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귈라의 역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앵귈라의 역사는 남미에서 건너온 아라와크족의 정착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들은 낚시와 농업을 하며 살았다. 유럽인과의 접촉 이후 영국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프랑스의 침략과 저항을 겪었다. 19세기에는 노예 제도가 폐지되고 소금 생산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했다. 20세기 후반에는 세인트 키츠 네비스와의 분리 독립 운동을 거쳐 영국 해외 영토로 남게 되었으며, 현재는 관광과 금융 서비스를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앵귈라의 첫 거주민들은 남아메리카에서 온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아라와크족이라고 알려진다.[1][2] 이들은 뗏목과 통나무 카누를 타고 섬으로 건너와 어업, 사냥, 농업 집단을 이루며 정착했다.[1] 40개의 아라와크 마을이 발굴되었으며, 가장 큰 마을은 아일랜드 하버(Island Harbour), 샌디 그라운드(Sandy Ground), 샌디 힐(Sandy Hill), 랑데부 베이(Rendezvous Bay), 쇼얼 베이 이스트(Shoal Bay East)에 있었다.[1] 아메리카 원주민이 부르던 섬의 이름은 ''말리우하나(Malliouhana)''였다.[2] 앵귈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아메리카 원주민 유물은 기원전 13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서기 600년경의 정착지 유적도 발견되었다.[2] 빅 스프링스와 분수 동굴(Fountain Cavern)과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종교 유물과 의식의 잔해는 유럽인들이 오기 전 거주자들이 매우 종교적이었음을 시사한다.[2] 아라와크족은 나중에 더 사나운 카리브족에 의해 밀려났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사건의 버전과 특성은 일부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2]
유럽인들이 언제 앵귈라를 발견하고 이름 지었는지는 시기가 불확실하다. 콜럼버스가 목격했다는 주장과[11] 프랑스 탐험가 르네 굴렌 드 루도니에르가 1564년에서 1565년 사이에 발견했다는 주장이 있다.[11]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1631년에 섬에 요새를 건설했으나, 1633년 스페인 군대의 공격으로 파괴된 후 철수했다.[11]
2. 콜럼버스 발견 이전
2. 1.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착
앵귈라의 첫 거주민들은 남아메리카에서 온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아라와크족이라고 알려진다.[1][2] 이들은 뗏목과 통나무 카누를 타고 앵귈라에 정착 후 낚시, 사냥, 농업을 하며 부족을 형성했다.[1] 40개의 아라와크족 마을이 발굴되었으며, 가장 큰 마을은 아일랜드 하버, 샌디 그라운드, 샌디 힐, 랑데부 베이, 쇼얼 베이 이스트에 존재한다.[1] 아라와크족은 이 섬을 ''말리우하나(Malliouhana)''라고 불렀다.[1] 앵귈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아메리카 원주민 유물은 약 기원전 1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정착지 유적은 기원후 600년에 밝혀졌다.[1][2] 빅 스프링스 및 파운테인 케번 국립공원과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종교적 유물과 의식의 잔재들은 아라와크족들이 매우 종교적이었음을 암시한다.[1][2] 아라와크족은 이후 호전적인 카리브족에 의해 쫓겨났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일부 사실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1][2]
2. 2. 종교와 문화
앵귈라의 첫 거주민들은 남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아라와크족이라고 알려진다.[1] 이들은 뗏목과 쪽배를 타고 앵귈라에 정착 후 낚시, 사냥을 하며 부족을 형성했다.[1] 40개의 아라와크족 마을이 발굴되었으며, 그 중 가장 큰 마을은 아일랜드 하버(Island Harbour), 샌디 그라운드(Sandy Ground), 샌디 힐(Sandy Hill), 랑데부 베이(Rendezvous Bay), 쇼얼 베이 이스트(Shoal Bay East)에 존재한다.[1] 아라와크족은 이 섬을 ''말리우하나(Malliouhana)''라고 불렀다.[2] 앵귈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아메리카 원주민 유물은 약 기원전 1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정착지 유적은 기원후 600년에 밝혀졌다.[2] 빅 스프링스 및 파운테인 케번 국립공원과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종교적 유물과 의식의 잔재들은 아라와크족들이 본질적으로 매우 종교적이었음을 암시한다.[2] 아라와크족은 이후 호전적인 카리브족에 의해 쫓겨났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일부 사실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2]
2. 3. 카리브족과의 관계
앵귈라의 첫 거주민들은 남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아라와크족이라고 알려진다.[1] 이들은 뗏목과 쪽배를 타고 앵귈라에 정착 후 낚시, 사냥을 하며 부족을 형성했다.[1] 40개의 아라와크족 마을이 발굴되었으며, 그 중 가장 큰 마을은 하버 섬, 샌디 그라운드, 샌디 힐, 랑데부 베이, 쇼얼 베이 이스트에 존재한다.[1] 이 섬을 아라와크족은 ''
3. 식민지 시대
앵귈라는 1650년부터 세인트 키츠 섬에서 온 영국 정착민들에 의해 정복되고 식민지화되었다.[12] 지역 의회가 형성되었고, 앤티가섬에 의해 감독되었다. 6년 후, 다른 섬의 원주민들에게 공격받아 대부분의 남성이 죽고 여성과 어린이는 노예가 되었다. 1666년에는 300명의 프랑스인이 섬을 공격하여 정착민들을 숲으로 몰아넣었으나, 1667년 브레다 조약에 따라 영국으로 반환되었다. 1688년, 프랑스는 아일랜드와 함께 앵귈라를 공격하여 영국인들을 앤티가섬으로 몰아냈고, 1680년대의 가뭄으로 인해 많은 앵귈라 거주민들이 1694년에 산타크루스섬과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이주했다. 1724년, 앵귈라의 인구는 360명의 유럽인과 900명의 아프리카인으로 재건되었다.
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300명의 앵귈라인들이 세인트 키츠 섬에게 지원받은 사략선 2기를 몰고 이웃한 생마르탱의 절반을 침공하여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 때까지 보유했다. 1745년, 2대의 프랑스 프리깃이 앵귈라의 크로쿠스 베이에 700명 또는 10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으나 호지 총독 휘하의 민병대 150명에 의해 격퇴되었다.
1796년 11월 27일,[13]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 전함 ''데키우스''와 ''바일란테''는 빅토르 위그의 지휘 아래 랑데부 베이에 400명의 프랑스인을 상륙시켰다. 이들은 사우스 힐과 현 수도 더 밸리의 마을들을 파괴하였지만 앵귈라인들은 샌디 힐 포트 근처의 ''롱 패스''에서 재집결했다. HMS ''랩윙''이 프랑스 전함들을 격파 할 수 있었고 프랑스의 공격은 다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앵귈라를 플랜테이션 기반 경제체제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이에 적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농장들은 크게 실패한다. 앵귈라의 인구는 약 10,000명에서 2,000명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19년에는 유럽인 360명, 노예가 아닌 아프리카인 320명, 노예 2451명이 있었다. 1830년대, 영국은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농장주들은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남겨진 자유민들은 농부와 어부로서 앵귈라에서 계속 생계를 유지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가뭄과 기근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섬의 전체 인구를 영국령 기아나 (현재 가이아나)의 데메라라 로 이주시키려고 했으나 대부분은 남는 걸 선택했다. 19세기, 섬 중앙에 있는 큰 호수에서 소금이 개발되었고 이는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매년 약 3,000,000 부셸이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 섬의 주요 무역이 형성되었고 소금뿐 만 아니라 설탕, 면화 및 담배 도 생산되었다.
1871년, 앵귈라는 세인트 키츠 연방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 앵귈라는 영국 식민지 사무소에 분리되고 직접적인 통치를 허용해달라고 청원했다. 이 무렵 인구는 3000명으로 증가했다. 1882년에 네비스섬이 추가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시절 인구는 3890명까지 증가했다. 그 무렵 숯 생산이 이루어지며 섬 전체를 탈산림화 시켰으나 이로 인해 확장된 목초지는 소를 세인트 토머스섬으로 수출하게 해주었다. 제3인산칼슘도 생산되었다.
1951년이 되어서야 앵귈라가 리워드 제도 연방 식민지의 일부인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의 영국 식민지 행정부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이 3개 국가는 서인도 연방의 일부였다.
3. 1. 초기 유럽인과의 접촉
유럽인들이 앵귈라를 발견하고 이름 붙인 시기는 불확실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발견했다는 주장과[11] 프랑스 탐험가 르네 굴렌 드 루도니에르가 1564년에서 1565년 사이에 발견했다는 주장이 있다.[11]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1631년 섬에 요새를 건설했으나, 1633년 스페인 군대의 공격으로 파괴된 후 철수했다.[11]
앵귈라는 1650년부터 세인트 키츠 섬에서 온 영국 정착민들에 의해 정복되고 식민지화되었다.[12] 지역 의회가 형성되었고, 앤티가섬에 의해 감독되었다. 6년 후, 다른 섬의 원주민들에게 공격받아 대부분의 남성이 죽고 여성과 어린이는 노예가 되었다. 1666년에는 300명의 프랑스인이 섬을 공격하여 정착민들을 숲으로 몰아넣었으나, 1667년 브레다 조약에 따라 영국으로 반환되었다. 1688년, 프랑스는 아일랜드와 함께 앵귈라를 공격하여 영국인들을 앤티가섬으로 몰아냈고, 1680년대의 가뭄으로 인해 많은 앵귈라 거주민들이 1694년에 산타크루스섬과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이주했다. 1724년, 앵귈라의 인구는 360명의 유럽인과 900명의 아프리카인으로 재건되었다.
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300명의 앵귈라인들이 세인트 키츠 섬에게 지원받은 사략선 2기를 몰고 이웃한 생마르탱의 절반을 침공하여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 때까지 보유했다. 1745년, 2대의 프랑스 프리깃이 앵귈라의 크로쿠스 베이에 700명 또는 10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으나 호지 총독 휘하의 민병대 150명에 의해 격퇴되었다.
1796년 11월 27일,[13]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 전함 ''데키우스''와 ''바일란테''는 빅토르 위그의 지휘 아래 랑데부 베이에 400명의 프랑스인을 상륙시켰다. 이들은 사우스 힐과 현 수도 더 밸리의 마을들을 파괴하였지만 앵귈라인들은 샌디 힐 포트 근처의 ''롱 패스''에서 재집결했다. HMS ''랩윙''이 프랑스 전함들을 격파 할 수 있었고 프랑스의 공격은 다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앵귈라를 플랜테이션 기반 경제체제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이에 적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농장들은 크게 실패한다. 앵귈라의 인구는 약 10,000명에서 2,000명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19년에는 유럽인 360명, 노예가 아닌 아프리카인 320명, 노예 2451명이 있었다. 1830년대, 영국은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농장주들은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남겨진 자유민들은 농부와 어부로서 앵귈라에서 계속 생계를 유지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가뭄과 기근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섬의 전체 인구를 영국령 기아나 (현재 가이아나)의 데메라라 로 이주시키려고 했으나 대부분은 남는 걸 선택했다. 19세기, 섬 중앙에 있는 큰 호수에서 소금이 개발되었고 이는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매년 약 3,000,000 부셸이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 섬의 주요 무역이 형성되었고 소금뿐 만 아니라 설탕, 면화 및 담배 도 생산되었다.
1871년, 앵귈라는 세인트 키츠 연방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 앵귈라는 영국 식민지 사무소에 분리되고 직접적인 통치를 허용해달라고 청원했다. 이 무렵 인구는 3000명으로 증가했다. 1882년에 네비스섬이 추가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시절 인구는 3890명까지 증가했다. 그 무렵 숯 생산이 이루어지며 섬 전체를 탈산림화 시켰으나 이로 인해 확장된 목초지는 소를 세인트 토머스섬으로 수출하게 해주었다. 제3인산칼슘도 생산되었다.
1951년이 되어서야 앵귈라가 리워드 제도 연방 식민지의 일부인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의 영국 식민지 행정부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이 3개 국가는 서인도 연방의 일부였다.
3. 2. 영국의 식민지배
앵귈라는 1650년부터 세인트 키츠 섬에서 온 영국 정착민들에 의해 정복되고 식민지화되었다.[12] 지역 의회가 형성되었고, 앤티가섬에 의해 감독되었다.[12] 1666년에는 300명의 프랑스인이 섬을 공격하여 정착민들을 숲으로 몰아내기도 했으나, 1667년 브레다 조약에 따라 영국으로 반환되었다.[1] 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는 앵귈라인들이 생마르탱의 프랑스령 절반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했고,[1] 1745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앵귈라를 공격했으나 호지 총독 휘하의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1] 나폴레옹 전쟁 중인 1796년에도 프랑스 군대가 랑데부 베이에 상륙하여 공격을 시도했으나, 앵귈라인들은 샌디 힐 포트 근처에서 재집결하여 HMS ''랩윙''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을 격파했다.[1]
19세기 초, 앵귈라를 플랜테이션 기반 경제체제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이에 적합하지 않아 대부분 실패했다.[5] 1830년대 영국이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면서 농장주들은 유럽으로 돌아갔고, 남겨진 자유민들은 농부와 어부로 생계를 유지했다.[1] 19세기에는 섬 중앙의 큰 호수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미국으로 수출되면서 주요 무역 품목이 되었고, 설탕, 면화, 담배도 생산되었다.[1]
1871년, 앵귈라는 세인트 키츠 연방에 속하게 되었고, 1882년에는 네비스섬이 추가되었다.[1] 1951년이 되어서야 앵귈라는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 영국 식민지 행정부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고, 1958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인도 연방의 일부였다.[1]
3. 3. 프랑스의 침략과 저항
앵귈라는 1650년 세인트 키츠 섬에서 온 영국 정착민들에 의해 정복되어 식민지가 되었다.[12] 1666년 300명의 프랑스인이 섬을 공격하여 정착민들을 숲으로 몰아냈으나,[1] 1667년 브레다 조약에 따라 영국으로 반환되었다. 1688년 프랑스는 아일랜드와 함께 앵귈라를 공격하여 영국인들을 앤티가섬으로 몰아냈다.[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44년, 300명의 앵귈라인들이 세인트 키츠 섬의 지원을 받은 사략선 2척을 이끌고 이웃한 생마르탱의 프랑스령 지역을 침공하여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 체결 때까지 점령했다.[1] 1745년에는 2척의 프랑스 프리깃이 앵귈라의 크로쿠스 베이에 700명[1] (혹은 10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으나, 호지 총독 휘하의 150명으로 구성된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중인 1796년 11월 27일,[13] 프랑스 전함 ''데키우스''와 ''바일란테''는 빅토르 위그의 지휘 아래 400명의 프랑스인을 랑데부 베이에 상륙시켰다. 이들은 사우스 힐과 현 수도 더 밸리의 마을들을 파괴했지만, 앵귈라인들은 샌디 힐 포트 근처의 ''롱 패스''에서 재집결했다. 세인트 키츠 섬에서 출항한 HMS ''랩윙'' (바튼 선장 지휘)이 프랑스 전함들을 격파하면서 프랑스의 공격은 다시 실패로 끝났다.[1]
3. 4. 노예제와 플랜테이션 경제
앵귈라를 플랜테이션 기반 경제 체제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이에 적합하지 않아 대부분의 농장들은 크게 실패하였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앵귈라의 노예들은 가혹한 처벌, 강제 노동 및 학대를 당해야 했다.[5] 1819년에는 360명의 유럽인, 320명의 자유 아프리카인, 2451명의 노예가 있었다. 주인들의 자녀인 혼혈 물라토 노예들은 종종 자유를 얻거나 토지를 유증받았다.[5] 다른 섬에 임대되어 보상을 받아 자유와 토지를 구매한 노예들도 있었다.[6]
1830년대, 영국은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농장주들은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해방된 사람들은 앵귈라에서 자급자족 농부와 어부로 계속 살았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섬에 빈곤과 고통이 심화되었고, 절도와 밀수가 성행했다.[1] 영국 정부는 섬의 모든 인구를 영국령 기아나의 데메라라 (현대 가이아나)로 보내려 했지만, 대부분은 남았다.[1] 19세기에는 섬 중앙에 있는 큰 호수에서 소금이 개발되어 미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연간 약 3,000,000 부셸이 생산되었다. 설탕, 면화, 담배도 생산되었다.
3. 5. 세인트키츠 네비스와의 관계
19세기 후반, 앵귈라는 세인트 키츠와의 연방에 강제로 편입되었다.[1] 1871년 앵귈라는 세인트 키츠 연방의 일부가 되었고, 1882년에는 네비스가 이 연방에 추가되었다.[1] 앵귈라인들은 이러한 통합에 불만을 품고 1872년에 영국 식민지 사무소에 분리 및 직접 통치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하기도 했다.[1][11]
1951년이 되어서야 앵귈라는 리워드 제도 연방 식민지의 일부인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 영국 식민지 행정부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이 세 국가는 서인도 연방의 일부였다.[1]
4. 현대 앵귈라
1967년 2월 27일, 영국은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 영토에 자체 헌법과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는 "자유 연합" 지위를 부여했다.[14] 그러나 많은 앵귈라인들은 세인트 키츠에 대한 정치적 종속을 강력히 반대했고, 1967년 5월 30일 ("앵귈라의 날") 세인트 키츠 경찰은 섬에서 추방되었다.[1] 이후 1967년 7월 11일 앵귈라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찬성 1,813표, 반대 5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 별도의 입법부가 선언되고, 피터 아담스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바베이도스 협상 이후 의회는 피터 아담스 대신 롤란드 웹스터를 의장으로 선출했다.[15][16]
1969년 2월 7일, 앵귈라는 두 번째 국민 투표를 통해 세인트 키츠와의 재결합에 반대(찬성 4표, 반대 1,739표)하며 독립 공화국을 선언하고 웹스터가 다시 의장을 맡았다. 1969년 3월 19일, 2대대, 낙하산 연대와 40명의 광역경찰청 경찰이 "질서 회복"을 위해 섬에 상륙했다.[1] 1971년, 영국은 앵귈라와 "임시 협정"을 맺었다. 1976년 2월 12일, 앵귈라는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여 세인트 키츠 네비스로부터의 분리 독립의 길을 열었다.[1] 1980년 12월 19일, 앵귈라는 공식적으로 세인트 키츠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영국 속국이 되었다.[1] 1983년 세인트 키츠 네비스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지만, 앵귈라는 여전히 영국의 해외 영토이다.
최근 앵귈라는 고급 관광지로 발전했으며, 관광과 어업이 주요 경제 활동이다.[17] 금융 서비스 부문도 성장하고 있다. 앵귈라의 현대 인구는 대부분 아프리카계이며, 소수의 유럽계(주로 영국) 주민도 있다.[17]
4. 1. 세인트키츠 네비스로부터의 분리 독립 운동
1967년 2월 27일, 영국은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 영토에 자체 헌법과 상당한 수준의 자치가 주어지는 "자유 연합"의 지위를 부여했다.[14] 그러나 많은 앵귈라인들은 세인트 키츠에 대한 지속적인 정치적 복종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1967년 5월 30일 (앵귈라의 날), 세인트 키츠 경찰은 섬에서 추방되었다.[1] 임시 정부는 미국 행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967년 7월 11일, 앵귈라의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가 열렸고, 분리 독립 찬성 1,813표, 반대 5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 곧바로 별도의 입법부가 선언되었고, 피터 아담스가 앵귈라 의회의 초대 의장에 선임되었다.바베이도스에서 8일간의 협상 끝에 1967년 7월 31일, 피터 아담스는 앵귈라에 네비스섬과 유사한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앵귈라를 앵귈라-세인트 키츠-네비스 연방에 다시 합류시키는 데 동의했다.[14] 그러나 앵귈라 의회는 이 조약을 거부하고, 로널드 웹스터를 새 의장으로 선출했다.[15][16] 1967년 12월, 영국 의회 의원 2명은 1년 동안 영국 관리가 앵귈라 의회와 함께 기본적인 행정 권한을 행사하는 임시 협정을 체결했다. 1968년 1월 토니 리가 취임하였으나, 임기 말까지 섬 정부의 장기적인 미래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9년 2월 7일, 앵귈라는 두 번째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세인트 키츠와의 재결합에 반대 1,739표, 찬성 4표를 얻었다. 같은 시기 앵귈라는 독립 공화국을 선언하고 웹스터가 다시 의장을 맡았다. 1969년 3월 11일, 새로운 영국 특사 윌리엄 휘틀록이 새로운 임시 협정 제안을 가지고 도착했지만, 곧 추방되었다.[1] 1969년 3월 19일, 2대대, 낙하산 연대와 40명의 광역경찰청 경찰이 "질서 회복"을 위해 섬에 상륙했다. 그해 가을 군대는 철수하고 육군 기술자들이 공공 사업 개선을 위해 투입되었다. 토니 리는 장관으로 돌아와 1971년에 섬 주민들과 또 다른 "임시 협정"을 맺었다.[1]
1976년 2월 12일, 앵귈라는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여 세인트 키츠 네비스로부터의 탈퇴가 가능해졌다. 1980년 12월 19일, 앵귈라는 공식적으로 세인트 키츠와 분리되어 별도의 영국 속국이 되었다.[1] 1983년 세인트 키츠 네비스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으나, 앵귈라는 여전히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 있다.
4. 2. 영국의 개입과 독립 쟁취
1967년 2월 27일, 영국은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에 자체 헌법과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부여하는 "자유 연합" 지위를 부여했다.[14] 그러나 많은 앵귈라인들은 세인트 키츠에 대한 정치적 복종에 반대했고, 1967년 5월 30일 ("앵귈라의 날") 세인트 키츠 경찰은 섬에서 추방되었다.[1] 임시 정부는 미국 행정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1967년 7월 11일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찬성 1,813표, 반대 5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 별도의 입법부가 선언되고 피터 아담스가 앵귈라 의회의 초대 의장에 선임되었으나, 바베이도스에서 8일 간의 협상 끝에 앵귈라에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앵귈라-세인트 키츠-네비스 연맹에 재가입하는 조약에 동의했지만, 의회는 이를 거부하여 의장을 롤란드 웹스터로 대체했다.[15][16]1969년 2월 7일, 앵귈라는 두 번째 국민 투표를 통해 세인트 키츠와의 재결합에 반대(찬성 4표, 반대 1,739표)하며 독립 공화국을 선언하고 웹스터가 다시 의장을 맡았다. 새로운 영국 특사 윌리엄 휘틀록이 새로운 임시 협정 제안과 함께 도착했지만 곧 추방되었다.[1] 1969년 3월 19일, 2대대, 낙하산 연대와 40명의 광역경찰청 경찰이 "질서 회복"을 위해 섬에 상륙했다. 그 해 가을 군대가 떠나고 육군 기술자들이 공공 사업 개선을 위해 투입되었다. 토니 리는 장관으로 돌아와 1971년에 섬 주민들과 또 다른 "임시 협정"을 맺었다.[1] 1976년 2월 12일 앵귈라는 처음으로 헌법을 받았고, 1980년 12월 19일 앵귈라는 공식적으로 세인트 키츠와 분리되어 별도의 영국 속국이 되었다.[1] 1983년 세인트키츠 네비스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으나, 앵귈라는 여전히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 있다.
4. 3. 현재의 앵귈라
1967년 2월 27일, 영국은 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에 자체 헌법과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는 "자유 연합" 지위를 부여했다.[14] 그러나 많은 앵귈라인들은 세인트 키츠에 대한 정치적 종속을 강력히 반대했고, 1967년 5월 30일 ("앵귈라의 날") 세인트 키츠 경찰은 섬에서 추방되었다.[1] 이후 1967년 7월 11일 앵귈라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찬성 1,813표, 반대 5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 별도의 입법부가 선언되고, 피터 아담스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바베이도스 협상 이후 의회는 피터 아담스 대신 롤란드 웹스터를 의장으로 선출했다.[15][16]1969년 2월 7일, 앵귈라는 두 번째 국민 투표를 통해 세인트 키츠와의 재결합에 반대(찬성 4표, 반대 1,739표)하며 독립 공화국을 선언하고 웹스터가 다시 의장을 맡았다. 1969년 3월 19일, 2대대, 낙하산 연대와 40명의 광역경찰청 경찰이 "질서 회복"을 위해 섬에 상륙했다.[1] 1971년, 영국은 앵귈라와 "임시 협정"을 맺었다. 1976년 2월 12일, 앵귈라는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여 세인트 키츠 네비스로부터의 분리 독립의 길을 열었다.[1] 1980년 12월 19일, 앵귈라는 공식적으로 세인트 키츠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영국 속국이 되었다.[1] 1983년 세인트 키츠 네비스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지만, 앵귈라는 여전히 영국의 해외 영토이다.
최근 앵귈라는 고급 관광지로 발전했으며, 관광과 어업이 주요 경제 활동이다.[17] 금융 서비스 부문도 성장하고 있다. 앵귈라의 현대 인구는 대부분 아프리카계이며, 소수의 유럽계(주로 영국) 주민도 있다.[17]
5. 앵귈라와 한국의 역사적 유사성 (별도 섹션 추가)
5. 1. 식민지배 경험
5. 2. 독립 투쟁과 민족의식
5. 3. 경제 발전과 미래
참조
[1]
서적
The Anguilla House of Assembly Elections
Government of Anguilla
2007
[2]
웹사이트
Anguilla's Precolumbian History
http://net.ai/precol[...]
2003
[3]
웹사이트
Anguilla
http://www.atlasofmu[...]
[4]
웹사이트
Anguilla's Judicial System, 1650-2017
https://donmitchellc[...]
2017-05-12
[5]
서적
Annals of Anguilla, 1650-1923
Belfast : Christian Journals
1976
[6]
학술지
Anguilla: From the Archives. 1650-1776
https://www.aahsangu[...]
n.d.
[7]
뉴스
Anguilla goes back to union
https://news.google.[...]
1967-08-01
[8]
뉴스
Anguilla levels warning at force
https://news.google.[...]
1967-08-12
[9]
뉴스
Anguilla seeks permanent ally
https://news.google.[...]
1967-09-09
[10]
서적
Fodor's in Focus St. Maarten, St. Barths & Anguilla
Fodor's
[11]
문서
Atlas of Mutual Heritage
http://www.atlasofmu[...]
[12]
웹인용
https://donmitchellc[...]
2016-05-16
[13]
문서
Roche, p.145
[14]
뉴스
Anguilla goes back to union
https://news.google.[...]
1967-08-01
[15]
뉴스
Anguilla levels warning at force
https://news.google.[...]
1967-08-12
[16]
뉴스
Anguilla seeks permanent ally
https://news.google.[...]
1967-09-09
[17]
서적
Fodor's in Focus St. Maarten, St. Barths & Anguilla
Fodor'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