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색슨인의 브리타니아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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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타니아 정착은 5세기부터 시작되어 잉글랜드 문화와 사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00년경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에서 물러나면서,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 등 게르만 민족들이 브리타니아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처음에는 용병으로 고용되거나 해안 약탈자로 나타났으나, 점차 브리타니아에 정착하여 앵글로색슨 문화를 발전시켰다. 앵글로색슨족의 이주는 침략, 이주, 토착민과의 융합의 복합적인 과정을 거쳤으며, 언어, 고고학, 유전학적 증거를 통해 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앵글로색슨 사회는 친족 중심적이었으며, 법과 제도, 경제 생활, 물질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독자적인 특징을 나타냈다. 7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바이킹의 침입과 왕국 통합을 거쳐 노르만 정복으로 쇠퇴했지만, 앵글로색슨 시대는 잉글랜드의 언어, 법률, 문화, 사회 구조에 깊은 유산을 남겼다.
5세기에서 6세기경,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타니아 정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길다스의 ''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이지만, 색슨족을 신이 보낸 벌로 취급하고 날짜와 같은 세부 사항을 거의 제공하지 않아 내용이 부족하고 단편적이다.[17][18]
부족 은대(Tribal Hideage)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35개 부족의 목록이다. 이 목록에는 여러 독립 왕국과 다른 작은 영토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영토에는 은대 수가 할당되어 있다. 은대는 가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토지 면적을 의미한다. 부족 목록의 맨 위에는 머시아가 있으며, 험버 강 어귀 남쪽에 살았던 사람들과 머시아 왕국을 둘러싼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학자들에 의해 만족스럽게 식별되지 않았다. 이 문서는 문제가 있지만, 사람, 토지, 그리고 그들이 조직화된 부족과 집단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24]
2. 앵글로색슨족의 기원과 브리타니아 이주
비드는 ''잉글랜드 백성 교회 연대기''에서 초기 앵글로색슨 역사의 사건 연대를 추정하려 했지만, 길다스의 기록에 크게 의존했다.[19] 비드는 호르사와 헹기스트의 도착 날짜를 길다스가 포에데라티에 대한 초대가 446년 아에티우스의 세 번째 집정관직 때 있었다고 보고한 것에 근거해 계산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프로코피우스는 브리타라는 섬에 앵길리, 프리스족, 브리토네스라는 세 민족이 정착했으며, 각 민족은 자체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각 민족이 인구를 많이 배출하여 매년 많은 사람들을 프랑크족에게 보냈고, 프랑크족은 그들을 영토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코피우스 자신도 이 기록에 의문을 제기했고, 내용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16]
길다스는 색슨족을 ''포에데라티(foederati)''라고 불렀는데, 이는 로마 제국과의 조약에 따라 브리타니아로 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20] 길다스는 그들을 색슨족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정착민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브리튼식 용어였을 것이다. 길다스가 색슨족과 픽트족과 관련하여 "고향(patria)"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일부 색슨족이 브리타니아 원주민으로 간주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2. 1. 앵글로색슨족의 기원
5세기에서 6세기경,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타니아 정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길다스의 ''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부족하고 단편적인 사건만을 다루고 있다.[17][18]
비드는 자신의 저서 ''잉글랜드 백성 교회 연대기''에서 초기 앵글로색슨 역사의 사건에 대한 연대를 추정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역시 길다스의 기록에 크게 의존했다.[19]
6세기 동로마 제국의 프로코피우스는 브리타라는 섬에 앵길리, 프리스족, 브리토네스라는 세 민족이 정착했으며, 각 민족은 자체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프로코피우스 자신도 이 기록에 의문을 제기했고, 내용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16]
길다스는 색슨족을 ''포에데라티(foederati)''라고 불렀는데, 이는 로마 제국과의 조약에 따라 브리타니아로 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20]
2. 2. 후기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와 앵글로색슨족
400년, 브리타니아의 로마 속주는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로마 자료에서는 색슨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북해 해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해안 약탈자를 지칭했다. 로마인들은 현재 잉글랜드 남동부에 색슨 해안이라고 불리는 해안 요새 체계를 감독하도록 군 지휘관을 임명했다.[3] 이 색슨족 약탈자들의 고향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프랑크족의 북쪽 이웃이었고, 하부 라인 강에 살았다.[4]
452년의 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브리타니아는 409년 또는 410년에 색슨족 침략자들에 의해 황폐화되었다. 6세기 중반 프로코피우스는 411년 콘스탄티누스 3세가 몰락한 후 "로마인들은 브리타니아를 되찾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폭군 아래에 남았다"고 말했다.[5]
로마-브리튼은 색슨족뿐만 아니라 픽트족과 스코티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의 성인전은 429년에 픽트족과 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방어를 지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430년경 브리타니아의 고고학적 기록은 로마의 물질 문화가 붕괴되고 앵글로색슨의 물질 문화로 대체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길다스는 445년에서 454년 사이에 브리튼인들이 아에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오만한 폭군"이 픽트족과 스코티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색슨족을 브리타니아로 초대했다고 보고했다. 길다스는 동쪽에 배치된 색슨족이 충분한 보급품을 제공받지 못해 온 나라를 점령했다고 전한다.[6]
452년의 갈리아 연대기는 441년에 "브리튼 속주는 색슨족 통치로 축소되었다"고 기록한다. 베데는 이 군인들이 449년에 도착했고, "오만한 폭군"을 보티게른이라고 명명했다.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는 430년대에 이미 북부 독일과 유사한 "앵글로색슨" 문화가 브리타니아에서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8]
베데의 설명에 따르면 "앵글 또는 색슨 민족"(Anglorum sive Saxonum gensla)에 대한 외침에 헨기스트와 호르사와 헨기스트의 아들 오이스크가 이끄는 세 척의 배가 응답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 동부에 할당된 지역을 받았다.[9] 더 큰 함대가 뒤따랐고,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에서 왔다. 베데에 따르면:[10]
베데는 앵글로색슨족의 대륙 조상이 더 다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8세기에 독일에 살고 있는 이교도들을 프리지아인, 루기니(뤼겐 출신), 데인족, 훈족(판노니아 아바르족), "옛 색슨족", 리페 강 근처 브루크테리의 옛 거주자로 추정되는 "보루크투아리"로 명명했다.[11]
길다스 시대의 로마-브리튼 왕국이 베데 시대의 앵글로색슨 왕국으로 전환된 방식은 불확실하다. 길다스는 초기 전쟁 이후 색슨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브리타니아가 법과 질서에 의존할 수 없는 부패한 로마-브리튼 폭군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평화가 있었고, 외국과의 싸움 대신 내부 싸움만 있었다고 언급했다.
길다스는 색슨족을 ''포에데라티(foederati)''로 사용했는데, 이는 조약에 따라 브리타니아로 온 사람들을 지칭한다. 길다스는 그들을 색슨족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정착민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브리튼식 용어였을 것이다. 길다스가 색슨족과 픽트족과 관련하여 "고향(patria)"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일부 색슨족이 브리타니아 원주민으로 간주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20]
길다스를 비롯한 자료들이 베데가 731년경에 저술한 ''잉글랜드 민족 교회 역사''에 사용되었다. 브리튼인에 대한 베데의 시각은 그들을 앵글로색슨의 억압받는 백성으로 묘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교회 역사''에 나타난 브리튼인에 대한 묘사는 길다스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는데, 길다스는 색슨족을 브리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다.
2. 3. 앵글로색슨족의 본격적인 이주와 정착
452년의 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골에서 쓰여진 연대기에 따르면, 브리타니아는 409년 또는 410년에 색슨족 침략자들에 의해 황폐화되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 3세가 브리타니아에서 로마 황제로 선포된 지 불과 몇 년 후였고, 그가 여전히 대륙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브리타니아 로마 군대를 이끌던 시기였다.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로마-브리튼 시민들은 이 기간 동안 로마 관리들을 추방했고, 다시는 로마 제국에 합류하지 않았다.[5] 6세기 중반에 글을 쓴 프로코피우스는 411년 콘스탄티누스 3세가 몰락한 후 "로마인들은 브리타니아를 되찾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폭군 아래에 남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브리튼은 색슨족뿐만 아니라 픽트족과 스코티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의 성인전은 그가 429년에 픽트족과 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방어를 지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430년경 브리타니아의 고고학적 기록은 로마의 물질 문화가 비교적 빠르게 붕괴되고 앵글로색슨의 물질 문화로 대체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몇 세대 후에 글을 쓴 길다스는 445년에서 454년 사이에 브리튼인들이 골의 로마 군 지도자 아에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절망에 빠진 이름 없는 "오만한 폭군"은 이후 픽트족과 스코티족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색슨족을 브리타니아로 초대했다. 길다스는 처음에 동쪽에 배치된 이 색슨족이 브리튼인들이 충분한 월별 보급품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결국 온 나라를 점령했다고 전한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잔인한 약탈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6] 그 후 브리튼인들은 아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래에서 성공적으로 연합하여 반격했다. 역사가 닉 하이엄은 이것을 "색슨 동맹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몬스 바도니쿠스' 포위전 후에 끝났다.
길다스는 이 초청의 해를 보고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와 동일한 사건의 어떤 단계를 언급하면서, 452년의 갈리아 연대기는 441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때까지 다양한 패배와 불행을 겪었던 브리튼 속주는 색슨족 통치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몇 세기 후에 글을 쓴 비드는 이러한 군인들이 449년에 도착했고, 그 "오만한 폭군"을 보티게른이라고 명명했다.
비드의 반신화적인 설명에서 "앵글 또는 색슨 민족"(Anglorum sive Saxonum gens|앙글로룸 시베 삭소눔 겐스la)에 대한 외침에 처음에는 헨기스트와 호르사("종마와 말")와 헨기스트의 아들 오이스크가 이끄는 세 척의 배가 응답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 동부에 할당된 지역을 받았다.[9] 더 큰 함대가 뒤따랐고, 게르마니아의 세 개의 가장 강력한 부족인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에서 왔으며, 이들에 이어 끔찍한 무리가 따랐다. 비드의 유명한 구절에 따르면:[10]3. 앵글로색슨족과 브리튼족의 관계
목록에 있는 개별 단위는 부족 집단의 정착 지역에서 발전했으며, 일부는 300은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스트 윅스나''와 ''스워드 오라''와 같이 이름은 찾기 어렵지만, 이는 부족과 가족의 미시적 정체성이 처음부터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목록은 다른 역사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단일 정치적 실체보다 더 복잡한 정착의 증거를 제시한다.[24]
3. 1.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앵글로색슨족과 브리튼족
5세기 또는 6세기의 영국에는 앵글로색슨인의 정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다. ''크로니카 갈리카''는 남동부 갈리아에서 작성되었으며 단편적인 정보만 담고 있다.[16] 이 연대기에서 409년 영국의 습격에 대한 기록은 로마 세력의 약화와 적의 증가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으로 시작되며, 같은 기간 침략을 겪은 갈리아와 스페인의 사건들과 함께 묶여 있다.[16]
길다스는 로마 통치가 끝난 후 6세기에 살았으며, 그의 ''브리타니아의 멸망과 정복''은 가장 상세하고 동시대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영국 정치, 사회 및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색슨족을 신이 보낸 벌로 취급하고, 날짜와 같은 세부 사항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16] 길다스는 과거에 색슨족을 초대된 병사 (포에데라티)로 묘사했으며, 이주, 진행 중인 분쟁, 심지어 그의 시대에 색슨족의 존재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정착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역사학자들은 비드 (672/673–735)에 의존했으며, 그는 ''잉글랜드 백성 교회 연대기''에서 초기 앵글로색슨 역사의 사건에 대한 날짜를 계산하려고 시도했다. 비드는 주로 교회 역사를 저술했지만, 자신의 참고 자료를 인용하고 사건을 재위 목록이 아닌 날짜에 따라 나열했기 때문에 영국 최초의 진정한 역사학자로 여겨진다.[16] 비드가 호르사와 헹기스트의 도착 날짜를 길다스가 포에데라티에 대한 초대가 446년 그의 세 번째 집정관직에 있었던 아에티우스를 영국인들이 처음 간청한 후에 일어났다고 보고한 것에 근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6]
길다스와 동시대인인 6세기 로마 자료는 프로코피우스인데, 그는 동로마 제국에서 글을 썼으며 서부의 사건에 대해 들은 이야기에 의문을 표했다. 그는 브리타라는 섬이 있는데, 이는 영국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앵길리, 프리스족, 브리토네스라는 세 민족이 정착했으며, 각 민족은 자체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진술한다. 각 민족은 너무나 많은 인구를 배출하여 매년 많은 수의 사람들을 프랑크족에게 보냈고, 그들은 그들을 그들의 영토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정착시켰다. 그는 색슨족이나 주트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앵글족의 대륙 친척들은 와리니로 불리며, 그는 그들이 다뉴브강에서 대양까지 뻗어 있는 왕국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마이클 존스는 "그러나 프로코피우스 자신은 이 특정 구절에 대해 의문을 표했으며, 그 장의 후속 세부 사항은 6세기의 영국 인구에 대한 단서로서의 신뢰성을 훼손한다"고 말한다.[16]
길다스의 저작은 로마-브리튼인들이 색슨족과의 갈등을 포함한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난하는 일관된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 그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반항적이었으며, 제국을 장악하려 했던 많은 찬탈자들을 지원했다. 이러한 폭군들은 5세기와 6세기의 역사적 기록을 지배하며, 이 저작은 브리타니아에서 행정 권력에서 군주 권력으로의 전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17] 길다스의 언급은 그의 동족들의 취약성과 그들의 무관심, 그리고 내분에 대한 지속적인 우려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이 백성은 (지금도 그렇듯이) 적의 무기를 물리치는 데는 약했지만, 내전과 죄의 짐을 견디는 데는 강했다."[18]
길다스는 색슨족에 대해 후기 로마 시대에 사용된 정확한 용어인 ''포에데라티(foederati)''를 사용했는데, 이는 잘 사용되던 조약 시스템에 따라 브리타니아로 온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종류의 조약은 로마 제국 내로 사람들을 들여와 도로 또는 강을 따라 이동시키고 군대와 함께 일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19] 길다스는 그들을 색슨족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마도 정착민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브리튼식 용어였을 것이다. 길다스가 색슨족과 픽트족과 관련하여 "고향(patria)"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일부 색슨족이 브리타니아 원주민으로 간주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20]
길다스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이 베데가 731년경에 저술한 ''잉글랜드 민족 교회 역사''에 사용되었다. 브리튼인에 대한 베데의 시각은 그들을 앵글로색슨의 억압받는 백성으로 묘사하는 데 부분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묘사는 일부 언어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 학살, 강제 이주, 노예화 등을 포함하는 침략 및 정착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었다.[21] ''교회 역사''에 나타난 브리튼인에 대한 묘사는 길다스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는데, 길다스는 색슨족을 브리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다. 윈디 매키니는 "베데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길다스의 시각을 확장하여 이교도 앵글로색슨족을 타락한 브리튼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닌, 오히려 브리튼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묘사했다."라고 지적한다.[22]
잉글랜드 왕국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인 반(半) 신화적 설명은 비드와 더 늦은 시대의 '''브리튼인의 역사'''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 설명들은 길다스에 알려지지 않은 출처를 기반으로 많은 세부 사항을 추가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부족 은대(Tribal Hideage)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35개 부족의 목록이다. '엘멧 거주자'의 포함은 사이먼 케인즈에게 ''부족 은대''가 울프헤어 왕 통치 기간인 670년대 초에 편찬되었음을 시사하는데, 엘멧은 그 이후 노섬브리아의 지배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23] 여기에는 여러 독립 왕국과 다른 작은 영토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영토에 은대 수를 할당한다. 은대는 가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토지 면적이었다. 부족 목록의 맨 위에는 머시아가 있으며, 험버 강 어귀 남쪽에 살았던 사람들, 머시아 왕국을 둘러싼 영토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는 학자들에 의해 만족스럽게 식별된 적이 없다. 이 문서는 문제가 있지만,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데, 이는 사람, 토지, 그리고 그들이 조직화된 부족과 집단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목록에 있는 개별 단위는 부족 집단의 정착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일부는 300은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름은 찾기가 어려운데, ''이스트 윅스나''와 ''스워드 오라''와 같은 장소가 있다. 이는 부족과 가족의 미시적 정체성이 처음부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목록은 다른 역사적 자료의 단일 정치적 실체보다 더 복잡한 정착의 증거이다.[24]
8세기, 늦어도 7세기에는 앵글로색슨 학자들이 왕들의 목록과 계보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착 기간과 그 이후의 조상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특히 앵글리아 왕 목록과 웨스트 색슨 계보 통치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25][26] 이 통치 목록은 다시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자료가 되었으며, 관련 부분은 9세기 후반에 현존하는 형태로 편집되었다. ''연대기''는 또한 5세기와 6세기에 대한 다양한 더 자세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앵글로색슨 엘리트와 다양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주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바라 요크, 패트릭 심스-윌리엄스, 데이비드 덤빌 등은 5세기와 6세기에 대한 통치 목록과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여러 특징이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을 구성한다는 생각과 명백히 모순되는지 보여주었다.[26][27][28][29] 덤빌이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대해 지적했듯이 "중세 역사 기록은 우리와 다른 가정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허구와 비허구의 구별 측면에서 그렇다."[31]
3. 2. 언어학적 증거로 본 앵글로색슨족과 브리튼족
고대 영어의 부상과 같은 언어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튼 정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하이엄에 따르면, 앵글로색슨 엘리트의 언어, 물질 문화 및 전통을 "사회 구조 내에서 지위를 향상시키고 이를 위해 엄격한 동화를 수행하려는 많은 수의 지역 주민"이 채택한 것이 로마-브리튼에서 앵글로색슨으로의 전환을 이해하는 핵심이다.[33] 이러한 언어 습득의 점진적인 특성과 지배 집단에 대한 친족 관계의 '소급 수정'은 궁극적으로 "영국에서 그들의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이민과 전체 사회를 묶는 신화"로 이어졌다.[33] 21세기 초 수십 년 동안의 합의는 로마 경제와 행정의 붕괴로 인해 라틴어가 쓸모와 권위를 잃은 상황에서 소수의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배적이 되면서 영어의 확산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이엄은 "언어는 초기 잉글랜드에서 민족성의 핵심 지표였다. 법률상의 자유, 친족과의 수용, 후원에 대한 접근, 무기의 사용 또는 소유가 모두 게르만 혈통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인 상황에서, 라틴어나 브리튼어 굴절 없이 고대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상당한 가치를 지녔다"라고 평가했다.[34]
3. 3. 고고학적 증거로 본 앵글로색슨족과 브리튼족
5세기에서 6세기 영국은 앵글로색슨인의 정착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갈리아 연대기》는 단편적인 정보만을 담고 있으며, 409년 영국의 습격에 대한 기록은 로마 세력의 약화와 적의 증가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으로 시작된다. 이는 같은 기간 침략을 겪은 갈리아와 스페인의 사건들과 함께 묶여 있다.[16]
길다스는 로마 통치가 끝난 후 6세기에 살았던 인물로, 그의 저서 《브리타니아의 멸망과 정복》은 가장 상세하고 동시대적인 기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은 로마-영국 정치, 사회,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색슨족을 신이 보낸 벌로 취급하고, 날짜와 같은 세부 사항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17] 길다스는 과거에 색슨족을 초대된 병사(포에데라티)로 묘사했으며, 이주, 진행 중인 분쟁, 심지어 그의 시대에 색슨족의 존재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18]
앵글로색슨 정착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역사학자들은 종종 잉글랜드의 수도사 비드 (672/673–735)에 의존한다. 비드는 그의 저서 《잉글랜드 백성 교회 연대기》에서 초기 앵글로색슨 역사의 사건에 대한 날짜를 계산하려고 시도했다. 비드는 주로 교회 역사를 저술했지만, 자신의 참고 자료를 인용하고 사건을 재위 목록이 아닌 날짜에 따라 나열했기 때문에 영국 최초의 진정한 역사학자로 여겨진다.[19] 비드는 호르사와 헹기스트의 도착 날짜를 길다스가 포에데라티에 대한 초대가 446년 그의 세 번째 집정관직에 있었던 아에티우스를 영국인들이 처음 간청한 후에 일어났다고 보고한 것에 근거했다.[20]
길다스와 동시대인인 6세기 로마 자료는 동로마 제국에서 살면서 글을 쓴 프로코피우스인데, 그는 브리타라는 섬에 앵길리, 프리스족, 브리토네스라는 세 민족이 정착했으며, 각 민족은 자체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기록했다. 각 민족은 너무나 많은 인구를 배출하여 매년 많은 수의 사람들을 프랑크족에게 보냈고, 그들은 그들을 그들의 영토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정착시켰다. 그는 색슨족이나 주트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앵글족의 대륙 친척들은 와리니로 불리며, 그는 그들이 다뉴브강에서 대양까지 뻗어 있는 왕국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마이클 존스는 "그러나 프로코피우스 자신은 이 특정 구절에 대해 의문을 표했으며, 그 장의 후속 세부 사항은 6세기의 영국 인구에 대한 단서로서의 신뢰성을 훼손한다"고 말한다.[21]
길다스의 저작은 로마-브리튼인들이 색슨족과의 갈등을 포함한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난하는 일관된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길다스는 색슨족에 대해 후기 로마 시대에 사용된 정확한 용어인 ''포에데라티''를 사용했는데, 이는 잘 사용되던 조약 시스템에 따라 브리타니아로 온 사람들을 지칭한다. 길다스는 그들을 색슨족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마도 정착민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브리튼식 용어였을 것이다. 길다스가 색슨족과 픽트족과 관련하여 "고향(patria)"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일부 색슨족이 브리타니아 원주민으로 간주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22]
길다스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이 베데가 731년경에 저술한 《잉글랜드 민족 교회 역사》에 사용되었다. 브리튼인에 대한 베데의 시각은 그들을 앵글로색슨의 억압받는 백성으로 묘사하는 데 부분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묘사는 일부 언어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 학살, 강제 이주, 노예화 등을 포함하는 침략 및 정착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었다.[23] 《교회 역사》에 나타난 브리튼인에 대한 묘사는 길다스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는데, 길다스는 색슨족을 브리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다. 윈디 매키니는 "베데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길다스의 시각을 확장하여 이교도 앵글로색슨족을 타락한 브리튼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닌, 오히려 브리튼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묘사했다."라고 지적한다.[24]
잉글랜드 왕국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인 반(半) 신화적 설명은 비드와 더 늦은 시대의 《브리튼인의 역사》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 설명들은 길다스에 알려지지 않은 출처를 기반으로 많은 세부 사항을 추가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부족 은대(Tribal Hideage)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35개 부족의 목록이다. 여기에는 여러 독립 왕국과 다른 작은 영토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영토에 은대 수를 할당한다. 은대는 가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토지 면적이었다. 부족 목록의 맨 위에는 머시아가 있으며, 험버 강 어귀 남쪽에 살았던 사람들, 머시아 왕국을 둘러싼 영토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는 학자들에 의해 만족스럽게 식별된 적이 없다.
목록에 있는 개별 단위는 부족 집단의 정착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일부는 300은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름은 찾기가 어려운데, ''이스트 윅스나''와 ''스워드 오라''와 같은 장소가 있다. 이는 부족과 가족의 미시적 정체성이 처음부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목록은 다른 역사적 자료의 단일 정치적 실체보다 더 복잡한 정착의 증거이다.[25]
8세기, 늦어도 7세기에는 앵글로색슨 학자들이 왕들의 목록과 계보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착 기간과 그 이후의 조상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특히 앵글리아 왕 목록과 웨스트 색슨 계보 통치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26][27] 이 통치 목록은 다시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자료가 되었으며, 관련 부분은 9세기 후반에 현존하는 형태로 편집되었다. 《연대기》는 또한 5세기와 6세기에 대한 다양한 더 자세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앵글로색슨 엘리트와 다양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주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바라 요크, 패트릭 심스-윌리엄스, 데이비드 덤빌 등은 5세기와 6세기에 대한 통치 목록과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여러 특징이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을 구성한다는 생각과 명백히 모순되는지 보여주었다.[28][29][30]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의 모든 언어학적 증거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브리튼어 및/또는 영국 라틴어를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로마 이후의 언어 상황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가 다음에 나타나는 8세기까지, 현재 잉글랜드 동부와 남부에서 지배적인 언어는 고대 영어였으며, 그 서게르만어의 조상은 현재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서 사용되었다.[32] 고대 영어는 그 후 수 세기 동안 서쪽과 북쪽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고대 영어는 켈트어 또는 라틴어에서 명백한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예를 들어, 브리튼어 기원의 영어 단어는 거의 없다.[33][34] 게다가, 콘월어를 제외하고, 잉글랜드의 지명의 대다수는 고대 영어(또는 나중에 바이킹의 영향으로 고대 노르드어)로 쉽게 어원을 분석할 수 있으며, 이는 로마 이후 잉글랜드 전역에서 영어의 지배력을 보여준다.[35] 최근 수십 년 동안 켈트 지명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잉글랜드와 남부 스코틀랜드의 더 많은 지명이 브리튼어 또는 때때로 라틴어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동부 절반의 브리튼어 및 라틴어 지명은 극히 드물고, 서부 절반에서는 눈에 띄게 더 흔하지만, 여전히 극소수이다. 예를 들어, 체셔에서는 2%이다.[37]
3. 4. 유전학적 증거로 본 앵글로색슨족과 브리튼족
5세기 또는 6세기 영국에는 앵글로색슨인의 정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었다. 길다스의 ''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는 가장 상세하고 동시대적인 기록이지만, 색슨족을 신이 보낸 벌로 취급하고, 날짜와 같은 세부 사항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17][18]
비드는 그의 저서 ''잉글랜드 백성 교회 연대기''에서 초기 앵글로색슨 역사의 사건에 대한 날짜를 계산하려고 시도했다. 비드는 주로 길다스에 크게 의존했다.[26][27][28][29]
6세기 로마 자료는 프로코피우스인데, 그는 브리타라는 섬에 앵길리, 프리스족, 브리토네스라는 세 민족이 정착했으며, 각 민족은 자체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진술한다. 각 민족은 너무나 많은 인구를 배출하여 매년 많은 수의 사람들을 프랑크족에게 보냈다.[16]
부족 은대(Tribal Hideage)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35개 부족의 목록이다. 여기에는 여러 독립 왕국과 다른 작은 영토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영토에 은대 수를 할당한다. 은대는 가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토지 면적이었다.[24]
고대 영어의 부상과 같은 언어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튼 정착에 대한 설명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이엄에 따르면, 앵글로색슨 엘리트의 언어, 물질 문화 및 전통을 "사회 구조 내에서 지위를 향상시키고 이를 위해 엄격한 동화를 수행하려는 많은 수의 지역 주민"이 채택한 것이 로마-브리튼에서 앵글로색슨으로의 전환을 이해하는 핵심이다.[33]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의 모든 언어학적 증거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브리튼어 및/또는 영국 라틴어를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8세기까지, 현재 잉글랜드 동부와 남부에서 지배적인 언어는 고대 영어였으며, 그 서게르만어의 조상은 현재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서 사용되었다.[36] 고대 영어는 켈트어 또는 라틴어에서 명백한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40][41][42] 잉글랜드의 지명의 대다수는 고대 영어로 쉽게 어원을 분석할 수 있으며, 이는 로마 이후 잉글랜드 전역에서 영어의 지배력을 보여준다.[43]
21세기 초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언어 접촉 연구의 영향을 받아, 소수의 고대 영어 사용자들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면서 많은 브리튼인들이 고대 영어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이 합의된 견해이다.[41][50][51]
4. 앵글로색슨 사회와 문화
브리튼 켈트어가 고대 영어의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에 미묘한 기층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69][70][71][72][73][5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합의된 견해는 아니다. 2012년 연구는 '고대 영어에 대한 켈트어의 영향에 대한 증거는 다소 빈약하지만, 이는 단지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짓고 있다.[77]
많은 브리튼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일부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농민 계급 이민자들의 언어 전환 관여 여부, 영어의 높은 지위를 촉진했을 법적 또는 사회적 구조, 그리고 브리튼어가 다양한 지역에서 얼마나 천천히 사라졌는지 등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스티븐 오펜하이머는 영어에 켈트어의 영향이 없는 이유는 영어가 로마 시대 말 이전에 이미 벨가이에 의해 브리튼에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의 아이디어는 알려진 사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5세기 이전에 브리튼에 잘 정착된 게르만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아이디어는 켈트어와 라틴어 사용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와 모순된다.[78][39]
5세기와 6세기에 영국에서 토착 브리튼인 정체성과 게르만 문화의 출현을 모두 고려해야 하며, 먼저 로마 통치 말기 시기를 고려해야 한다. 5세기 초 어느 시점에 로마 물질 문화가 붕괴되면서 고고학 기록에 공백이 생겼고, 이는 침입적인 앵글로색슨 물질 문화로 매우 빠르게 채워졌으며, 토착 문화는 고고학적으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매장품과 금속 탐지기 발견을 통해 동전 사용과 수입이 서기 410년에 갑자기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91]
후기 로마 시대 (및 하위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의 고고학은 농민과 노예보다는 엘리트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들의 별장, 주택, 모자이크, 가구, 비품, 은제 접시 등이 연구 대상이 되었다.[93]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고, 빈곤층의 장식품은 고고학적 연구의 대상이 덜 되었다. 그러나 4세기와 5세기 농민의 고고학은 대가족과 관련된 "사다리" 형태의 밭 시스템이나 울타리가 특징이며,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에서는 목재로 지어진 건물과 농가의 광범위한 사용은 수적으로 훨씬 적은 엘리트의 주택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로마 건축 방식과의 연관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94]
캐서린 힐스(Catherine Hills)는 앵글로색슨 고고학을 단지 민족학 연구로 간주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정체성이 "전반적인 앵글로색슨 민족성보다는 가족이나 부족, 기독교인 또는 이교도, 엘리트 또는 농민과 같은 구성원 자격과 더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01]
최근의 연구에서는 현재 민족성의 사회학에 대한 접근 방식이 순전히 고고학적 수단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입증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장품 매장이나 ''페플로스'' 드레스의 사용과 같은 의복 관행, 또는 알월턴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유물에서 발견되는 특정 예술 스타일을 이교 신앙의 증거, 또는 부족 또는 민족적 소속의 문화적 기억으로 사용하는 근거를 거부한다.[105][106]
4. 1. 사회 구조와 계급
부족 은대(Tribal Hideage)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35개 부족의 목록이다. 여기에는 여러 독립 왕국과 다른 작은 영토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영토에 은대 수를 할당한다. 은대는 가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토지 면적이었다. 이 문서는 문제가 있지만,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데, 이는 사람, 토지, 그리고 그들이 조직화된 부족과 집단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23]목록에 있는 개별 단위는 부족 집단의 정착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일부는 300은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부족과 가족의 미시적 정체성이 처음부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목록은 다른 역사적 자료의 단일 정치적 실체보다 더 복잡한 정착의 증거이다.[24]
많은 연구에서 낮은 사회 계층의 원주민 브리튼인들이 "엘리트 지배" 기제를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면서 상당수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하는 한편, 브리튼 엘리트들의 생존과 그들의 앵글로색슨화에 대한 증거도 있다. 앵글로색슨 엘리트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북부 게르마니아에서 온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브리튼 지역을 장악하거나, 토착 브리튼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앵글로색슨 문화와 언어를 채택하는 경우이다.[196]
웨섹스 왕가는 전통적으로 체르딕이라는 인물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켈트어 이름으로, 두 명의 브리튼 왕에게 주어진 이름인 ''케레틱''과 동일하며, 궁극적으로 공통 브리튼어 *Caraticos에서 유래되었다.[79] 이는 체르딕이 토착 브리튼인이었고, 그의 왕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80][196] 체르딕의 자손 중 다수는 '브레트왈다' 체울린을 포함하여 켈트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81]

베다는 그의 주요 저서에서 영국 교회에서 상류 계급 형제 4명의 경력을 기록했는데, 그는 그들을 노섬브리아 출신, 즉 "영국인"으로 언급했다.[86] 그러나 성 머시아의 채드 (유명한 주교)와 그의 형제 체드 (역시 주교), 키니빌, 케일린 (체울린의 변형)의 이름은 앵글로색슨어보다는 브리튼어이다.[87][88]
4. 2. 법과 제도
부족 은대(Tribal Hideage)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35개 부족의 목록이다. 여기에는 여러 독립 왕국과 다른 작은 영토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영토에 은대 수를 할당하는데, 은대는 가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토지 면적이었다. 부족 목록의 맨 위에는 머시아가 있으며, 험버 강 어귀 남쪽에 살았던 사람들, 머시아 왕국을 둘러싼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는 문제가 있지만,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데, 이는 사람, 토지, 그리고 그들이 조직화된 부족과 집단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23]목록에 있는 개별 단위는 부족 집단의 정착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일부는 300은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스트 윅스나''와 ''스워드 오라''와 같은 장소는 이름은 찾기가 어렵다. 이는 부족과 가족의 미시적 정체성이 처음부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목록은 다른 역사적 자료의 단일 정치적 실체보다 더 복잡한 정착의 증거이다.[24]
브리튼 켈트어가 고대 영어의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에 미묘한 기층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69][70][71][72][73][53] 브리튼 라틴어 사용자들이 앵글로색슨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브리튼 고지대로 도망치면서 브리튼어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도 연구되었으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합의된 견해는 아니다.[74][75][76][77]
많은 브리튼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틀 안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소한 일부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농민 계급 이민자들이 언어 전환을 가져오는 데 관여했어야 하는지, 영어의 높은 지위를 촉진했을 수도 있는 법적 또는 사회적 구조(노예 제도 또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관습)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브리튼어(및 브리튼 라틴어)가 다양한 지역에서 정확히 얼마나 천천히 사라졌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많은 연구에서 낮은 사회 계층의 원주민 브리튼인들이 "엘리트 지배" 기제를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면서 상당수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하는 한편, 브리튼 엘리트들의 생존과 그들의 앵글로색슨화에 대한 증거도 있다. 앵글로색슨 엘리트는 북부 게르마니아에서 온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브리튼 지역을 장악하거나, 토착 브리튼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앵글로색슨 문화와 언어를 채택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196]
다수의 "앵글로색슨" 왕조의 왕족 계보에서 브리튼 켈트 인명이 나타나는 것은 후자의 과정을 시사한다. 웨섹스 왕가는 전통적으로 체르딕이라는 인물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켈트어 이름으로, 두 명의 브리튼 왕에게 주어진 이름인 ''케레틱''과 동일하며, 궁극적으로 공통 브리튼어 *Caraticos에서 유래되었다.[79] 이는 체르딕이 토착 브리튼인이었고, 그의 왕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80][196] 체르딕의 자손 중 다수가 '브레트왈다' 체울린을 포함하여 켈트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81] 이 왕조에서 브리튼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689년에 사망한 카에드왈라 왕의 이름이었다.[82] 린지 왕국의 왕족 계보에서 브리튼 이름인 카에드바드가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도 브리튼 엘리트가 생존했음을 시사한다.[83] 머시아 왕족 계보에서 펜다 왕의 이름과 다른 왕들의 이름은 알려진 웨일스 인명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게르만어 어원보다는 브리튼어 어원을 더 분명하게 가진다.[84][85]
베다는 그의 주요 저서에서 영국 교회에서 상류 계급 형제 4명의 경력을 기록했는데, 그는 그들을 노섬브리아 출신, 즉 "영국인"으로 언급했다.[86] 그러나 성 머시아의 채드 (유명한 주교)와 그의 형제 체드 (역시 주교), 키니빌, 케일린 (체울린의 변형)의 이름은 앵글로색슨어보다는 브리튼어이다.[87][88]
최소한 남부 브리튼 (특히 웨섹스, 켄트, 에식스 및 사우스 이스트 앵글리아의 일부)은 게르만 조상이나 관련이 있는 왕조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토착 브리튼 엘리트와 기원을 같이 하거나 결혼을 통해 관계를 맺었다는 강력한 주장을 할 수 있다.[196][89]
4. 3. 경제와 생활
부족 은대(Tribal Hideage)는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35개 부족의 목록으로, 여러 독립 왕국과 작은 영토를 포함하며 각 영토에 은대 수를 할당했다. 은대는 가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토지 면적이었다. 목록의 맨 위에는 머시아가 있으며, 험버 강 어귀 남쪽에 살았던 사람들, 머시아 왕국을 둘러싼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23] 이 문서는 문제가 있지만, 사람, 토지, 그리고 그들이 조직화된 부족과 집단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어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목록에 있는 개별 단위는 부족 집단의 정착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일부는 300은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스트 윅스나''와 ''스워드 오라''와 같은 장소는 이름은 찾기가 어렵다. 이는 부족과 가족의 미시적 정체성이 처음부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목록은 다른 역사적 자료의 단일 정치적 실체보다 더 복잡한 정착의 증거이다.[24]
브리튼 켈트어가 고대 영어의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에 미묘한 기층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69][70][71][72][73][5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합의된 견해는 아니다. 2012년 연구는 '고대 영어에 대한 켈트어의 영향에 대한 증거는 다소 빈약하지만, 이는 단지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짓고 있다.[77]
많은 브리튼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일부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농민 계급 이민자들의 언어 전환 관여 여부, 영어의 높은 지위를 촉진했을 법적 또는 사회적 구조, 그리고 브리튼어가 다양한 지역에서 얼마나 천천히 사라졌는지 등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스티븐 오펜하이머는 영어에 켈트어의 영향이 없는 이유는 영어가 로마 시대 말 이전에 이미 벨가이에 의해 브리튼에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의 아이디어는 알려진 사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5세기 이전에 브리튼에 잘 정착된 게르만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아이디어는 켈트어와 라틴어 사용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와 모순된다.[78][39]
많은 연구에서 낮은 사회 계층의 원주민 브리튼인들이 "엘리트 지배" 기제를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면서 상당수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한다. 브리튼 엘리트들의 생존과 그들의 앵글로색슨화에 대한 증거도 있다. 앵글로색슨 엘리트는 북부 게르마니아에서 온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브리튼 지역을 장악하거나, 토착 브리튼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앵글로색슨 문화와 언어를 채택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196]
다수의 "앵글로색슨" 왕조의 왕족 계보에서 브리튼 켈트 인명이 나타나는 것은 후자의 과정을 시사한다. 웨섹스 왕가는 전통적으로 체르딕이라는 인물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켈트어 이름으로, 두 명의 브리튼 왕에게 주어진 이름인 ''케레틱''과 동일하며, 궁극적으로 공통 브리튼어 *Caraticos에서 유래되었다.[79] 이는 체르딕이 토착 브리튼인이었고, 그의 왕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80][196] 체르딕의 자손 중 다수가 '브레트왈다' 체울린을 포함하여 켈트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81] 이 왕조에서 브리튼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689년에 사망한 카에드왈라 왕의 이름이었다.[82] 린지 왕국의 왕족 계보에서 브리튼 이름인 카에드바드가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도 브리튼 엘리트가 생존했음을 시사한다.[83] 머시아 왕족 계보에서 펜다 왕의 이름과 다른 왕들의 이름은 알려진 웨일스 인명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게르만어 어원보다는 브리튼어 어원을 더 분명하게 가진다.[84][85]
베다는 그의 주요 저서에서 영국 교회에서 상류 계급 형제 4명의 경력을 기록했는데, 그는 그들을 노섬브리아 출신, 즉 "영국인"으로 언급했다.[86] 그러나 성 머시아의 채드 (유명한 주교)와 그의 형제 체드 (역시 주교), 키니빌, 케일린 (체울린의 변형)의 이름은 앵글로색슨어보다는 브리튼어이다.[87][88]
최소한 남부 브리튼 (특히 웨섹스, 켄트, 에식스 및 사우스 이스트 앵글리아의 일부)은 게르만 조상이나 관련이 있는 왕조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토착 브리튼 엘리트와 기원을 같이 하거나 결혼을 통해 관계를 맺었다는 강력한 주장을 할 수 있다.[196][89]
고고학적 증거는 5세기와 6세기에 영국에서 토착 브리튼인 정체성과 게르만 문화의 출현을 모두 고려해야 하며, 먼저 로마 통치 말기 시기를 고려해야 한다. 5세기 초 어느 시점에 로마 물질 문화가 붕괴되면서 고고학 기록에 공백이 생겼고, 이는 침입적인 앵글로색슨 물질 문화로 매우 빠르게 채워졌다. 하지만 최근의 매장품과 금속 탐지기 발견을 통해 동전 사용과 수입이 서기 410년에 갑자기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기 로마 시대 (및 하위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의 고고학은 농민과 노예보다는 엘리트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들의 별장, 주택, 모자이크, 가구, 비품, 은제 접시 등이 연구 대상이 되었다.[93]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고, 빈곤층의 장식품은 고고학적 연구의 대상이 덜 되었다. 그러나 4세기와 5세기 농민의 고고학은 대가족과 관련된 "사다리" 형태의 밭 시스템이나 울타리가 특징이며,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에서는 목재로 지어진 건물과 농가의 광범위한 사용은 수적으로 훨씬 적은 엘리트의 주택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로마 건축 방식과의 연관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94]
4. 4. 물질 문화
5세기와 6세기에 영국에서 토착 브리튼인 정체성과 게르만 문화의 출현을 모두 고려해야 하며, 먼저 로마 통치 말기 시기를 고려해야 한다. 5세기 초 어느 시점에 로마 물질 문화가 붕괴되면서 고고학 기록에 공백이 생겼고, 이는 침입적인 앵글로색슨 물질 문화로 매우 빠르게 채워졌으며, 토착 문화는 고고학적으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매장품과 금속 탐지기 발견을 통해 동전 사용과 수입이 서기 410년에 갑자기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91]
브리타니아 내 로마 군사 시스템의 고고학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작센 해안이 방어적인 역할을 했는지 또는 상품 수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역할을 했는지 등이다. 앤드루 피어슨은 "작센 해안 요새"와 기타 해안 시설이 종종 과소평가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경제적, 물류적 역할을 했으며, 이 요새의 이름을 바탕으로 한 작센 및 기타 대륙 해적의 전통은 아마도 신화일 것이라고 주장한다.[92]
후기 로마 시대 (및 하위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의 고고학은 농민과 노예보다는 엘리트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들의 별장, 주택, 모자이크, 가구, 비품, 은제 접시 등이 연구 대상이 되었다.[93] 이 집단은 부를 과시하는 방법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브리튼인"을 식별할 수 있는 풍부한 물질 문화를 제공한다.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고, 빈곤층의 장식품은 고고학적 연구의 대상이 덜 되었다. 그러나 4세기와 5세기 농민의 고고학은 대가족과 관련된 "사다리" 형태의 밭 시스템이나 울타리가 특징이며,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에서는 목재로 지어진 건물과 농가의 광범위한 사용은 수적으로 훨씬 적은 엘리트의 주택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로마 건축 방식과의 연관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94]
앵글로색슨인을 포에데라티 또는 동맹군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후기 로마 군대에 지급된 유형의 군사 장비를 착용한 앵글로색슨인들의 매장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윈체스터와 콜체스터의 로마 묘지와 같은 후기 로마 시대 유적과 머킹(에식스)과 같은 순수한 '앵글로색슨' 시골 묘지에서 발견되었다.[95] 머킹은 로마-브리튼인이 사용하던 정착지였다. 초기 앵글로색슨 유적지와 지명이 로마 정착지와 도로에 근접해 분포하는 것은 초기 앵글로색슨 정착지가 로마-브리튼인에 의해 통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96]
캐서린 힐스는 초기 정착민 모두를 동맹군으로 볼 필요는 없으며, 이 해석이 일부 고고학자들에 의해 너무 쉽게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97] 로마-브리튼인과 유입된 앵글로색슨인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했을 수 있다. 더 넓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모델로는 영국의 모든 앵글로색슨 정착지를 설명할 수 없으며, 상당한 지역적 변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8] 정착지 밀도는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에서 다양했다. 노퍽에는 인접한 이스트앵글리아의 서퍽보다 더 많은 대규모 앵글로색슨 묘지가 있으며, 동부 요크셔(앵글로색슨 왕국 데이라의 핵심)에는 노섬브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많은 묘지가 있다.[99] 정착민은 모두 같은 유형이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무기를 갖춘 채 매장된 전사였지만, 이들이 모두 로마-브리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초청된 손님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일부는 후대의 영국의 바이킹 정착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점령하고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한 해적 약탈자였을 수 있다. 다른 정착민들은 무기가 거의 또는 전혀 없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훨씬 더 겸손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소니아 채드윅 호크스에 의해 기후 악화로 인해 생존이 불가능해진 북해의 혼잡한 정착지에서 온 난민인 게르만 '보트 피플'로 묘사되었다.[100]
4. 5. 종교와 신앙
브리튼 켈트어가 고대 영어의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에 미묘한 기층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69][70][71][72][73][5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합의된 견해는 아니다.[77]많은 브리튼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논쟁이 있다. 언어 전환을 가져오는 데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농민 계급 이민자들이 관여했는지, 영어의 높은 지위를 촉진했을 법적 또는 사회적 구조(노예 제도 또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브리튼어(및 브리튼 라틴어)가 다양한 지역에서 얼마나 천천히 사라졌는지 등이 논쟁의 대상이다.
스티븐 오펜하이머는 영어에 켈트어의 영향이 없는 이유는 영어가 로마 시대 말 이전에 이미 벨가이에 의해 브리튼에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5세기 이전에 브리튼에 잘 정착된 게르만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펜하이머의 아이디어는 켈트어와 라틴어 사용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와 모순된다.[78][39]
많은 연구에서 낮은 사회 계층의 원주민 브리튼인들이 "엘리트 지배" 기제를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면서 상당수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한다. 한편, 브리튼 엘리트들의 생존과 그들의 앵글로색슨화에 대한 증거도 있다. 앵글로색슨 엘리트는 북부 게르마니아에서 온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브리튼 지역을 장악하거나, 토착 브리튼 족장과 그의 전사 집단이 앵글로색슨 문화와 언어를 채택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196]
웨섹스 왕가는 체르딕이라는 인물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이는 켈트어 이름으로, 두 명의 브리튼 왕에게 주어진 이름인 ''케레틱''과 동일하며, 궁극적으로 공통 브리튼어 *Caraticos에서 유래되었다.[79] 이는 체르딕이 토착 브리튼인이었고, 그의 왕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앵글로색슨화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80][196] 체르딕의 후손 중 다수가 '브레트왈다' 체울린을 포함하여 켈트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81] 린지 왕국의 왕족 계보에서 브리튼 이름인 카에드바드가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도 브리튼 엘리트가 생존했음을 시사한다.[83] 머시아 왕족 계보에서 펜다 왕의 이름과 다른 왕들의 이름은 알려진 웨일스 인명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게르만어 어원보다는 브리튼어 어원을 더 분명하게 가진다.[84][85]
베다는 영국 교회에서 상류 계급 형제 4명의 경력을 기록했는데, 그는 그들을 노섬브리아 출신, 즉 "영국인"으로 언급했다.[86] 그러나 성 머시아의 채드 (주교)와 그의 형제 체드 (역시 주교), 키니빌, 케일린 (체울린의 변형)의 이름은 앵글로색슨어보다는 브리튼어이다.[87][88]
최소한 남부 브리튼 (특히 웨섹스, 켄트, 에식스 및 사우스 이스트 앵글리아의 일부)은 게르만 조상을 가지거나 관련된 왕조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토착 브리튼 엘리트와 기원을 같이 하거나 결혼을 통해 관계를 맺었다는 강력한 주장을 할 수 있다.[196][89]
캐서린 힐스(Catherine Hills)는 앵글로색슨 고고학을 단지 민족학 연구로 간주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정체성이 "전반적인 앵글로색슨 민족성보다는 가족이나 부족, 기독교인 또는 이교도, 엘리트 또는 농민과 같은 구성원 자격과 더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01]
피터버러 근처 알월턴에서 1999년, 장례 부장품이 잘 갖춰진 이교 시대 혼합 매장묘가 발굴되었다. 5~6세기 사이에 연대 측정된 28개의 옹관 화장과 2개의 비옹관 화장, 그리고 5세기 말과 7세기 초 사이에 연대 측정된 34개의 매장이 발굴되었다. 화장과 매장 모두 화장터나 묘지 부장품이 제공되었으며, 일부 매장은 풍성하게 장식되었다. 발굴 결과, 부족이나 가족 충성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지역적 차이를 반영하는 혼합된 관행과 상징적인 의복의 증거가 발견되었다.[104]
최근의 연구에서는 현재 민족성의 사회학에 대한 접근 방식이 순전히 고고학적 수단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입증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장품 매장이나 ''페플로스'' 드레스의 사용과 같은 의복 관행, 또는 알월턴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유물에서 발견되는 특정 예술 스타일을 이교 신앙의 증거, 또는 부족 또는 민족적 소속의 문화적 기억으로 사용하는 근거를 거부한다.[105][106]
5. 앵글로색슨 왕국의 발전과 쇠퇴
앵글로색슨 시대 초기, 고대 기념물은 시신 매장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107] 앵글로색슨인들은 선사 시대와 로마 시대 유적지에 이차적으로 매장하는 관행을 보였는데, 이는 단순한 실용적 목적 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하워드 윌리엄스는 이러한 재사용이 기념물과 무덤의 수와 유형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107]
앵글로색슨 고분 매장은 6세기 말부터 8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특히 선사 시대의 고분은 토지 소유권 주장과 조상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108] 에바 테테는 로마 멸망 후 잉글랜드에서 기념물 재사용의 대륙적 기원을 강조했으며,[109] 하워드 윌리엄스는 이민자들이 비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제안했다.[107]
7세기와 8세기에는 기념물 재사용이 널리 퍼져, 색슨족 이전 시대의 눈에 띄는 기념물 옆에 엘리트 계층의 무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일반적인' 매장지도 선사 시대 고분 옆에 자주 위치했다. 5/6세기에서 7/8세기로 가면서 이러한 공간적 연관성이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하르케는 기념물 재사용 증가의 배경 중 하나가 "지배적인 이민자의 물질 문화를 원주민이 채택한 것"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110]
5. 1. 7왕국 시대
앵글로색슨족은 7세기와 8세기에 켈트족이 사용하던 시대의 기념물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엘리트 계층의 무덤을 색슨족 이전 시대의 눈에 띄는 기념물 옆에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반적인 매장지도 선사 시대 고분 옆에 자주 위치했다. 이러한 공간적 연관성은 5/6세기에서 7/8세기로 가면서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하워드 윌리엄스에 따르면, 템스강 상류 지역의 앵글로색슨 매장지는 32%에서 50%로, 1945년 이후 발굴된 앵글로색슨 묘지의 47%에서 71%로 증가했다.[110]하르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지배적인 이민자의 물질 문화를 원주민이 채택한 것"이 기념물 재사용 증가의 배경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보았다.[110]
앵글로색슨족은 이전의 로마 시대의 밭 배치를 그대로 유지했다. 옥스퍼드셔의 얀튼과 에식스의 머킹의 경관은 5세기 내내 변하지 않았으며, 옥스퍼드셔의 바턴 코트에서는 로마 빌라 영지의 '도랑을 판 울타리 또는 밭'의 격자무늬가 그곳 앵글로색슨 정착지의 일반적인 틀을 형성했다. 버크셔의 서튼 코트네이에서도 유사한 증거가 발견되었다.[112] 햄프셔의 찰턴과 캐더링턴, 버킹엄셔의 보우 브릭힐, 에식스의 헤이버링에 있는 로마-브리튼 밭은 모두 7세기까지 경작되었다.[113][114]
수잔 오스투이젠은 경작지 경작의 집단적 조직, 즉 여러 경작자들이 공유하지만 개별적으로 경작하는 개방형 밭 시스템, 경작지 소유권과 공유 목초지 권리의 연관성, 지배 구조 및 잉여분의 일부를 임대료 또는 의무의 형태로 지역 영주에게 지불해야 하는 의무 등이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고 보았다.[115] 이는 7세기와 8세기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5세기 동안 도시를 기반으로 한 로마 행정의 상위 계층은 사라졌지만, 시골의 하위 구획을 기반으로 한 보조 시스템은 계속되었을 수 있다.[119] 앵글로색슨 왕국과 켈트족 이웃 왕국의 내부 조직의 기초는 중앙 거주지에 의존하는 여러 개의 하위 정착지를 포함하는 넓은 시골 영토였으며, 이는 초기 앵글로색슨 지역 행정의 기본 인프라가 후기 로마 또는 아마도 로마 브리튼에서 상속되었음을 시사한다.[120]
5. 2. 바이킹의 침입과 앵글로색슨 왕국의 통합
앵글로색슨족은 새로운 유형의 정착지와 농업을 도입하며 버려진 경관에 정착했다는 통념과 달리, 4세기 말경 영국의 시골 풍경은 이미 대부분 개간된 상태였다. 분산된 농가와 촌락이 주를 이루었으며, 각 농가와 촌락은 자체 밭을 소유하면서도 다른 자원을 공유하는 "내부-외부 경작" 형태를 보였다.[111] 5세기에 들어 로마 브리튼의 붕괴와 기후 악화로 인해 농부들은 생계 유지에 집중하며 경작지를 목초지로 전환했지만, 경작지가 완전히 버려졌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남부와 중부 잉글랜드에서는 선사 시대와 로마 시대의 밭 배치가 앵글로색슨 시대, 심지어 앵글로색슨 시대 전체에 걸쳐 지속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된다. 옥스퍼드셔의 얀튼과 에식스의 머킹 경관은 5세기 내내 변하지 않았고, 옥스퍼드셔 바턴 코트에서는 로마 빌라 영지의 밭 격자무늬가 앵글로색슨 정착지의 틀을 형성했다. 버크셔의 서튼 코트네이에서도 유사한 증거가 나타났다.[112]
수잔 오스투이젠은 "경작지 경작의 집단적 조직"이 선사 시대와 로마 시대 브리튼의 밭에 반영되었다고 주장한다.[115] 여러 경작자가 공유하지만 개별적으로 경작하는 개방형 밭 시스템, 경작지 소유권과 공유 목초지 권리의 연관성, 지배 구조 및 잉여 생산물의 임대료/의무 형태 지불 등이 그 예시이다. 이는 혈연 및 사회적 관계가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며, 영주의 강요나 파괴, 침략자의 야만적 행동, 시스템 붕괴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경관 연구는 지형, 고고학, 문헌 자료를 활용한다. 앵글로색슨 헌장 경계와 기록되지 않은 로마 영지 경계를 연관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앵글로색슨 시대 말까지 경관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전 배치가 모호해질 수 있다.[116] 후기 로마 행정 체제에 대한 불확실성도 해석을 방해한다. 그러나 "앵글로색슨" 및 "브리튼" 지역 연구에서 로마 빌라 영지 경계가 초기 헌장에 묘사된 중세 영지 경계와 동일한 경우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영토 경계의 연속성을 보여주지만, 정착지는 이동했을 수 있다.[117] 이는 착취보다는 행정 단위로서 영지 또는 영토의 연속성을 보여준다.[118] 5세기 동안 도시 기반 로마 행정 상위 계층은 사라졌지만, 시골 하위 구획 기반 보조 시스템은 지속되었을 수 있다.[119]
앵글로색슨 왕국과 켈트족 이웃 왕국의 내부 조직은 중앙 거주지(라틴어: ''빌라''(villa), 고대 영어: ''툰''(tūn))에 의존하는 여러 하위 정착지를 포함하는 넓은 시골 영토를 기반으로 했다. 이는 초기 앵글로색슨 지역 행정(또는 초기 왕이나 백작의 정착)의 기본 인프라가 후기 로마 또는 아마도 로마 브리튼에서 상속되었음을 시사한다.[120]
내륙 정착지 다수는 로마 시대에 주요 항로였던 강에 위치했다.[122][123] 상류 템스강의 도체스터 온 템스와 같은 유적지는 앵글로색슨인들이 사용하던 얕은 흘수선의 클링커 방식 배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오스강, 트렌트강, 위섬강, 넨강, 템스강 하구 늪지대에도 유사한 정착지가 있었다.
5. 3. 앵글로색슨 왕국의 쇠퇴와 노르만 정복
5세기 말, 앵글로색슨 묘지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까지 나타나면서 앵글로색슨의 정착 범위가 확장되었다.[126] 2000년까지 약 10,000구의 초기 '앵글로색슨' 화장 및 매장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다양한 장례 의식을 보여준다.[127] 이는 소규모 문화와 지역 관습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켄트의 초기 묘지에서는 대륙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부장품이 발견된다. 하지만 항아리와 단지, 특히 브로치[128] 등 독특한 유물도 있다. 브로치는 여성 의복의 고정 장치였다. Quoits 브로치 양식은 5세기 잉글랜드 남부에서만 나타나며, 켄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스즈키 세이이치(Seiichi Suzuki)는 이 양식이 로마 시대 이후 사회의 사회 문화적 역학 관계 속에서 새로운 집단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고 주장한다.[128]
여성의 패션은 정착민을 구별하는 데 사용되었으며,[129] 대륙의 특정 지역과 관련된 유물로 보완되었다. 켄트에서는 많은 수의 프랑크족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초기 이주보다는 무역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요크는 프랑크족의 일부 정착 가능성만을 언급했다.[130] 프랑크족의 해상 약탈은 260년경부터 기록되었으며[131] 그 다음 세기 동안 흔해졌지만, 영국 약탈은 c. 367년에 끝났다.[132]
험버 강 어귀와 이스트 앵글리아 사이 해안 지역에서 북게르만 유물이 발견되어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영국 이주를 나타낸다.[133][134][135][136] 하지만, 이들이 앵글족과 같은 시기에 도착했는지는 불확실하다.[136][137] 서튼 후의 배와 이스트 앵글리아의 우핑가 왕조의 스웨덴 기원과 관련된 상당한 스웨덴의 영향력에 관해서는, 두 가능성 모두 현재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된다.[138]
이주민과 토착민의 혼합 및 동화 과정은 물질 문화로는 거의 해명할 수 없지만, 골격 증거가 단서를 제공한다. 앵글로색슨 묘지에서 7/8세기 남성의 평균 신장은 5/6세기에 비해 15mm 감소했다.[139] 웨섹스에서는 평균이 24mm 감소했다.[140] 이는 환경 변화로 설명되지 않으며, 7/8세기에 식단 변화나 이주민 유입의 증거도 없다. 영국인들의 평균 신장이 더 낮다는 점을 고려할 때, 토착 앙클레이브의 물질 문화에 대한 점진적인 색슨화 또는 앵글로화, 토착민의 앵글로색슨 공동체로의 동화, 앵글로색슨 인구 내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혼인이 가장 가능성 있는 설명이다. 햄프셔의 후기 로마 시대와 초기 앵글로색슨 시대의 골격 재료 비교 결과, 도시 로마 시대 매장에서 나타나는 신체 유형이 앵글로색슨 시대 매장에서도 잘 나타났다.[141]
스트레턴온포스 II (워릭셔)에서는 무기를 소지한 성인 남성의 비율이 82%로, 잉글랜드 남부 평균보다 높다. 앵글로색슨 매장지인 묘지 II는 로마-브리튼 묘지인 스트레턴온포스 I과 III에 인접해 있다. 이 부지에서 토착 여성 인구의 연속성은 섬유 기술의 연속성과 후성 유전적 특성의 연속성으로 추론되었다. 골격 증거는 로마 시대 이후 인접 묘지에서 남성보다 더 가늘고 키가 큰 새로운 신체 유형의 출현을 보여준다.[142] 이는 게르만족 남성 집단이 유입되어 지역 공동체를 장악하고 토착 여성과 결혼했음을 시사한다. 무기 매장 비율이 매우 높은 경우 이러한 '전투 집단' 정착 사례가 나타난다고 가정하면, 이러한 유형의 정착은 친족 집단 모델보다 훨씬 드물었다.[110]
하이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한다.
> "대부분의 앵글로색슨 묘지가 전체 인구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 일부 개인의 포함 여부가 정치적 통제 또는 문화적 심사에 따라 결정되었는가? 이것이 민족성의 표시인가, 아니면 특정한 친족 관계... 또는 특정 종교의 추종자를 나타내는가? 이것이 지위에 따라 다른가, 아니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을 시골 프롤레타리아가 제외되었는가? 많은 묘지가 특정, 고위 가구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성인 구성원에게 치우쳐 있는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공동체의 특정 부분이 수입된, 어떤 의미에서는 '게르만' 화장 의식에 대한 헌신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설명이 필요하다."
6. 앵글로색슨족의 유산
5세기 초, 앵글로색슨 시대로 분류되는 초기 묘지들이 매우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125] 켄트 지역은 묘지와 유물의 밀도가 높아 앵글로색슨족의 정착이 매우 활발했거나,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에는 앵글로색슨 묘지들이 추가로 생겨났는데, 일부는 이전 묘지 옆에 있었지만, 서식스 남부 해안까지 확장되었다.[126]
2000년까지 약 10,000구의 초기 '앵글로색슨' 화장 및 매장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다양한 장례 의식 형태를 보여준다.[127] 묘지 증거는 의복, 장신구, 무기, 항아리, 개인 소지품 등 물질 문화와 더불어 해골, 뼈, 치아에서 얻은 물리적, 분자적 증거 또한 중요해지고 있다.
켄트의 초기 묘지에서는 대륙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된다. 특히 항아리와 단지, 브로치[128]가 주목할 만하다. 브로치는 여성 의복의 중요한 요소였으며, Quoits라고 불리는 브로치 양식은 5세기 잉글랜드 남부에서만 나타나며 켄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스즈키 세이이치(Seiichi Suzuki)는 이 양식이 로마 시대 이후 사회의 사회 문화적 역학 관계 속에서 새로운 집단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브로치는 문화가 단순히 대륙에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초기부터 새로운 "앵글로색슨"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28]
여성 패션은 정착민을 구별하고 식별하는 데 사용되었으며,[129] 대륙의 특정 지역과 관련된 다른 유물로 보완되었다. 켄트에서는 많은 수의 프랑크족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초기 이주보다는 무역과 상업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130] 요크는 프랑크족의 일부 정착 가능성만을 언급했다.[130] 프랑크족의 해상 약탈은 260년경부터 기록되었으며[131] 그 다음 세기 동안 흔해졌지만, c. 367년에 영국 약탈은 끝났다.[132]
험버 강 어귀와 이스트 앵글리아 사이 해안 지역에서 북게르만 계통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영국으로 이주했음을 보여준다.[133][134][135][136] 그러나 이들이 앵글족과 같은 시기에 도착했는지는 불분명하며, 거의 한 세기 후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136][137] 서튼 후의 배와 이스트 앵글리아의 우핑가 왕조의 스웨덴 기원과 관련된 상당한 스웨덴의 영향력에 관해서는, 두 가능성 모두 현재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된다.[138]
이주민과 토착민의 혼합 및 동화 과정은 물질 문화로는 거의 해명할 수 없지만, 골격 증거가 단서를 제공한다. 앵글로색슨 묘지에서 7/8세기 남성의 평균 신장은 5/6세기에 비해 15mm 감소했다.[139] 웨섹스에서는 평균 24mm 감소했다.[140] 이는 환경 변화나 식단 변화, 이주민의 추가 유입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영국인들의 평균 신장이 더 낮다는 점을 고려할 때, 토착 앙클레이브의 물질 문화에 대한 점진적인 색슨화 또는 앵글로화, 토착민의 앵글로색슨 공동체로의 동화, 앵글로색슨 인구 내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혼인이 증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햄프셔의 후기 로마 시대와 초기 앵글로색슨 시대의 골격 재료 비교 결과, 도시 로마 시대 매장에서 나타나는 신체 유형이 소멸되지 않고 앵글로색슨 시대 후속 매장에서도 잘 나타났다.[141]
스트레턴온포스 II (워릭셔)에서는 무기를 소지한 성인 남성의 비율이 82%로, 잉글랜드 남부 평균보다 훨씬 높다. 앵글로색슨 매장지인 묘지 II는 로마-브리튼 묘지인 스트레턴온포스 I과 III에 인접해 있다. 이 부지에서 토착 여성 인구의 연속성은 섬유 기술의 연속성과 후성 유전적 특성의 연속성으로 추론되었다. 골격 증거는 로마 시대 이후 인접 로마-브리튼 묘지에서 남성보다 더 가늘고 키가 큰 새로운 신체 유형의 출현을 보여준다.[142] 이는 대부분 게르만족인 남성 집단이 유입되어 지역 공동체를 장악하고 토착 여성과 결혼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전투 집단' 정착 사례는 친족 집단 모델보다 훨씬 드물었다.[110]
하이엄은 앵글로색슨 묘지가 전체 인구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묘지 포함 여부가 정치적 통제, 문화적 심사, 민족성, 친족 관계, 종교, 지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참조
[1]
서적
[2]
논문
Anglo-Saxon Immigration and Ethnogenesis
[3]
논문
The 'Saxon Shore' Reconsidered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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