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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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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창용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의 영화인으로,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입사 후 나운규 사단에 합류하여 촬영 기사로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풍운아》, 《금붕어》 등 나운규 연출작의 촬영을 담당하며 식민지 현실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1930년대에는 일본 유학으로 활동이 뜸했으나, 1940년대 국책 영화 시기에 영화 제작자로 복귀하여 친일 영화를 제작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 영화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1949년 제일극장 사장을 역임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61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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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영화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1907년
출생지함경북도 회령군 (현 함경북도 회령군)
사망1961년 8월 27일 (54세)
국적
분야영화 촬영, 영화 제작

2. 생애

이창용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으로 회령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20년대 중반 나운규 사단에 합류하기 전까지의 자세한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심훈윤백남의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촬영기사 중 제1인자가 되었다고 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나운규의 촬영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이후 일본 신흥키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했다.[2][3]

나운규와 함께 《풍운아》(1926), 《금붕어》(1927), 《잘 있거라》(1927), 《들쥐》(1927), 《사랑을 찾아서》(1928) 등을 촬영하며 식민지 현실과 반일 의식을 담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들쥐》는 상영 금지 조치를 받기도 했다.[4] 1931년 이필우 등과 영화 동호인 모임을 결성했으나, 이후 일본 유학으로 한동안 활동이 뜸했다.

1940년대에는 영화 제작자로 복귀하여 《승리의 뜰》(1940), 《수업료》(1940), 《복지만리》(1941), 《집없는 천사》(1941), 《풍년가》(1942),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일본어)》(1943) 등을 제작했다. 이 영화들은 대부분 친일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조선영화인협회 이사, 조선영화제작자협회 참여 등 친일 행적에 가담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하고 국립극장 부극장장으로 발표되기도 했으며, 1949년 제일극장 사장을 맡았다.[6][7] 이구영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 전쟁 전후 일본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1961년 8월 27일 일본에서 사망했다.

이창용은 1920년대 나운규 영화의 기술적 파트너였고, 1930년대 이후 영화 산업 기업화 과정에서 전국적 배급망을 확립하여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활동 (1920년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으로 회령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하여 영화계에 입문했다. 1920년대 중반 나운규 사단에 합류하여 촬영 기사로 활동했다. 심훈은 이창용이 윤백남의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촬영기사 제1인자가 되었다고 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학생 신분으로 영화판을 기웃거렸던 인물'로서 나운규의 촬영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 이후 일본의 신흥키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했다.[3]

2. 2. 나운규와의 협업 (1926~1928)

나운규가 제작한 《풍운아》(1926), 《금붕어》(1927), 《잘 있거라》(1927), 《들쥐》(1927), 《사랑을 찾아서》(1928) 등의 영화 촬영을 담당했다.[4] 이 영화들은 모두 가난한 식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했으며, 특히 일본 제국주의를 풍자한 《들쥐》와 만주 독립군을 간접적으로 다룬 《사랑을 찾아서》는 반일 의식이 강하게 드러났다. 《들쥐》는 개봉 이튿날 상영 금지 조치를 받기도 했다.[4] 이창용은 촬영기사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생계가 어려워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2. 3. 1930년대 활동

1931년 이필우 등과 영화 동호인 모임을 결성했다.[2] 이후 일본 유학으로 한동안 활동이 없었다.[3]

2. 4. 친일 영화 제작 (1940년대)

1930년대에 일본 유학으로 한동안 활동이 없다가, 1940년대 국책영화 시기에 영화 제작자로 영화계에 돌아왔다. 《승리의 뜰》 (1940), 《수업료》 (1940), 《복지만리》 (1941), 《집없는 천사》 (1941), 《풍년가》 (1942),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일본어)》(1943)를 제작했는데, 대부분 정도의 차이만 있는 친일 영화들이다.[5] 《승리의 뜰》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선전 영화이며, 《망루의 결사대》도 만주 지역 국경 지대에서 일본이 마적단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7년 고려영화협회를 설립했고, 1939년 친일 영화인 단체 조선영화인협회 이사를 맡았다. 1940년 조선영화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총독부가 발족시킨 조선영화제작자협회에 고려영화협회 대표로 참여했다.[5]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5. 해방 이후 활동

광복 이후 이창용은 좌익 계열 영화인 단체였던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했다.[6] 1946년 미군정 하에서 국립극장 설치 논의가 있을 때 부극장장으로 발표되었다.[7] 1949년 서울 종로4가 제일극장 사장을 맡았다. 영화 감독 이구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창용은 한국 전쟁 전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 8월 27일 일본에서 사망했다.

2. 6. 사망

이구영의 증언에 따르면 李蒼龍일본어은 한국 전쟁 전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부터 다시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 8월 27일 일본에서 사망했다.

3. 평가

이창용은 1920년대 나운규의 영화 작업에서 빠질 수 없는 기술적 파트너였고, 1930년대 이후 영화 산업이 기업화되는 과정에서 전국적 배급망을 확립하여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5]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참조

[1] 서적 반일과 동아시아 소명 2005-12-30
[2] 뉴스 남북 모두에 잊혀진 존재로 남은 '주인규' - [한국영화스타6-②] 영화배우 주인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4-21
[3]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2003-02-03
[4] 웹인용 들쥐(野鼠) https://web.archive.[...] 예술로 2008-01-31
[5] 웹사이트 한국영화의 수난 http://seoul600.visi[...] 서울특별시 2007-09-28
[6] 간행물 8·15 해방과 문화예술 재건 운동 - 인습과 오명에서 벗어나려는 정치적 움직임들 https://web.archive.[...] 2007-08-19
[7] 웹사이트 국립극단의 화려하고도 짧았던 꿈 : 50년 전을 회고하며 (차범석) http://www.ntok.go.k[...]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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