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베코비치 체르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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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베코비치 체르카스키는 카바르다 통치자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로 개종한 러시아인이다. 표트르 대제의 명으로 항해술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차르의 작전을 지원했다. 아무다리야 강에서 금을 얻기 위해 히바 칸국 원정을 이끌었으나, 히바 칸의 계략에 빠져 군대가 학살당하고 자신도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 제국은 1세기 이상 중앙아시아 진격을 재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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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베코비치 체르카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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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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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이름 | 알렉산드르 베코비치-체르카스키 (Алекса́ндр Беко́вич-Черка́сский) |
다른 이름 | 데블레트-기레이-무르자 (Девлет-Гирей-мурза) |
사망일 | 1717년 |
사망 장소 | 히바 근처 |
국적 | 러시아 제국 |
직업 | 군인 |
2. 초기 생애
카바르다 통치자의 아들인 체르카스키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러시아인이 되었다.[2] 1707년 표트르 대제에게서 서유럽에서 항해술을 배우라는 명을 받았고, 1711년 탐험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후 고향인 카바르다로 파견되어 그곳의 유력 인사들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러시아 차르의 작전을 지원하도록 설득했다.
2년 후, 아스트라한에 도착한 투르크멘인 여행자가 지역 기관에 과거 카스피해로 흘렀던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을 히바 칸국이 점령하여 아랄해의 강바닥에서 황금 모래를 퍼내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주지사였던 가가린 대공은 이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 히바 칸국으로 사절을 보냈고, 사절은 옥수스 강에서 퍼왔다는 황금 모래 자루를 가지고 돌아왔다.[1]
1717년 알렉산드르 베코비치 체르카스키는 아스트라한에서 카스피해의 첫 지도를 제작하는 측량 작업을 수행하던 중 히바 원정을 명령받았다. 그는 대위로 진급하여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의 예비 원정을 지휘했으며, 크라스노보츠크와 알렉산드로프스크에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일부 코사크를 남겨두었다.[1]
3. 엘도라도의 꿈: 아무다리야강 탐사 배경
이 전설은 신뢰를 얻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대북방 전쟁으로 금이 절실히 필요했던 표트르 대제는 히바의 엄청난 재산에 관한 정보를 듣고, 1716년 2월 14일 무슬림 출신이자 전쟁 전문가인 알렉산드르 베코비치 체르카스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7천 명의 부대를 파견했다.[1]
체르카스키는 다음 네 가지 명령을 받았다.[1]
1. 옥수스 강바닥을 조사하고 카스피 해로 물길을 돌릴 수 있는지 조사할 것.
2. 히바 칸국을 항복시킬 것.
3. 옥수스 강을 따라 요새를 건설할 것.
4. 인도의 무굴 제국과 직접 무역을 확립하기 위해 사신을 보낼 것.
4. 히바 원정 (1717년)
1717년 2월, 베코비치는 아스트라한으로 돌아와 추가 병력을 모집하고 엔지니어 및 토지 측량사들과 함께 히바로 출발했다. 그러나 몇 달 후, 몇몇 타타르족이 돌아와 히바 원정대의 참혹한 소식을 전했다. 원정대는 악천후와 투르크멘 부족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투르크메니스탄에 새로 건설된 요새는 곧 철수되었다.[1]
4. 1. 히바 참사
1717년, 알렉산드르 베코비치 체르카스키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히바 칸국 원정에서 끔찍한 참사를 겪었다. 히바 칸국은 24,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러시아 탐험대를 공격했고,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다.[1]
베코비치 체르카스키는 적의 수가 매우 많은 것을 보고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500명의 병력과 함께 적진으로 갔지만, 히바 칸은 항복하는 척하며 그를 속였다. 히바 칸은 러시아군을 5개 마을로 분산시킨 후 각 마을을 공격하여 대부분의 러시아인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았으며, 베코비치 체르카스키를 포함한 러시아 장교들을 처형했다.[1]
이 사건의 정확한 전말은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히바 원정대의 생존자들은 히바군이 러시아군을 기만하여 분산시킨 후 각개격파했다고 증언한다.[1]
당시 표트르 대제는 대북방 전쟁과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 때문에 즉각적인 보복을 할 수 없었다. 러시아 제국은 1세기 이상이 지난 후에야 중앙아시아 진격을 재개했다.[1]
5. 원정의 결과 및 영향
베코비치 체르카스키의 탐험대는 대북방 전쟁과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로 인해 즉각적인 보복을 받지 못했다.[1] 러시아 제국은 1세기 이상 중앙아시아 진출을 멈췄다.[1] 1873년이 되어서야 러시아는 히바 칸국을 점령했다.[1]
참조
[1]
서적
Central Asia, 130 Years of Russian Dominance
Duke University Press
[2]
간행물
"Ни о происхождении Б., ни о времени поступления его на службу и принятия христианства точных сведений до сих пор нет."
[3]
서적
Central Asia, 130 Years of Russian Dominance
Duk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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