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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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살론은 1128년경 덴마크에서 태어난 인물로, 로스킬레 주교이자 룬드 대주교를 역임했다. 그는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1세의 측근이자 조언자로서 벤드족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이끌었으며, 코펜하겐의 건설을 지원했다. 또한 덴마크 교회를 개혁하고, 삭소 그라마티쿠스에게 덴마크 역사를 기록하도록 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기여했다. 압살론은 1201년 사망했으며, 덴마크 해군의 함선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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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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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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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경력 | |
직함 | 로스킬레 주교 룬드 대주교 |
교구 | 로스킬레 교구 (1158–1192) 룬드 대교구 (1178–1201) |
이전 | 아세르 (로스킬레) 에스킬 (룬드) |
이후 | 페더 수네센 (로스킬레) 안데르스 수네센 (룬드) |
인물 정보 | |
출생 | 1128년경 |
출생지 | 소뢰 근처 |
사망 | 1201년 3월 21일 |
사망지 | 소뢰 |
매장지 | 소뢰 수도원 |
2. 초기 생애
압살론은 1128년경 쇠뢰 근처, 셸란에서 태어났다. 덴마크에서 그의 이름이 특이했기 때문에, 덴마크의 "압살론" 이름 축일인 10월 30일에 세례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2] 그는 셸란 피네슬레우 출신 화이트 가문의 거물인 아세르 릭과[1] 잉에르 에릭스도터의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룬드의 대주교 에스킬의 친척이기도 했다.[2] 그는 아버지의 성에서 자랐으며, 그의 형 에스번 스나레와 젊은 왕자 발데마르와 함께 자랐는데, 발데마르는 나중에 덴마크의 발데마르 1세가 되었다.[6]
압살론은 발데마르 1세의 측근이자 조언자였으며, 덴마크의 벤드인에 대한 십자군의 주요 후원자였다.[6] 덴마크는 벤드인의 해안 습격을 받았는데,[4] 압살론은 벤드 해적들을 발트해에서 몰아낼 의지를 가졌다.[1] 그는 경비 함대를 구성하고 해안 방어를 구축했으며, 여러 차례 원정을 이끌었다.[4]
1146년 덴마크의 에릭 3세의 죽음 이후 내전 동안 압살론은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해외로 여행을 떠났고, 에스번은 발데마르의 왕위 등극을 위해 싸웠다. 파리에서 그는 군주 통치로부터 교회의 독립에 대한 그레고리 개혁의 이상에 영향을 받았다.[3] 그는 또한 생트 주느비에브 수도원의 캐논 윌리엄 오브 아벨홀트와 친해졌고, 나중에 그를 에스킬쇠 수도원의 원장으로 만들었다.[2]
압살론은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동시대 연대기 ''데인인의 사적''에 내전이 끝날 무렵 스벤 3세와 발데마르 사이의 평화 협정을 오덴세의 세인트 알반 수도원에서 중재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2] 그는 1157년 스벤이 그의 경쟁자 덴마크의 크누드 5세와 발데마르를 위해 열었던 로스킬레 연회에 참석했다. 압살론과 발데마르는 이 자리에서 스벤의 암살을 간신히 피했고 유틀란트로 도망쳤으며, 스벤이 그들을 따라갔다.[1] 압살론은 스벤이 패배하고 죽은 1157년의 그라테 황무지 전투에는 아마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압살론은 생가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은 후, 형과 함께 파리의 신학교로 유학했다. 그가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인의 업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157년 크누드 5세와 발데마르 1세가 왕위를 다투던 스벤 3세에게 손님으로 로스킬레에 초대받은 부분이다. 압살론과 발데마르 1세는 이 방심할 수 없는 주인의 암살 시도로부터 벗어나 가까스로 유틀란트 반도로 도망쳤다. 스벤 3세는 그들을 추격했지만, 그라테 헤더 전투에서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3. 정치 및 군사 활동
1160년, 압살론이 직접 지휘한 첫 번째 원정이 시작되었다.[1] 1168년에는 뤼겐의 아르코나 요새를 정복하고, 벤드족은 덴마크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후 뤼겐 한가운데에 있는 벤드족의 정치적 수도 차렌차를 무혈 점령했다. 압살론은 오르후스 주교 스베인과 12명의 호스칼만 데리고 6,000명의 벤드족 전사들이 늘어선 좁은 길을 따라 늪지를 지나 요새 문으로 향했다. 그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신 루기에비트 신전으로 가서 우상을 베어 넘어뜨리고 불태웠다. 그 후 가르츠의 모든 주민이 세례를 받았고, 압살론은 뤼겐 섬에 12개의 교회를 세웠다.[1] 뤼겐은 이후 압살론의 로스킬레 주교 관할 구역에 속하게 되었다.[4]
벤드족 해적들의 주요 출입구를 파괴함으로써 압살론은 덴마크 함대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발트해를 계속 주시했으며, 1170년에는 뤼겐 섬의 즈비누프에 있는 또 다른 해적 거점을 파괴했다. 압살론의 마지막 군사적 업적은 1184년 성령강림절에 슈트랄준트 인근에서 덴마크의 봉신인 뤼겐의 야로마르 1세를 공격한 포메라니아 함대를 격파한 것이다.[1]
압살론의 주요 정치적 목표는 덴마크를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1] 그는 덴마크 교회를 개혁하여 성좌에 더 가깝게 맞추었고, 덴마크가 성좌의 가까운 동맹으로 남도록 노력했다.[6] 1162년 발데마르 1세는 압살론의 조언과 경고에 반하여 프랑스 도르에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82년 크누드 6세가 즉위할 때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가 로스킬레를 방문했지만, 압살론은 신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결연히 거부했다.
압살론은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고, 시토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와 같은 국제적 종교 단체를 지원했으며, 학교를 세우고 문명과 계몽을 증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1] 1167년, 압살론은 하븐(Havn, 영어: "Harbour", 항구) 도시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았고, 벤드족에 대한 해안 방어를 위해 그곳에 성을 건설했다.[6] 하븐은 빠르게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 중 하나로 확장되었고, 결국 오늘날의 코펜하겐으로 발전했다.[2]
3. 1. 로스킬레 주교
1158년, 발데마르 1세는 자신이 왕위에 오른 같은 해 압살론을 로스킬레 주교로 임명했다.[6] 이후 압살론은 발데마르 1세의 제1고문이 되어, 이후 발데마르 1세, 크누드 6세, 발데마르 2세 3대에 걸쳐 덴마크의 발트해 지배 방침의 발안자가 되었다.
압살론은 후에 포메라니아라고 불리는 발트해 연안에 거점을 둔 북해에 출몰하는 벤드족[10] 해적 소탕을 꾀하며, 한동안 이에 주력했다. 발데마르가 왕위를 계승했을 당시 3분의 1로 줄어든 덴마크 해안을 해적들은 요령껏 약탈했다.
압살론은 덴마크 내전 동안 벤드인의 해안 습격을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4], 벤드 해적들을 발트해에서 몰아낼 의지를 가졌다.[1] 벤드 해적들은 스벤 3세, 크누드 5세, 발데마르의 내전 동안 덴마크 해안을 약탈하여 발데마르가 즉위했을 때 덴마크의 3분의 1이 황폐해지고 인구가 감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 압살론은 경비 함대를 구성하고, 해안 방어를 구축했으며, 벤드인에 대항하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이끌었다.[4] 그는 심지어 발데마르의 이전 적들을 용서할 것을 옹호했는데, 이는 덴마크 내부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2]
3. 2. 발데마르 1세 치세
압살론은 발데마르 1세의 측근이자 조언자였으며, 덴마크의 벤드인에 대한 십자군의 주요 후원자였다.[6] 덴마크 내전 동안 덴마크는 벤드인의 해안 습격을 받았는데,[4] 발데마르가 즉위했을 때 덴마크의 3분의 1이 황폐해지고 인구가 감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 압살론은 경비 함대를 구성하고, 해안 방어를 구축했으며, 벤드인에 대항하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이끌었다.[4] 그는 심지어 발데마르의 이전 적들을 용서할 것을 옹호했는데, 이는 덴마크 내부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2]
압살론의 주요 정치적 목표는 덴마크를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1] 압살론은 덴마크 교회를 개혁하여 성좌의 관행에 더 가깝게 맞추었고, 덴마크가 성좌의 가까운 동맹으로 남도록 노력했다.[6] 그러나 분열 기간 동안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대립교황 빅토르 4세 사이에서 압살론은 발데마르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며, 심지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빅토르 4세를 지지했다.[4] 발데마르 1세가 1162년 도르에서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봉건적 충성을 바치는 것은 압살론의 조언과 경고에 반하는 일이었다.[1] 발데마르가 덴마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압살론의 지원을 받아 독일 국경에 있는 다네비르케 요새를 강화하기로 결심했다.[2]
압살론은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고, 시토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와 같은 국제적 종교 단체를 지원했으며, 학교를 세우고 문명과 계몽을 증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1] 1162년, 압살론은 자신의 가족이 소유한 소뢰 수도원을 베네딕토회에서 시토회로 바꾸고, 자신의 개인 소유지에서 토지를 기증했다. 1167년, 압살론은 하븐(Havn, 영어: "Harbour", 항구) 도시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았고, 벤드족에 대한 해안 방어를 위해 그곳에 성을 건설했다.[6] 하븐은 빠르게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 중 하나로 확장되었고, 결국 오늘날의 코펜하겐으로 발전했다.[2] 또한 1167년 룬에서 최초의 덴마크 시노드를 개최한 것도 압살론이었다.[1] 그는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삭소 그라마티쿠스에게 덴마크인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기록한 ''데인인의 사적''을 의뢰했다.[4]
1158년, 발데마르 1세는 자신이 왕위에 오른 같은 해 압살론을 로스킬레 주교로 임명했다.[9] 이후 압살론은 발데마르 1세의 제1고문이 되어, 이후 발데마르 1세, 크누드 6세, 발데마르 2세 3대에 걸쳐 덴마크의 발트해 지배 방침의 발안자가 되었다.
압살론은 발트해 연안에 거점을 둔 북해에 출몰하는 벤드족[10]의 해적 소탕을 꾀하며, 한동안 이에 주력했다.
압살론 자신이 지휘하여 1160년에 시작된 벤드 원정은 뤼겐섬(Rügen) 아르코나 곶(Cape Arkona)에 있는 벤드인의 신 스벤토비트의 성역이 있는 요새가 항복한 1168년까지 이어졌다. 아르코나의 벤드인은 항복과 동시에 기독교로의 개종도 받아들였다. 압살론은 아르코나에서 배를 타고 뤼겐섬 중앙에 위치한 벤드인의 정치적 본거지인 카렌차(Charenza)를 목표로 했다.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벤드인들은 아르코나의 예상 밖의 항복으로 인해 덴마크 배를 보기만 하고 두려워하며 무조건 항복했다. 압살론은 우상을 쓰러뜨려 불태우기 위해 오르후스의 주교 스벤과 12명의 호위대만 데리고 벤드인의 강인한 전사 6,000명이 이루는 이중 열 사이를 지나 요새 입구로 이어지는 습지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7개의 머리를 가진 신 루기에비트(Rugievit)의 신전으로 향했다. 가르츠(Garz)의 모든 백성은 세례를 받았고, 압살론은 뤼겐섬에 12개의 교회를 세웠다. 벤드족의 주요 출격로를 파괴한 보람도 있어, 압살론은 덴마크 해군의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그러나 그는 발트해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않고, 1170년에는 더욱 동쪽의 볼린섬 디펜아우에 있는 해적의 본거지를 하나 더 파괴했다.
1176년, 압살론은 국왕으로부터 셸란섬 동해안의 외레순 해협에 면한 요충지에 요새를 건설할 허가를 받았다. 이것이 훗날 코펜하겐이 되었다[11]
1178년 그는 마지못해 룬드의 대주교가 되었다. 팔리움을 받도록 설득해오는 교황령의 파문만이 위협이었지만, 그는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압살론의 마지막 군공은 1184년 성령강림절 날 덴마크의 속국을 습격해온 뤼겐 공작 야로미르 1세(Jaromar I.)의 포메라니아 해군을 스트렐라(슈트랄준트)에서 전멸시킨 것이었다. 그는 아직 57세였지만 분투가 계속되어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다. 압살론은 군을 은퇴하고, 발데마르 공작(후의 발데마르 2세)과 같은 젊은이에게 해군 및 군사 지휘를 맡기는 것에 만족했던 것 같지만, 자신의 재능으로 구축한 주권의 자리에서는 물러나지 않았다.
1162년 발데마르 1세는 압살론의 조언과 경고에 반하여 프랑스 도르에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3. 3. 룬드 대주교
압살론은 덴마크 교회를 개혁하고 성좌와 더 가깝게 만들었으며, 덴마크가 성좌의 가까운 동맹으로 남도록 노력했다.[6] 1167년 룬에서 최초의 덴마크 시노드를 개최했다.[1] 1171년에는 "젤란 교회법"(Sjællandske Kirkelov|셸란 교회법da)을 발표하여 십일조 납부 시스템을 시행하고, 교회법 위반은 세속 법정에서 처벌받도록 했다.[5]
1177년 에스킬이 룬드 대주교직에서 물러났을 때, 압살론을 후임자로 선택했다.[4] 압살론은 처음에는 셸란에서의 권력 기반을 잃을까 염려하여 거부했지만, 1178년 교황의 명령에 따라 수락했다.[2] 특별 교황 특례에 따라 로스킬레 주교직을 동시에 유지했다.[6] 룬드 대주교로서, 압살론은 가혹하고 효과적인 통치자였으며, 교황의 기준에 맞춰 동방 정교회의 전례 잔재를 모두 제거했다.[6] 1180년 스캐니아 농민 반란으로 셸란으로 피신했다가, 발데마르의 도움으로 돌아와 진압했다.[4]
3. 4. 크누드 6세 치세
크누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압살론은 조언자 역할을 계속하였으며,[4] 크누드 6세 치하에서 덴마크 정치의 주요 정책 결정자였다.[3] 압살론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1182년 크누드 6세가 즉위했을 때, 제국의 대사가 로스킬레에 도착하여 새 왕에게 프리드리히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지만, 압살론은 단호하게 그를 거부했다.[1]
압살론의 마지막 군사적 업적은 1184년 성령강림절 날 덴마크의 속국을 습격해온 뤼겐 공작 야로미르 1세의 포메라니아 해군을 스트렐라에서 전멸시킨 것이었다. 그는 아직 57세였지만 계속된 전투로 인해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압살론은 군에서 은퇴하고, 발데마르 공작(후의 발데마르 2세)과 같은 젊은이에게 해군 및 군사 지휘를 맡기는 것에 만족했던 것 같지만, 자신의 재능으로 구축한 주권의 자리에서는 물러나지 않았다.
4. 문화적 업적
압살론은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고, 시토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 같은 국제적 종교 단체를 지원했으며, 학교를 세우고 문명과 계몽을 증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1] 1162년, 압살론은 자신의 가족이 소유한 소뢰 수도원을 베네딕토회에서 시토회로 바꾸고, 자신의 개인 소유지에서 토지를 기증했다. 1167년, 압살론은 하븐(Havn, Harbour|항구영어) 도시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았고, 벤드족에 대한 해안 방어를 위해 그곳에 성을 건설했다.[6] 하븐은 빠르게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 중 하나로 확장되었고, 결국 오늘날의 코펜하겐으로 발전했다.[2] 1167년 룬에서 최초의 덴마크 시노드를 개최한 것도 압살론이었다.[1] 그는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삭소 그라마티쿠스에게 덴마크인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기록한 ''데인인의 사적''을 의뢰했다.[4] 1171년, 압살론은 "젤란 교회법"(Sjællandske Kirkelovda)을 발표했는데, 이 법은 교회가 대중에게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교회법 위반 건수를 줄이는 동시에 십일조 납부 시스템을 시행했다. 법 위반은 세속적인 법적 절차에 따라 처벌받도록 명시되었다.[5] 압살론은 노라 오스무 교회의 건립에 즈음하여 석비를 봉헌했는데(DR.347, 노라 오스무 석비), 비문은 당시 교회에서 사용되던 라틴어가 아닌 덴마크어로 룬 문자로 새겨져 있다.[12]
5. 죽음과 유산
1184년, 압살론은 57세의 나이로 군에서 은퇴하면서 훗날 발데마르 2세 공작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함대와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대신 그는 덴마크 제국의 행정에만 전념했다.[2] 1192년, 압살론은 조카 페데르 순에센da을 로스킬레 주교의 후임으로 임명했고, 다른 조카 안데르스 순에센은 크누드 6세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4] 1201년 3월 21일, 압살론은 73세의 나이로 소뢰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마지막 유언을 통해 피에네스레브를 에스번 스나레에게 넘긴 것을 제외하고 개인 소유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했다. 그는 이미 코펜하겐을 로스킬레 주교에게 넘겨주었다.[2] 압살론은 소뢰 수도원 교회에 묻혔고,[4] 룬 대주교직은 안데르스 순에센이 승계했다.[6]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데인인의 사적》은 압살론 사후에 완성되었지만,[6] 압살론은 이 연대기의 주요 영웅 중 한 명이었으며, 이 연대기는 초기 덴마크 역사에 대한 주요 지식 출처가 되었다.[4] 압살론은 12세기 덴마크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이자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유산을 남겼다.[6] 압살론은 교회 지도자, 정치가, 전사로서 동등하게 위대했다. 그의 팽창 정책은 3대에 걸쳐 덴마크가 발트해를 지배하게 했다. 그가 전쟁을 즐겼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검 대신 전투에서 메이스를 사용하여 "피를 흘리는" 것을 피함으로써 자신의 종교적 역할을 나타내는 중세 시대의 일반적인 전투 주교와는 달랐다. 압살론은 결코 자신의 교회적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1]
2000년대에 "압살론"은 덴마크 왕립 해군 함선의 함급 명칭으로 채택되었으며, 이 함급의 선도 함선은 HDMS 압살론 (L16)와 ''에스번 스나레''(L17)로 2004년과 2005년에 덴마크에서 진수 및 취역했다.[7][8]
참조
[1]
서적
Absalon
[2]
서적
Dansk Biografisk Lexikon
https://runeberg.org[...]
Carl Frederik Bricka
1887
[3]
서적
Gads Historieleksikon
2006
[4]
간행물
Artikel: Absalon ca. 1128–1201
http://www.danmarksh[...]
Aarhus University
2009-06-20
[5]
웹사이트
Kirkelove
http://www.denstored[...]
[6]
웹사이트
Absalon
http://www.denstored[...]
[7]
웹사이트
Forsvaret.dk
http://forsvaret.dk/[...]
2010-03-25
[8]
웹사이트
Absalon Class Combat / Flexible Support Ship, Denmark
http://www.naval-tec[...]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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