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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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피니는 1872년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창설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 산악 보병 부대이다. 이탈리아 북부 산악 국경 방어를 위해 조직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등 여러 전쟁에 참전했다. 냉전 시대에는 이탈리아 북부 국경 방어 임무를 수행했으며, 현재는 국제 평화 유지 활동 및 국내 재난 구호 활동에 참여한다. 알피니는 산악 지역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며, 매년 대규모 동창회를 개최한다. 현재는 토리넨세, 줄리아 여단을 중심으로 부대가 운영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알피니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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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사보이아 왕조 이탈리아 왕국 성립 직후인 1872년에 창설된 왕립 산악 연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산악 부대로 여겨진다.
이탈리아는 남부가 지중해에 면해 있는 반면, 북부는 유럽 중앙부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천연의 요새로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등 육지로 국경을 접한 국가와의 전쟁은 산악 지대에서의 전투가 예상되었기에, 정예 산악 부대 창설이 시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알피니 부대는 4개 사단으로 확대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험난한 알프스 산악 지대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고, 겨울의 혹한은 이를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눈과 얼음의 전쟁"에서 알피니 사단은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와 남티롤을 병합했고, 이탈리아 국민은 알피니 병들을 민족 영웅으로 존경하게 되었다.[1]
전쟁 사이 기간에는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파시스트 정권 성립 후 다시 부대가 확대되었다. 육군은 알피니 병의 군관구를 통합, 재편성하여 6개 알피니 사단을 편성했다. 이들 중 다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반 이탈리아-러시아 전역군 증원으로 러시아에 파견되어 동계 전투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는 5개 알피니 여단 편성을 갖추게 되었고, 군관구도 새롭게 결정되었다.
2. 1. 창설 (1872년)
주세페 페루케티 대위는 이탈리아 왕국의 산악 국경 방어를 위해 현지에서 모집된 군인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 그는 주변 지역 지식과 개인적 애착을 가진 이들이 유능하고 동기 부여된 수비수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페루케티는 1868년 산악 훈련을 조직했던 중장 아고스티노 리치 장군의 연구에 크게 의존했다. 그의 제안 5개월 후, 왕실 칙령 제1056호에 따라 15개의 최초 알피니 중대가 창설되었고, 1872년 10월 15일 발효되었다. 이로써 알피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 산악 보병 부대가 되었다.처음에 알피니는 이탈리아 북부 산악 국경을 방어할 민병대로 조직되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항복하면서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지역을 병합했고, 그 북부 국경은 알프스 산맥과 일치했다. 이전까지 콰드릴라테로 전략에 기반했던 국방은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의 지정학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 전략은 포 계곡 지역 ("''Pianura Padana''") 방어를 우선시하고, 알프스 지역은 군사 작전에 부적합하다고 여겨 방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산악 계곡 현지인들을 특별 군단으로 조직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산악 지형에 대한 지식과 알프스 환경 적응력을 갖춘 병사들을 모집했다. 초기에는 산악 지역을 7개 군사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는 장교가 지휘하고 최소 2개의 알피니 중대(각 120명)를 두었다. 군인들은 베테를리 1870 소총으로 무장했다. 1873년에는 9개 중대가 추가되어 총 24개가 되었다. 1875년에는 중대 규모가 2배(병사 250명, 장교 5명)로 늘어나 7개 알피니 대대로 조직되었고, 각 대대는 7개 군사 지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 ''쿠네오'', 2° ''몬도비'', 3° ''토리노 (수사)'', 4° ''토리노 (키바소)'', 5° ''코모'', 6° ''트레비소'', 7° ''우디네''
사보이아 왕조의 이탈리아 왕국 성립 직후인 1872년에 창설된 알피니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산악 부대로 여겨진다.[1]
이탈리아는 남부는 지중해, 북부는 유럽 중앙부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알프스 산맥이 천연 요새로 존재한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산악 전투가 예상되었기에, 정예 산악 부대 창설이 시급했다. 1872년, 주세페 페루케티는 산악 지대 주민들로 전문 부대를 편성할 것을 제안했고, 아고스티노 리치의 지지로 추진되었다. 1872년 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명령에 따라 알피니 연대가 창설되었다. 민간인의 지식과 경험을 군에 도입하는 유연한 방식은 단기간에 강력한 산악 부대를 이탈리아 육군이 보유하게 했다.[1]
2. 2. 초기 활동 (1888년 ~ 1914년)
1888년, 알피니 부대는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참전하여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에 투입되었다. ''1° Battaglione Alpini d'Africait''(제1 아프리카 알피니 대대)는 다른 알피니 대대에서 차출된 지원병으로 구성되어 에리트레아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도갈리 전투의 복수를 위해 파견되었으나, 열대 질병으로 인해 지휘관과 13명의 병력을 잃고 1888년 4월 27일 나폴리로 귀환했다.[1]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알피니 부대는 장비를 현대화하고 재편되었다. 각 알피니 중대에는 8마리의 노새가 배정되었고, 베테를리 70 소총은 베테를리-비탈리 mod. 70/87 소총으로 교체되었다. 1892년에는 새로운 Mod. 91 소총을 처음으로 지급받았으며, 1897년에는 Mod. 91TS 버전으로 교체되어 1945년까지 사용되었다.
1896년, 제1차 이탈리아-아비시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1° Battaglione Alpini d'Africait''는 다시 에리트레아로 파견되었다. 아도와 전투에서 알피니 부대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지휘관 다비데 메니니 중령을 포함하여 400명 이상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제4 중대의 피에트로 첼라 대위와 그의 부하들은 암바 라조를 점령하고 유지하여 패배한 이탈리아군 병력이 도망칠 수 있도록 하였다. 첼라 대위와 그의 부하들은 모두 전사하였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군사적 용맹 금메달이 수여되었다.[1]
1900년, 알피니 부대는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국제 구호군에 참여하여 중국 베이징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톈진에서 1901년 말까지 주둔 임무를 수행했다. 1902년에는 스키 부대(''Compagnie Sciatoriit'')를 창설하여 산악 지형에서의 작전 능력을 강화했다.
1905년과 1908년에는 칼라브리아와 메시나에서 발생한 대지진 등 재해 복구 활동에 참여하여 민간인들을 지원하였다. 이는 재해 시 군의 역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1911년, 이탈리아-터키 전쟁이 발발하자 알피니 부대는 리비아에 파견되어 전투를 수행했다. 살루초, 몬도비, 이브레아, 베로나, 톨메초, 펠트레, 수사, 베스토네, 페네스트렐레, 에돌로 대대와 ''토리노-수사'', ''몬도비'', ''비첸차'' 포병 그룹이 리비아에 파견되었다. 1912년 로잔 조약으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현지인의 반란으로 인해 알피니 부대는 계속 주둔해야 했다. 1914년 8월, ''펠트레'' 대대가 이탈리아로 귀환했지만, 리비아에서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1909년에는 알피니 부대의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졌다. 제2 산악 포병 연대가 창설되고, 제7 알피니 연대와 제4 알피니 연대에 새로운 대대가 추가되었다. 특히, 안토니오 칸토레 대령이 지휘하는 제8 알피니 연대가 창설되어 알피니 부대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1910년에는 ''벨루노'' 대대가 창설되어 전쟁 전 알피니 대대의 편제가 완성되었다.
1909년 당시 알피니 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연대 | 주둔지/본부 | 제1 대대/그룹 | 제2 대대/그룹 | 제3 대대/그룹 | 제4 대대/그룹 |
---|---|---|---|---|---|
제8 알피니 연대 | 우디네 | -- 톨메초 | -- 제모나 | -- 치비달레 | |
제1 산악 포병 연대 (이탈리아) | 토리노 | ![]() | -- 몬도비 | -- 토리노-수사 | -- 토리노-아오스타 |
제2 산악 포병 연대 | 비첸차 | -- 코넬리아노 | -- 베르가모 | -- 비첸차 | -- 벨루노 |
2. 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알피니 부대는 평시 26개 대대에서 62개 대대로 증강되어 알프스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2] [3] [4] [5] [6] [7] [8] [9] 각 알피니 대대는 1명의 대위, 4명의 소위, 250명의 병사로 구성된 264개의 중대로 편성되었다.

눈과 얼음 속의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은 600 km 전선의 대부분이 알프스산맥의 산과 빙하를 통과했기 때문에 매우 혹독했다. 1915/16년 겨울에는 12미터(40 피트)의 눈이 내리는 것이 흔했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알피니와 오스트리아 측 대응 부대인 카이세르슈츠, 슈탄츠슈츠, 란데슈츠는 1년 내내 모든 언덕과 산꼭대기를 점령했다. 거대한 지하 기지가 산비탈과 마르몰라다와 같은 빙하의 얼음 속으로 뚫리고 파헤쳐졌다.
이러한 종류의 전쟁에서는 먼저 높은 지점을 점령한 쪽이 유리했기 때문에, 양측은 산봉우리 아래에 터널을 뚫고 폭발물을 채운 다음 정상과 방어군을 폭파시키는 지뢰전을 벌였다. 콜 디 라나, 몬테 파수비오, 라가주오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10]

등산과 스키는 양측 군대의 필수 기술이 되었고, 곧 스키 대대와 특수 등반 부대가 창설되었다. 알피니와 그들의 정신, 행적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알피니의 사상자는 114,948명으로, 전사(KIA) 14,175명, 부상(WIA) 61,620명, 실종(MIA) 39,153명(대부분 눈사태 또는 지뢰전으로 사망)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알피니 부대는 산악 지대 전투에서 큰 기대를 받았고, 4개 사단으로 확대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험난한 산악 지대에서의 전투는 치열했고, 겨울의 혹한은 이를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눈과 얼음의 전쟁"에서 알피니 사단은 종종 영웅적인 활약을 보였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와 남티롤을 병합했고, 이탈리아 국민은 알피니 병들을 민족적 영웅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 1945년)
파시스트 정권은 알피니 부대를 6개 사단으로 증강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시켰다. 이들은 프랑스, 알바니아, 그리스, 소련 등 다양한 전선에 투입되었다. 특히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사단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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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산악 사단 "타우리넨세" |
제2 산악 사단 "트렌티나" |
제3 산악 사단 "줄리아" |
제4 산악 사단 "쿠네엔세" |
제5 산악 사단 "푸스테리아" |
제6 산악 사단 "알피 그라에" |
각 사단은 2개의 알피니 연대(각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 1개의 산악 포병 연대(3개 포병 그룹으로 구성), 1개의 혼성 공병 대대, 1개의 병참 대대, 그리고 지원 부대로 구성되었다. 각 사단의 병력은 장교 573명, 부사관 및 병사 16,887명으로 총 17,460명이었으며, 약 5,000마리의 노새와 500대의 차량을 보유했다.[11]
1942년, 트렌티나, 줄리아, 쿠네엔세 사단은 소련 전선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알피니는 코카서스 산맥 대신 돈 강 평원에서 전선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산악전에 특화된 병력이 평원에서 탱크와 기계화 보병에 맞서는 상황은 비판받을 만한 결정이었다. 알피니는 1943년 1월까지 전선을 지켰지만, 추축군 붕괴로 소련군에 포위되었다. 니콜라예프카 전투에서 포위를 뚫고 탈출했지만, 트렌티나 사단은 3분의 1(4,250명 생존), 줄리아 사단은 10분의 1(1,200명)만이 생존했고, 쿠네엔세 사단은 전멸했다.[11]
1943년 카시빌 협정으로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일부 알피니 부대는 연합군 측에 가담했다. 제1 산악 사단 "타우리넨세"는 제19 보병 사단 "베네치아" 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합류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싸웠다. 이들은 1945년 3월 이탈리아로 귀환한 이탈리아 파르티잔 사단 ''가리발디''를 결성했다.[11]
1944년, 제3 알피니 연대는 "피에몬테" 대대와 "몬테 그라네로" 대대로 재창설되어 이탈리아 해방군에 합류, 연합군 측에서 싸웠다. 이들은 ''레냐노'' 전투단에 합류하여 영국 제8군의 일원으로 이드로 강 인근에서 전투를 치렀다.[11]
한편, 북부의 살로 공화국은 제4 산악 사단 "몬테로사"를 창설하여 나치 독일과 함께 전쟁을 계속했다. 이 사단은 고딕 선에서 브라질 원정군, 미국 제92 보병 사단 등과 싸웠으며, 최종 연합국 공세 때 콜레키오 전투 이후 항복했다.[11][12][13]
2. 5. 냉전 시대 (1947년 ~ 1991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알피니 부대는 다시 이탈리아 북부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9년 10월 15일, 알피니 여단 '줄리아'가 우디네에서 창설되었고, 1951년 5월 1일 알피니 여단 '트리덴티나'가 브릭센에서, 1952년 4월 15일 알피니 여단 '토리네세'가 토리노에서, 1953년 1월 1일 알피니 여단 '오로비카'가 메란에서, 1953년 7월 1일 알피니 여단 '카도레'가 벨루노에서 창설되었다. 각 여단은 이탈리아 산악 지역의 특정 지역에서 병사를 징병하여 지역 주민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1972년에 '토리네세'가 제4 군단에 합류하면서 이탈리아 육군의 모든 알피니, 산악 부대에 대한 단일 지휘 체계가 마련되었다.
1976년 개혁 이후 제4 알피니 군단은 서쪽의 알프스 산맥 주산맥의 스위스-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 삼중점부터 동쪽의 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국경까지 이탈리아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제4 알피니 군단은 이탈리아 제5 군단의 좌익을 지키는 고정적인 위치를 유지하며, 제5 군단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 평원에서 적군과 교전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전투를 벌였을 유일한 여단은 '줄리아'였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제4 알피니 군단은 두 가지 전쟁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소련 남부군과 헝가리 육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통과하여 진격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오스트리아 중립을 위반하고 오스트리아를 통해 진격하는 경우이다. 적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통과할 경우, 줄리아는 4개의 기갑 여단과 5개의 기계화 여단으로 구성된 제5 군단의 산악 좌익을 방어하여 적군이 북부 이탈리아의 파다 평원으로 돌파하기 전에 적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다른 알피니 여단은 고정된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소련과 헝가리 사단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남부 슈타이어마르크와 드라바 계곡을 통해 케른텐으로 진격할 가능성이 더 높았는데, 이 경우 알피니 여단은 이탈리아 육군의 최전선 부대가 될 것이다. '줄리아'는 카날 계곡을, '카도레'는 피아베 계곡을, '트리덴티나'는 푸스터 계곡을 방어하는 동안 '오로비카'는 특별 임무를 수행하고 '토리네세'는 예비대로 남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5개 알피니 여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부대 | 징병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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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에몬테 주, 리구리아 주, 토스카나 주 북부 |
![]() | 롬바르디아 주 북부 |
![]() |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주, 베네토 주 서단부 |
![]() | 베네토 주 북부, 에밀리아-로마냐 주 남부 |
![]() |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 주, 아브루초 주 |
2. 6. 현대 (1991년 ~ 현재)
냉전 종식 이후, 알피니 부대는 2개 여단(줄리아, 타우리넨세)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1] 현재 알피니 부대는 국제 평화 유지 활동 및 국내 재난 구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3. 특징
알피니는 전통적으로 어릴 때부터 산에서 사는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특징을 갖는다.[14] 다른 병과와는 달리 군관구 내의 정해진 토지에 사는 이탈리아인만이 알피니에 지원할 수 있어, 가문 대대로 알피니 병을 하는 가족도 적지 않다.[14]
이러한 특성으로 부대마다 폐쇄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지만, 오히려 알피니 각 부대의 결속은 매우 굳건하다. 전국 알피니 협회(Associazione Nazionale Alpini, ANA)는 이탈리아 알피니 부대의 옛 구성원들인 "Veci"(영어로는 "the old ones", 단수형은 "vecio")를 대표하는 단체이다.[14] "Veci"들은 스스로를 참전용사가 아닌 "휴가 중"으로 여기기 때문에, ANA는 구어체로 제10 알피니 연대로도 알려져 있다.[14] 1920년부터 매년 ANA는 "Veci"들을 위한 전국 동창회를 개최해 왔다.[14] 매년 늦봄 주말이면 수십만 명의 알피니들이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만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축하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14] 행사장으로 선택된 마을에서는 수십만 명의 알피니 병이 방문하여 재회를 기뻐하고, 거리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주민들과 이탈리아 국기로 가득 채워진다.[14]
4. 편제
알피니는 에임포인트 M3 레드닷이 장착된 베레타 ARX 160 소총, 베레타 92 FS 권총, OD/82SE 수류탄, Type III AP/98 방탄복(NC4/09 방탄복으로 교체 중), 3세대 야간 투시 장비를 갖추고 있다.[1]
분대 자동 화기로는 FN 미니미 또는 라인메탈 MG3가 사용된다.[1] 지원 사격은 M2 브라우닝 (0.50인치) 기관총, 히르텐베르거 M6C-210 코만도 60 mm 휴대용 경박격포 또는 MO-120-RT-61 120 mm 중박격포로 제공된다.[1]
기동성은 이베코 VTLM 린체 4륜구동 전술 차량, 푸마 6x6 장갑 수송차, Bv 206 / Bv 206S 전지형 궤도 차량을 통해 확보한다.[1]
대전차 무기로는 판처파우스트 3 로켓 추진 유탄과 MILAN 2 및 TOW II 대전차 유도 미사일이 있다. 후자 2개는 향후 몇 년 안에 스파이크 대전차 유도 미사일로 대체될 예정이다.[1]
1999년 포병 연대는 FH-70 곡사포를 지급받았다. 이는 OTO 멜라라 모드 56 휴대용 곡사포보다 화력이 크게 증가했지만, 유연성은 감소했다. 현재는 "산악 포병"이 아닌 "야전 포병(산악)" 연대로 지정된다.[1]
알피니는 이탈리아 육군의 표준 소총 ARX-160의 혹한 환경 현장 테스트를 위해 소수를 제공받았다.[1]
4. 1. 현재 알피니 부대
냉전 종식 이후, 줄리아와 토리넨세 여단을 제외한 모든 알피니 부대가 해산되었으며, 다음의 알피니 부대만이 "피암메 베르디" (fiamme verdiit, 녹색 불꽃) 칼라 휘장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부대 | 예하 부대 |
---|---|
![]() | -- 지휘 및 전술 지원 부대 "트렌티나" |
-- 토리넨세 산악 여단 | |
-- 줄리아 산악 여단 | |
기타 군사 지휘부 소속: |
참조
[1]
웹사이트
Vecio.it - La storia degli Alpini nel web - Capitano Pietro Cella (prima medaglia d'oro Alpina)
http://www.vecio.it/[...]
2011-10-27
[2]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3]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4]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5]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6]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7]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8]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9]
서적
L'Esercito Italiano verso il 2000 - Vol. Primo - Tomo I
SME - Ufficio Storico
1998
[10]
뉴스
FOUGHT TILL DEATH TO DELAY AUSTRIANS; Bersaglieri and Alpini in the Mountains Made Futile von Hoetzendorf's Plans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17-12-14
[11]
서적
"The Italian Army, 1940-1945 (3): Italy, 1943-45"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2001
[12]
서적
"British Intelligence in the Second World War: Volume 3 Part 2"
https://books.google[...]
British Crown
1988
[13]
서적
Seek, Strike, Destroy: the History of the 894th Tank Destroyer Battalion in World War II
Gateway Press
1995
[14]
웹사이트
Official Site of the National Alpini Association
http://www.ana.it/
[15]
웹사이트
Inno degli Alpini, dal sito ufficiale dell' ANA
http://www.ana.it/mo[...]
201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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