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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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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4세는 155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부르봉 왕가의 첫 번째 국왕으로, 나바라 여왕 호아나 3세와 앙투안 드 부르봉의 아들이다. 개신교 신앙으로 성장했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간의 종교 전쟁 시기에 부르봉 가문의 당주로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앙리 3세의 암살 후 앙리 4세로 즉위했으나 가톨릭 동맹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 재정 개혁과 경제 발전을 통해 프랑스를 재건하고, 북아메리카 탐험을 지원하는 등 통치했지만, 1610년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후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과 대중문화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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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5살의 앙리 4세 초상화
1610년, 프랑스 푸르뷔스 그림
이름앙리 4세
프랑스어 이름Henri IV
출생일1553년 12월 13일
출생지베아른 지방
사망일1610년 5월 14일
사망지파리 루브르 궁전
매장일1610년 7월 1일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파리
서명[[파일:Signature of Henry IV of France.svg|서명]]
통치 정보
프랑스 국왕 즉위1589년 8월 2일
프랑스 국왕 퇴위1610년 5월 14일
프랑스 국왕 대관식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 대성당
이전 국왕앙리 3세
다음 국왕루이 13세
나바라 국왕 즉위1572년 6월 9일
나바라 국왕 퇴위1610년 5월 14일
이전 나바라 국왕호아나 3세
다음 나바라 국왕루이 2세
안도라 대공[[파일:Arms of Andorra (1580).svg|20px]]
가문
왕가부르봉 가
아버지앙투안 드 부르봉
어머니잔 3세
배우자
배우자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1572년 결혼, 1599년 이혼)
마리 드 메디치 (1600년 결혼)
자녀
자녀루이 13세
엘리자베트
크리스틴
니콜라 앙리
가스통
헨리에타 마리아
사생아세자르 드 방돔
카트린 앙리에트 드 엘뵈프 공작부인
알렉상드르 드 방돔 기사
종교
종교칼뱅주의 (1553–1593) / 가톨릭교 (1593–1610)
기타
암살암살

2. 생애

앙리 4세는 1553년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자틀랑티크 지방의 포성(Château de Pau)에서 태어났다.[64] 아버지는 부르봉가앙투안이며, 어머니는 나바라 여왕 호아나 3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어머니 잔느는 열렬한 위그노(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였으며, 그 영향으로 아버지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가 세력을 키워 가톨릭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부르봉가 당주인 아버지는 위그노의 지도자가 되었다.

1572년 어머니 호아나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앙리 4세는 나바라 왕국의 왕 '''헨리케 3세'''로 즉위하였다.[64] 10대에 이미 개신교 세력의 수뇌가 되어 프랑스 내전을 이끌었다.

어머니쪽 할머니인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는 프랑수아 1세의 누이였으며, 앙리 4세는 발루아 왕조 말기 세 국왕(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과 첫 번째 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5촌 조카에 해당한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살리카 법에 근거하여 카페 왕조의 남자 계통 분파인 부르봉가의 가주였기 때문에 주어졌다. 부르봉가의 시조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는 루이 9세의 여섯째 아들, 필리프 3세의 동생으로, 앙리 4세로부터 9대 전, 약 300년 전 인물이다.

나바라 왕위는 여계 계승이 인정되었고, 어머니 잔느 달브레의 죽음으로 앙리 4세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조의 역대 프랑스 국왕은 나바라 국왕을 겸임하여 "프랑스와 나바라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2. 1. 탄생과 가계

아버지 앙투안 드 부르봉


어머니 잔느 달브레


앙리 3세가 죽음을 앞두고 앙리 4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모습 (1589)


앙리 4세는 1553년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자틀랑티크 지방의 포성(Château de Pau)에서 태어났다.[64] 아버지는 부르봉가앙투안이며, 어머니는 나바라 여왕 호아나 3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어머니 호아나 3세의 영향으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어머니 잔느는 열렬한 위그노(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였으며, 그 영향으로 아버지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가 세력을 키워 가톨릭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강력한 왕위 계승권을 가진 부르봉가 당주인 아버지는 위그노의 지도자가 되었다.

앙리 4세는 10대에 이미 개신교 세력의 수뇌가 되어 프랑스 내전을 이끌었다. 1572년 6월 어머니 호아나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앙리 4세는 나바라 왕국의 왕 '''헨리케 3세'''로 즉위하였다.[64]

'''앙리 4세의 3대 조상'''
colspan="2" |
프랑스 국왕이자 나바라 국왕
앙리 4세
아버지:
나바라 국왕이자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
부계 조부:
방돔 공작
샤를 드 부르봉
부계 증조부:
방돔 백작
프랑수아 드 부르봉
부계 증조모:
마리 드 룩셈부르크
부계 조모:
프랑수아즈 달랑송
부계 증조부:
알랑송 공작
르네 달랑송
부계 증조모:
마르그리트 드 로렌
어머니:
나바라 여왕
후아나 3세
(잔느 달브레)
모계 조부:
나바라 국왕
앙리 2세
(앙리 달브레)
모계 증조부:
나바라 국왕
후안 3세
(장 달브레)
모계 증조모:
나바라 여왕
카타리나
(카트린 드 푸아)
모계 조모: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모계 증조부:
앙굴렘 백작
샤를 드 롤레앙
모계 증조모:
루이즈 드 사보이



어머니쪽 할머니인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는 프랑수아 1세의 누이였으며, 앙리 4세는 발루아 왕조 말기의 세 국왕(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과 첫 번째 왕비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5촌 조카에 해당한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살리카 법에 근거하여 카페 왕조의 남자 계통 분파인 부르봉가의 가주였기 때문에 주어졌다. 부르봉가의 시조인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는 루이 9세의 여섯째 아들, 필리프 3세의 동생으로, 앙리 4세로부터 9대 전, 약 300년 전 인물이다.

나바라 왕위는 여계 계승이 인정되었고, 어머니 잔느 달브레의 죽음으로 앙리 4세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조의 역대 프랑스 국왕은 나바라 국왕을 겸임하여 "프랑스와 나바라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2. 2. 유년 시절과 종교 전쟁

피레네자틀랑티크 지방의 포성(Château de Pau)에서 태어난 앙리 4세는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를 받았으나, 어머니 호아나 3세의 영향으로 개신교로 개종했다.[64] 10대에 이미 개신교 세력의 수뇌가 된 앙리는 1572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나바라 왕국의 왕 헨리케 3세[64]로 즉위했다.

1572년 8월 18일, 앙리는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누이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이는 종교적 평화를 위한 왕실의 노력이었으나,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으로 내전이 심화되었다.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카트린 드 메디시스, 앙리 드 기즈 사이의 분쟁이 학살의 불씨였다.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콜리니는 기즈 공작의 수하들에게 살해되었고, 가톨릭교도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왕실은 이를 통제하지 못했고, 개신교 신자들도 대항하면서 파리에서만 수천 명이 죽었다. 앙리는 강제로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뒤 파리에 감금되었으나, 1576년 탈출하여 위그노 개신교도들과 합류,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앙리 3세 나바라 왕(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의 초상화


1562년, 기즈 공의 유그노 학살 사건을 계기로 유그노 전쟁이 발발했다. 1563년 2월 기즈 공이 프로테스탄트 암살자에게 암살당하고, 3월 앙부아즈 화약이 성립하여 전쟁은 일단 끝났다. 1567년에 평화는 깨지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앙리는 어머니에게 베아른으로 데려가져 유그노 진영에 가담했다.[40] 1568년, 자르낙 전투에서 유그노 맹주인 숙부 콩데 공이 전사하면서, 젊은 앙리가 맹주가 되고 군대 지휘는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이 맡게 되었다. 1570년에 화의가 성립되어 전쟁이 끝났다.

앙리는 여러 차례 궁정 탈출 시도에 실패[42]했으나, 1576년 2월 3일 사냥 대회 중에 탈출에 성공한다.[43] 그 후 얼마 동안 전쟁의 정세를 관망한 앙리는, 같은 해 5월 유그노에게 유리한 화의가 성립되자 6월 13일에 프로테스탄트로 재개종하여 유그노 진영의 맹주가 되었다.[43]

2. 3. 프랑스 왕위 계승과 즉위

앙리 3세1589년 광신적인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사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앙리 드 나바라가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로 즉위하였다.[65] 앙리 4세는 어머니로부터 나바라 왕위를, 아버지로부터는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가문의 수장으로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았다. 살리카 법에 따라 앙리 4세는 왕위 계승 1순위였으나, 그가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 동맹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프랑스 앙리 4세의 즉위식 의상, 프랑스 푸르뷔스(Frans Pourbus the Younger) 작


앙리 3세 사망 당시, 프랑스 왕위는 세 명의 주요 인물 간의 갈등, 즉 삼왕전쟁(1587~1589)으로 혼란스러웠다.

인물세력지지 기반
앙리 3세프랑스 국왕왕당파와 온건파
앙리 4세나바라 왕, 프랑스 왕위 계승자, 위그노 지도자엘리자베스 1세와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앙리 1세 (로렌)기즈 공작, 가톨릭 동맹 지도자필립 2세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 계통의 계승은 불가능했으나, 앙리 4세가 위그노였기 때문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그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앙리 3세는 기즈 공작을 암살했으나, 민중의 반발로 그의 권력은 블루아, 투르와 그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앙리 3세는 나바라 왕 앙리와 동맹을 맺고 파리로 진군했으나, 1589년 8월 2일 수도승에 의해 암살당했다.

앙리 4세는 명목상 프랑스 국왕이 되었지만,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 동맹은 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식스토 5세는 앙리 4세를 파문하고 왕위 계승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65] 앙리 4세는 아르크 전투와 이브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590년 파리 공성전에서 파리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앙리 4세, 아르크 전투


루벤스가 그린 ''앙리 4세, 이브리 전투''


1590년 가톨릭 동맹이 왕으로 추대한 부르봉 추기경이 사망하자, 동맹은 삼부회를 소집했으나 새로운 왕을 선출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스페인의 이사벨라 클라라 외제니아 공주를 지지했으나, 프랑스인들은 살리카 법을 옹호하며 반대했다.

한스 라우퍼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만든 앙리 4세 초상이 새겨진 제통


앙리 4세는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왕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1593년 7월 25일, 앙리 4세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49] 그는 “''Paris vaut bien une messe''”(파리는 미사를 드릴 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50]

1594년 2월 27일, 앙리 4세는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하고, 3월 22일 파리에 입성했다. 이후 각 도시들이 앙리 4세에게 귀순하면서 가톨릭 동맹은 와해되었다.

2. 4.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내전 종식

1572년 8월 18일,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누이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앙리 4세가 결혼했다. 이는 왕국 내 종교적 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나,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으로 내전이 심해졌다. 앙리 드 나바라는 강제로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뒤 파리에 감금되었으나, 1576년 탈출하여 위그노(개신교) 세력과 합류하면서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위그노인 앙리 4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파리시 역시 그의 입성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앙리 4세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했다. 가톨릭교회 연맹은 샤를 추기경을 '샤를 10세'로 내세웠으나, 그는 앙리 4세의 포로였기 때문에 큰 영향력이 없었다. 1590년 샤를 추기경이 사망하자, 가톨릭교회 연맹은 스페인의 공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살리카 법 위반 및 적국 스페인 왕족이라는 점 때문에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1593년 앙리 4세는 정부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충고에 따라 "파리는 (개종해서라도) 미사를 드릴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선언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49][50] 이 사건은 엘리자베스 1세를 경악시켰으나, 오랜 전쟁에 지친 파리 시민들은 앙리 4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1594년 2월 27일 앙리 4세는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1595년 9월 17일,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앙리 4세에게 내려졌던 파문을 철회하고 그를 프랑스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였다.[66] 1598년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위그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내전(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67]

2. 5. 경제 성장과 정책

나바라 국왕 시절부터 앙리 4세를 보필한 쉴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튄은 재정 장관으로 임명되어 오랜 전쟁으로 파산 직전이었던 프랑스의 재정을 크게 개선하고, 프랑스 사회 전반을 발전시켰다.[68] 그는 농민들의 과중한 세금 부담을 줄이고 귀족들의 세금 부담을 늘리는 정책을 펼쳤다. 위그노들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 상공업자들이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면서 직물 산업과 유리 공업 등이 다시 발전했다. 쉴리 공작은 재무, 농업, 토지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도로망, 삼림, 운하 건설과 캐나다 퀘벡주 개발을 이끌었다.[69][70] 앙리 4세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정책으로 이는 현실이 되었다.[71][72]

앙리 4세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해, 막시밀리앙 드 베튀뉴에게 국가 경제 재건, 농업 촉진, 개간지 확대, 공공 사업 활성화 등의 정책을 수행하게 했다. 또한 교육기관 확충, 도로 정비, 산림 보호, 다리와 운하 정비를 추진했다. 센 강을 가로지르는 퐁뇌프 다리 건설을 중심으로 수도 파리의 대규모 재개발 계획을 실행하여 팔레 루아얄루브르 궁전의 대 갤러리를 건설했다. 이 갤러리는 길이 400m, 폭 30m에 달하는 당시 세계 최대급 건축물이었다. 앙리 4세는 모든 예술가와 공예가들을 초청하여 루브르 궁전에 거주하게 하고 창작 활동을 하도록 했으며, 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금지할 때까지 역대 왕들에 의해 계승되는 정책이었다.

행정 면에서는 세금 납부의 대가로 관직의 세습을 보장하는 폴레 법을 제정했고, 금융가로부터 지역의 세금을 미리 빌려 대신 징세를 맡기는 제도를 만들어 재정 재건에 힘썼다.[55]

2. 6. 재혼과 자녀

1572년 8월 18일, 앙리 4세는 프랑스의 샤를 9세의 누이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로 인해 불행하게 시작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앙리와 마르그리트는 서로를 몹시 싫어했고, 1589년 8월 앙리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별거 상태였다. 마르그리트는 오베르뉴의 위송 성으로 은퇴하여 그곳에서 살았다.[73][74]

앙리 4세는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이미 자신과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은 정부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1599년 가브리엘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75][76]

1599년, 앙리 4세는 마르그리트와 이혼하고, 1600년 12월 17일 마리 드 메디시스와 재혼했다.[75][76] 마리 드 메디시스는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와 오스트리아 대공녀 조안나의 딸이었다.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결혼 생활은 이전처럼 불행했지만, 마리는 결혼 1년 만에 훗날 루이 13세가 되는 아들을 비롯해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


이름출생사망비고
루이 13세1601년 9월 27일1643년 5월 14일1615년 오스트리아의 안과 결혼
엘리자베트 (스페인 왕비)1602년 11월 22일1644년 10월 6일1615년 스페인 왕 필리페 4세와 결혼
크리스틴 마리 (사보이 공작 부인)1606년 2월 10일1663년 12월 27일1619년 사보이아 공작 빅토르 아마데우스 1세와 결혼
오를레앙 공1607년 4월 16일1611년 11월 17일세례받지도, 이름 붙여지지도 않았음. 때때로 "니콜라스"라고 잘못 불림.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1608년 4월 25일1660년 2월 2일(1) 1626년 몽팡시에 공작 부인 마리 드 부르봉과 결혼
(2) 1632년 로렌의 마르그리트와 결혼
헨리에타 마리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비)1609년 11월 25일1669년 9월 10일1625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찰스 1세와 결혼



앙리 4세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와의 사이에서 사산을 제외하고 세 명의 서자를 두었다.


  • 세자르 (1594년 - 1665년) 방돔 공작
  • 카트린 앙리에트 (1596년 - 1663년) 1619년 에르브 공작 샤를 2세와 결혼
  • 알렉상드르 (1598년 - 1629년)

3. 통치와 외교

앙리 4세는 내정과 외교 모두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국내적으로는 낭트 칙령을 통해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슈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튀뉴를 등용하여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퐁뇌프 건설을 비롯한 파리 재개발 사업을 통해 도시 미관을 개선하고, 폴레 법 제정으로 관직 세습을 허용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다.[55]

국제 관계에서 앙리 4세는 스페인과 갈등했다. 스페인은 프랑스 가톨릭 동맹을 지원하며 앙리 4세의 즉위를 방해하려 했으나, 앙리 4세는 베르뱅 조약으로 스페인과 전쟁을 종식시켰다.[1] 이후 사보이 공국과 분쟁을 리옹 조약으로 해결하고, 브레스, 뷔제, 젝스를 얻었다.[9] 또한 네덜란드 공화국제네바를 지원하며 스페인을 견제했다.[9]

3. 1. 국내 정책

앙리 4세는 현명하고 유능한 군주였다. 그는 반대파 귀족들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대신 회유하는 데 힘썼으며, 그러기 위해 배상금 지불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민의 생활 상태를 배려하는 태도가 높이 평가되어 "선왕 앙리"라고 불리며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54]

앙리 4세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해, 측근이었던 막시밀리앙 드 베튀뉴에게 국가 경제 재건, 농업 촉진, 개간지 확대, 공공 사업 활성화 등의 정책을 수행하게 했다. 또한 교육기관 확충, 도로 정비, 산림 보호, 다리와 운하 정비를 추진했다. 그리고 센 강을 가로지르는 퐁뇌프 다리 건설을 중심으로 한 수도 파리의 대규모 재개발 계획을 실행하여 팔레 루아얄루브르 궁전의 대 갤러리를 건설했다. 이 갤러리는 길이 400m, 폭 30m에 달하는 당시 세계 최대급 건축물이었다. 더욱이 앙리 4세는 모든 예술가와 공예가들을 초청하여 루브르 궁전에 거주하게 하고 창작 활동을 하도록 했다. 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금지할 때까지 역대 왕들에 의해 계승되는 정책이 되었다.

행정 면에서는 세금 납부의 대가로 관직의 세습을 보장하는 폴레 법을 제정했고, 또한 금융가로부터 지역의 세금을 미리 빌려 대신 징세를 맡기는 을 만들어 재정 재건에 힘썼다.[55]

앙리 4세는 성공적으로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장관들과 함께 약 의 뇌물을 사용하여 가톨릭 지도자들을 달랬는데, 이는 프랑스 연간 수입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다른 재정 문제와 결합되어 1590년대 중반까지 왕은 재정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위기에 대응하여 앙리는 1596년 11월 새로운 왕실 수입 창출을 승인하기를 바라는 귀족 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는 도시로 들어오는 상품에 대한 새로운 세금인 "판카르트(pancarte)"의 신설을 승인했지만, 1597년에는 에스파냐가 아미앵을 점령하면서 왕실은 다시 군사적 위기에 흔들렸다.

위그노 지도자들은 네 개의 다른 부분으로 구성된 낭트 칙령에 의해 달래졌다. 이 조항들은 위그노들에게 허용될 관용, 예배가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정확한 장소, 세 개의 프로테스탄트 대학교 인정,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시노드 허용 등을 명시했다. 왕은 또한 프로테스탄트 체제를 인정하는 두 개의 개인 문서(브레베(brevet)라고 함)를 발표했다. 낭트 칙령은 종교적 관용을 법으로 제정했고, 브레베는 프랑스 내에 프로테스탄트 국가를 만든 자비의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이 칙령은 프로테스탄트에게 제공된 보장에 반대하는 의회(parlements)의 반대에 직면했다. 루앙 의회(Parlement de Rouen)는 1609년까지 공식적으로 이 칙령을 등록하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그 조항들을 준수했다.

3. 2. 국제 관계

앙리 4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스페인과의 갈등을 겪었다. 스페인은 가톨릭 동맹을 지원하며 앙리 4세의 즉위를 방해하려 했다.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군대는 1590년 앙리 4세에 대항해 파리 포위 공격을 저지했고, 1592년 크라옹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 귀족들이 승리하도록 도왔다.[1] 그러나 앙리 4세는 1597년 아미앵 공성전에서 승리했고, 1598년 베르뱅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앙리 4세는 사보이 공국과의 분쟁인 프랑스-사보이아 전쟁을 겪었다. 이 분쟁은 살루초 후작령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발생했는데, 앙리 4세는 스페인 길을 차단할 기회로 여겼다. 결국 1601년 리옹 조약을 통해 영토 교환이 이루어졌고, 앙리 4세는 브레스, 뷔제, 젝스를 얻는 대신 사보이는 셰제리 계곡을 통과하는 좁은 통로를 유지했다. 이로써 스페인 군대는 프랑스를 통과하지 않고도 롬바르디아에서 프랑슈콩테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론 강을 건너는 다리 하나만이 병목 지점으로 남게 되었다.[9]

앙리 4세는 스페인의 적들을 계속 지원했는데, 1598년부터 1610년까지 네덜란드 공화국에 가 넘는 돈을 지원했다. 이는 프랑스 연간 예산의 1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또한 1602년 사보이 공작의 제네바 점령 시도 이후 제네바에도 보조금을 보냈다.[9]

1609년에는 콩데 공작 부부의 망명 사건과 율리히 계승 전쟁이 겹치면서 스페인과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기도 했다.[9]

4. 암살과 유산

앙리 4세는 재위 기간 동안 쉴리 공작을 통해 국가 재정을 정비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플레슈에 왕립 앙리 르 그랑 대학(현 플레슈 군사 사관학교)을 설립하고, 삼림 보호, 도로 및 운하 건설 등 다양한 공공 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퐁텐블로 성 공원에는 1200미터 길이의 운하를 건설하고 나무를 심었다.[8]

앙리 4세가 적을 짓밟는 모습을 묘사한 청동상. 1615년~1620년경 제작, 프랑스 파리 추정.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소장


앙리 4세는 파리를 위대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뉠프 다리를 건설하여 센 강 양쪽을 연결하고, 왕궁 광장(현재의 보주 광장)을 건설했다. 또한 루브르 궁전에 그랑 갈러리를 추가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는 예술을 장려하여 수백 명의 예술가와 장인들을 초청했고, 그의 치세의 예술과 건축은 앙리 4세 양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8]

프랑수아 피라르 드 라발(François Pyrard de Laval)의 여정(1601~1611)


경제적으로는 보호무역 정책을 통해 외국 상품 수입을 줄이고 국내 제조업을 지원하려 했다. 사치품 규제법을 통해 수입을 제한하고, 고블랭 직조 공장, 사보네리 직조 공장과 같은 왕실 공장을 건설하여 사치품 생산을 장려했다. 또한 투르리옹에서 비단 직조를 재건하고, 피카르디브르타뉴에서 린넨 생산을 증가시켰다. 그는 올리비에 드 세르의 농업 안내서인 「농업 극장(The Theatre of Agriculture)」 1만 6천 권을 무료로 배포했다.[8]

앙리 4세의 비전은 북아메리카까지 확장되어 피에르 뒤가 드 몽과 사뮤엘 드 샹플랭의 탐험에 자금을 지원했고, 프랑스는 뉴 프랑스(현재 캐나다)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8]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가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야크에게 암살당했다.[77][78] 그는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기간 중 유해가 훼손되었다.[60] 이후 그의 머리가 발견되어 2010년에 앙리 4세의 것으로 공식 확인되었으나, DNA 감식 결과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60][61][62]

사후 뉠프 다리에 앙리 4세 기마상이 세워졌으나 프랑스 혁명 때 철거되었다가 1818년에 재건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25] 앙리 4세는 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에 '선왕 앙리'로 칭송받았으며, 앙리 4세 행진곡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26][27]

4. 1. 암살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가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야크가 휘두른 칼에 두 차례나 찔려 죽었다.[77][78] 앙리 4세가 타던 마차가 파리 시가지에서 교통 혼잡으로 멈춘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독일의 율리히 공작령 계승 문제를 두고 합스부르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규모 원정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쉴리 공작을 만나러 가던 길에 변을 당했다.

앙리 4세는 밝고 유쾌한 성격으로 친구가 많았지만, 정치적·종교적 문제로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특히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것이 가톨릭 교회의 원한을 샀다. 그는 무려 17차례나 암살 위기를 겪었으며,[79] 그때마다 예수회 관련성이 끊임없이 거론되었다. 특히 1594년 예수회 콜레주 학생 장 샤스텔의 암살 기도 후 예수회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80][81]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파리에서 가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야크에게 암살당했다. 라바야크는 왕의 마차가 페롱느리 거리에서 교통 체증으로 멈춰 섰을 때 앙리를 칼로 찔렀다. 가스파르 부타의 판화에 묘사되어 있듯이, 마차는 왕비의 대관식 행사로 인한 교통 체증으로 멈춰 섰다.[23][24] 왕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있던 에르퀼 드 로앙은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지만 생존했다. 라바야크는 즉시 체포되어 며칠 후 처형되었다. 앙리는 생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고, 그의 미망인 마리 드 메디시는 1617년까지 아홉 살 난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4. 2. 사후

프랑스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던 앙리 4세의 유해는 프랑스 혁명 중이던 1793년 묘에서 도굴되어 머리가 잘리고 행방불명되었다.[60] 이후 머리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붕어 400년 후인 2010년 법의학자들에 의해 앙리 4세의 것으로 공식 확인되었다.[60] 미라화된 머리는 보존 상태가 양호했으며, 1594년 암살 미수 당시의 상처 등이 남아 있었다. 2012년에는 루이 16세 처형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손수건과 비교하는 DNA 감식이 이루어져 결정적인 결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왕위 계승자였던 파리 백작 겸 프랑스 공작 앙리 드 오를레앙은 복원된 머리의 외관이 부르봉가의 특징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검사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다.[61] 이후 부르봉가 후손 3명의 DNA와 이전 검사에 사용된 증거물의 DNA를 비교하는 DNA 감식이 이루어졌고, 최초의 검사 결과는 부정되었다.[62]

앙리 4세 사후 4년 뒤인 1614년, 누프 다리에 그의 기마상이 세워졌다. 초기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앙리 4세가 루이 16세의 모범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군주제 자체가 거부되자 동상은 철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18년에 처음으로 재건되었고, 오늘날에도 누프 다리에 그대로 서 있다.[25]

앙리 4세는 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에 크게 칭송받았다. 복고된 왕조는 논란이 많았던 루이 15세와 루이 16세의 통치를 축소하고 '선왕 앙리'를 부각하려 했기 때문이다.[26] 앙리 4세 행진곡(앙리 4세 만세)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27]

5. 평가

앙리 4세는 1609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신성 로마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평화를 유지하고 합스부르크가에 맞서는 통일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9] 그는 도르트문트 조약을 통해 평화를 중재하고 프로테스탄트 계승권자들을 지지했다.[9]

율리히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앙리 4세는 프랑스군을 파병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했다. 그는 제국 제후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합스부르크가의 권력을 억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9]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그를 호전적인 인물로 보는 비판을 야기했고, 교황청은 그의 프로테스탄트 지원을 우려했다.[9] 앙리 4세는 교황청에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답하며 종교 문제를 배제할 것을 경고했다. 그는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보장했다.[9]

5. 1. 긍정적 평가

앙리 4세는 "위대한 앙리(Henri le Grand)"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프랑스에서는 "착한 왕 앙리(le bon roi Henri)" 또는 "푸른 멋쟁이(le vert galant)"라고도 불린다.[8][21] 영어로는 나바라의 앙리(Henry of Navarre)로 가장 자주 언급된다.

앙리 4세는 확고한 칼뱅주의자였으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554년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나, 어머니 잔느 3세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앙을 유지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이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1576년 파리 탈출 후 다시 칼뱅주의로 돌아왔다. 1593년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칼뱅주의적 가르침을 소중히 여겼고 1610년 사망할 때까지 위그노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며, 낭트 칙령을 통해 위그노에게 많은 권리를 보장했다.

1614년, 앙리 4세 사후 4년 뒤 누프 다리에 그의 기마상이 세워졌다. 초기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루이 16세의 모범으로 여겨졌으나,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군주제 자체가 부정되어 동상이 철거되었다. 하지만 1818년 재건되어 현재까지 누프 다리에 남아있다.[25]

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에 앙리 4세는 크게 칭송받았다. 복고된 왕조는 논란이 많았던 루이 15세와 루이 16세의 통치를 축소하고 '선왕 앙리'를 부각하려 했기 때문이다.[26] 앙리 4세 행진곡(앙리 4세 만세)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27] 그의 손자인 앙리는 앙리 4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쥐랑송 와인과 마늘로 세례를 받는 등 앙리 4세의 전통을 따랐다.[28]

앙리 4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헛수고''에서 나바라 왕 페르디낭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29]

1661년 아르뒤앵 드 페레픽스 드 보몽은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를 위해 ''위대한 왕 앙리의 역사''라는 전기를 썼다.[30][31] 1663년에는 앙리 4세의 또 다른 손자인 잉글랜드 국왕 잉글랜드의 찰스 2세를 위해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32]

1788년 9월 14일, 초기 프랑스 혁명 중 반세금 폭동이 일어났을 때, 폭도들은 여행자들을 막고 앙리 4세 동상에 경례를 하도록 강요했다.[33]

5. 2. 부정적 평가

앙리 4세는 율리히 계승 전쟁 당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지원했으나, 많은 독일 국가들은 그를 불신했다.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전력과 프랑스가 일부 독일 국가에 빚을 지고 있었던 점, 그리고 앙리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9] 1610년 앙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확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으나, 그의 암살과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 하에 스페인과의 화해로 인해 무산되었다.[9]

또한, 앙리 4세의 장관이었던 슐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튈느는 실각 이후 1611년에 출판한 ''왕실 경제''에서 자신의 경제적 업적을 과장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많은 공식 문서가 변경되거나 위조되어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5. 3. 종합적 평가

앙리 4세는 사후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1609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 요한 빌헬름이 후사 없이 사망하며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의 계승 분쟁이 발생했을 때, 앙리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평화를 유지하고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9] 그는 주요 프로테스탄트 계승권 주장자들 간의 평화적 해결을 장려했고, 도르트문트 조약 체결 후에는 이들을 지지하며 합스부르크가에 맞섰다.[9]

율리히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앙리 4세는 프랑스군을 파병하여 프로테스탄트 계승권자들을 지원했다.[9] 그는 제국 제후들의 권리와 이전 합의를 존중하며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을 억제하려 했다고 밝혔다.[9]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그를 호전적인 인물로 보는 비판을 받았고, 교황청은 앙리 4세의 프로테스탄트 지원을 우려했다.[9] 앙리 4세는 교황청에 평화 유지를 주장하며 종교 문제를 배제할 것을 경고했고,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지원할 것이라 확언했다.[9]

많은 독일 국가들은 앙리 4세가 과거 가톨릭으로 개종한 전력과 프랑스의 채무 문제, 그리고 그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의혹 때문에 그를 불신했다. 1610년 앙리 4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확대하려 했으나, 그의 암살과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으로 인해 스페인과의 화해로 이어지며 무산되었다.

앙리 4세, 마리 드 메디시스와 가족


리옹 시청(Hôtel de Ville, Lyon) 정면의 앙리 4세 부조


사후 4년 뒤인 1614년, 누프 다리에 앙리 4세 기마상이 세워졌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루이 16세의 모범으로 여겨졌으나,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군주제 거부와 함께 동상이 철거되었다.[25] 하지만 1818년에 재건되어 현재까지 누프 다리에 남아있다.[25]

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에 앙리 4세는 '선왕 앙리'로 칭송받으며, 앙리 4세 행진곡(앙리 4세 만세)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얻었다.[26][27]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암살 후 태어난 왕위 계승자 앙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쥐랑송 와인과 마늘로 세례를 받는 등 앙리 4세의 전통을 따랐다.[28] 앙리 4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헛수고''에서 나바라 왕 페르디낭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29]

파리를 향해 말을 탄 프랑스의 앙리 4세의 기마 초상화. 그의 왼쪽에는 튀르리 궁전의 뷔랑 파빌리온이 있고, 배경에는 몽마르트 수도원이 보인다. 그의 오른쪽에는 샤를 5세 성벽 뒤의 투르 뒤 부아가 있고, 더 오른쪽에는 루브르 궁전이 보인다. (약 1595년경)


1661년 아르뒤앵 드 페레픽스 드 보몽은 루이 14세를 위해 ''위대한 왕 앙리의 역사''를 썼고,[30][31] 1663년에는 잉글랜드의 찰스 2세를 위한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32] 초기 프랑스 혁명 중에는 폭도들이 앙리 4세 동상에 경례를 강요하기도 했다.[33] 앙리 4세의 장관이었던 슐리는 그의 ''왕실 경제''를 출판했지만, 후속 연구는 슐리의 경제적 업적이 과장되었음을 보여준다.

6. 대중문화 속의 앙리 4세


  • 조지 채프먼(1559?–1634)의 희곡 《바이런 공작 찰스의 음모와 비극》(1608)에는 앙리 4세가 등장한다.
  •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마고 여왕(1845)은 앙리 4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 하인리히 만은 앙리 4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앙리 4세의 젊은 시절》(1935)과 《앙리 4세의 완성》(1938)을 집필했다. 이 소설은 오구리 히로시 역으로 정문사(1989)에서 출판되었다.
  • 메이나드는 《공동체의 몽상: 앙리 4세 시대의 프랑스 서사시, 1572–1616》(2017)에서 앙리 4세 시대의 프랑스 서사시를 분석했다.
  • 드 로조이는 1774년에 서정극 《앙리 4세, 서정극》을 발표했다.
  • 프랑수아 바이유는 전기 《앙리 4세 자유를 갈망한 왕》을 저술했으며, 이 책은 코우다 레이가 역으로 신평론(2000)에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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