있었고, 군용 지프를 사적으로 유용하기도 했다.[2] 이러한 행동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아버지 안병범을 존경하여 안광수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았다.[2] 이종찬은 자신의 집무실로 안광수를 불러 징계하는 선에서 문제를 처리했다.[2] 이후 참모총장이 된 정일권은 안광수를 복권시켰다.[2]
2008년 4월 2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군 부문에 안광수를 등재했다.[3]
참조
[1]
뉴스
(3655)제79화 육사졸업생들-7기 특별반(108)
https://www.joongang[...]
1983-03-08
[2]
뉴스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 18/22
https://shindonga.do[...]
2010-03-03
[3]
뉴스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
http://www.ohmynews.[...]
2008-04-29
[4]
뉴스인용
안광수 대사 별세
조선일보
1975-01-31
[5]
뉴스인용
외무부 발령. 안광수씨 대사승진,의전실장 지련태씨
조선일보
197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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