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플레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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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틀랜타 플레임스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활동한 내셔널 하키 리그(NHL)의 아이스하키 팀이다. 1971년 NHL이 확장되면서 창단되었으며, 옴니 콜리세움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 톰 커즌스 소유 하에, 미국 남북 전쟁 중 애틀랜타 방화에 경의를 표하여 팀 이름을 플레임스로 명명했다. 1973-74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1980년 재정적 어려움과 관중 감소로 인해 캘거리로 연고를 이전하여 캘거리 플레임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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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플레임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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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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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지 |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
경기장 | 옴니 콜리시엄 |
창단 연도 | 1972년 |
해체 연도 | 1980년 |
팀 역사 | 애틀랜타 플레임스 1972년–1980년 캘거리 플레임스 1980년–현재 |
팀 색상 | 빨강, 노랑, 하양 |
하키 리그 정보 | |
콘퍼런스 | 클레런스 캠벨 콘퍼런스 (1975-1980) |
디비전 | 웨스트 디비전 (1972-1974) 패트릭 디비전 (1975-1980) |
기타 정보 | |
스탠리 컵 | 없음 |
컨퍼런스 우승 | 없음 |
디비전 우승 | 없음 |
헤드 코치 | 알 맥닐 (마지막 감독) |
2. 역사
내셔널 하키 리그(NHL)는 1966년 6개 팀에서 1970년 14개 팀으로 성장한 후, 적어도 1973년까지는 추가 확장을 계획하지 않았다.[1] 그러나 1971년 경쟁 메이저 리그인 월드 하키 협회(WHA)가 창설되면서 NHL의 계획이 바뀌었고, 두 리그는 선수와 시장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1] NHL은 WHA가 신축된 나소 콜리세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미국 남부 지역에 팀을 배치하기 위해 1971년 11월 9일 롱아일랜드와 애틀랜타로 확장을 발표했다.[2][3]
전미 농구 협회(NBA)의 애틀랜타 호크스를 소유하고 있던 애틀랜타 부동산 개발업자 톰 커즌스가 옴니 콜리세움에서 경기를 치를 조건으로 애틀랜타 프랜차이즈를 소유하게 되었다.[4] 팀 창설 비용은 600만 달러였으며,[1] 커즌스는 미국 남북 전쟁 중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의 애틀랜타 방화에 경의를 표하여 프랜차이즈 이름을 플레임스(Flames, 불꽃)로 명명했다.[4]
플레임스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출신 클리프 플레처를 단장으로,[5] 전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선수 버니 제프리온을 수석 코치로 고용했다.[6] 1972년 6월 6일에 열린 확장 드래프트에서 플레처는 골키핑에 집중하여 첫 번째 선택으로 필 마이어를, 두 번째 선택으로 신인 댄 부샤드를 선택했다.[7] 플레처는 유능하지만, 젊고 경험이 부족한 선수단으로 드래프트를 마쳤다.[8] 이틀 뒤, 플레임스는 1972년 NHL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자크 리차드를 지명했다.[9]
플레임스는 1972년 10월 7일 확장 신생팀인 뉴욕 아일랜더스를 상대로 롱아일랜드에서 NHL 데뷔전을 치렀고, 모리스 스테파니우가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골이자 나소 베테랑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 열린 첫 NHL 골을 기록하며 3-2로 승리했다.[10] 10월 14일 홈 데뷔전에서는 매진된 14,568명의 관중 앞에서 버펄로 세이버스와 1-1로 비겼다.[11] 부샤르와 마이어의 골키핑 덕분에 시즌 대부분을 존경받는 팀으로 보냈으나,[12] 25–38–15로 시즌을 마감하며 웨스트 디비전에서 7위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3][14] 하지만 입장권 판매에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어 시즌 시작 무렵 7,000매에 가까운 시즌 티켓을 판매했고, 경기당 평균 12,516명의 팬을 유치했다.[15][16]
1973-74 시즌을 앞두고 1973년 NHL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된 톰 리시악이 합류하여 64점을 기록하며 플레임스 득점 선두를 달렸고, NHL 최고의 신인에게 주어지는 칼더 메모리얼 트로피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17][18] 30–34–14로 개선된 플레임스는 웨스트 디비전에서 4위를 차지하며 1974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진출 자격을 얻었으나,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게 4연패를 당했다.[16][20] 제프리온은 팀을 잘 지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의 코치에게 수여되는 잭 애덤스 상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21]
1974-75 시즌에 NHL이 18개 팀으로 확장되면서 리그는 4개 디비전 체제로 전환되었고, 플레임스는 패트릭 디비전에 배치되었다.[22] 리시악은 77점으로 플레임스 득점 선두를 다시 차지했고, 에릭 베일은 39골로 팀을 이끌며 칼더 트로피를 수상했다.[23][24] 팀은 12월에 8연패를 겪고 몇몇 핵심 선수들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34–31–15의 기록으로 창단 첫 승리 시즌을 기록했으나, 패트릭 디비전에서 4위를 기록하며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다.[25][26][14] 개인적인 이유로 제프리온은 시즌 말에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프레드 크레이튼으로 교체되었다.[27]
크레이튼은 꾸준하지만 뛰어난 팀은 만들지 못했고, 플레임스는 이후 세 시즌 동안 패트릭 디비전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매년 손실보다 더 많은 경기를 치렀다.[28] 3년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매번 예선 라운드에서 탈락했다.[14] 1975-76 시즌과 1976-77 시즌에는 로스앤젤레스 킹스에게 패했으나, 1977년 4월 7일 킹스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며 구단 역사상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었다.[20][29] 윌리 플렛은 1975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80순위로 지명되어 1976-77 시즌 신인으로서 33골을 넣었고, 칼더 트로피를 수상했다.[30]
1977-78 시즌에 부샤드와 마이어의 골키퍼 탠덤은 출전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서로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플레처는 부샤드를 1번 골키퍼로 지명하고 마이어를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로 트레이드했다. 그들은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에 패했다.[31] 1979년 3월, 플레처는 필 러셀을 포함한 3명의 선수를 받는 대가로 톰 리시악과 4명의 선수를 시카고 블랙 호크스로 보내는 트레이드를 완료했다.[32]
1978년 10월에 구단 기록인 10연승을 기록하며,[26] 1978-79 시즌 플레임스는 애틀랜타 시절 최고의 기록인 41승 31패 8무를 기록했다.[14] 밥 맥밀런은 팀 득점 1위를 차지했으며, 가이 슈이너드와 함께 한 시즌에 100득점을 기록한 최초의 두 명의 플레임스 선수가 되었다.[14][34] 슈이너드는 또한 팀 최초의 50골 득점자가 되었다.[35] 맥밀런은 NHL의 가장 신사적인 선수에게 주어지는 레이디 빙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다.[36] 토론토 메이플리프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애틀랜타는 또다시 승리하지 못했다.[20]
플레처는 1979-80 시즌 내내 팀의 구성을 계속 변경했다. 알 맥닐은 시즌 전에 크레이튼을 수석 코치로 교체했으며,[37] 팀은 WHA의 몰락 이후 스웨덴 스타 켄트 닐슨을 영입했다. 닐슨은 40골 53어시스트로 애틀랜타를 득점 선두로 이끌었다.[38] 1979년 NHL 드래프트에서 플레처는 폴 라인하트, 짐 페플린스키, 팻 리긴, 팀 헌터 등 플레임스 라인업의 주전 선수가 될 4명의 선수를 지명했다.[39] 그러나 1980년에도 플레임스는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뉴욕 레인저스에게 패하며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20]
팀이 경기장에서 정체되면서, 플레임스는 관중 동원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째 시즌인 1973-74 시즌에 평균 14,161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지만, 3년 후에는 12,258명으로, 1977-78 시즌에는 10,500명으로 감소했다.[26] 낮은 관중 동원으로 인해 팀이 연고 이전을 할 수 있다는 우려가 1976년까지 제기되었고, 정치인들과 선수들은 프랜차이즈를 안정시키기 위해 티켓을 구매했다.[40] 플레임스는 1980년, 소련과의 "빙상의 기적" 승리 이후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 남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짐 크레이그를 영입하여 관중 동원을 늘리려 했다.[41] 그러나 평균 관중이 10,024명으로 감소하면서 성공하지 못했다.[26] 플레임스의 재정적 어려움에 더해, 오미 콜리세움은 수익을 창출하는 럭셔리 스위트룸 없이 지어진 북미 마지막 주요 경기장 중 하나였고, 이로 인해 플레처는 이 시설을 "개장했을 때 이미 구식"이라고 묘사했다.[3]
쿠진스는 플레임스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후 클럽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43] 마지막 경기는 1980년 4월 12일 애틀랜타에서 열린 뉴욕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2-5로 패배했다.[42] 그는 낮은 시청률로 인해 텔레비전 계약을 체결할 수 없어, 팀에서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겪었다고 주장했다.[43] 또한, 1970년대 부동산 시장 침체가 쿠진스에게 특히 큰 타격을 입혔다. 그의 부동산 관련 자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금이 플레임스에 묶여 있었고, 그는 플레임스를 시장에 내놓게 되었다.[44] 8년 동안 1,200만 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되는 플레임스는 수개월 동안 캘거리로의 이전을 소문이 있었지만, 댈러스와 휴스턴도 이전 후보지로 거론되었다.[45] 댈러스는 1993년, 미네소타 노스 스타스가 도시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댈러스 스타스가 되면서 NHL 팀을 얻었다.
시먼 형제, 데릴과 바이런은 1,400만 달러를 제시했으며, 캘거리 시는 팀을 위한 새로운 경기장 건설을 준비했다.[46] 그러나 캐나다 사업가 넬슨 스칼바니아가 캘거리 컨소시엄에 합류하기 전 팀에 대한 경쟁 입찰자로 등장했다. 이 그룹은 당시 NHL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가인 1,600만 달러에 플레임스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47] 이 매각은 1980년 5월 21일에 발표되었고, 프랜차이즈는 캐나다로 연고를 이전하여 캘거리 플레임스가 되었다.[48] 플레임스는 이후 부주장과[49] 아메리카 하키 리그 (AHL)에서 뛰었던 팀의 전 자매팀인 애디론댁 플레임스 모두에 애틀랜타 로고를 사용했다.[50]
캘거리 로스터에 남아있던 마지막 애틀랜타 플레임스 선수는 1987-88 시즌 이후 밴쿠버 캐넉스로 트레이드된 폴 라인하트였다. NHL에서 활동한 마지막 애틀랜타 플레임스 선수는 1995년 1995년에 유럽 리그에서 7시즌을 보낸 후 NHL로 복귀한 켄트 닐슨이었다. NHL로 복귀하기 전에는 1992-93 시즌 말에 은퇴한 브래드 마시가 그 자리에 있었다.
팀의 몇몇 전 선수들이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애틀랜타로 돌아왔다.[51] 그 중 톰 리시악은 도시 외곽에서 말 농장을 운영했고,[52] 에릭 베일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기 위해 돌아왔으며[53] 윌리 플렛은 스포츠 테마파크와 골프 코스를 운영했다.[30] 플레처는 1991년까지 팀의 단장으로 남아, 팀을 두 번의 스탠리 컵 결승전 진출과 1989년 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플레임스는 애틀랜타에서의 4번째 해부터 16시즌 연속으로 1991년까지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 1. 창단 배경 (1966-1972)
내셔널 하키 리그(NHL)는 1966년 6개 팀에서 1970년 14개 팀으로 성장한 후, 적어도 1973년까지는 추가 확장을 계획하지 않았다.[1] 그러나 1971년 경쟁 메이저 리그인 월드 하키 협회(WHA)가 창설되면서 NHL의 계획이 바뀌었고, 두 리그는 선수와 시장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1] NHL은 WHA가 신축된 나소 콜리세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미국 남부 지역에 팀을 배치하기 위해 1971년 11월 9일 롱아일랜드와 애틀랜타로 확장을 발표했다.[2][3]전미 농구 협회(NBA)의 애틀랜타 호크스를 소유하고 있던 애틀랜타 부동산 개발업자 톰 커즌스가 옴니 콜리세움에서 경기를 치를 조건으로 애틀랜타 프랜차이즈를 소유하게 되었다.[4] 팀 창설 비용은 600만 달러였으며,[1] 커즌스는 미국 남북 전쟁 중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의 애틀랜타 방화에 경의를 표하여 프랜차이즈 이름을 플레임스(Flames, 불꽃)로 명명했다.[4]
플레임스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출신 클리프 플레처를 단장으로,[5] 전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선수 버니 제프리온을 수석 코치로 고용했다.[6] 1972년 6월 6일에 열린 확장 드래프트에서 플레처는 골키핑에 집중하여 첫 번째 선택으로 필 마이어를, 두 번째 선택으로 신인 댄 부샤드를 선택했다.[7] 플레처는 유능하지만, 젊고 경험이 부족한 선수단으로 드래프트를 마쳤다.[8] 이틀 뒤, 플레임스는 1972년 NHL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자크 리차드를 지명했다.[9]
플레임스는 1968년 NBA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를 인수한 사업가 톰 커즌스(Tom Cousins)와 전 조지아 주지사 칼 샌더스(Carl Sanders)에 의해 1971년에 창단되었다.
2. 2. 애틀랜타 플레임스 시대 (1972-1980)
내셔널 하키 리그(NHL)는 1966년 6개 팀에서 1970년 14개 팀으로 성장한 이후, 경쟁 메이저 리그인 월드 하키 협회(WHA)가 1971년에 창설되면서 선수와 시장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1] NHL은 WHA가 신축된 나소 콜리세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미국 남부 지역에 팀을 배치하기 위해 1971년 11월 9일, 롱아일랜드와 애틀랜타로 확장을 발표했다.[2][3]
애틀랜타 프랜차이즈는 전미 농구 협회(NBA)의 애틀랜타 호크스를 소유하고, 새로 건설된 옴니 콜리세움에서 경기를 치를 애틀랜타 부동산 개발업자 톰 커즌스에게 주어졌다.[4] 팀 창설 비용은 600만 달러였다.[1] 커즌스는 미국 남북 전쟁 중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의 애틀랜타 방화에 경의를 표하여 프랜차이즈 이름을 플레임스(Flames, 불꽃)로 명명했다.[4]
플레임스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출신 클리프 플레처를 팀의 단장으로, 전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선수 버니 제프리온을 팀의 수석 코치로 고용했다.[5][6] 1972년 6월 6일에 열린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골키핑에 집중하여 첫 번째 선택으로 필 마이어를, 두 번째 선택으로 신인 댄 부샤드를 선택했다.[7] 이틀 뒤, 플레임스는 1972년 NHL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자크 리차드를 지명했다.[9]
플레임스는 1972년 10월 7일 확장 신생팀인 뉴욕 아일랜더스를 상대로 롱아일랜드에서 NHL 데뷔전을 치렀고, 모리스 스테파니우가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골이자 나소 베테랑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 열린 첫 NHL 골을 기록하며 3-2로 승리했다.[10] 10월 14일 홈 데뷔전에서는 매진된 14,568명의 관중 앞에서 버펄로 세이버스와 1-1로 비겼다.[11] 부샤르와 마이어의 골키핑 덕분에 시즌 대부분을 존경받는 팀으로 보냈으나,[12] 25–38–15로 시즌을 마감하며 웨스트 디비전에서 7위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3][14] 하지만 입장권 판매에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어 시즌 시작 무렵 7,000매에 가까운 시즌 티켓을 판매했고, 경기당 평균 12,516명의 팬을 유치했다.[15][16]
1973-74 시즌을 앞두고 1973년 NHL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된 톰 리시악이 합류하여 64점을 기록하며 플레임스 득점 선두를 달렸고, NHL 최고의 신인에게 주어지는 칼더 메모리얼 트로피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17][18] 30–34–14로 개선된 플레임스는 웨스트 디비전에서 4위를 차지하며 1974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진출 자격을 얻었으나,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게 4연패를 당했다.[16][20] 제프리온은 팀을 잘 지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의 코치에게 수여되는 잭 애덤스 상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21]
1974-75 시즌에 NHL이 18개 팀으로 확장되면서 리그는 4개 디비전 체제로 전환되었고, 플레임스는 패트릭 디비전에 배치되었다.[22] 리시악은 77점으로 플레임스 득점 선두를 다시 차지했고, 에릭 베일은 39골로 팀을 이끌며 칼더 트로피를 수상했다.[23][24] 팀은 12월에 8연패를 겪고 몇몇 핵심 선수들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34–31–15의 기록으로 창단 첫 승리 시즌을 기록했으나, 패트릭 디비전에서 4위를 기록하며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다.[25][26][14] 개인적인 이유로 제프리온은 시즌 말에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프레드 크레이튼으로 교체되었다.[27]
크레이튼은 꾸준하지만 뛰어난 팀은 만들지 못했고, 플레임스는 이후 세 시즌 동안 패트릭 디비전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매년 손실보다 더 많은 경기를 치렀다.[28] 3년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매번 예선 라운드에서 탈락했다.[14] 1975-76 시즌과 1976-77 시즌에는 로스앤젤레스 킹스에게 패했으나, 1977년 4월 7일 킹스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며 구단 역사상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었다.[20][29] 윌리 플렛은 1975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80순위로 지명되어 1976-77 시즌 신인으로서 33골을 넣었고, 칼더 트로피를 수상했다.[30]
1977-78 시즌에 부샤드와 마이어의 골키퍼 탠덤은 출전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서로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플레처는 부샤드를 1번 골키퍼로 지명하고 마이어를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로 트레이드했다. 그들은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에 패했다.[31] 1979년 3월, 플레처는 필 러셀을 포함한 3명의 선수를 받는 대가로 톰 리시악과 4명의 선수를 시카고 블랙 호크스로 보내는 트레이드를 완료했다.[32]
1978년 10월에 구단 기록인 10연승을 기록하며,[26] 1978-79 시즌 플레임스는 애틀랜타 시절 최고의 기록인 41승 31패 8무를 기록했다.[14] 밥 맥밀런은 팀 득점 1위를 차지했으며, 가이 슈이너드와 함께 한 시즌에 100득점을 기록한 최초의 두 명의 플레임스 선수가 되었다.[14][34] 슈이너드는 또한 팀 최초의 50골 득점자가 되었다.[35] 맥밀런은 NHL의 가장 신사적인 선수에게 주어지는 레이디 빙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다.[36] 토론토 메이플리프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애틀랜타는 또다시 승리하지 못했다.[20]
플레처는 1979-80 시즌 내내 팀의 구성을 계속 변경했다. 알 맥닐은 시즌 전에 크레이튼을 수석 코치로 교체했으며,[37] 팀은 WHA의 몰락 이후 스웨덴 스타 켄트 닐슨을 영입했다. 닐슨은 40골 53어시스트로 애틀랜타를 득점 선두로 이끌었다.[38] 1979년 NHL 드래프트에서 플레처는 폴 라인하트, 짐 페플린스키, 팻 리긴, 팀 헌터 등 플레임스 라인업의 주전 선수가 될 4명의 선수를 지명했다.[39] 그러나 1980년에도 플레임스는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뉴욕 레인저스에게 패하며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20]
플레임스는 1968년 NBA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를 인수한 사업가 톰 커즌스(Tom Cousins)와 전 조지아 주지사 칼 샌더스(Carl Sanders)에 의해 1971년에 창단되었으나, 디비전 최하위권 경쟁과 부진이 계속되었다. 결국 1980년 캐나다 캘거리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캘거리 플레임스가 되었다.
2. 3. 캘거리로의 이전 (1980)
팀이 경기장에서 정체되면서, 플레임스는 관중 동원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째 시즌인 1973-74 시즌에 평균 14,161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지만, 3년 후에는 12,258명으로, 1977-78 시즌에는 10,500명으로 감소했다.[26] 낮은 관중 동원으로 인해 팀이 연고 이전을 할 수 있다는 우려가 1976년까지 제기되었고, 정치인들과 선수들은 프랜차이즈를 안정시키기 위해 티켓을 구매했다.[40] 플레임스는 1980년, 소련과의 "빙상의 기적" 승리 이후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 남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짐 크레이그를 영입하여 관중 동원을 늘리려 했다.[41] 그러나 평균 관중이 10,024명으로 감소하면서 성공하지 못했다.[26] 플레임스의 재정적 어려움에 더해, 오미 콜리세움은 수익을 창출하는 럭셔리 스위트룸 없이 지어진 북미 마지막 주요 경기장 중 하나였고, 이로 인해 플레처는 이 시설을 "개장했을 때 이미 구식"이라고 묘사했다.[3]쿠진스는 플레임스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후 클럽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43] 마지막 경기는 1980년 4월 12일 애틀랜타에서 열린 뉴욕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2-5로 패배했다.[42] 그는 낮은 시청률로 인해 텔레비전 계약을 체결할 수 없어, 팀에서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겪었다고 주장했다.[43] 또한, 1970년대 부동산 시장 침체가 쿠진스에게 특히 큰 타격을 입혔다. 그의 부동산 관련 자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금이 플레임스에 묶여 있었고, 그는 플레임스를 시장에 내놓게 되었다.[44] 8년 동안 1,200만 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되는 플레임스는 수개월 동안 캘거리로의 이전을 소문이 있었지만, 댈러스와 휴스턴도 이전 후보지로 거론되었다.[45] 댈러스는 1993년, 미네소타 노스 스타스가 도시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댈러스 스타스가 되면서 NHL 팀을 얻었다.
시먼 형제, 데릴과 바이런은 1,400만 달러를 제시했으며, 캘거리 시는 팀을 위한 새로운 경기장 건설을 준비했다.[46] 그러나 캐나다 사업가 넬슨 스칼바니아가 캘거리 컨소시엄에 합류하기 전 팀에 대한 경쟁 입찰자로 등장했다. 이 그룹은 당시 NHL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가인 1,600만 달러에 플레임스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47] 이 매각은 1980년 5월 21일에 발표되었고, 프랜차이즈는 캐나다로 연고를 이전하여 캘거리 플레임스가 되었다.[48] 플레임스는 이후 부주장과[49] 아메리카 하키 리그 (AHL)에서 뛰었던 팀의 전 자매팀인 애디론댁 플레임스 모두에 애틀랜타 로고를 사용했다.[50]
캘거리 로스터에 남아있던 마지막 애틀랜타 플레임스 선수는 1987-88 시즌 이후 밴쿠버 캐넉스로 트레이드된 폴 라인하트였다. NHL에서 활동한 마지막 애틀랜타 플레임스 선수는 1995년 1995년에 유럽 리그에서 7시즌을 보낸 후 NHL로 복귀한 켄트 닐슨이었다. NHL로 복귀하기 전에는 1992-93 시즌 말에 은퇴한 브래드 마시가 그 자리에 있었다.
팀의 몇몇 전 선수들이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애틀랜타로 돌아왔다.[51] 그 중 톰 리시악은 도시 외곽에서 말 농장을 운영했고,[52] 에릭 베일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기 위해 돌아왔으며[53] 윌리 플렛은 스포츠 테마파크와 골프 코스를 운영했다.[30] 플레처는 1991년까지 팀의 단장으로 남아, 팀을 두 번의 스탠리 컵 결승전 진출과 1989년 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플레임스는 애틀랜타에서의 4번째 해부터 16시즌 연속으로 1991년까지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3. 주요 선수
'''참고:''' GP = 출장 경기, G = 골, A = 어시스트, Pts = 포인트, PIM = 페널티 시간[72]
선수 | 포지션 | GP | G | A | Pts | PIM |
---|---|---|---|---|---|---|
톰 리시악 | C | 445 | 155 | 276 | 431 | 329 |
에릭 베일 | LW | 469 | 174 | 209 | 383 | 223 |
가이 쇼이나드 | F | 318 | 126 | 168 | 294 | 56 |
커트 베넷 | C | 405 | 126 | 140 | 266 | 190 |
밥 맥밀란 | RW | 208 | 90 | 131 | 221 | 50 |
레이 코모 | F | 468 | 88 | 126 | 214 | 153 |
켄 휴스턴 | RW | 350 | 91 | 108 | 199 | 332 |
빌 클레멘트 | C | 297 | 69 | 107 | 176 | 136 |
윌리 플렛 | RW | 296 | 91 | 83 | 174 | 738 |
랜디 매너리 | D | 377 | 30 | 142 | 172 | 242 |
- 버니 조프리온
3. 1. 역대 주장
키스 맥크리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애틀랜타 플레임스의 주장을 맡았다.[57] 팻 퀸은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주장을 역임했다.[57] 1977년부터 1979년까지는 톰 리시아크가 주장을 맡았다.[57] 장 프로보스트는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주장을 역임했다.[57]3. 2. 수상 경력
플레임스 소속 선수 3명이 애틀랜타에서 활동하는 동안 NHL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에릭 베일은 1974–75 시즌에 39골을 넣고 60포인트를 기록하며 최고의 신인 선수에게 수여되는 칼더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다.[58] 파라과이 출신의 윌리 플레트는 NHL 풀타임 시즌에 33골 2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2년 뒤 이 상을 수상했다.[59] 밥 맥밀란은 1978–79 시즌에 리그에서 가장 신사적인 선수로 선정되어 레이디 빙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다. 그는 시즌 동안 단 14 페널티 시간만 기록하면서 104포인트로 리그 전체 득점 순위 5위에 올랐다.[60]플레임스 소속 선수 7명이 NHL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랜디 매너리는 1973년 경기에 출전하며 팀 최초의 올스타가 되었다. 이후 알 맥도너프(1974년), 톰 리시악(1975년, 1976년 및 1977년), 커트 베넷(1975년 및 1976년), 에릭 베일(1977년), 빌 클레멘트(1978년) 및 켄트 닐슨(1980년)이 그 뒤를 이었다.[61]
3. 3. 명예의 전당 헌액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애틀랜타 플레임스 조직원은 다음과 같다.[62][63][64][65]- 버니 제프리언은 1972년 선수 부문으로 헌액되었으며, 같은 해 플레임스 초대 감독으로 합류했다.
- 클리프 플레처는 몬트리올 출신으로, 1956년 몬트리올 카나디언스의 스카우트로 하키 경영 경력을 시작하여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에서 부단장으로 승진한 후, 1972년 애틀랜타 플레임스의 초대이자 유일한 단장으로 고용되었다. 플레처는 캘거리로 이전한 후에도 11년 동안 팀에 남아 1989년 프랜차이즈의 유일한 스탠리 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4년 빌더 부문으로 헌액되었다.
- 팻 퀸은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애틀랜타 플레임스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며, NHL 여러 팀을 코치한 공로로 2016년 빌더 부문으로 헌액되었다.
- 데이비드 포일은 플레임스에서 1972년부터 1982년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임원이었으며, 이후 워싱턴 캐피털스로 이적했으며 2024년에 헌액되었다.
애틀랜타 플레임스 선수 중 선수 부문에 헌액된 사람은 없다.
4. 팀 기록
애틀랜타 플레임스는 정규 시즌에서 268승 260패 108무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2승 15패를 기록했다.[72]
- 최다 골 – 가이 슈이나드, 50 (1978–79)[73]
- 최다 어시스트 – 밥 맥밀란, 71 (1978–79)[73]
- 최다 포인트 – 밥 맥밀란, 108 (1978–79)[73]
- 최다 페널티 시간 – 윌리 플레트, 231 (1979–80)[74]
- 최다 포인트, 수비수 – 폴 라인하트, 47 (1979–80)[73]
- 최다 포인트, 신인 – 톰 리시악, 64 (1973–74)[73]
- 최다 승리 – 댄 부샤드, 32 (1978–79)[74]
- 출장 경기 – 에릭 베일, 469[75]
- 골 – 에릭 베일, 174[76]
- 어시스트 – 톰 리시아크, 276[76]
- 포인트 – 톰 리시아크, 431[76]
- 페널티 시간 – 윌리 플레트, 738[76]
- 골텐더 출장 경기 – 댄 부샤드, 384[77]
- 골텐더 승리 – 댄 부샤드, 164[77]
- 셧아웃 – 댄 부샤드, 20[77]
5. 역대 홈경기장
애틀랜타 플레임스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옴니 콜리시엄을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홈경기장으로 사용했다. 옴니 콜리시엄의 수용인원은 15,278명이였다.
6. 유니폼
애틀랜타 플레임스는 8년의 역사 동안 노란색 강조가 들어간 빨간색과 흰색 유니폼을 착용했다. 이 유니폼 세트는 일반적으로 소매, 양말, 꼬리에 노란색 테두리가 있는 대비되는 색상의 줄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흰색 유니폼에는 빨간색 어깨 줄무늬가 장식되었다. 애틀랜타 플레임스는 연고지 이전을 따라 이 유니폼 세트를 캘거리 플레임스로 가져가 앞면에 "불타는 A" 대신 "불타는 C" 데칼을 사용했다. "불타는 A"는 나중에 캘거리 플레임스에서 부주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우연의 일치로, 당시 자매팀이었던 애틀랜타 호크스도 플레임스가 창단된 직후 색상을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변경했다. 호크스는 2007년까지 이 색상 구성을 유지했으며, 202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호크스는 또한 1992년에 검은색을 보조 색상으로 추가했고, 현재의 캘거리 플레임스는 1995년에 이를 따랐다. 2024년 현재, 두 팀 모두 검은색 유니폼을 세 번째 유니폼으로 착용하고 있으며, 주 유니폼에서는 검은색이 색상 구성표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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