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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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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은 1490년에 태어나 1568년에 사망한 인물로, 튜튼 기사단의 단장을 거쳐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공작이 되었다. 그는 루터교로 개종하고 프로이센을 세속 국가로 만들었으며,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종교 개혁과 교육, 정치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알브레히트는 1525년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지지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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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카스 크라나흐 作, 프로이센 공 알브레히트 (1533년)
루카스 크라나흐 作, 프로이센 공 알브레히트 (1533년)
이름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아ንስ바흐
다른 이름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출생일1490년 5월 17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 안스바흐 (현재의 독일, 바이에른 주)
사망일1568년 3월 20일
사망지프로이센 공국, 타피아우 성 (현재의 러시아, 그바르데이스크)
매장지프로이센 공국,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종교가톨릭 (1525년까지), 루터교 (1525년부터)
작위
독일 기사단독일기사단 총장 (1510년 - 1525년)
프로이센프로이센 공작 (1525년 4월 10일 - 1568년 3월 20일)
가문
가문호엔촐레른 가문
아버지프리드리히 1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어머니조피아 야기엘론카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도로테아 아 단마르크 (1526년 결혼, 1547년 사망)
안나 마리아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1550년 결혼)
자녀안나 조피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경력
독일기사단 총장 임기1510년 - 1525년
프로이센 공작 임기1525년 - 1568년
기타
서명이미지 파일 참고 (Wg brandenburg.gif)

2. 생애

1490년 5월 17일 바이에른의 안스바흐에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백작 프리드리히 2세와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시 4세의 딸 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 사이에서 태어났다.[8] 호엔촐레른 왕가의 분가인 호엔촐레른 안스바흐 가문 출신이다.

1510년 12월 튜튼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이자 작센 공작인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하면서 제37대 튜튼 기사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었다.[2]

1519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폴란드 전쟁 선언 후, 1521년 중남부 프로이센을 원하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설득하여 4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 폴란드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을 완화시켰다.[2]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종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작센 공 프리드리히 3세 등과 함께 루터 지지자가 되었다. 1522년 안드레아스 오지안더의 거듭된 설득으로 루터교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525년 2월 10일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기사이자 사제 신분에서 벗어났고, 1525년 4월 10일 외삼촌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을 할당받고 프로이센 공작에 임명되었다.[2]

1522년 루터파 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그의 개종 선언과 세속 국가화에 대해서는 튜턴 기사단의 저항이 있었다.

1544년 쾨니히스베르크에 쾨니히스베르크 아카데미를 설립,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 명문 대학 크라카우 아카데미에 대응하고자 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독일 내 마르부르크 대학에 이은 두 번째 루터교 대학이었다.

그의 치세 후반에는 루터파와 오시안더파 간의 신학 해석 갈등이 지속되었다. 1566년 10월 28일 법원 음모 사건을 계기로 요한 펑크는 처형된다.

1568년 3월 20일 역병으로 사망했으며, 16시간 만에 재혼한 부인 안나 마리아 역시 역병으로 같은 날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계

알브레히트 프로이센


1490년 5월 17일 바이에른의 안스바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백작 프리드리히 2세이고, 어머니 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시 4세와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딸 엘리자베스 폰 합스부르크의 딸이다.[8] 호엔촐레른 왕가의 분가인 호엔촐레른 안스바흐 가문 출신이다.

어머니 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지만 알브레히트는 마르틴 루터와 서신을 주고 받던 중, 1525년경 루터교로 개종하였다.[8] 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가 알브레히트의 두 형에 의해 폐위되면서 영지를 분배받지 못했다.[8] 이후 튜튼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알브레히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프리드리히 2세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안스바흐 백작인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의 셋째 아들
어머니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시 4세의 딸
고조할아버지뉘른베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141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직책을 받음[9]
6대조뉘른베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5세1398년 사망, 아들들에게 영토 분할 상속[10]
증조부요가일라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격파



그는 여러번 결혼했는데, 후처 중 안나 마리아는 그의 조카딸의 딸이자 6년 연상인 친사촌형 요아힘 1세 네스토르의 손녀딸이었다.[11] 장모 엘리자베스는 알브레히트의 4촌 형 요아힘 1세 네스토르의 딸로 알브레히트보다 20살 연하인 5촌 조카딸이었다.

2. 2. 튜튼 기사단장

1510년 튜튼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이자 작센 공작인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510년 12월 프리드리히 1세의 사망과 동시에 알브레히트는 제37대 튜튼 기사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었다.[2] 튜튼 기사단장에 임명된 것은 튜튼 기사단의 영지가 폴란드의 국경에 인접해 있으므로, 기사단과 그의 외삼촌과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기사단장 취임 조건으로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하지 말라는 조건이 붙었다.

1522년의 튜턴 기사단 단장으로서의 초상화


튜턴 기사단 단장으로서의 문장


프로이센은 토룬 제2차 평화 조약 (1466년) 이후 폴란드의 종주권 하에 기사단이 점유하고 있었다.[2] 새로운 단장은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에 대한 의무를 인식하고 폴란드 왕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다. 기사단의 존속을 둘러싼 전쟁이 불가피해 보이자 알브레히트는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장기간 협상을 벌였다.

1519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폴란드의 전쟁을 선언하였다. 그는 중남부 프로이센을 원하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설득하여 1521년 4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케 하여 폴란드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을 완화시켰다.[2] 폴란드에서 기사단원들의 약탈로 인해 악화된 감정은 1519년 12월에 시작되어 프로이센을 황폐화시킨 폴란드-튜턴 전쟁 (1519년-1521년)으로 절정에 달했다.

분쟁은 황제 카를 5세와 다른 제후들에게 회부되었지만, 어떠한 해결도 이루어지지 않자 알브레히트는 전쟁 재개를 앞두고 도움을 얻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1522년 뉘른베르크 제국 회의를 방문하여 개신교 종교 개혁가 안드레아스 오시안더와 알게 되었고, 오시안더의 영향으로 알브레히트는 개신교로 개종했다.[2]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종교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는 작센 공 프리드리히 3세 등과 함께 몇 안되는 루터 지지자가 되었다. 1522년 안드레아스 오지안더는 그에게 루터교 운동에 적극 참여해달라고 여러번 설득했고, 거듭된 설득으로 그는 루터교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522년 하순 알브레히트는 비텐베르크를 방문하여 마르틴 루터와 담론하였다. 루터는 그에게 가톨릭 교리에 얽매이지 말고 결혼할 것을 권고하고, 새로운 세속국가의 건설을 호소하였다. 알브레히트는 루터의 제안을 자신의 친척들과 일부 논의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루터는 새로운 세속국가의 건설은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며, 만약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채택한 기사는 교황 아드리안 4세로부터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2]

2. 3. 프로테스탄트 개종과 프로이센 공국 건국

1525년 2월 10일 알브레히트는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기사이자 사제 신분에서 벗어났고, 결혼하여 자식을 둘 수 있게 되었다.[2] 1525년 4월 10일 외삼촌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을 할당받고 프로이센 공작에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지그문트 1세가 공작 작위 수여를 거부했으나, 마르틴 루터의 설득으로 작위 수여식이 거행되었다.[2] 그의 영지는 독일령인 서부 프로이센과 폴란드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동부 프로이센이었다. 그는 루터교를 국교로 삼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국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약했으며, 프로이센 공작직은 알브레히트의 남자 후손들만이 계승할 수 있다는 법령을 신설하였다. 알브레히트는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왕의 도시)를 건설하고 프로이센의 수도로 삼았다.

알브레히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국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자치권을 요구했다. 지그문트 1세에게 자체적인 군대 양성, 폴란드 굴덴 외에 프로이센의 자체적인 화폐 주조권,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허락받았다. 또한 프로이센의 지역 의회를 설치하여 주민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폴란드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온 뒤, 알브레히트는 개신교 개종을 선언했다. 튜튼 기사단은 충격을 받았고, 기사들은 반대와 개종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인망을 얻었고, 튜튼 기사단의 프로이센 지부 단원들에게 루터교로 개종을 강요했다. 메메르트의 사령관 에리히 폰 브라운슈바이트-볼펜뷔펠 등 소수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개종에 반대했다. 알브레히트의 개신교 개종과 폴란드 왕국 제후 임명을 계기로, 튜튼 기사단장 퇴임 후에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튜튼 기사단의 대군행관(Großkomtur), 의무총감(Großspittler), 기사단 재무총감(Ordenstressler), 기사단 의복감(Ordenstrappier) 등 고위 지휘관들을 비롯한 많은 기사들이 신앙을 지키겠다며 알브레히트의 곁을 떠났다.[2] 알브레히트 사망 당시 튜튼 기사단에는 55명의 기사만이 남아 있었고, 이들 역시 알브레히트의 개종에 혐오감을 느끼며 후임 그랜드 마스터인 발터 폰 카론부르크에게 프로이센을 실패한 국가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서부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 영토였지만, 알브레히트는 공작 작위를 받는 대신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봉신임을 선언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영토를 지켰다.[2] 지그문트 1세는 가톨릭 국가의 군주였음에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조카 알브레히트를 옹호하였다.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아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왕의 봉신이 된 데에는 마르틴 루터의 설득도 작용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크라쿠프의 젖소 거래'라며 비웃었다.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 공국을 종교국이 아닌 세속 국가로 운영하며, 프로이센 토속 신앙도 허용하였다. 이는 유럽의 황제, 국왕, 제후들이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삼은 관례를 깬 것이었다. 1526년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장 고타르트 케틀러 역시 쿠를란트 공작이 되면서 영지를 세속 국가로 운영하게 된다.

2. 4. 저항과 잠란트 반란 사건

1522년 알브레히트는 루터파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의 개종 선언과 세속 국가화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반발과 논란이 벌어졌다. 남아 있던 튜턴 기사단은 그가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너무 쉽게 개종했다며 저항하였다.

그러던 중 1525년 잠란트에서 농민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는 귀족들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노동력 무급 착취, 갑작스러운 알브레히트의 개종 및 신 국가의 세속 국가화, 튜턴 기사단의 세속화 문제, 알브레히트 및 프로이센 정부의 프로테스탄트 지지 등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하였다. 카이멘 출신 농부와 샤켄 출신의 여관 주인을 지도자로 하는 이들 반란군은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농민군은 정부에 귀족들의 세금 강제 징수 폐지, 모든 형태의 귀족이 거두는 세금 폐지, 세금을 2마르크 대로 조정하고, 농민들에게는 1후페의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귀족들의 난폭함에 일으킨 저항이며 알브레히트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알브레히트는 농민군과 회의를 개최하여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현장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이 동안 농민군의 지도자 두 명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농민군의 일부 조건을 수용하면서 농민군은 자연 해산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은 개신교의 지역이자 파벌주의가 만연한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 5. 정치, 사회 개혁

알브레히트 프로이센


즉위 직후 농노를 해방시켜 귀족 세력을 약화시켰다. 모든 마을에 학교를 설립하게 하는 칙령을 내려 해방 농노와 그 자녀들에게 학업 기회를 부여하였다.[13]

알브레히트는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고 루터교적 가르침을 시민들에게 교육하였다. 이는 1510년 이후 60년간 프로테스탄트 확산의 원인이 되었다. 가톨릭교도 및 이교도에게는 세금을 많이 부과하여 신성 로마 제국 정부와 가톨릭교회는 알브레히트가 불법 행위를 한다고 비판하였다.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 지역 가톨릭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지역 귀족들에게 나눠주어 불만을 무마시켰다.[13]

폴란드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공식 지지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본국의 외교관이자 의사로 알베르트의 측근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알베르트는 새 달력 제정을 생각하여 프로이센 내의 루터교도 천문학자들을 동원,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이용한 천문계산을 작성하도록 지지했다. 이 계산표는 로마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달력 개혁에도 영향을 주었다.[13]

1544년 사재를 투자하여 쾨니히스베르크에 쾨니히스베르크 아카데미를 설립한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 명문 대학 크라카우 아카데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독일 내 마르부르크 대학에 이은 두 번째 루터교 대학이었다. 알브레히트는 독일어 교재와 프로테스탄트 교리 문답집의 인쇄 비용을 스스로 부담했다.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초빙하여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교수진으로 위촉하고, 1549년에는 천문학 서적 번역과 발간에 투자했다. 1551년 안드레아스 헤스를 초빙하여 쾨니히스베르크 성 남쪽 성벽을 건설하였다. 그밖에 쾨니히스베르크 공립 도서관을 설립하였다.[13]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 협정에 참석한 알브레히트는 반 카를 5세파 군주였다. 프로테스탄트 확산으로 영지 내에서 루터파와 오시안더파의 신학 해석에 대한 의견이 갈려 물리적 폭력으로 번졌다. 알브레히트는 폭력을 금지하고 오시안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13]

2. 6. 최후

그의 치세 후반에는 루터파와 오시안더파 간의 신학 해석 갈등이 지속되었다. 1552년 안드레아스 오시안더가 사망하자, 알브레히트는 요한 펑크를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요한 펑크는 알브레히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의 총애를 이용하여 공공 비용으로 상당한 재산을 취득하고 오시안더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을 강요하기도 했다. 1566년 10월 28일 법원 음모 사건을 계기로 요한 펑크는 처형된다.

알브레히트는 1526년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1세의 딸 덴마크의 도로테아(1504 - 1547)와 결혼하여 4녀 2남을 두었지만 두 아들은 요절하였다. 1550년에는 안나 마리아와 재혼하여 딸 엘리자베스와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를 두었다.

알브레히트는 많은 귀족, 학자,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그 중 많은 편지들이 20세기에도 전해졌다. 1568년 3월 20일 역병으로 사망했으며, 그가 병에 걸린 지 16시간 만에 그의 재혼한 부인 안나 마리아 역시 역병으로 같은 날 사망했다.

'''처자:'''

이름출생사망비고
안나 조피1527년1591년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요한 알브레히트 1세와 결혼
카타리나1528년1528년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1529년1530년
루치아 도로테아1531년1532년
루치아1537년1539년
알브레히트1539년1539년


  • 1550년, 브라운슈바이크-칼렌베르크 후작에리히 1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재혼.

이름출생사망비고
엘리자베트1551년1596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1553년1618년


2. 7. 사후

알브레히트는 쾨니히스베르크 성당에 자신의 무덤을 설계해두었고, 사후 그의 시신은 쾨니히스베르크 성당에 안치되었다.

3. 유산

알브레히트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지지한 최초의 독일 귀족이었다.[5] 1544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알베르티나)를 설립했는데, 이는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 명문 대학인 크라쿠프 아카데미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독일 내에서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이은 두 번째 루터교 대학이었다.

1551년 안드레아스 헤스는 쾨니히스베르크 성 남쪽 날개 르네상스 시대 출입구 위에 알브레히트의 부조를 제작했다.[5] 알베르티나의 원래 캠퍼스 벽에는 익명의 예술가가 제작한 부조가 포함되었다. 어깨에 검을 든 공작을 묘사한 이 그림은 대학교의 상징인 "알베르투스"였다. 원본은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 공립 도서관으로 옮겨졌고, 조각가 파울 김리츠가 벽에 사용할 복제품을 만들었다.[5] 쾨니히스베르크 주립 왕립 도서관 입구에는 로타 자우어의 "알베르투스" 다른 버전이 있었다.[5]

1891년 프리드리히 로이쉬는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 마지막 대공, 프로이센의 첫 번째 공작"이라는 비문이 새겨진 알브레히트의 동상을 제작했다.[6] 알베르트 볼프 (조각가)는 알베르티나의 새 캠퍼스에 있는 알브레히트의 기마상을 디자인했다. 왕의 문에도 알브레히트의 동상이 있다.

알브레히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북부 마라우넨호프 지구에서 자주 존경받았다. 1906년 이 지구의 주요 거리가 헤르조크-알브레히트-알레로 명명되었다. 1934년 이 지구의 타운 광장인 쾨니히-오토카르-플라츠는 헤르조크-알브레히트-게데히트니스키르헤 교회와 일치하도록 헤르조크-알브레히트-플라츠로 이름이 변경되었다.[7]

4. 가족 관계

Albrecht von Preußen|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de은 1526년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의 딸인 도로테아 (1504년 8월 1일~1547년 4월 11일)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들은 여섯 자녀를 두었다.[11]

이름출생사망비고
안나 소피아1527년 6월 11일1591년 2월 6일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작 요한 알브레히트 1세와 결혼
카타리나1528년 2월 24일1528년 2월 24일출생 시 사망
프리드리히 알베르트1529년 12월 5일1530년 1월 1일요절
루치아 도로테아1531년 4월 8일1532년 2월 1일유아기에 사망
루치아1537년 2월 3일1539년 5월 1일요절
알브레히트1539년 3월 1일1539년 3월 1일출생 시 사망



1550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에리히 1세의 딸인 안나 마리아 (1532년~1568년 3월 20일)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부부는 두 자녀를 두었다.[11]

이름출생사망비고
엘리자베트1551년 5월 20일1596년 2월 19일미혼, 자녀 없음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1553년 4월 29일1618년 8월 18일프로이센 공작


참조

[1] Britannica Albert (duke of Prussia) http://www.britannic[...]
[2] EB1911 Albert (grand master)
[3] 웹사이트 An Etymological Dictionary of Astronomy and Astrophysics - 1 http://dictionary.ob[...] 2019-02-01
[4] 서적 Mühlpfordt
[5] 서적 Mühlpfordt
[6] 서적 Mühlpfordt
[7] 서적 Mühlpfordt
[8] 문서 알브레히트 아킬레스의 본부인은 바덴의 마르그리트이다.
[9] 문서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직은 본래 브란덴부르크 백작령이었다가 비텔스바흐 가문 신성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의 아들 루트비히 5세에게 넘어갔고, 루트비히 4세 황제의 다른 아들이자 5세의 이복동생 루트비히 6세 때에 선제후령이 되었다. 이후 황제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가 자기 아들 윈체슬라스에게 주었다가 지기스문트에게로 넘어왔고 지기스문트는 [[뉘른베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 (1414년)|프리드리히 1세]]에게 양도하였다.
[10] 문서 원래 아들이 없었던 [[프리드리히 1세 (1414년)|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프리드리히 2세]]는 동생인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에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직]]을 물려주었다.
[11] 문서 프리드리히 1세-세실리아-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의 빌헬름4세-에리히 1세
프리드리히 1세-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프리드리히 1세 안스바흐-알브레히트

[12] 문서 프리드리히 1세-세실리아-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의 빌헬름4세-에리히 1세
프리드리히 1세-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요한 치체로-요아힘 1세 네스토르-엘리자베트

[13] 문서 공국의 국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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