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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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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세웅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활동한 한국의 영화 촬영기사이다. 부산 출신으로 일본에서 촬영 기술을 배우고, 1930년대 중반 발성 영화 시대에 활발히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 친일 영화 촬영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영화건설본부에서 활동하고 어린이 영화를 촬영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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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양세웅
본명(알 수 없음)
출생일1906년 12월 11일
출생지부산
사망일(알 수 없음)
사망지(알 수 없음)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분야영화촬영
교육
교육(알 수 없음)

2. 생애

부산 출신으로 부산제이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아키네마에서 촬영을 공부했다.[2] 1932년 카메라맨으로 승진하여 《눈물의 빛》, 《두 개의 유방》, 《그 밤의 노래》 등을 촬영하며 일본에서 정식 촬영기사로 활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35년 귀국, 박기채 연출의 《춘풍》 촬영으로 조선 영화계에 데뷔했고, 경성촬영소의 김학성이 조수로 참여했다. 1930년대 중반 발성 영화 시대 개막과 함께 등장하여 활발히 활동했고, 일본 영화계 경력을 바탕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2]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영화 촬영을 담당했다. 《군용열차》(1938)를 시작으로, 일본군 공군을 그린 어용 영화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1943),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친일 영화 《감격의 일기(感激の日記일본어)》(1945), 징용을 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을 통해 전시 지원을 강조한 《우리들의 전쟁(我れらの戰爭일본어)》(1945)을 촬영했다. 조선영화인협회 임원을 맡았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영화건설본부에서 뉴스 영화를 촬영했고, 미군 502부대 소속 카메라맨으로 활동했다.[3] 1946년 《똘똘이의 모험》을 촬영했다.[3]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마지막 작품은 1949년 부산에서 찍은 《해연(海燕)》이다.

2. 1. 일본 유학 및 활동 (1924년 ~ 1935년)

부산 출신으로 부산제이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아키네마에서 촬영을 공부했다.[2] 1932년 동아키네마에서 카메라맨으로 승진하여 《눈물의 빛》, 《두 개의 유방》, 《그 밤의 노래》 등을 촬영했다. 양세웅은 일본에서 정식 촬영기사로 활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2. 2. 귀국 및 국내 활동 (1935년 ~ 1945년)

1935년 귀국하여 박기채 연출의 《춘풍》 촬영을 맡아 조선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때 경성촬영소의 김학성이 양세웅의 조수로 촬영에 참여했다. 1930년대 중반 발성 영화 시대 개막과 함께 등장한 세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촬영 능력과 일본 영화계 경력을 바탕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2]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영화 촬영을 담당했다. 친일 영화 시대를 예고한 《군용열차》(1938)를 시작으로, 일본군 공군을 그린 어용 영화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1943),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친일 영화 《감격의 일기(感激の日記일본어)》(1945), 징용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을 통해 전시 지원을 강조한 《우리들의 전쟁(我れらの戰爭일본어)》(1945)을 촬영했다.

친일 단체 조선영화인협회 임원을 맡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2. 3. 친일 행적 (1938년 ~ 1945년)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영화에 촬영 담당으로 참여했다. 《군용열차》(1938), 일본군 공군을 그린 어용 영화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1943),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친일 영화 《감격의 일기(感激の日記일본어)》(1945), 징용 나간 남편을 참고 기다리는 여성을 통해 전시 지원을 강조한 《우리들의 전쟁(我れらの戰爭일본어)》(1945)을 촬영했다.[2]

친일 단체 조선영화인협회 임원을 맡았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2]

2. 4.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 1950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영화건설본부에 가입하여 뉴스 영화를 촬영했고, 미군 502부대 소속 카메라맨으로 활동했다.[3] 1946년에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똘똘이의 모험》을 촬영했다.[3]

2. 5. 한국 전쟁 중 납북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마지막 작품은 1949년 고향인 부산에서 찍은 《해연(海燕)》이다.

참조

[1]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2003-02-03
[2] 뉴스 "`새로운` 조선영화를 꿈꾸다...이규환 감독편 上" https://web.archive.[...] 씨네21 2001-06-13
[3] 웹사이트 양세웅 (梁世雄) http://www.kwa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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