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소노미야 요시코 내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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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소노미야 요시코 내친왕은 에도 막부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와 약혼했으나, 이에쓰구의 사망으로 파혼된 일본 황족이다. 이 약혼은 당시 정치적 의도에 따라 레이겐 천황과 막부 사이의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었다. 요시코 내친왕은 이후 출가하여 죠린인노미야가 되었으며, 45세에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 치온인에 있다. 또한, 요시코 내친왕이 도쿠가와 무네하루의 측실이 되었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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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소노미야 요시코 내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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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요시코 (吉子) |
별호 | 야소노미야 (八十宮) |
출생일 | 쇼토쿠 4년 음력 8월 22일 (1714년 9월 30일) |
사망일 | 호레키 8년 음력 9월 22일 (1758년 10월 23일) (향년 45세) |
매장지 | 치온인 |
신분 | 내친왕 |
칭호 | 야소노미야 |
혈통 | 레이겐 천황의 제13황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레이겐 천황 |
어머니 | 마츠무로 아츠코 |
배우자 | 도쿠가와 이에쓰구 (약혼만 하고 요절) |
기타 정보 |
2. 생애
1715년(쇼토쿠 5년)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와 약혼했으나, 1716년 이에츠구가 사망하여 파혼되었다. 1726년 친왕 선하를 받아 요시코 내친왕이 되었고, 1732년 출가하여 조린인노미야가 되었다. 1758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연도 | 날짜 | 사건 |
---|---|---|
1715년(쇼토쿠 5년) | 11월 6일 (음력 9월 29일) |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와 약혼 (당시 이에츠구 7세, 요시코 내친왕 3세)[1] |
1716년 (쇼토쿠 6년/교호 원년) | 4월 10일 (음력 2월 18일) | 납채 의식 |
1716년 (교호 원년) | 6월 19일 (음력 4월 30일) |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사망으로 파혼 |
1726년 (교호 11년) | 12월 21일 (음력 11월 28일) | 친왕 선하, 요시코 내친왕(吉子内親王)이 됨[1] |
1732년 (교호 17년) | 12월 16일 (음력 10월 29일) | 출가, 법명 조린인노미야(浄琳院宮)[1] |
1758년 (호레키 8년) | 10월 23일 (9월 22일) | 45세로 사망,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지온인[1] |
출가하지 않고, 도쿠가와 무네하루의 측실 오쿤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2. 1. 약혼과 파혼
1715년(쇼토쿠 5년) 11월 6일(음력 9월 29일), 야소노미야 요시코 내친왕은 에도 막부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와 약혼하였다. 당시 이에쓰구는 7세, 요시코 내친왕은 3세였다.[1] 1716년(쇼토쿠 6년) 4월 10일(음력 2월 18일) 납채 의식까지 마쳤으나, 같은 해 6월 19일(교호 원년 음력 4월 30일) 이에쓰구가 사망하면서 파혼되었다. 이로써 황녀 강가는 실현되지 못했다.2. 2. 출가와 사망
교호 11년(1726년) 12월 21일, 친왕 선하를 받고 '''요시코 내친왕(吉子内親王)'''이 되었다.[1] 교호 17년(1732년) 12월 16일 출가하여 법명을 '''조린인노미야(浄琳院宮)'''로 하였다.[1] 호레키 8년(1758년) 10월 23일,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치온인에 있다.[1]3. 약혼의 정치적 배경
이 강압적인 혼약에는 당시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에도성 오오쿠에는, 이에쓰구의 아버지이자 먼저 사망한 전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덴에이인과, 측실이자 이에쓰구 생모인 겟코인의 두 세력이 있었다. 한편 교토에서는, 요시코 내친왕의 아버지인 레이겐 법황과 덴에이인의 친아버지인 고노에 모토히로가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에노부 사후, 어린 군주를 받들고 쇼토쿠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있던 마나베 아키후사나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 사상 최연소의 쇼군(이에쓰구)에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황녀의 강가를 계획했고, 덴에이인에 대항하는 권위를 조정에 구한 겟코인도 찬성했다. 덴에이인도 이에노부 생전에 친정 조카인 고노에 히사코(후의 신주와몬인)와 이에쓰구의 혼약을 진행했지만, 이에쓰구와 히사코의 나이 차이를 고려해 혼약 이야기를 파기한 적이 있었고(히사코는 후에 나카미카도 천황의 뇨고가 되었다), 정실을 황실에서 맞이하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레이겐 법황은 오랫동안 막부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나, 정적인 고노에 모토히로의 권력 기반인 막부와의 관계에 쐐기를 박기 위해 이에 응했다고 추측된다. 고노에 모토히로는 이 혼약에 반대했지만, 덴에이인과의 관계 때문인지 공개적인 반대는 하지 않았다.[2]
3. 1. 막부와 조정의 권력 관계
이 억지 약혼의 배경에는 당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당시 에도성 오오쿠에서는 이에쓰구의 아버지로 먼저 사망한 전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덴에이인과 이에쓰구의 생모인 측실 겟코인의 두 세력이 있었다. 한편 교토에서는 요시코 내친왕의 아버지인 레이겐 천황과 덴에이인의 아버지 고노에 모토히로가 지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이에노부 사망 후, 어린 군주를 모시며 쇼토쿠 개혁을 추진할 수 밖에 없는 난처한 입장에 있던 당시 사실상 정권 운용자 소바요닌 마나베 아키후사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 사상 최연소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황녀 강가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덴에이인에게 대항할 권위를 조정에 요구한 겟코인도 찬성했다.
또한, 덴에이인도 이에노부가 살아 있을 때, 조카인 히사코 (후의 신츄카몬인(新中和門院))와 이에쓰구의 약혼을 추진했지만, 이에쓰구와 히사코의 나이 차를 생각하여 약혼 이야기를 없던 것으로 한 적이 있어 (히사코는 나중에 나카미카도 천황의 뇨고(女御)가 되었다.), 정실을 황실에서 맞이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레이겐 법황은 오랜 기간 막부와 대립 관계였으나, 정적인 고노에 모토히로의 권력 기반인 막부와의 관계에 쐐기를 박기 위해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 고노에 모토히로는 이 약혼에 반대했지만, 덴에이인과의 관계 때문인지 표면적으로는 반대하지 않고 침묵했다.[2]
3. 2. 오오쿠의 권력 투쟁
이 억지 약혼의 배경에는 당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당시 에도성 오오쿠에서는 이에츠구의 아버지로 먼저 사망한 전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덴에이인과 이에츠구의 생모인 측실 겟코인, 이 둘의 세력이 있었다. 한편 교토에서는 요시코 내친왕의 아버지인 레이겐 천황과 덴에이인의 아버지 고노에 모토히로가 지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이에노부 사망 후, 어린 군주를 모시며 쇼토쿠 개혁을 추진할 수 밖에 없는 난처한 입장에 있던 당시 사실상 정권 운용자 소바요닌 마나베 아키후사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 사상 최연소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황녀 강가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덴에이인에게 대항할 권위를 조정에 요구한 겟코인도 찬성했다.
또한, 덴에이인도 이에노부가 살아 있을 때, 조카인 히사코 (후의 신츄카몬인(新中和門院))와 이에츠구의 약혼을 추진했지만, 이에츠구와 히사코의 나이차를 생각하여 약혼 이야기를 없던 것으로 한 적이 있어 (히사코는 나중에 나카미카도 천황의 뇨고(女御)가 되었다.), 정실을 황실에서 맞이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레이겐 법황은 오랜 기간 막부와 대립 관계였으나, 정적인 고노에 모토히로의 권력 기반인 막부와의 관계에 쐐기를 박기 위해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 고노에 모토히로는 이 약혼에 반대했지만, 덴에이인과의 관계때문인지 표면적으로는 반대하지 않고 침묵했다.[2]
3. 3. 레이겐 천황의 의도
레이겐 천황은 오랜 기간 막부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나, 정적인 고노에 모토히로의 권력 기반인 막부와의 관계에 쐐기를 박기 위해 약혼에 응했다.[2] 고노에 모토히로는 이 약혼에 반대했지만, 덴에이인과의 관계 때문인지 표면적으로는 반대하지 않고 침묵했다.[2]4. 이설
요시코 내친왕이 출가하지 않고, 도쿠가와 무네하루의 측실 오쿤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3]
참조
[1]
문서
現代での1歳7か月
[2]
서적
霊元院政について
岩田書院
[3]
간행물
徳川宗春側室阿薫の出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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